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인문학이 죽으면 나라 망한다 - 한국 인문학의 위기

이강기 2015. 9. 26. 16:10

한국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이 죽으면 나라 망한다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상업주의 정신에 물들지 안는 사회의 비영리 분야 덕분이다. 만약 고급관리 군인 사법관 학자 종교지도자들이 이익추구 정신에 굴복한다면 그 사회는 붕괴되고 경제제도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프랑 스의 자유시장 옹호 경제학자 프랑수와 뻬루)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1998 년에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 간·원제 ‘Great Books’)라는 책이 있다. 데이빗 덴비라는 미국 영화평론가 겸 언론인이 쓴 책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지 30년만에 미 컬럼비아대학에 복학, 18세 새내기 대학생들과 함께 ‘인문학’과 ‘문명론’ 두 과목을 1년 동안 수강한 뒤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도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날에 읽었거나 이해했던 지식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지식 없는 정보, 원칙 없는 의견, 믿음 없는 본능만 있었다. 내가 위층 발코니에 앉아서 그저 먼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건물의 기초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진동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고대의 호메로스로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현대의 보부아르, 하버마스,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의 핵심 원전들을 강독하는 이 ‘교양강좌’ 두 개를, 나이 오십줄을 바라보는 저자는 왜 새삼 수강할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왜 인문학이 위기인가?

한국의 대학사회에 메아리없는 아우성이 퍼지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이해찬(李海瓚) 교육부’가 추진 중인 대학개혁안에 대해서 인문학계열 교수들이 내지르는 비명, 이른바 “교육부가 한국의 인문학을 다 죽이려 한다”는 절망의 목소리다.

기실 그 아우성은 최근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오랜 세월 대학사회에서 서서히 영역을 넓혀오던 ‘환부(患部)’에 교육부가 개혁안이라는 수술 메스를 대려 하자, 칼이 환부에 채 닿기도 전에 내지르는 비명이랄까? 대학교수들은 교육부의 개혁안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잘못된 수술계획에, 잘못된 칼을 쓰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아우성이 대학사회 바깥에까지 들리는 것 같지는 않다. ‘먹고 살기 바쁜’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인문학의 위기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금 당장은 나와 무관해 보이는 일들이 길게 보면 내 삶의 질(質)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되지는 않을까?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정신적 중심’을 지탱해줄 의지처를 도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지금 왜 인문학이 위기인가? 교육부 개혁안은 어디가 어떻게 잘못돼 있나? 교육부를 비난하는 인문학자들 자신은 지난 수십년간 상아탑 안에서 각자 자기 전공에 울타리를 높게 쳐놓고, 남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네만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안주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학문’이라는 인문학이 빈사지경을 헤매게 될 때,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치게 될 여파는 어떤 것일까?

‘호메로스와 테레비’라는 책을 쓴 데이빗 덴비는 개인적 차원에서 갖게 된 ‘중년의 위기’ 혹은 ‘자기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30년 전 대학생 시절에 들었던 인문학 강좌를 재수강했다. 개인 차원에서 이런 모색이 가능한 사회는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도 새로운 인문학적 모색이 가능한 사회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30년 전의 대학 강의실로 돌아간 그의 ‘용기’도 부럽지만, 그런 모색이 가능한 미국은 ‘행복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는 데이빗 덴비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전체 사회 차원에서 인문학적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한국 인문학자들의 자기평가다.

이 글은 기자가 작성한 ‘한국 인문학의 위기’ 설문에 대해서 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 계열에 몸담고 있는 대학교수 10여 명이 제시한 답변을 중심 축으로 구성됐다. 설문은 ▲ 최근 대학 개혁안과 관련한 대학 내부에서의 인문학 위기 ▲ 인문학 자체의 위기 ▲ 인문학 위기가 장기적으로 초래할 사회적 결과 등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돼 있으며, 내용의 성격상 한 항목에 관한 답변은 다른 항목과도 유기적으로 관련됨을 밝혀둔다.

