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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 - 黑田勝弘

이강기 2015. 9. 25. 21:31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
 
이미 근대화를 이루고, 21세기를 앞두고도 아직 血緣의 보호막·地緣의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20여년 간의 한국 체험에서 얻은 놀라운 인상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전통사회에 살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근대화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血緣의 보호막」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따뜻하게 살고 있는 듯하다. 메이지(明治) 유신을 통한 일본의 근대화는 血緣과 地緣으로부터의 철저한 결별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를 위해 「부모 죽이기」와 「고향 否定」을 감행했다.

그 血緣과 地緣 네트워크의 파괴 없는 한국인들의 近代化 실험은 과연 21세기에도 유효할 것인가
黑田勝弘 일본 산케이(産經) 신문 서울 지국장

한국인과 일본인의 同異感

 필자는 1986년 출판한 「한국인의 발상」이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한국인은 동양의 이탈리아인이다」라는 假說(가설)을 소개한 바가 있다.
 
  한국 사람도 이탈리아 사람도 大陸(대륙)에 매달린 半島(반도)에 살고 있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말이 많고, 노래나 춤을 좋아하고, 감정기복이 심하고, 인정이 많고, 가족이나 친척·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국가나 정부는 믿지 않으며, 식욕이 왕성해 요리는 소박하나 양은 많고, 낙천적이며, 해외이민이 많고, 해외에서 스포츠, 예능, 갱 세계에서 활약을 하고 있으며, 남자는 여성에 대해 적극적이며… 등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것은 문화인류학적으로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인이 밖에서 보고 느낀 印象論的(인상론적) 이야기이다.
 
  필자가 한국인 이야기에 이탈리아 사람을 인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당시 일본 사회에 있어서 한국이나 한국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어둡고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꿔보자는 생각이었다.
 
  밝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인과 닮았다고 소개함으로써 일본인의 한국·한국인觀(관)도 밝아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필자의 이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또 다른 책에서는 일본인에 있어서 한국·한국인은 「닮은 듯하지만 닮지 않았으며, 그러나 닮지 않은 듯하면서도 닮은 존재」라고 쓴 적도 있다. 또는 「同異感(동이감)」이라는 단어를 인용해, 일본인에게 있어서 한국인은 「同異感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외국인」이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이 「재미」 때문에 필자는 20년간, 한국·한국인과 사귀어 왔지만 아직 싫증나지 않는다.
 
 
  近代化·西洋化·資本主義化의 1백년
 
 
  마르크스는 19세기 중반에 「공산주의라는 妖怪(요괴)가 배회하고 있다」고 썼는데,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 세계에는 「시장경제」라는 妖怪가 배회하고 있다. 한국은 IMF를 계기로 이 「妖怪」에 대해 스스로 「민족주의 시대는 끝났다」(金大中 대통령)고 선언함과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대내외에 선명히 하고 국제화와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가 흥미진진하다.
 
  한국도 일본도 20세기 1백년은 근대화의 시대였다. 近代化(근대화)란 西洋化(서양화)이며 資本主義化(자본주의화)이기도 하다. 서양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살아남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西洋化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 자신」이란, 전통이며, 문화이며 그리고 민족적 正體性(정체성)이기도 하다.
 
  우리 非西歐(비서구) 사회는 1백년 동안, 자기를 지키기 위해 自己否定(자기부정)이라는 모순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좋다. 이것은 슬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지금은 또 「시장경제」라는 성난 파도 속에서, 非西歐 사회의 우리들은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경제」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에 가장 저항한 것은 「共同體(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란 것은 「마을」이라 해도 좋고, 또는 「마을」에 상징되는 「전통사회」라 해도 좋다.
 
  따라서 左翼(좌익) 또는 공산주의자, 그리고 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지식인들이 소위 「共同體主義者(공동체주의자)」로 변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 1960∼70년대에 등장한 「新左翼(신좌익)」의 대부분이 나중에 에콜로지스트(生態主義者·생태주의자)나 환경론자로 변신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한국에서 시인인 金芝河(김지하)씨가 근래 「밥」주의나 「생명」주의 그리고 「律呂(율려)」주의로 변신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자본주의(시장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저항의 길을 모색하면서 결국 「공동체」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여담이지만 「공동체(또는 전통)」란 右翼思想(우익사상)의 근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은 左翼만의 몫은 아니다. 사상적으로는 右翼이야말로 원래는 反資本主義(반자본주의)라는 것이다. 金芝河씨는 한국 右翼사상의 핵심을 모색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면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역시 近代化(西洋化 또는 資本主義化) 속에서의 「近代와 傳統」의 갈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한국생활 경험은 약 20년으로, 그 개인적인 체험과 소감으로 이 문제를 생각하고자 한다.
 
