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대마도(對馬島)는 왜 우리 땅이 못 되었는가
時代精神, 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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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對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에 대해서는 일본학계에도 아직 확립된 정설이 없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온 사람들이 지금의 대마섬사람들의 조상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지금 그곳이 일본 영토이고 일본의 고대유물이 조금씩 발견되고 있어 일본본주(本州)의 조상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일본역사학계의 추정이다. 이 문제의 해답에 앞서 일본 본주 주민의 조상은 언제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역사, 인류 및 고고학계는 일본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지금부터 약 2만 년에서 1만 2천 년 전으로 보고 있다. 이는 구석기시대에서 조몬시대(繩文時代) 초기에 걸치는 시기이다.
하니하라 교수는 대륙지방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한랭한 기후가 주요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북방민족의 남방이주가 시작되었고, 이 이동이 동아시아지역에 민족 마찰과 정치적 동란을 일으켜 한반도에 거주하던 한민족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일본 이주물결은 야요이시대( 生時代)가 시작되는 기원전 5~4세기로 접어들면서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북부규슈와 인근 일대에 소규모의 부족국가가 형성되어 서로 간에 세력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들이 다시 지금의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일대인 긴키지방(近畿地方)으로 진출하여 야마토문화(大和文化)의 기초를 닦았다고 하니하라 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세키 아키라(關 晃) 교수는 그의『귀화인(歸化人)』에서“고대의 도래인은 일본인의 조상이다”라고 단정하면서 일본의 고대사회 형성은 주로 귀화인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인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이누족이 다른 하나의 주요축이 되고 있다. 북방아시아계의 한민족이 북부규슈와 본주의 서남 방면으로 진출한 데 비해, 아이누족은 북해도에 정착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一郞) 두 교수는『일본민족의 기원(日本民族の起源)』에서 아이누족이 문화의 층위적(層位的) 측면에서 가장 오래된 위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이누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선사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동북아시아 인종집단에 속하는 몽골로이계 종족이라는 주장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이들 아이누족이 이른바 일본의 선주민인 원일본인(原日本人)이며, 이들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대륙계, 주로 한민족 도래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종족이 지금의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하니하라 교수의‘일본인 이중구조론’은 바로 이 두 인종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일본학계는 위와 같은 학설을 근거로 대마 사람들의 조상은 한반도 도래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한반도에서 북부규슈로 항해할 경우, 거의 대부분 대마를 거쳐 갔으며, 대마에는 이를 증명할 유적과 유물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도 3세기경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대마도를 거쳐 섬나라인 일본에 전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마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몇 가지 설이 있다. ‘대마(對馬)’란 이름은『위지왜인전』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위지의 편집자가 ‘쓰시마’라는 일본어를‘시마(對馬)’라는 한자로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쓰시마’는 일본어로‘津(쓰)의 島(시마)’, 즉‘배가 닿는 섬’을 의미하며, 일본의 고대역사서인『일본서기(日本書紀)』에‘對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설은 대마의 향토사학자와 일본학계로부터 폭 넓게 인정받고 있다. 대마에 대한 다른 한 설은 대마의 위치가 바다 건너편에 있는 조선반도 남부의 마한(馬韓)에 대(對)한다는 의미로 대마(對馬)로 쓰였다는 것이며, 제3설은‘두 개의 섬’이라는 한국 측 풀이이다. ‘쓰’는 우리말의‘두’라는 말에서, 그리고‘시마(島)’는‘섬’을 의미하기 때문에‘쓰시마’는 우리말로‘두 개의 섬(島)’을 말한다는 설이다. 실제로 부산에서 본 대마는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아소만(淺茅灣) 부근이 지대가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이 만의 가장 좁은 지역인 동쪽의 미우라(三浦)만 쪽을 절개했기 때문에 지금은 실제로 남, 북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다. 절개된 해협에는 만세키바시(万關橋)라는 교량을 세우고, 북부 섬을 가미지마(上島), 남쪽 섬을 시모지마(下島)라고 명명했다.