 

 

대학에서의‘인문학 위기’
 

    즘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대학이 사회 진출을 위한 기능교육의 장으로 전락했다는 탄식도 높습니다. 오늘의 대학이 이렇게 된 데에는 대학교육의 문제 이전에 배금주의(拜金主義) 등 우리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요즘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현저하게 저하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대학생은 더 이상 지식인, 지성인이 아니다. 고향에 내려간 대학생이 동네 사람들의 선망 섞인 시선을 한몸에 받던 ‘그때 그 시절’은 빛바랜 흑백 슬라이드 속의 우화일 뿐, 요즘 대학생들은 형편없는 한자실력 때문에 신문도 못 읽는 ‘무식쟁이’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한국민의 열화와 같은 교육열은 지난 수십년 사이에 대학생 수를 승수(乘數)로 증폭시켰지만, 남은 것은 대학생이라는 껍데기를 쓴, 전체로서 하향평준화가 거듭된 ‘보통 인간의 군상’일 뿐이다. 왜 이렇게 됐는가.

“요즘 대학생들이 과거보다 낫다, 못하다고는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대학교육이 사회적 요구에 따라 실용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 학생들도 사회에 나가서 당장 쓸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추세다. 예전의 교양과목이 철학개론이나 한국사, 세계사 같은 것들이었다면 지금은 컴퓨터, 영어회화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대학생의 위상이 예전보다 떨어졌다는 점도 대학생의 질 저하와 관련된다. 예전에는 대학생이라면 엘리트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 또래가 대부분 대학생이고, 대학은 당연히 거쳐가는 과정처럼 돼버렸다. 이에 따라 스스로 장래 지도자로서 소양을 갖추겠다는 의식을 갖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하면, 지금 대학생의 의식수준은 예전의 고등학생 정도라고 본다. 또, 80년대에는 운동권 학생들이 대학생의 의식세계를 선도한 측면이 있었는데, 지금은 운동권 학생이라면 이상한 아이들, 특별한 아이들로 취급받는다. 이런 일들이 전반적인 인문학의 위기와 직결된다고 본다”(안병욱·가톨릭대·한국사)

 

 


왜곡된 우리 근현대사가 원죄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전반적으로 낮아진 것은 일차적으로 고등교육의 확대에 기인하는 현상이겠지만, 지금 ‘인문학의 위기’라고 지적되는 것처럼 인문교육의 약화도 한 가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인문교육의 약화는 왜 초래되는가? 단적으로 교육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인문학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컨대 책 한 권 더 읽은 것이 어떻게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성과로 측정될 것인가?

더욱이 이제 인문적 가치에 대한 신념마저도 점차 엷어지고 있다. 그 이유 역시 그런 가치를 계량화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착한 사람’의 가치,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측량하고 평가할 것인가?

이렇게 계량화가 어렵고, 그 본질적인 가치마저도 의심받는 상황이 벌어질 때, 그에 관련된 교육분야, 관련 학문분야가 약해지는 현실은 피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어제 오늘, 우리만의 현실이 아니라 T.S. 엘리어트가 자기 나라인 미국을 버리고, 유럽으로, 영국으로 망명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한형구·서울시립대·국문학)

“요즘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은 대학마다 편차가 큰 것 같다. 최근 모 대학에서는 인문사회과학부 700여명 중에서 단 한 명이 철학과를 지원했다는 보도를 읽었는데, 이런 일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아무튼 수요·공급의 맥락에서 봐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 낮은 것은 분명한데, 이는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대해 갖는 기본 시각, 나아가 정권이나 교육담당자들이 우리 사회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오늘의 인문학 위기를 우리 근대사의 성격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게 필요하다. 큰 틀에서 얘기하면, 우리 인문학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자생적인 전통을 잇는 데에 실패한 것은, 일단 개화기 이후에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학문의 일반적 발전 형식이 깨져 버린 게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본다. 이로써 우리의 인문적 전통은 근·현대 학문 사이의 유기적 소통이 단절된 상태가 돼 버렸다. 일제와 군정에 이어 미국 중심의 수입근대화가 계속된 상황에서 우리 본래의 인문적 전통은 배척의 대상, 전근대의 표상으로 치부됐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시대 이후 한국사회에는 성장지상주의라는 근대화 논리가 지배했다. 근대화의 성격 자체가 워낙 산업화 중심이었고, 그 와중에 인문학자들은 근대화에 관여하지 못한 채 소외돼왔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김영삼정권 때 우리가 그간의 민주화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적 성숙을 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문민정부가 세계화라는 신근대화 논리를 내세우면서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기회를 놓치면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완연히 상업주의로 돌아섰고, 이와 함께 세계화라는 두 가지 대세에 밀려 인문학자들은 제 역할을 찾을 수 없었다.

