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어떻게 軍을 장악했나?
2005년 월간조선 배진영기자
1.
1933년 수상에 임명된 히틀러는 빠르게 독재권력을 확립해 나갔다.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했고, 이어 국회에서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전권위임법에 따라 입법권을 손에 쥐게 된 히틀러는 반대당들을 해산하고, 나치당을
국가의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선언했으며,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 인권을 말살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안 그래도 바이마르공화국과
'코드'가 맞지 않던 공무원,경찰,법조인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나치정권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찰의 경우 뮌헨시경국장을 시작으로
"경찰사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친위대(SS)의 지도를 성실히 받아들일 것"을 선언했다. 국가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이 나치당의 私兵인 친위대에
자진해서 굴종을 선언하면서 독재권력에 투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집단이 있었다. 바로 軍部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200여년에 걸쳐 독일 군부는 국가발전과 민족통일의 주력군이었고, '전통의 수호자'였다.
명망 높은 군인귀족집안이나
중산층 출신이었던 장교단은 생래적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나치당 지도부의 粗野함이나 게슈타포의 무도함에 대해서도
마뜩찮게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군부를 손에 넣기 위해 히틀러는 한편으로는 군부를 달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를 음해하는 술수를
썼다.
2.
우선 히틀러는 1934년 6월 나치 돌격대 막료장 에른스트 룀을 처형했다. 돌격대는 제대군인, 우익 청년,
건달들로 이루어진 나치당의 前衛행동조직으로, 당시 병력은 200만 명에 달했다.
공산당,사회민주당 등과의 가두 투쟁에서 선봉에 섰던
돌격대는 히틀러 집권 이후 공공연히 육군과의 통합을 주장했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군병력이 10만명으로 묶여 있던 상황 아래서 이는
돌격대가 軍을 흡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히틀러는 룀과 돌격대 간부들을 숙청, 돌격대를 무력화시키면서 "국가에서 무기를 지녀야 할 자는 오직
국방군뿐이다"라고 선언했다. 국가의 무력을 두고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던 군부와 돌격대 가운데서 군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히틀러가 군부에 준 더 큰 선물이 있었다. 바로 베르사이유 조약의 폐기와 再군비였다.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군병력을 10만
명으로 제한당하고, 전차,비행기, 전함,잠수함 등 근대 병기의 보유도 금지당하고 있던 독일 군부로서는 히틀러의 再군비 약속은 다시 없는
선물이었다.
再군비에 따르는 병력증강은 장교단에게 더 많은 기회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軍장교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프로이센 장교단 등 군부 내 기득권 세력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소장파 장교들도 히틀러의 집권을 환영했다.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격전 개념을
다듬어 가고 있던 하인츠 구데리안, 평범한 중산층 출신인 에르빈 롬멜 같은 사람들이 그 예이다.
3.
그렇다고 해서
군부가 히틀러를 맹종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라인란트 진주 때에나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침략 때, 독일군부는 곧잘 망설였다. 그들은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프랑스 등 주변국가들을 상대하기에는 벅차다고 생각했고, 사실이 그랬다. 히틀러의 공갈협박외교가 먹혀들어갈 때마다, 독일군 지휘부는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히틀러의 나치는 이런 군부가 마땅치 않았다. 그들이 군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군부가 나치와 '코드'를
맞추라는 것이었고, 히틀러에게 맹종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군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비판조차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히틀러의
충복인 하인리히 히믈러(친위대 사령관이자 게슈타포 총책), 헤르만 괴링(공군사령관) 등이 나섰다.
이들의 타깃이 된 사람은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츠 장군이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전형적인 독일 장교였다. 처음에는 히틀러의 등장을 반겼던 그는
히틀러의 군비확장 정책이 지나치게 급진적인데 대해 공공연히 비판하다가 히틀러의 눈밖에 났다.
히믈러와 괴링은 게슈타포(비밀경찰)을 동원해
프리츠가 동성연애자라고 음해했다.
프리츠는 육군총사령관 자리에서 쫒겨나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재판과정에서 프리츠의 무고함이
밝혀졌다. 육군 지도부는 히틀러에게 프리츠의 복직을 요구했지만, 프리츠는 복직되지 못했다 (그는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시 명예대령으로 참전했다가
개전 초기 폴란드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프리츠가 숙청되는 와중에서 히틀러에게 비판적이던 16명의 장성이
예편되고,44명이 좌천됐다.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도 함께 옷을 벗었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무공을 세운 전형적인
프로이센 장교였지만, 의지가 강한 인물은 못 되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고개를 숙였다. 히틀러에 의해 국방장관에 임명된 후 그는
"총통은 만사를 올바르게 계획하고 실행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블롬베르크도 히틀러가 베르사이유 조약을 노골적으로 파기하고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시킬 때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히틀러의 눈밖에 났다.