대마는 15세기 중반인 무로마찌(室町)조정 중기 이래 당시 조선과의 무역에 힘을 쏟았다. 명치 4년 폐번치현령(廢藩置縣令)에 의해 대마번(藩)이 폐지되면서 그동안 거의 독자적으로 행해왔던 대마의 대(對)조선외교와 무역특권이 소멸되었으나, 대마번주는 한동안 중앙정부의 폐번조치를 무시하고 조선왕조와의 통상관계를 계속한 적도 있었다. 15세기 후반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申叔舟)는 그의『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대마에 대해“토지는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며 소금에 절이고 말린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섬의 거의 90퍼센트가 산악지대인 대마는 지금도 벼농사가 극히 제한적이며 일부 밭농사와 오징어잡이 등 어업이 주산업을 이루고 있다. 만성적인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대마는 거리가 가까운 조선과의 교역에 매달렸으나 신라 때부터 식량 확보를 위해 수시로 한반도 남부일대를 침략한 대마해적의 약탈로 주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대마를 거점으로 한 왜구는 14세기 중반부터 고성, 거제 등 우리나라의 남해안 일대에 수시로 출현, 일대의 주민들을 괴롭혔으며, 고려와 조선 조정도 왜구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해적질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고 조선조정이 대마해적 두목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정기적으로 일정량의 식량을 주며 달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대마에는 지금도 가을철이면 아이들이 민들레 꽃잎을 창공으로 불어 날리면서“멀리 멀리 날아라. 조선까지 날아가서 쌀을 갖고 오너라”라는 동요까지 전해지고 있다. 대마의 문화는 한반도와의 교류사를 빼면 성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대마에서 발굴된 약 8,000~7,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조몬(繩文)시대의 융기문(隆起文)토기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가장 오래된 토기이며, 이밖에도 무문(無文)토기, 빗살무늬토기 등 고대 조선이 대마에 전수한 문화는 수없이 많고 범위도 넓다. 생활면에서 대마와 한반도의 교류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굴되는 유적에서부터 구전되는 전설, 민담, 속담, 그리고 민요와 생활용어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대마의 지명과 출산, 불교전파와 관련된 전설, 신, 인간, 동물 등에 관한 민담, 그리고 어부의 생활상과 가족사랑에 관한 민요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속담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 “선원이 셋이면 배가 섬(산)으로 간다”, “갈매기 떠있는 곳에 고기가 많다”든가, 날씨와 관련해서는“산비둘기가 울면 날씨가 개인다”, “아침에 무지개가 뜨면 비가 오고 저녁 무지개 때는 날씨가 든다”, “두꺼비가 밖으로 나오면 큰 비가 온다”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언어분야에서도 동일하거나 유사한 말들이 많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처럼 대마에도 끝자에‘原’자가 붙는 지명이 많다. 이는 일본전역 어디서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우리말의‘바지’는 그대로‘바지’로, ‘친구’는‘친쿠’또는‘찡쿠’로, ‘조금만’은‘조고마이’로, ‘총각’은‘촌까꾸’로, ‘고구마’는‘고코모’, ‘괭이’는‘구와이’로, ‘지게’는 ‘지케이’, ‘크다’를‘키보’, ‘높다’를‘놋보’, ‘여성’을‘여보’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밖에 대마 토종 말(馬)이 제주도 말과 흡사한데 이는 대마에서 조선말을 사육했기 때문이며 일본 본토의 비육우가 대부분 검은색인데 비해 대마 소는 우리와 같은 황색이며 꿩도 한국 것과 같고 이름도 고려 꿩(雉, 기지)이라고 부른다. 또 부녀자들이 바깥일을 할 때 머리에 두르는 수건이 우리나라처럼 흰색에 매는 방식이 같으며, 곡식을 터는 키와 남자의 짚신도 우리나라와 같은 모양이다. 현재 행정상 나가사키(長崎)현 대마시로 편제되어 있는 대마는 남쪽으로부터 이즈하라마치(嚴原町), 미쓰시마마치(美津島町), 도요타마마치(豊玉町), 미네마치(峰町), 가미아가타마치(上縣町), 그리고 가미쓰시마마치(上對馬町) 등 여섯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2009말 현재 34,116명에 이르는 대마시 인구는 한국여객선의 출입항구인 남쪽의 이즈하라에 1만 5천여 명, 그리고 북쪽의 히타가츠(比田勝)에 5천여 명으로 두 마을이 섬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밖에 사스나(佐須奈)와 미네(三根) 등 규모가 비교적 큰 마을을 제외하면 작게는 10~20호, 큰 것이라야 50~60호에 지나지 않은 농어촌 마을이 산 계곡과 해변에 점점이 박혀 있다. 남북으로 82킬로미터, 동서 폭이 18킬로미터로 제주도의 반 남짓한 대마는 본 섬 외에 모두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지며 그중 5개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시화(市花)는 현해진달래, 시조(市鳥)는 고려 꿩, 그리고 시목(市木)은 이팝나무이다.