셋째, 냉전이 가져온 집체주의적 성격도 인문정신의 위기에 중요한 몫을 했다고 본다. 그동안 이데올로기적 분절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면, 이런 양극적 상황에서 다원성과 섬세함을 표방하는 인문학적인 사유가 성장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근·현대 역사와 구조가 빚어낸 원죄 같은 게 수입 근대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인문학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김영민·한일장신대·철학)

 

 

교육부 개혁이 인문학 죽인다

    근 교육부는 학부제, 연구중심 대학, 대학원 중심 대학 등 일련의 대학개혁을 추진하고 있고, 이는 ‘인문학 고사’ 위기와 관련해서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부의 대학개혁 방안 중 어떤 것이 가장 문제이며,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교육제도, 특히 고등교육제도의 개혁은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수단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서울대학교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과 (부)장들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으고 이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 21세기 무한 경쟁시대에는 첨단과학뿐만 아니라 이의 밑받침이 되는 기초 학문의 중요성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예측되며, 이에 따라 연구중심대학 지원계획에서 기초 학문의 위상도 같이 높아져야 하리라고 믿는다…”

 

지난 3월30일 서울대 인문·사회대 학과장들이 낸 의견서 중 일부분이다. 도대체 무엇이 점잖은 ‘교수님’들을 화나게 해서 이례적으로 집단행동에까지 나서게 됐을까?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하면 이렇다. 지난 3월10일 교육부는 ‘교육발전 5개년 계획(안)’을 발표했다. 오는 5월 중 최종안을 결정한다는 목표로 일단 여론을 떠보기 위한 발표였다. 대학개혁의 기본 방향은 우리 대학 가운데 적어도 몇몇 대학만이라도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해가겠다는 것과, 권역별로 우수대학을 중점 육성하고 이공계의 확충과 함께 교육환경을 개선해나간다는 것이었다.교육부는 대학원중심대학 육성에 950억원을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교육부의 안에 인문·사회계열에 대한 지원방안은 완전 배제돼 있었다. 연구비로 지원할 950억원도 정보기술, 생명기술, 기반기술, 자연과학기술 등 이공계열 대상이었던 것. 이런 사정과 함께 교육부가 서울대 정원을 2002년까지 30% 감축할 것을 요구한 것 등이 인문대와 사회대의 학과장 27명이 기자회견을 갖게 된 배경이 됐다. 또, 교육부가 그동안 대학에 학부제를 ‘강요’하면서 영문과 등 일부 학과를 제외한 대다수 인문학계열 학과들에 지원하는 학생 수가 격감하게 된 사정 등 ‘인문학을 배려하지 않는’ 교육정책에 대한 누적된 불만도 집단행동의 배경이 됐다.

“교육발전 5개년 계획(안)은 95년에 발표된 5·31 신교육개혁안과 대동소이하며, 오히려 대학이사회와 교무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은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우려를 낳고 있다.

우리 헌법에는 ‘대학자치이념’(31조 3항.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이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자율이란 미명 하에 대학을 다스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교육개혁 입안단계에서 대학교육 현장의 생생한 육성을 도외시한 채 여론수렴도 없이 교육개혁안이 제시됐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선, 대학원중심대학과 학부중심대학 이원화의 문제점은 대학 본연의 주된 기능인 교육과 연구기능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위해 1조원 이상의 예산과 금년도 실행예산 2000억원을 책정해놓았다고 하는데, 엄청난 국고 낭비에 비해 효과는 극히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현재 국내 어느 대학도 연구중심 대학원에 필요한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대학을 지정해서 운영할 게 아니라 지역 연구인력을 최대한 공동 활용하는 ‘지역거점 대학원’ 운영을 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안 된다

 

둘째, 국립대학교 특별회계법 제도는 국립대학의 예산(일반회계와 기성회계)을 일원화하고 표면상으론 대학 자율에 맡긴다는 취지이나, 국립대학의 예산규모가 학생들 등록금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특히 시설예산을 교육부가 배분함으로써 대학이 통제를 받게 될 것이 자명하다.

