수정주의 역사관의 가장 큰 문제는
뭘까요. 『미국 쪽에서 당시에 공개한 史料만을 이용한 게 가장 큰 한계입니다. 공산권 진영인 소련과 중국 측의 史料를
확보할 수 없었으니까요. 수정주의자들은 지금까지 「한국 또는 미국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공산권의 史料들이 공개된 상황에서
이런 주장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방법론상의 하자입니다. 수정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에 傾倒(경도)된 나머지 모든 것을 경제 變數
하나로 還元시켜 설명하려고 들었죠』 ―소련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던 헨리 월러스 같은 인물이 트루먼 대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면 冷戰(냉전)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누가 대통령이 됐건 소련과의 대결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이런 우려가 훗날 매카시즘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월러스가 대통령이 되어서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더라도, 상원이 이를 批准(비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엄청난 불신이 있었습니다』 李承晩과 金日成의 「벼랑 끝 전술」 ―소련 등 舊공산권 측 자료가
공개되면서 새로 발견된 사실은 어떤 것들입니까. 『새로 공개된 史料들을 보면, 소련 지도자들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견고했습니다. 우리는 한때 소련 지도자들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인용해 연설을 하더라도 그건 일종의
정치적 修辭(수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죽기 직전까지 마르크스의 예언처럼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유대는 서방세계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밀했습니다. 놀라운 발견이죠. 스탈린이 죽은
뒤에는 소련과 중국 사이에 거리가 벌어졌지만, 그전에는 毛澤東과 스탈린 사이에 의견 차이가 없었습니다』 ―金日成과 스탈린은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강고하게 연결된 협력자라고 봐야겠군요. 『그렇습니다. 트루먼이 李承晩의 군사지원 요청 등에 대해
냉담했던 데 비해, 스탈린은 金日成에게 대단히 협조적이었습니다. 金日成이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 좀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전쟁 이후에는 이같은 力學 관계가 변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졌고, 미국은 한국이 공산화가 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李承晩 대통령이 미국에 「벼랑 끝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만약 미국이 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남한이 공산화될 것이다」라는 式으로 위협하고, 그때마다 미국이 양보를 하는 것이죠. 金日成도 소련을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했습니다. 모스크바는 때때로 격노했지만, 金日成 정권을 교체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해서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됐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軍備 증강이 급속히 이뤄졌다. 미국 정부內에서 소련과의 대결을 원하는 세력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대표적이죠.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국방비가 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국방비가 1년 만에 3배가 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큰 폭으로 국방비가 줄었습니다. 美 국무부內에서 미국의
對蘇 전략인 「NSC 68」을 입안한 이들이 한국의 李承晩 대통령을 使嗾(사주)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이나
의심을 뒷받침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반면 스탈린과 金日成이 전쟁을 謀議(모의)했고, 일으켰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수정주의 학파의 저서들은 대부분 舊공산권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에 쓰인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6·25
직전 38선상에서 벌어졌던 남북한 간의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을 보거나, 「한국전쟁은 한국의 北侵(북침)에 대한 북한의
정당방위였다」는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史料들은 스탈린이 1950년 1월에 金日成에게 南侵을 허용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이후 金日成의 南侵 준비가 급격히 가속화되고, 4월에는 모스크바로부터 군사행동과 관련한 최종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한국전쟁이
38선상에서 벌어져 온 소규모 군사 충돌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의 北侵이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입니다』
미국이 核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 ―한국전쟁 때
미국이 核무기를 이용해서 만주지역을 폭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중국의 참전을 막았다면 한국전쟁의 향배가 달라졌을 텐데.
