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여기에서는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의 正體(정체)에 절실한 조명이 요구되는 쪽으로 시각을
좁혀 각광을 비쳐볼까 한다. 먼저 同一性(동일성·Identities)에 대한 설명이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 사람들이 수천년 더불어 살아온 지역의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해먹고 살아온 생업이 다르며,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가 다르고, 믿는 신앙과
종교, 지키는 윤리와 도덕,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다르는 등 같다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건 속에서 인간은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
나라 사람에게만 있거나, 다른 나라 사람에게 있더라도 그 나라 사람에게 유별나게 강한 자질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그 나라 사람에게 특유한
자질을 그 나라 사람의 同一性이라 한다. 바로 韓國人(한국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한국인의 同一性이 뭣이냐고 묻는 것이
되며, 급작스레 좁아져 가는 지구촌에서 그 自畵像(자화상)의 인식 없이 살아날 길이 막막한 그런 同一性들이 돌출되고 있다.
놀라운 한국인의 손재간 그 한국인의 육체적 동일성 가운데 하나로 長掌筋(장장근)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손목을 앞으로 굽히면 손바닥과 접합부위인 손목을 만지면 딱딱한 연골 같은 것이 잡힐 것이다. 이것이 손가락과 손바닥의
才幹(재간)을 관장하는 근육선인 長掌筋이다. 이 長掌筋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발달한 것이 한국인이라 한다. 西洋 사람은 1백명에 30인꼴로
퇴화하여 흐물흐물하다던데 한국 사람으로 서양 사람만큼 퇴화한 사람은 1백명에 3인꼴이라 한다. 長掌筋이 발달할수록 손재간이 좋아지고 퇴화할수록
나빠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서양 사람은 다 큰 성인이 돼도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이나 발칸문제 등 국제분쟁이 일어났을 때마다 신문 만화에 서양사람이 젓가락질하는 것으로 해결의 어려움을 나타내곤 했다. 한데 한국
사람은 다섯 살만 돼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젓가락질로 콩자반을 집어먹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다. 또한 돌멩이로 공기놀이를 할 수 있는 것은 한국
계집아이뿐이라는 것도 상식이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젓가락질이나 공기놀이를 한국 아이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할 수 있게 하는 손의
생리구조, 곧 長掌筋이 발달돼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 長掌筋 발달이라는 同一性이 현재 한국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 본다. 현재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겨루는 경기종목들은 거의가 유럽에서 탄생되어 유럽 기후풍토에
적응하고 유럽 사람들의 체격 체질 체력에 알맞게끔 된 것으로, 여타 지역, 여타 인종, 여타 국민들에게는 부적한 反(반)국제적 불평등 종목들인
데 예외가 없다. 이를테면 서양 사람은 뛰지 않고도 덩크슛을 하는 농구에 있어, 배내힘까지 다 내어 뛰어도 그들 어깨도
못미치는 한국인과 동등한 규격으로 겨룬다는 것은 모순이요 만부당한 일이다. 이런 불평등 하에서 체격 체질 체력이 열세인 우리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주장은 합리적이다. 한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 아가씨들이
금메달을 따오는데 정신이 없었을 지경이요, 1980년대 들어서 사나이들도 금메달을 심심찮게 따들였다. 그리하여 1백50여개국이 겨루는 올림픽에서
한국은 10위 안에 드는 데 자리를 굳혔다. 國力(국력)이나 國勢(국세)로 보아도 그렇고 또 체격 체력 체질로 보아도 거의 불가능한 업적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결코 우연일 수는 없는 것이요, 그러할 수 있는 필연이 內在(내재)돼 있으며 그 난제를 同一性이 풀어준다.