한편, 대학이사회와 교무위원회 설치조항은 ‘교수회’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89년 입법화했다가 폐기된 과거 교육법 117조의 ‘대학평의원회’를 부활시키려는 관료주의적 발상이라는 비난이 거세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세기에 대학 구성원의 새로운 각성과 각오가 요청되지만, 무엇보다 교육당국의 안이하고 구태의연한 정책과 발상에 일대 전환이 시급히 요청된다”(장성중·충북대·불문학)

“크게 보면 95년 5월31일 교개위가 개혁안을 내놓은 이래 한국의 대학과 교육현장이 크게 흔들려왔고, 이번에 교육부가 내놓은 개혁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95년 당시 개혁안의 골자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었다. 다시 말해 대학과 교육현장을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서 운영하자는 얘기다. 이게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지금 우리 교육이 당면한 문제는 일견 서구 교육계가 60년대에 겪었던 변화와 부분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학부제, 통합 학문,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등등의 얘기가 그렇다. 그런데 당시 서구에서의 변화는 아래로부터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일반 대중과 학생들이, 전통적 학문방식이 당시 지배체제를 온존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인식하고 이를 바꿔야 한다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 서구사회는 이런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커리큘럼 등 여러 가지가 개혁됐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겉으로는 당시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지만 기본적으로 위로부터의 개혁 요구에 의한 것이다. 즉 기존 지배체제가 시대변화에 맞춰 지배양식을 새롭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강내희·중앙대·영문학)

“지금 얘기되는 학부제란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고 학생이 스스로 자기 적성을 찾아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성을 찾아가게 하려면 그런 제도로는 안된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수록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는데,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없이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면 인기학과, 실용적인 전공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선택권이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 주는 것이지, 아무에게나 다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제도는 기초학문의 보호책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전문인력의 고급화에도 실패할 것이다. 즉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사회지도층을 키워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사법제도는 못 고치고, 의사들은 힘이 세서 손대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해놓고 교육개혁을 한다니까 나로서는 지금 돌아가고 있는 일들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유평근·서울대·불문학)

 

 

 

경제에 이어 교육에도 신자유주의?

    래 학계 일각에서는 “교육에도 시장논리가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반면에 인문학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일단 교수로 선임되면 평생이 보장되는 학계의 무사안일주의, 생산성 낮은 학문풍토 등 여러 문제점들을 타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입장이라고 이해되는 데 반해, 후자의 경우 인간의 심성을 닦는 기초학문으로서 인문학의 본질적 성격에서 볼 때 시장논리 도입은 불가하다는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런 논의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말씀해 주십시오. 양자에 대한 타협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우리 교육은 파시즘적 체제하에 있었다. 독재정부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주입식, 암기식으로 획일화하는 교육이었다. 이런 상황에 학문정책이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파시즘적 교육체제로부터 교육의 민주화를 이루기 전에 우리에게 닥쳐온 것이 IMF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은 창조성과 효율성을 명분으로 교육에도 시장경제의 원리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면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학문과 교육을 발전시키는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얼핏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우리에게 그렇게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것은 우리 교육의 특수성, 즉 교육의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던 파시즘적 경직성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곧 그 부정적 면모를 드러내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시장경제 원리를 교육에 강요하는 것이 분명한 한에 있어, 우선 당장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을 저지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으로부터 기초학문의 육성은 시작된다”(강치원·강원대·사학. 98.10.23. 학술 심포지엄 ‘21세기 대학교육과 인문학의 전망’ 발표 논문 ‘외국의 기초학문정책’ 중에서).

상당수 인문학자들은 최근 교육부가 추진중인 교육개혁안이 ‘신자유주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 전반이 신자유주의에 맥이 닿아 있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대학사회에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쟁논리, 시장논리를 도입하자는 주장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인문학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돈 세상, 즉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기 때문에 왔다. 지금처럼 돈이 숭상받고 시장원리가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방책을 써도 인문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이 살아 남으려면 시장원리로 지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정부와 공공기구를 통해서 보호해야 한다.