『미국이 한국전쟁 때 核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전쟁 중에 북한을 집중 공습한 결과, 核무기를 사용할 만한 마땅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주 폭격의 경우, 중국과 소련의 대규모 개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만주 폭격을 검토했던
시점에는 소련도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核무기를 사용했을 경우 마땅한 장거리 投射(투사)수단이 없었던 소련이 미국을 공격할 수는
없었겠지만, 서울이나 부산을 공격할 수는 있었겠죠.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核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재래식 전쟁에서 戰勢(전세)가 불리해지더라도
核무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先例를 만들었습니다. 소련도 이 先例를 따랐습니다』 ―미국이 한국전쟁 발발과 중공군 참전을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소평가가 가장 큰 문제였죠. 「스탈린과 毛澤東이 설마 金日成의 南侵 전쟁을 승인해
주겠느냐, 북한이 도발하더라도 참전이야 하겠느냐」라고 여겼던 것이 실책이었습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큰 실책을 범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38선을 돌파해 北進을 하는 바람에 중국군의 참전을 불러왔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毛澤東은 UN軍의 인천상륙작전이나 38선 돌파 이전에 이미 한국전 참전을 결심했습니다. 최근 입수된 중국 측 자료들이 이같은 사실을
강력하게 입증합니다』 『레이건은 소련 붕괴에 결정적으로 기여』 ―한국戰이 베트남戰의
序幕(서막)이 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미국이 별다른 전략적 가치도 없는 베트남의 민족주의 전쟁에 개입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주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베트남戰과 한국戰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戰은 북한의 침공에 뒤이은 반격이었다는
점에서 점진적으로 전개된 베트남戰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 전쟁 모두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염원을 달성하기 위한 분쟁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한국戰과 베트남戰에는 「민족주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超강대국이 깊숙이 개입해 있었습니다. 월맹의
호치민은 잘 알려진 민족주의 지도자였습니다. 金日成을 호치민에 비견할 수는 없겠죠. 반면 李承晩은 남북한에 걸쳐 명망을 누리는 민족주의
지도자였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前 대통령이 冷戰 종식에 얼마나 역할을 한 걸까요. 『레이건에게는
「한낱 배우일뿐 대통령이라는 重責을 맡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가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레이건은 그렇게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레이건은 흔들리고 있던 소련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소련 체제의 취약성을 다른 어떤 서방 지도자보다 잘 알고 있었고,
「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그는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상호확증파괴)라는, 냉전시대의 전략핵 운용 독트린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전략 방어 계획 일명 「별들의 전쟁」)로 冷戰을 지속시켰던 가장 중요한 토대를 무너뜨렸습니다. 이런 전략 변경에는 「소련은
惡의 제국」이라는 레이건의 믿음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레이건의 주장을 수긍하는 쪽입니다』 케리와 부시 모두 선제공격 독트린 견지
―존 케리가 부시를 꺾고 大選에서 승리했다면 미국의 외교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케리가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국가에 대해 先制공격을 배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케리가 多者主義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UN을 중심으로 하는 多者主義 외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非효율적인 UN 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라크 정책을 보자면 케리가 제시하는 代案들 대부분은 이미 부시 행정부가 채택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정권 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冷戰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의 전쟁이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도 이슬람 원리주의와의 이념
전쟁이라는 점에서 冷戰과 유사점이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이 冷戰 당시 對蘇 동맹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던 반면,
全세계적 차원의 反테러 동맹을 형성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테러의 위협에 대해 미국과
같은 정도의 인식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른 나라들이 9·11 규모의 테러 공격을 받았다면, 미국과 똑같이 강력한 對테러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소련은 冷戰 시기 미국의 가장 큰 우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방국가들이 생존의 가장 큰 위협이 소련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죠』 ―빈곤이 테러의 토양입니다. 미국이 冷戰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제3세계 국가들에게 마셜
플랜과 같은 대대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마셜 플랜 등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독일이나 일본이 성과를
냈던 것은 이들 나라들에 산업시설, 관료제도, 기술인력 등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미국이 대규모로 원조를 하더라도,
이를 활용할 만한 기반이 없습니다. 이라크의 경우는 어느 정도 근대화의 경험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일단 치안을 확보하고 그 위에 마셜 플랜과
같은 지원이 이뤄진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라크戰은 베트남式으로 확전될 가능성 없다 ―이라크 전쟁에서 美軍
전사자가 늘어나면서 「이라크가 제2의 베트남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戰費 지출이 베트남戰 수준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超강대국의 지원이 없다는 점에서, 확전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인명 손실 역시 베트남戰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교수님께서는 2001년 9·11 테러 직후 예일대학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가질 때』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시 대통령의 국내 정책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당연하지요. 조국을 사랑한다면 정부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의 失政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애국심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