한국인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스포츠를 손을 주로 쓰는 스포츠냐, 발을 주로 쓰는
스포츠냐로 대별해 볼 때, 한국 선수들이 따온 금메달 종목은 거의 예외 없이 손을 주로 쓰는 종목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구, 배구,
탁구, 핸드볼, 하키가 그렇고 궁도, 사격, 권투, 레슬링이 그렇다. 유도도 손의 작용이 발보다 웃돈다고 들었다. 반면에
발을 주로 쓰는 종목은 그야말로 足脫不及(족탈불급)이다. 발을 주로 쓰는 육상경기 종목에서 마라톤을 제외하고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오리라고
기대 거는 종목은 어느 하나도 없으며,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이지만 우리 축구가 우승하리라고 기대 거는 삼척동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의 체질구조의 동일성인 長掌筋 발달과 손을 주로 쓰는 스포츠의 우세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 동일성의 후광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해 왔다. 수출하는 한국 제품이 조악하다는 것은 상식이 돼 있다. 그래서 수출할 때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낙인을 찍지 않을 조건으로 수출계약을 맺는 치욕을 감수해 오기까지 했다. 한데 그렇지 않은 종목이 있다. 바로
근년의 한국경제를 지탱해 온 대종이랄 반도체가 그렇다. 세계 제일의 수출국이요, 質(질)의 품평에 있어도 세계 제일이다. 왜 반도체 종목만은
조악하다는 한국 제품의 고정 인식에서 제외됐을까. 또 있다. 5년 후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전자분야도 그렇다. 그밖의 정밀, 금형 등 미세작업이 필요한 분야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인식은 뛰어나다. 그렇다면 반도체, 전자,
미세산업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그 의문이 풀릴 것인데, 모두가 정밀작업이라는 공통분모가 나온다. 정밀 작업에는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되며 바로
한국인의 長掌筋 발달이라는 동일성과 무관하지 않음이 자명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에게는 딴 나라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동일성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세상은 지금 「라운드」라는 평등이념을 표방한 강대국의 경제논리에 약소국이 종속되는
經濟帝國主義(경제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다. 장바닥에서 하루일 마친 지게꾼이 사 마시는 소주稅(세) 하나 우리나라에서 정할 수 없고, 쌀도
외국쌀을 사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농사가 斜陽(사양)에 접어들 비운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경쟁력을 키우는 일뿐이라 했다. 경쟁력 提高(제고)는 논리상의 당위성일 뿐이다. 각
분야에서 선점한 선진국들이 그 엄청난 자본과 기술과 두뇌와 체험과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데 그 모든 분야에서 열악한 한국이 경쟁에 뛰어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라운드라는 경제 파도에서 살아날 길을 달리 모색해야 한다. 바로 외국인들의 경쟁력이
약한 한국인의 동일성을 찾아 그 분야를 앞세워 매진하는 일이다. 長掌筋 발달이라는 동일성으로 정밀 미세분야를 우리가 석권하듯이 그밖의 많은
동일성 산업을 개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발전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은 모험과 위험이 도사린 벤처산업보다,
국제적으로 보아 우리에게 경쟁력이 강한 동일성 산업으로 틔었다고 보는 것이다. 술마시기와 한국인의 結果意識
이상이 시대적 전환기에 뜻을 두어 조명해 보는 육체적 한국인이라면, 스스로 개조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소외당하게 돼 있는 정신적 한국인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한국인에게 눈깔사탕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다고 가정하자. 입에 넣어 몇번은 굴릴 것이다. 하지만 좀 이르건 늦건 간에 와지끈 와지끈 깨물어 먹지 끝까지 녹여 먹는 한국인은
하나도 없다. 서서히 우러나는 甘味(감미), 곧 과정을 맛보려 않고 그 모두가 빨리 먹어치우는 결과를 서둘러 얻으려 든다. 시골 한길이 나 있는
인근 보리밭치고 지름길 나 있지 않는 밭이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외국인이 하나 둘이 아니다. 과정일랑 가급적 조금 밟고 결과를 빨리 얻으려는
의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우리 한국인이다. 이를 結果意識(결과의식)이 강하다 하고,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부여를 하고 중요시하는 의식을
過程意識(과정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국제화가 진행되면서 외국인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밀도 있게 지적받는 한국인의 자질이요, 현재 한국에서
야기되고 있는 각양각색의 부조리와 대형사고도 바로 結果意識에 귀결된다. 우리 한국 사람이 즐겨 마시는 폭탄주도 결과의식의