오전 10시 반 부산을 출발한 여객선이 한 시간 남짓 진행했을 무렵 오른쪽에서 마치 항구의 방파제처럼 동서로 길게 뻗은 비슷한 높이의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 대마였다. 배가 섬의 북단을 돌아 남쪽을 향해 한 시간 넘게 내려가도 섬은 계속되었다. 우리 땅이라면 천혜의 요새구나 싶었다. 대마에서 가장 큰 마을인 이즈하라(嚴原)의 선착장에 닻을 내린 것은 부산을 출발한 지 2시간 40분 후였다. 대마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는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이 73킬로미터, 후쿠오카(福岡)까지는 132킬로미터의 거리인 데 비해 우리나라의 부산에서 대마북쪽의 히타가쓰(比田勝)까지는 49.5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일본지진대에서 벗어나 지진이 거의 없는 대마는 지질적으로도 우리나라 지층대와 연속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대마는 홍적세(洪積世) 말기까지 우리나라와 연결돼 있었으며 지금도 대마에는 대륙계의 생물이 많이 남아있다. 도착한 날 이즈하라 일대의 한민족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음 날은 섬을 종주하는 일정을 세웠다. 전날 예약한 택시기사는 아침 7시 정각 호텔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경력이 30년 넘었다는 50대 후반의 하나오카(花崗) 씨는 좁고 굴곡이 심한 산길 운전이 능숙하기도 했지만 한민족 유적지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선왕조는 이에 앞서 무로마치(室町) 시대인 15세기에도 친선사절단을 3회나 일본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선조 40년에서 순조 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과 행사는 대마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는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과 그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매년 8월의 첫째 주 토·일요일 이틀 동안 이즈하라에서 치러지는 한일합동 대마아리랑축제는 대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소 엇갈리고 있다. 막부고관이 대마에서 사절단을 출영했고 에도로 행진 중 도강 때 당시 쇼군(將軍)만 이용키로 되어있던 부교를 조선통신사에게 예외로 허용하는 등 일본이 조선사절단에게 상당한 비중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나, 사절단의 방문목적이 대부분 새 쇼군의 취임축하를 위한 것이었고, 몇 차례 있었던 일본의 답방을 대마번주가 대행한 것 등으로 보아 균형이 맞지 않은 관계가 아니었나 하는 견해도 있다. 대마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역사의 상흔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대부분 험난한 역사의 길목에서 빚어진 슬픈 사연들이다. 대마번주 후손과의 사이에 일어난 덕혜옹주의 불행한 결혼과 이혼, 선조의 옹주가 조선 침략 왜군에게 끌려가 낯선 적국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슬픈 사연과 신라충신 박제상의 순국충절의 이야기 등……. 이즈하라마을의 옛 대마번주 거성(居城)이었던 금석성(金石城) 경내에‘이왕가종가어성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家御成婚奉祝記念碑)’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고종의 넷째 딸로 태어난 덕혜옹주와 대마번주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의 결혼을 기념해 세운 축하비석이다. 이 혼사는 당시 한·일 양국 간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정략결혼이었다.
