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조선시대의 인구센서스

이강기 2015. 9. 22. 23:05

조선시대의 인구센서스


월간조선 김용삼 기자

 

 

조선 초기 500만 명을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인구는 조선 중기인 현종 시절(1669)에 겨우 500만을 넘었다. 그러나 돌림병과 역질이 돌 때마다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30년 전의 인구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영조 중반기에 인구 700만을 돌파한 조선의 인구는 순조 17년(1817)에서야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인구 조사는 참고자료일 뿐 공인 자료로 인정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노처녀는 관청에서 시집보내 주다


인구 폭발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여성들이 아이 낳기를 꺼려 인구가 줄어들 걱정을 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정부가 나서서 피임을 권장하고, 정관수술을 하면 예비군 훈련을 면제해 주었던 시대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조선시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지만 정확한 인구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가끔씩 세금 수납과 징병, 부역 등 통치의 기본자료로 삼기 위해 조정에서 인구 조사를 했던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조선 초기인 태종 4년(1404) 4월 25일 호조에서 각 도의 전답과 호구 수를 보고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시절에 충청도는 1만9561호에 인구는 4만4476명, 전라도는 1만5703호에 인구가 3만9151명, 경상도는 4만8992호에 인구는 9만8915명, 풍해도(황해도)는 1만4170호에 인구는 2만9441명, 강원도는 1만5879호에 인구가 2만9238명, 동북면은 1만1311호에 인구가 2만8693명, 서북면은 2만7788호에 인구가 5만2872명으로 조사됐다.

태종 14년(1414) 6월 20일 호조의 보고에 의하면 한양 도성 내 환과고독(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164명인데 이 중 80세 이상이 31명, 맹인이 19명으로 조사됐다. 아울러 전라도에 100세 노인이 1명, 80세가 100명인데 "30세가 지나도록 결혼하지 못한 여자 5명은 관청에서 화장품을 주어 독촉하여 시집가게 하소서"라고 보고하고 있다.

세종 시절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의 상세한 인구통계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 청주목 문의현의 사례를 보면 '호수가 353호, 인구는 1871명, 군정은 시위군이 18명이요, 영속군(각 군영, 감영 등에 속한 군사)이 50명, 진군(각 진에 속한 군사)이 124명, 선군(수군)이 26명'으로 조사되었다.

문종 1년(1451) 3월 16일에는 행정구역 통합과 관련된 논의가 발견됐다. 평안도의 삼등과 강동 두 고을을 합쳐 삼강현을 세울 당시의 기록이다. 이날 실록을 보면 당시 삼등과 강동의 인구 수를 비롯하여, 새로 편성된 행정구역은 해당 마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취해 명칭을 부여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평안도 도 체찰사가 아뢰었다.

"강동현 인민이 원하는 본현을 세우는 것이 편한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삼등과 강동 두 고을의 호수를 합치면 민호가 모두 728호, 향호가 43호, 관노비가 41구입니다. 두 고을에 각각 수령을 두면 하급관리와 노비의 수가 넉넉하지 못하고 세력이 나누어져 힘이 약할 것이니 한 고을로 통합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봅니다. 다만 삼등의 현재 위치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강동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강동 인민의 왕래에 폐가 있습니다. 신이 고을 중앙에 읍성을 설치할 만한 곳을 살펴보니 옛 원터에 빈 땅이 있는데 산수의 기운이 모였고 서쪽으로 평양, 동쪽에는 성천, 남쪽에는 상원, 북쪽으로 자산과의 거리가 비슷합니다.

두 고을 인민의 왕래도 편리하며 개천, 은산, 자산, 순천의 적로가 서로 모이는 곳이 되니 관청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더욱이 삼등현을 이곳에 옮겨 두 고을의 재목과 기와로 관사와 객사를 짓고 본도 백성의 힘이 소생되기를 기다려 읍성을 쌓을 계획입니다. 삼등과 강동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삼강이라 일컬으면 백성의 마음이 편할 뿐 아니라 힘을 합쳐 수비하면 형세가 외롭지 않아 실로 편할 것입니다.">

성종 21년(1490) 9월 5일에는 조선시대의 호적제도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나타난다. 이날 특진관(임금의 경연에 참석하는 관원) 윤효손이 외방 고을의 호적을 '경국대전'에 입각하여 체계화할 것을 건의한다.
<윤효손:"경국대전 안에 '호적은 매 5가를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매 5통을 1리로 하여 이정(里正)을 두며, 매 1면마다 권농관을 둔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외방 고을의 호적이 법과 같지 않아 산만하고 어지러워 계통이 없습니다. 그 결과 풍속과 관계되는 일을 검검할 경로가 없으므로 불효하거나 불목하는 자가 많습니다. 청컨대 '경국대전'에 의해 통주, 이정, 권농관의 법을 거듭 밝혀 통 안에 강상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통주는 이정에게 신고하고, 이정은 권농관에게 신고하고, 다시 수령에게 고하여 그 죄를 다스리게 하면 풍속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임금이 이 의견에 대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승원:"서울에는 인가가 즐비하여 그 법을 시행할 만하지만 외방에는 산천이 서로 막히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 5가로 통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윤효손:"인가가 희소한 곳에서는 비록 3~4가로 1통을 만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신이 앞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이 법을 시행했더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싫어하다가 후에는 매우 편리하게 여겼습니다."