발명품이랄 수 있다. 세상에서 단위시간당 알콜 퍼붓는 농도는 한국 사람을 따라갈 어떤 다른 나라도 없다. 술자리의 한국 사람들은 주거니 받거니
30∼40분이면 머리가 돌아 잠재된 감정을 노출, 서로 싸우고 상 엎길 시작하고, 마셨다 하면 웩웩 토하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돼 있다. 미국
사람들은 위스키 한두 잔 놓고 한두 시간 마시는 것이 상식인 것과 비교함직하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술마시고
토하는 것을 한결같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나도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많이 마시면 토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대꾸하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라며 「꺼내 놓을 것을 왜 들여넣느냐」고 묻게 마련이다. 한국인은 무슨 행동이건 과정을 단축하고 결과를 빨리 얻으려는 결과의식이
작동하기에, 술을 마시면서도 그 결과 곧 빨리 취하려 들고 그러려다 보니 짧은 시간에 많은 술을 유입시켜 토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게 토할
만큼 단시간에 많은 양을 유입시키고도 그것도 느리게 취한다 하여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한국인이다. 不治의
重病, 대강대강·빨리빨리 의식 結果意識은 한국인의 소비생활도 지배한다. 결과의식은 결과를 추구하고 결과는 항상
이전에 없던 새 것이다. 새 것이기에 한국인의 소비성향이 새 것 좋아하는 新品(신품)지향이다. 과정의식이 강한 나라의 사람들은 과정에 의미부여를
하고, 오래 쓰고 많이 쓴 것일수록 값이 나가고 좋아하기에 耐久(내구)지향이다. 영국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아간 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사회자의 말에 숙연해졌던 생각이 난다. 『지금 신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는 신부의 7대조 할머니가 입기 시작한 것으로 그 후손들
중 48번째로 오늘의 신부가 영광을 누리게 됐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보다 먼 조상이 입기 시작하여 보다 많은 후손이 입은 웨딩드레스일수록
행복을 초래하는 것으로 안다. 한국에서는 언니가 입었던 것을 입으라고 했다가는 봉변당하기 일쑤다. 평생 두 번 시집가는 것도 아닌데 왜 남 입던
낡은 것을 입느냐는 반감이 자연스럽고 또 일리를 인정 받기 때문이다. 건국 후 결혼한 한국의 모든 신부가 한 벌씩의
웨딩드레스 新品을 맞춰 입었다면 현재 時價(시가)로 계산하여 지금 우리 한국이 IMF에 빚지고 있는 부채총액을 웃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뼈아프게 겪고 있는 이 경제공황도 따지고 보면 한국인의 결과주의 소비성향이 共謀(공모)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각종
건축이나 공사에서도 결과지향 과정소홀이 지배적이다. 유럽의 공공건물이나 寺院(사원)들은 보통 2백∼3백년이 걸려 짓는 게 상식이다. 지어가면서
쓰고 쓰면서 지어나가지 한국에서처럼 빨리 다 지어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짓다가 돈이 떨어지면 돈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짓고 전쟁이 일어나면
끝날 때를 기다렸다 짓기 때문이다. 빨리 짓고자 과정을 날리거나 속이거나 대강대강 한다는 의식이 들어갈 틈이 없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기초지반의 자연침전이 덜 됐더라도, 또 돈이 부족하면 시멘트 함량을 속이고 철근 다섯 개 넣을 것을 세 개만 넣고서라도 빨리
결과를 얻으려 든다. 年前(연전) 한 텔레비전의 카메라 고발에서 준공한 지 10여년이 넘은 지방의 콘크리트 다리의 부실이 방영되었는데, 다리
양편에 설치하게 마련인 철물 난간을 강력 접착제인 본드로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여기저기 무작위로 난간을 잡아올리니 뜯겨 올라갔다. 결과주의도
이 정도라면 不治(불치)의 重病(중병)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한국인의 결과주의의 개연성이 투영되어 겨우 건설한 지 10여년밖에 안되는 다리가
댕강 끊어지고 고층 백화점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폭삭 주저앉는 것이다. 세상 사는 것도 결과주의로 산다.
예전에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던 아들놈이 문 열고 들어오면서 『아빠 이런 것 알지 몰라』 하던 적이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이 뭣이냐고
묻자 목청을 낮추며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간단하게 공부하는 방법 없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혈압이
올라 머리통 쥐어박으며 내쫓아 버렸다. 내쫓고 생각하니 이 세상의 초중고등학교 학생뿐 아니라 대학생, 석사학위, 박사학위
밟는 모든 학도들 중에 가급적 힘드는 과정일랑 조금만 밟거나 단축하여 쉽고 간단히 진급하고 졸업하고 학위 받길 원하고 추구하지 않는 한국인이
있는가 自問(자문)했을 때 그 대꾸는 부정적이었다. 학생뿐만이 아니다. 공무원이나 각급 단체, 업체에 근무하는 모든
한국인도 가급적 어렵고 힘드는 과정일랑 조금만 밟고 과장, 부장, 이사로 진급되길 바라고 또 꾸준히 모색한다. 내가 부장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이
