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통치시대는 과연 악(惡)이었던가?' 1993년 그 책은 이런 도발적인 선전 문구를 달고 나왔다. 제목은 '추한 한국인'. 출판사는 저자 '박태혁'을 이렇게 소개했다. '1928년 한국 경기도 출생, 서울대 중퇴, 한국 유력 신문의 도쿄 특파원 역임.'
▶'추한 한국인'은 '한국인들은 옛날에 인육(人肉)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또 '식민지 시대 한국인들은 일본이 가져다준 근대화에 감사해 일본 나막신 게다(下馱)를 신는 것도 자랑스러워했다'고 썼다. 한국 침략과 관련해 늘 '반성'과 '사과' 요구를 받아온 일본인들은 자기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책 내용에 열광했다. 나온 지 몇달 만에 15만부가 팔렸다. 그러나 곧 의문이 싹텄다. 박태혁이란 이름은 물론, 그 나이에 그런 이력을 가진 한국 언론인은 어디를 찾아봐도 없었다. 진짜 저자는 일본인 극우 평론가였다는 게 정설이다.
▶비록 희대의 사기극이긴 했지만 '추한 한국인'은 일본 내 '혐한론(嫌韓論)'의 씨를 뿌렸다. 그로부터 20년. 일본 출판·서점가에 혐한론 관련 책들이 봇물을 이룬다고 한다. 대형 서점 계산대 옆 특별 코너엔 매한론(�韓論·어리석은 한국론), 악한론(惡韓論·나쁜 나라 한국론)을 담은 책이 열 종 넘게 깔린다. 한국을 '빈 깡통 같은 나라' '세계가 경멸하는 나라'로 묘사한 책들이다. 일본 주간지 편집자들 사이에선 "한국 때리기 기사가 없으면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이다.
▶'혐한'은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재일 한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사람들은 한국인 밀집 지역에서 '조센징 돌아가라' '한국인을 죽여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다. 이렇게 한국인을 증오하면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이 탕감되기라도 한다고 믿고 있는 걸까.
▶이 재특회 홈페이지에 일본 내 각종 극우단체들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달력이 떠 있다. 올해 '4월 20일'에 적혀 있는 이벤트는 '히틀러
탄생 125주년 파티'다. '위대한 총통 각하가 탄생한 날 와인을 마시며 얘기하자'고 쓰여 있다. 그러고 보면 엊그제 도쿄 시내 공립 도서관에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숨진 유대인 소녀 안네의 일기 관련 서적들이 찢긴 사건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밤중 위안부 소녀상(像)에
말뚝 테러를 하는 짓이나 남몰래 안네의 일기를 찢어내는 짓이나 뿌리는 하나다. 제 나라 역사를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의 역사까지
날조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