 
  일본 드라마 「獅子의 시대」가 주는 의미
 
 
  필자는 서울특파원으로서는 처음으로 1980년 9월에 한국에 부임했다. 全斗煥(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로, 이 부임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全斗煥 정권 성립과정에는 光州사태가 있었는데 1980년 5월 이후 광주사태 관련 보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일본계의 거의 모든 특파원이 서울에서 추방되어 支局(지국)이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난 직후 일부 일본 특파원의 입국이 허가되었다. 필자의 서울 부임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은 10·26 사건을 발단으로 한 격동기였다. 12·12에 이어 다음해인 1980년에는 政治解禁(정치해금)과 「서울의 봄」, 그리고 정치적 과열 속에서 지역적인 反政府(반정부) 무장봉기(현재는 民主化 抗爭이라고 함)인 「광주사태」를 거쳐, 全斗煥 정권이 출범한 것이다.
 
  서울 부임 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金大中씨 등 야당, 反정부 세력에 대한 군사재판이 있었다. 아직 계엄령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관련기사는 서울시청에 있었던 계엄사령부 보도검열반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은 수습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런데 1980년이라는 해에는, 일본 NHK 텔레비전의 대하드라마 「獅子(사자)의 시대」라는 작품이 있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대단히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드라마는 「일본에 있어서 근대화란 무엇인가」라는 테마를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국에 와서 정치적 격동을 눈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한국의 근대화」라는 것을 일본과 비교하면서 많이 생각했다. 이 관심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필자의 20년 가까운 한국 및 한국인을 보는 시각 속에서, 드라마 「獅子의 시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 드라마는 메이지(明治)유신이라는 격동의 혁명시대를 배경으로 이름 없는 靑春群像(청춘군상)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에는 「일본에 있어서 근대화란 地緣(지연)과 血緣(혈연)의 극복, 또는 地緣과 血緣으로부터의 결별이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 「지연과 혈연」의 문제야말로 필자의 한국 및 한국인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지금까지 관심을 끌어내는 키워드의 하나이다.
 
 
  地緣과 血緣으로부터의 결별
 
 
  「지연과 혈연」은 원래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자연적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전통사회의 핵심요소라 해도 좋다. 이 「지연과 혈연」이 일본과 한국에서 소위 근대화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가가 필자의 관심 대상이다.
 
  드라마 「獅子의 시대」로 돌아가면, 드라마는 일본 사람이 메이지 근대화 혁명을 통해 「地緣」이라는 틀을 넘어 「일본」이라는 국가의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의 무대를 革命派(혁명파)의 승자인 「사쓰마」 지역과 守舊派인 敗者(패자) 「아이즈」 지역으로 설정하고, 사쓰마 남자와 아이즈 여자와의 사랑의 갈등이 하나의 줄거리로 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地緣을 기반으로 한 「恩(은수·은혜와 원수)」의 벽을 넘어 연결된다. 남녀의 사랑이 地緣의 틀을 넘어, 개인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남녀가 地緣的인 전통적 인간관계의 틀을 넘어, 개인으로서 일단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이 되고, 그 위에 개인과 개인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모색하는 시대, 즉 이것이 일본인에게 있어서 近代化의 의미였다는 것이다.
 
  드라마에는 또 하나 「西南戰爭(서남전쟁)」이라는 무대가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아시다시피 메이지 초기의 內亂內戰(내란내전)이었는데 혁명정부를 만든 사쓰마軍의 고향에서 일어난 反정부 내란이라는 역설 때문에 극적인 내용을 가진다.
 
  드라마에서는 사쓰마 출신의 주인공이 고향의 무장반란에 대해 정부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선다. 그런데 반란군에는 아버지가 있어 정부군과 대치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반란군과 정부군으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아들은 고뇌 끝에 新生(신생) 메이지 정부 즉, 근대 일본국가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다.
 
  이것은 地緣否定(지연부정)이며, 血緣否定이고 혈연으로부터의 訣別(결별)을 말하고 있다. 즉 「일본의 근대화란 아버지를 죽이면서 실현된 것이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필자는 1980년 서울 부임에 앞서 몇 차례에 걸친 한국 경험이 있었다. 1978년∼79년에는 어학연수를 하였는데 본격적인 한국 체험은 상주특파원이 된 1980년부터이다.
 
  유학생활 초기에 느낀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해 인상적인 것 중에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내용이었다.
 