싫어하고 기피하는 과정을 겪어야 부장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서는 아무도 싫어하는 자리를 원하는 한국 사람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결과주의가 한국 조직사회를 지배하고 있기에 지름길을 모색하게 되고 그 지름길에 부정부패가 기생하게 돼 있다. 한국
사회의 조직에 있어 부조리의 온상은 결과주의라 해도 大過(대과)가 없으며, 그 때문에 어떤 충격적인 사건 사고가 일어나도 며칠 지나면 원상복구가
되고 정화를 위한 어떤 강경책도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과정의식이 강한 나라 사람들은 세상 사는 것을
「사다리를 가로놓고 산다」고 비유한다. 제가 선택한 사다리 구멍을 빠져 나가는데, 남이야 빨리 빠져 나가건 말건 또 남이야 노래를 부르며 빠져
나가건 말건 아랑곳이 없다. 빠르건 늦건 내 나름대로요, 빠져 나가다가 허리를 걸치고 한숨 자건 말건 남에게 아랑곳없이 내 나름대로 사는 것이
과정주의다. 한데 결과주의는 그 사다리를 세로로 세워놓고 서로 앞서서 빨리 오르려 평생을 경쟁한다. 위에 먼저 오르는 자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자의 머리를 발로 눌러 올라오지 못하게 하며 고달프게 살아간다. 그렇게 빨리 얻으려는 결과는 궁극적으로
죽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코리안 애플박스」 홍콩 무역시장에
「코리안 애플박스」라는 속어가 있다. 견본이나 선전했을 때와 실물 사이에 차이가 있는 상품이거나, 겉만 반지르르하고 속이 부실하다든가 할 때
한국 사과상자, 곧 코리안 애플박스라 한다. 이를테면 견본에는 나사를 다섯 개 박는다고 해 놓고 실물에는 세 개밖에 박지 않았다든지 할 때
그것은 코리안 애플박스다. 지금 한국 어느 도시 어느 가게에서 무작위로 사과 한 상자를 사다가 뚜껑을 뜯어봤다고 하자. 맨
위칸에는 아이들 머리통만한 사과들에 그나마도 반질반질 닦여 윤이 나게 해 놓았을 것이다. 그 윗사과를 한 벌 거둬 다음 칸을 보면 아이들
머리통만한 사과는 하나도 없고 그보다 작은 놈으로 채웠다. 다시 그 다음 칸에는 모양새가 고르지 못하고 비틀배틀한 놈들로, 다시 그 다음 칸에는
약간씩 벌레 먹은 놈이 끼인 채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처음 한국 사과궤짝을 대하는 외국 상인이면 그 모두가 아이들
머리통만할 것으로 믿고 산다. 하지만 두 번 다시 한국 사과를 살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코리안 애플式(식)의 결과주의 상술로 단 한번은 장사가
되지만 지속적으로 장사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결과의식에 찌든 한국인은 이처럼 신용이 탄생되는 과정에 미숙하기에 한 번만 해먹고
알거지가 되는, 세상에서 가장 미숙한 상술로 국제무대에 나섰다 해도 大過가 없다. 유태인의 생활 지혜를 엮은 탈무드에 보면, 장사를 하거들랑
13년 동안 번 돈을 호주머니에 챙기지 말고 신용에 깔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상으로 좁아져 가는 지구촌에서 별나게 두드러진
同一性 가운데 살길의 시야를 터주는 한국인의 장점 하나와, 개조하지 않으면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당하게 돼 있는 정신적 결점으로 한국인의 자화상을
그려 보았다. 벼농사와 한국인의 長掌筋 이제 왜 그런 육체적 정신적 유전질이
한국인에게 형성됐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한 국민의 동일성은 어느 한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합이유로 형성되는데, 이상과
같은 한국인의 유전질 형성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기후와 풍토에 알맞지 않은 벼농사를 지어온 것과 관련이 깊다. 벼는 일년
내내 더워야 되는 열대 아열대 작물이다. 한데 한국인은 한국에서 알맞은 계절은 여름밖에 없는 부적합한 풍토에서 벼농사를 주로 지어먹고 살아왔다.
계절에 쫓기다 보니 어느 시한 동안에 꼭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로 연속되고 허덕허덕 서둘러 그 일을 해놓지 못하면 減收(감수)나 失農(실농)을
가져온다. 벼농사에 알맞은 월남에서는 서너 번만 손을 쓰면 벼를 수확하는데, 한국에서는 속칭 여든여덟 번 손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 만큼
일이 많다. 그만큼 손을 많이 쓰다보니 長掌筋이 발달하고 또 시한에 쫓기길 수백 수천년 거듭하다 보니 결과를 빨리 얻어놓아야 안심·안정이 되는
결과의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한반도에 適性(적성)인 보리나 콩농사를 지어먹고 살면 될
것을 왜 굳이 기후 풍토에 알맞지 않은 벼농사를 짓느라 그런 고생을 거듭해 왔느냐 하는 의문이다. 한반도의 78%는 非생산적인 땅이다. 온통
老年期(노년기)에 속하는 산이기 때문이다. 이 좁은 땅에서 민족이 생존해내려면 가급적 단위면적당 영양이 많은 씨알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
한데 한반도 풍토에 適性인 보리와 不適性인 벼의 단위면적당 영양소출을 비교하면 벼가 보리보다 5배, 곡종에 따라 18배나
많이 소출된다. 그렇다면 그토록 시절에 쫓기고 시한에 쫓겨 그 많은 손을 필요로 하더라도 벼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고, 수백 수천년 알맞지 않은
풍토에서 벼농사를 짓다 보니 長掌筋이 발달하고 결과의식이 강해진 것이다.● (월간조선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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