조선 14대 선조 왕 옹주의 것으로 확인된 비운의 묘는 우리나라 쪽으로 바다가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대마 북동부 우나쓰라(女連)마을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높은 산이 병풍처럼 뒤를 감싸 있고 앞쪽으로 동해를 볼 수 있는 아늑한 자리이긴 하나 주위에 인가라곤 한 채도 없는 곳이었다. 바깥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른 채 구중궁궐에서만 살았던 어린 공주가 어느 날 갑자기 핏발 선 왜적의 전리품으로 잡혀가 깊은 산골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며 살다 끝내 적의 나라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조국이 잘 보이는 높은 자리에 묻어달라는 옹주의 유언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유택이 마련되었다. 넓진 않지만 묘역은 잘 다듬어져 있고 네모난 돌 위에 작은 불탑을 얹어 놓은 묘와 그 옆에‘朝鮮國王姬の墓’라고 새겨진 둥근 네모꼴의 작은 비가 서 있었다. 옹주가 묻힌 곳은 대마에서도 외진 산골이었다. 참배객이 비나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묘 옆에 지어 놓은 조그마한 정자에 잠시 앉아 땀을 닦으며 한숨 돌렸다. 파란 바다 저편만 응시하다 돌보는 이 없는 이국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어린 옹주의 한 서린 삶이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애처롭게 느껴졌다.
불침조건으로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신라는 내물왕(奈勿王)의 셋째 왕자인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보냈다. 볼모기한이 지난 뒤에도 왕자의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자 내물왕의 뒤를 이은 눌지왕(訥祗王)이 박제상에게 왕자를 데려오도록 명을 내렸다. 박제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왕자와 함께 귀국하던 중 지금의 사고(佐護)에서 일본군에 발각되어 충돌이 일어났고, 와중에 왕자는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붙잡혀 일본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통곡하며 박제상에게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미사흔을 박제상의 딸과 혼인시켜 그 충절에 보답해 주었다. 그러나 바다를 바라보며 지아비를 기다리던 박제상의 부인은 끝내 망부석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오늘 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천석(韓天錫)을 단장으로 한 이들은 모두 역관(譯官)으로 정, 부사를 비롯하여 상관, 중관, 하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혼령을 기리는 위령비인 조선국역관 및 종자순난영위비(朝鮮國譯官 從殉難靈位碑)가 한국전망대에서 가까운 와니우라만 언덕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와 대마와의 관계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는 408년 실성이사금왕(實聖尼師今王)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병장기구와 군량을 비축하며 우리를 습격하려고 도모한다는 말을 듣고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병을 뽑아 적들의 군비를 격파하자고 하였다. 이에 신하인 미사품(未斯品)이‘군사는 흉기고 싸움은 위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큰 바다를 건너서 왜인을 정벌하다가 승리하지 못하면 후회하여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합니다.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설치하고 있다가 적들이 침입하면 이를 막아 침노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가 이로울 때에 나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유인할지언정 남에게 유인 당하지 말라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상책으로 여겨집니다’라고 진언했으며 왕은 미사품의 말을 좇아 대마도정벌을 그만두었다.” 고려 공양왕 원년인 1389년에는 대마왜구토벌을 위해 경상도원수인 박위(朴폘)가 이끄는 고려군이 대마를 공격, 왜구선 300여 척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다수의 고려병사를 구출했으며 조선조 태조 이성계도 대마왜구 소탕에 힘썼다. 1449년의『세종실록』에도‘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對馬島本是我國之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본시’가 언제부터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없어 대마의 영토편입 확인이 불가능하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조에 걸쳐 왜구토벌 시도는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한동안 대마의 실질적 점령이 있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대마가 우리나라 통치권 아래로 들어온 역사가 있었다. 세종 2년인 1419년, 왜구토벌을 위해 200여 척의 군선과 17,000여 명의 군사로 대마를 정벌한 이종무(李從茂)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는“대마를 조선의 속주로 하고 경상도 관할 아래에 둔다”는 내용의 협약을 대마도주와 맺었다. 그러나 1년 3개월 후 왜구의 조선 약탈을 단속하겠다는 무로마치(室町)조정의 약속을 담보로 협약은 폐기되었으며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24년 뒤인 1443년‘가길조약(嘉吉條約)’이 체결되어 대마와의 교역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이 조약도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으로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영유권을 주장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에 앞서 1932년 나가사키 현의 후지마쓰(藤松)라는 현(縣)의원이 지리적 이유를 들어 대마의 행정관할권을 나가사키 현에서 조선총독부로 이관할 것을 제안했으나 부결되었다. 왜구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취한 대책 중에‘고신(告身)’이란 게 있었다. 이는 대마도주였던 소우(宗)가문의 고문서에서 밝혀진 것으로 조선 조정이 해적두목에게 해적행위의 중지조건으로 조선관직을 부여하고 일정량의 녹봉을 보장해주는 조치였다. 이는 당시 일본의 중앙조정이 대마해적의 조선약탈행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했기 때문에 택한 고육책이었다.