성종:"법이 대전에 실려 있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연산군 9년 2월 9일에는 한성부에서 "정월부터 2월 5일까지 도성(서울) 안팎의 출생자는 120명, 사망 470명이라는 보고 자료가 발견됐다.

이번에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2월 29일의 인구기록을 보자. 이날 실록에 의하면 서울과 지방의 호수는 134만 2074호이고, 인구는 516만 4524명으로 집계되었다.

현종 13년(1672) 10월 30일 실록에 의하면 호수는 117만 6917호이고 인구는 469만 5611명. 이 중 남자가 254만 1552명, 여자가 215만 4059명이었다. 3년 전에 비해 인구는 무려 46만 8913명, 호수는 16만 5157호나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인구센서스 결과를 발표한 직후 다음과 같은 기록에 의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데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다. 신해년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잇따랐다. 그런데 이것은 호적에 들어 있는 숫자에만 의거해서 기록한 것이다.>

전염병 돌면 인구 크게 줄어

과연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어느 정도로 맹위를 떨쳤기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돌림병과 역질에 관련된 사건 중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숙종 44년(1718) 1월 15일:충청도 각 고을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앓는 자가 2140명, 사망자 642명, 함경도 각 고을에 염병(장티푸스)을 앓는 자가 4570명, 사망자 1243명.

▲숙종 45년(1719) 1월 2일:충청도에서 각 고을마다 염병을 앓는 자가 1643명, 사망 240명(온 집안이 몰사한 경우가 4호). 평안도에서 염병을 앓는 자가 8348명, 사망 1380명….>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당시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피해가 더욱 컸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중반기에 인구 700만 넘어서

이처럼 돌림병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았으니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숙종 1년(1675) 10월 27일 실록에 의하면 '서울과 8도를 합하여 호수가 123만 4512호이고 인구가 470만 35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2년 후인 숙종 43년(1717) 11월 14일 실록에 의하면 전국의 호수 총계는 155만 7709호, 인구는 683만 9771명으로 나타나 있다. 온갖 전염병과 기근, 괴질과 역질이 차례로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42년 만에 호수는 32만여 호, 인구는 213만여 명이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조 23년(1747) 12월 28일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호수는 3만 4153호, 인구는 18만 2584명이며 8도의 호수는 172만 5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남 353만 9107명, 여 380만 1211명)이었다. 이때 비로소 인구가 700만을 넘게 된다.

그러나 정조 1년(1777) 실록을 보면 호수가 117만 5371호, 인구는 723만 8523명으로 오히려 영조 시절보다 호수는 55만, 인구는 11만 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각종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떼죽음의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정조 시절에도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계속했는데, 이때도 질병과 기근이 반복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정조 16년(1792) 4월 14일엔 영천군수 이면긍이 군내에 인구 조사가 잘못되었다면서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당시 영천의 인구 규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자료를 제공해 줌과 동시에 당시 백성들의 고달픈 실상을 소개하고 있다.

<"본군의 임자년(1792) 조사 호구수는 총 3283호인데, 이 중 중이나 과부, 병자(病者), 무녀, 유장(버들고리를 만드는 장인) 등의 호를 제외하면 2700여 호에 불과합니다. 조정의 관리와 양반 족속이 1200여 호이고, 내노(중앙의 내수사에 딸린 노비), 사노(사원에 딸린 노비), 교원노(향교나 서원에 딸린 노비), 역노(역참에 딸린 노비), 개인 노비가 600여 호입니다.

충찬위(원종공신이나 그 자손에 속한 군대), 교생(지방 향교에 다니는 생도), 삼반관속(지방 관아에 속한 하급관리의 총칭), 석장(자리를 만드는 장인) 등이 300여 호입니다. 그 나머지 수를 계산하면 역에 응할 수 있는 호구가 대략 500호도 못 됩니다.

본읍의 군액은 수포군(면포를 바치고 군역을 대신하는 군사)의 숫자를 통산하면 모두 2783명입니다. 지금 500호를 가지고 이 군역을 하려면 호마다 5명씩 내더라도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군액을 허위로 기록한 것이 3분의 2가 됩니다. 죽은 자에게 10년간의 군포를 책임 지우고, 어린아이에게 두세 가지 신역을 겸하게 하니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가 고달파 솥이 남아 있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보병의 군포를 징수하는 때를 당해 끝내 징수하지 못한 것이 400~500금(金)에 이릅니다. 기한이 이미 지나 독촉하는 공문이 잇따라 내려오므로 부득이 진성(지방 관아에서 상부로 보내는 물품 명세서)을 만들어 주고 담당 관리를 재촉하여 보내면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가 빚을 내어 채워서 바치곤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명을 내려 감할 수 있는 인원은 감하고, 감할 수 없는 것은 본도와 다른 도를 막론하고 1000명을 한도로 군역을 정해주소서.">

순조 17년(1817) 12월 29일엔 전국의 호수가 163만 718호, 인구가 790만 3167명으로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된다.

조선시대의 인구를 전공한 학자들 의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통계는 실록의 기사를 그대로 신봉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오늘과 같이 정교한 인구센서스를 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과세대상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16~60세까지의 장정만 계산되고 노인과 어린이, 노비와 여자들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과세대상에서 빠지기 위해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인구통계는 '공인기록'이라기보다는 '참고자료'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월간조선 김용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