오랫동안 홀아비였던 블롬베르크는 1938년 초 한
타이피스트와 재혼했는데, 얼마 후 그녀가 전에 매춘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블롬베르크가 평소 지나칠 정도로 히틀러에게 아부하는 것을 곱지
않게 보던 군부는 위기에 처한 블롬베르크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블롬베르크는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4.
프리츠 육군총사령관이 부당하게 자리에서 쫒겨나고, 히틀러의 군부 장악 의지가 노골화되는 동안, 군부
일각에서는 反히틀러 쿠데타 모의가 진행됐다. 참모차장 프란츠 할더 장군을 비롯해 베를린 지구 사령관, 포츠담 주둔군 부대장, 장갑사단장,
참모본부 작전부장 등이 모의에 참여했다.
할더 장군은 참모총장 루드비히 베크 장군에게 거사를 종용했다. 베크 장군은 그 제안을
일축했다.
"독일 군인의 사전에 반란이나 혁명이란 없다."
국내 정치에 초연하면서, 오로지 군인으로서의 사명에만 충실한 독일 군부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얘기였다.
군인으로서는 지극히 옳은 얘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크 자신은 그때 할더 장군의 거사제안을
거부했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베크는 히틀러의 체코침공에 반대하다가 예편됐다. 그는 체코침공이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과 독일의 패전, 더
나아가 국가의 파멸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반대했던 것이다.
베크는 육군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장군에게
모든 장성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해 히틀러의 무모한 침략전쟁을 막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독일군 지휘부에 대해 "역사는 이들 지도자들에게
유혈의 죄를 범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적 복종에도 한계는 있다. 그들의 지식,양심,책임감이 명령의 실행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후임 참모총장이 된 할더에게 베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자네가 옳았다는 것을 알았어."
퇴역한 베크는
수 차례에 걸쳐 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했다. 1944년 7월 미수에 그친 히틀러 암살 음모도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암살되면
베를린 인근 군부대들을 동원해 주요 시설들을 점령하고 연합군과 講和조약을 맺어, 독일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는 것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거사가 실패한 후 베크는 자결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독일군도, 독일 국가도 파멸하고
말았다.
5.
히틀러가 군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軍 장교단의 비겁때문이었다.
그들은 히틀러가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짓밟는 것을 보면서도 '軍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미명 아래 수수방관했다.
더 나아가 히틀러에게 아부함으로써
자신의 출세만을 꾀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히틀러가 軍內 기득권 세력인 군인귀족 출신의 장교단을 개혁하면, 그 와중에서
자신의 출세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히틀러를 응원한 중견 장교들도 적지 않았다.
앞서 말한 국방장관 블롬베르크 장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때, 히틀러가 후임 국방장관을 추천하라고 하자 "왜 각하가 직접 국방장관을 맡지 않느냐?"고
속삭였다.
히틀러는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히틀러는 국방부를 폐지하는 대신, 국방군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최고사령관이 됐다.
'최고사령관' 히틀러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참모장으로는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됐다. 카이텔은 블롬베르크의
표현을 빌면, '(블롬베르크의) 사무실이나 운영하는 자'에 불과했다.
독일군 장성들은 카이텔을 일러 '카라이텔(아첨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히틀러가 보기에 카이텔에게는 아주 큰 미덕이 있었다. 그는 '개처럼 충직'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최고사령부에는
점차'예스맨'만 남게 됐다. 그 중 하나가 작전참모부장 알프레트 요들 대장이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고, 전방의 독일군
지휘관들이 전선 상황을 다급하게 보고해 올 때, 그는 히틀러에게 즉각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 "총통께서 주무시고 계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카이텔과 요들은 훗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6.
육군의 장성진급과
관련해 괴문서들이 나돌자, 軍검찰부가 육군인사참모부를 압수 수색했다.
軍인사에 부정이 있다면, 당연히 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나오기 전에 마치 적군 기지라도 급습하듯이 이루어진 압수 수색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主敵개념 설정, 국방부
문민화 등과 관련해 軍의 목소리를 대변해 오던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을 겨냥한 조치가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그런 가운데 열린우리당 安泳根
제2정조위원장은 24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黨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軍 진급 비리 근절을 취할 의향도 있다”고 했다. 국정조사권 발동 가능성도
내비쳤다.
지난 6월 무궁화회의에서 主敵개념을 흐리는 이종석 NSC차장의 주장을 반박했던 김광현 육군정훈감은 금년 말로 조기
전역하게 됐다.
국무회의에서 고교 근현대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도 지난 번 개각때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취임한 현 국방부 장관은 주적 개념 삭제, 국방부 문민화 등을 얘기하면서 열심히 '코드'를 맞추고
있다.
한편으로 노무현 정권은 '자주국방'과 '국방예산 증액'을 내세우면서 軍心을 달래고 있다.
이 밤, 우리 軍을
둘러싼 이런 저런 풍파를 보면서, 이런 일련의 과정이 히틀러의 군부 장악과정과 오버랩 되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월간조선
배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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