대마에 관한 역사기록은『위지왜인전』과『일본서기』등에도 등장하고 있다. 664년에 변방지역경비사인‘사키모리(防人)’를, 그리고 10년 후인 674년에는 지방행정관청인‘고쿠후(國府)’를 대마에 설치했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기록하고 있고 대마의 호칭도『위지왜인전』에는 대마국, 『일본서기』는 대마국 또는 대마주, 그리고『고사기(古事記)』에는 津嶋(쓰시마)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대주신사지(對州神社誌)』는“대마에는 바다 저편에서 통나무배로 도래한 사람들이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의 고대역사서에서 말하는‘바다 저편’이라는 표현은 한반도 남부, 즉 가야나 신라를 의미하기 때문에『대주신사지』의 기록은 한민족이 대마인의 주류를 이루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지왜인전』은 규슈와 조선 사이의 해협은 예로부터 중요한 항로로서 대마도를 창구로 하여 조선으로부터 선진문화가 일본으로 전달되었으며, 특히 3세기경 조선반도 남안(南岸)의‘구야간코쿠(狗邪韓國, 가야국 일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로 건너갔고 거기서 다시 잇키(壹岐)섬을 거쳐 지금의 규슈 나가사키 현 마쓰우라(松浦)에 상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마에는 중심마을인 이즈하라(嚴原)의 조선식 산성인 가나다성(金田城)을 비롯하여 고분과 불상, 스에키(須惠器) 토기, 각종 철제품과 마구 등 한반도에서 건너갔거나 대마에서 한민족 도래인이 만든 유적과 유물이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대마에 한민족이 거주했던 증거는 대마 전역에 걸쳐 만날 수 있다. 대마향토사학자인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 씨는 그의『古代歷史の鍵. 對馬』에서 두장(頭長)과 두폭(頭幅) 및 두장폭지수(頭長幅指數)면에서 보아 대마인의 상당 부분이 한민족에 가까우며 또한 묘제(墓制)도 야요이시대( 生時代)의 대마묘제는 대부분 석관(石棺)인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매장방법은 한반도, 특히 가야지방에서 유래된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가도메 씨는 또 야요이 중기의 석관에서 출토된 한반도식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야요이 후기 유적에서 나온 청동제 마탁(馬鐸)과 동팔찌(銅釧), 토사기(土師器) 등은 모두 한반도 도래인들이 휴대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특히 세형동검의 경우 고대에 부족의 수장이나 호족들이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에 한민족 도래인이 대마의 지배층을 형성했던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마에는 벼농사에 관해 이나쿠비신사(伊奈久比神社)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먼 옛날 학이 볍씨를 물고 와 떨어뜨린 곳에 오오토시노 가미(大歲神)가 나타났으며 이때부터 대마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이 설화는 바다 건너편, 즉 한반도로부터 벼농사가 전래된 사실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최초의 볍씨를 심었다는 대마 서북부의 작은 마을 시다루(志多留)에는 대마로서는 꽤 넓은 들판이 있다. 시다루에는 항아리에 관한 전설도 있다. 해변에 표착한 큰 항아리는 가야국에서 왔다면서 가야가 잘 보이는 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항아리의 요구대로 마을사람들이 항아리를 높은 산 위에 안치했는데 바다가 만조일 때는 항아리에 물이 차고 간조일 때는 물이 말랐다는 것이다. 일의대수(一衣帶水)의 해협을 사이에 둔 대마에 특히 가야에 관한 전설이 많은 것은 가야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의미함일 것이다. 조몬시대 후기에서 야요이시대 초기에 걸쳐 가야인들이 대마로 이주하여 선진문화의 씨를 뿌리고 가꿀 즈음 일본은 어디에도 아직 나라의 형태조차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이다. ‘대마가 우리 영토로 편입될 역사적 배경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라는 백일몽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여객선은 어느새 대마섬을 한참 벗어나 부산항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정이 역사에는 무의미하다지만 대마섬이 일본땅이기에는 한반도와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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