  사람들의 일상대화에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의 血緣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정보이다. 즉 한국인들의 일상대화에서는 부모, 형제, 자매, 친척 등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화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血緣 네트워크는 부모·형제에 그치지 않고 親家(친가) 쪽, 外家(외가) 쪽으로 넓어진다. 자신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걸친 정보, 그리고 자신이 제3자가 아니라 직접 관계하는 직접 정보가 화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놀라운 血緣 네트워크
 
 
  血緣의 폭이 넓은 만큼 화제는 끝이 없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血緣 네트워크 속에서 누군가가 생일이다, 명절이다 그리고 제사다 해서 시종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한다. 만나거나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혈연정보가 많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친구나 知人(지인)과의 대화에서 화제로 꺼내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과 알게 되면 모르는 사이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들의 친척, 혈연관계에 상세해진다. 마치 자신도 그 네트워크에 포함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혈연정보는 자신이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1차 정보이다. 이에 반해서 자신과 직접 관계없는 他人(타인)의 동정에 걸린 정보란 것은 3차 정보 또는 제3자 정보다. 예를 들면 탤런트 등 예능정보라든지 스포츠정보, 정치정보, 국제정보 등 모두가 제3자 정보에 속한다.
 
  일본인에 있어서 화젯거리라는 것은 본인과는 직접 관계없는 제3자 정보가 많다. 특히 부모, 형제, 자매를 비롯해 血緣 네트워크에 관련하는 정보는 극히 적다. 우리 일본인은 他人과의 대화 속에서 부모나 형제자매를 비롯해 혈연에 관계되는 화제를 꺼내는 것을 꺼린다. 때로는 창피하다고 생각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집안 일을 他人에게 공개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실례라는 것이다. 「內(내)」는 「私(사)」이기 때문에 「私」적인 관계가 아닌 他人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私」는 피해야 한다는 人間關係觀(인간관계관) 즉, 價値觀(가치관)이다. 일종의 公과 私의 구별의식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일본인인 필자에 있어서 血緣정보라는 직접정보가 일상대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신선하고 놀라웠다.
 
  바꿔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아직도 전통사회에 살고 있구나」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을 때, 한국 사회의 근대화 상황을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그리움, 부러움, 그리고 반드시 부정적이라 할 수 없는 묘한 感慨(감개)를 느꼈다.
 
 
  公私 혼동의 人脈社會
 
 
  그러면 이 한국인의 血緣 네트워크에 관련되는 일상생활 풍경은 지난 20년간 얼마나 변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이 20년간에 상당히 변화했다. 예를 들면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진행되고, 언론자유화도 실현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성장이 두드러지고, 대중소비시대가 도래했다. 패스트푸드나 편의점도 정착했으며, 생활방식도 전통가옥에서 고층아파트로 크게 변화해 가고 있으며 마이카 시대가 되었다.
 
  또 프로야구, 프로농구 등 여러 가지 프로 스포츠가 출범했고 정보매체인 텔레비전은 컬러화되었으며, TV채널이나 신문·잡지도 그 종류가 늘어나 다양해졌다. 「정보화 사회」라는 단어도 일반화되었다.
 
  즉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간 틀림없이 다양화되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다양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인 필자에게는 한국인의 血緣 네트워크에 관한 전통적인 풍경에는 이렇다 할 변화를 느끼지 않는다.
 
  한국인의 일상대화에 있어서 血緣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즉 한국인은 여전히 「血緣의 보호막」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따뜻하게 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드라마 「獅子의 시대」가 말하는 「일본의 근대화는 아버지 죽이기 덕분이다」라는 메시지와는 상당히 다른 풍경이다.
 
  우리 일본인은 근대화를 위해서는 부모까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으며, 부모 죽이기, 즉 血緣과 전통사회와의 결별에 노력해 왔다.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현재, 20세기 말 일본 사회의 모습이다. 일본은 非서구사회로는 거의 유일하게 서양 문명사회를 실현시켰지만 그것은 부모 죽이기에 의해 일궈낸 代價(대가)였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전통사회의 핵심인 血緣 네트워크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이것에는 당연히 「미숙한 근대화」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비롯해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의 대부분은 근대화의 부족함에 기인하고 있다. 조직의 논리와 윤리가 아닌 血緣을 핵으로 하는 公私(공사) 혼동의 人脈社會(인맥사회)가 부정부패의 근원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金泳三 전 대통령은 아들의 권력전횡을 봐준 탓에 정치적 실패를 불렀고, 金大中 대통령은, 지금 꿀에 떼지어 모여드는 개미처럼 국회의원이 된 장남에게 떼지어 모여드는 사람을 배제하는 일에 머리가 아프다. 알다시피 北에서도 혈연에 의한 세습권력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혈연의 보호막」은 따뜻해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안심시킨다. 혈연의 네트워크가 있는 한 한국인은 안심한다.
 