이번의 대학개혁 내용도 교육에 시장원리를 적용한다는 발상도 문제지만, 그 외에도 인간생활의 정신적인 부분을 간단한 행정조치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런 발상 자체가 인문과학이나 우리 사회 전반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문과학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인문과학 종사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돼 가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이지만, 돈을 잘 벌기 위해서, 경제나 사회가 좀더 능률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라도 인문과학은 전제조건이 된다. 제도나 사회기구, 정치기구가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그것을 현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아닌가. 결국 관건은 인간의 판단력이다.

이런 판단력을 키워주는 게 바로 인문과학적 수련이다. 인문과학적 수련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반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규칙을 적용하려 들 때, 그건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김우창·고려대·영문학)

 

 

 


하버드 법대와 서울대 법대의 차이

 

“시장경제 논리는 미국이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다양한 대학 3000여개 중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연구중심 대학은 120개 정도다. 그런데 이 대학들에서는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 영역의 중요성이 흔들려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미국의 대학사회에서 기초학문의 중요성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적 합의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우리가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즉 미국이 자기네들은 내부적으로 온전히 균형감각을 갖고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시장논리를 우리가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유평근)

“시장원리도 일부 도입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리 대학의 경우, 학과들이 평면적으로 발전해와서 규모도 다들 비슷비슷하고, 어떤 점에서는 필요 이상의 인력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요는 인문학, 기초과학을 잘 키워나가면서 여기서 배출되는 인력이 응용분야로 옮겨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은 MBA에 매년 900명, 법대는 매년 700명을 뽑는다. 이것만 해도 1600명인데, 하버드대학의 학부생 정원이 한 학년에 1600명이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그만큼 경쟁력 있는 인력을 많이 양성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이 강하다는 하버드 경영대에는 학부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대부분은 기초훈련이 잘 돼 있는 사람들, 즉 학부에서 역사학이나 철학 등 다양한 기초학문을 한 사람들이다.

이곳의 전략은 다양한 부문에서 전문적인 지도자를 양성해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체육과 출신이 하버드 경영대에 들어가서 스포츠 매니저가 된다. 연극영화과 출신은 연예인 매니저가 되고. 따라서 학부에서 어떤 전공을 했건 상관이 없다. 하버드 법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종교학과 학부에서 10명이 졸업했다면, 그중 종교학 대학원에는 1∼2명만 가면 된다. 나머지 8명은 경영대나 법대 같은 데로 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학부에서 반드시 실용적인 학문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2002년부터 OECD 국가들이 변호사·회계사·엔지니어·건축사 네 가지 분야를 개방하자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버드 법대 졸업생과 서울대 법대 졸업생들이 경쟁이 되겠는가?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사법고시 책만 달달 외운 우리 학생들과, 학부에서 인문학을 하고 졸업 후 직장경험도 약간 한 다음에 법대로 진학한 미국 학생들이 경쟁이 되겠는가 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법대에서 환경법을 하는 학생들은 학부에서 화학과를 졸업한 경우가 많고, 민법이나 가족법을 한다면 학부에서 역사학을 한 학생들이다. 기본 경험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경영대나 법대 학부를 과감하게 없애고, 지금의 학부 정원을 모두 대학원으로 넘겨야 한다”(김종서·서울대·종교학)

 

 

인문학 자체의 위기
 

    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몰락하고 세기말을 맞은 지금,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인문학계를 중심으로 기존 학문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그동안 우리 자신의 이론과 새 영역을 개발하기는커녕 외국이론을 도입하기에 급급했고, 그런 활동이나마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우리 인문학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론이 없는 현실은 무모하지만 현실이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 우리의 인문학이나 비평이론은 수입오퍼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구이론을 마구잡이로 수용해왔으나 그것이 한국의 현실을 밝히고 대안을 제공한 예는 드물다. 이것은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론을 수용한 점에도 있지만, 한국적 현실과 결부시켜 이론을 분석하고 대안을 세우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것이 현실의 토대에 서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우리는 현실과 관련시키는 학문을 ‘진보 또는 빨갱이’ 아니면 ‘저널적 속물주의’로 매도해왔다. 이것은 학문을 현실로부터 분리된 공허한 관념으로 전락시켰고, 지식인을 ‘대중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성자들’로 고립시켰다. 이는 학계와 더불어 언론계, 정치계의 지배층이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하여 취한 이데올로기적 공세이기도 하지만, 학자들 스스로 실증적, 공리공론적 한국적 학문탐구방식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답습했기 때문이다”(이도흠·국문학. 논문 ‘서구 문예비평 이론 수용의 功과 過’ 중에서).