  학생이 데모로 화염병을 던져 구속되면, 어머니는 경찰서 현관에 가서 『아들을 돌려달라!』고 부르짖는다. 한국에 있어서 「어머니의 연구」는 별도로 아주 흥미 깊은 일이지만, 어머니와 자식의 연결은 한국에서는 절대적이고 法을 초월한다. 母子(모자)의 정에는 법률도 개입할 수 없다.
 
  그 결과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은 곤란을 겪는다. 한국인 남편은 어머니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 부인은 『당신은 누구와 결혼한 거예요!』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은 영원히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한국 사회는 IMF 체제 아래 경제난국을 경험했다. 그러나 失業시대라는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에게는 그 심각함이 그다지 실감되어 전해오지 않았다.
 
  여기에는 血緣 네트워크로 커버되는 면이 상당히 있는 듯하다. 혈연에 의한 相互扶助(상호부조), 즉 곤란할 때는 一宿(일숙) 一食(일식)적으로 서로 돌봐주는 기능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유효한 것이다. 失業대책이나 失業보험 등 복지행정이라는 근대화의 불충분함을 전통적인 혈연 네트워크가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血緣 네트워크라는 전통사회가 무너졌기 때문에 복지행정에 의해 高費用(고비용) 高負擔(고부담)의 사회가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IMF 쇼크가 혈연사회 덕에 상당히 완화된 것처럼 보인다.
 
  1980년과 드라마 「獅子의 시대」 이야기로 돌아가자. 당시 필자는 드라마의 인상도 있고 해서 광주사태와 일본의 「西南전쟁」을 비교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 비교는 광주사태가 한국 남서부의 전라남도를 무대로 한 것으로, 「사쓰마」를 무대로 한 西南전쟁과 위치와 방향이 비슷하다는 것에서 생각해 냈다.
 
 
  「부모 죽이기」와 「고향 否定」이 없는 한국의 近代化
 
 
  광주사태도 西南전쟁과 마찬가지로 지역통합 또는 국민통합을 향한 국가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거치는 하나의 고통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西南전쟁과 광주사태의 비교를 지역문제로 생각할 때, 극히 흥미 깊은 對照(대조)를 알아냈다.
 
  西南전쟁은 중앙에서 권력을 장악한 사쓰마의 內部반란으로 시작했다. 권력내부의 갈등, 분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자세한 원인에 대해서는 생략하지만, 중앙권력에의 반란은 최후까지 「反」으로 남아 결국 권력을 획득하는 일은 없었다.
 
  이것에 비해 光州사태는 권력에서 소외당한 지역의 무장봉기이다. 거기에는 고향이 같은 사람들에 의한 내부갈등은 없다. 경상도 출신자를 중심으로 한 역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전라도 지역의 중앙권력에 대한 봉기이다. 사건 당시,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해 현지에서 퍼진 유언비어로 『경상도(계엄군)가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는 말은 상징적이다.
 
  光州사태의 배경에는 전라도 차별을 핵심으로 한 지역대립이라는 지역문제가 있었던 것에 비해 일본의 西南전쟁에는 지역차별이나 지역대립 문제는 없었다. 일본의 경우는 같은 고향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러 온 것이다.
 
  일본의 근대사는 근대국가 창설을 위해 고향도 否定(부정)해야만 했다. 필자의 고향은 사쓰마로, 사쓰마 역사에 대해 다소 알고 있다. 사쓰마는 그후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낙오지역이 되었다. 일본 근대화는 부모를 죽이고 자신의 고향을 부정하는 것으로 성립했다. 일본인은 그것이 근대화라고 생각해 왔다. 이와 같은 근대화는 한없이 슬프다.
 
  한국은 어떤가. 광주사태의 결과 또는 광주사태에도 불구하고 알다시피 金大中 대통령이 탄생하고 전라도가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金大中 정권 하에서 전라도 출신자의 사회적 진출이 두드러졌다.
 
  이 사정은 권력에서 쫓겨난 경상도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경상도 쪽이 反정부로 자리잡을 차례다. 이래서는 지역대립은 해소되지 않는다. 金大中 정권이 출범했다 해서 지역문제 해결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정치는 여전히 지역문제를 빼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져있다.
 
  血緣 네트워크도 따뜻하고 기분 좋고, 고향의 네트워크도 따뜻해 기분 좋다. 한국에서는 부모도 죽이지 않고 고향도 거부하지 않고 근대 산업사회화가 진행하고 있다. 「부모 죽이기」와 「고향 부정」이 상징하는 일본 근대화가 하나의 실험이었던 것처럼 이것도 아직 하나의 실험인 것이다. 한국은 이제부터 부모 죽이기와 고향부정을 해 갈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다른 근대화·현대화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월간조선 200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