우리 사회의 실상을 요즘 청소년들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비해 ‘신체지수’는 부쩍 좋아졌는데 ‘정신지수’는 예전 그대로인 모습이 꼭 닮았다는 것. 여기서 신체지수가 ‘경제’라면, 정신지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정신적 성장을 담당한 학문이 제 소임을 다 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비판의 진원지가 그동안 교육개혁을 주도했던 정책 쪽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른바 ‘한국 인문학의 식민성에 대한 비판’은, 비록 그 소리가 작기는 했지만, 기성 인문학계에서 부당하게 소외돼왔던 ‘인문학계 내부의 자기비판 집단’에서 주로 제기됐던 것임을 분명하게 환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이런 비판집단을 도외시한 가장 큰 책임은 인문학계의 기득권층이 져야 하겠지만, 정책 당국도 이런 인문학계 내부의 움직임에 철저하게 무관심했고 또 방조한 측면이 있다.

인문학, 그것도 한국 인문학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한국 인문학계의 고질적인 인적 충원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인문학, 즉 문학·철학·역사학의 기간구조는 ‘각 대학의 인문계 학과’라는 좁은 틀 안에서 운용돼왔다. 이 틀 안에서 ‘인문주의 이념에 부응하는 활동적 인간상’이 육성됐어야 하는데도, 이른바 인문학 후속세대는 경직된 학위수여 제도와 교수충원이라는 좁은 경로에 적합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아왔던 측면이 크다.

다시 말해 한국의 인문학 교육은 인문학적으로 자신감 있는 인적 자원을 육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인문학적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계적 수준의 학문적 성과가 없다는 정책당국의 이른바 논문중심주의적 위기진단이 얼마나 핵심을 빗나갔는가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부차적인 요인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인문학의 위축을 불러온 것으로 언론의 몰이해를 들 수 있다. 신문·방송은 인문학계의 동향을 단지 문화계 내지 학계의 한 움직임으로만 취급해왔다. 학문적 영웅이 (문화적 식민지 조성에 학계 못지 않게 악영향을 끼치는) 연예스타 못지 않게 대중의 주의를 끌려면 언론의 인문학적 각성이 절실하다고 본다”(홍윤기·동국대·철학)

 

 

 


20세기적 틀로 21세기를 맞는다

 

“학문은 두 단계로 발전한다. 첫 단계는 분화다. 분화를 통해서 전문화가 이뤄진다. 우리 학문은 지금까지 분화과정을 겪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다음 단계인 종합을 위한 예비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학문의 가지치기만 해왔을 뿐 그것을 종합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문의 스케일이 점점 작아졌고, 학문간 장벽이 높아졌고, 자기가 쓴 논문 이외 인접 학문에 대한 지식이 아주 협소해졌다. 학문이 나름의 생산성을 가지려면 종합이 돼야 한다. 종합이 될 때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이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문학은 이론을 낼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일단 교수가 되면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문제가 있고, 또 후학을 길러야 한다는 문제도 생긴다. 이건 이기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이다. 내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후학이 나와서 내 학문을 지켜주고 받들어주면 좋겠다, 이런 아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비슷한 사람들만 재생산하게 되고, 유사한 이론만 나오게 된 것이다. 나오는 논문의 수는 엄청 많은데, 그중 정말 창의적인 것은 별로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봐도 지금의 전공 학과라는 것은 모순 덩어리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에 15개 학과가 있는데, 이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틀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이들 나라에 대해서 하나씩 학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계가 다극화된 지금, 20세기 초에 만든 틀이 맞을 수가 없다. 수요·공급이 맞지 않게 된 것이다. 주체적으로 우리 조건에 걸맞은 학문 틀, 21세기적 학문 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한영우·서울대 인문대학장·한국사)

“우리 인문학에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많은 건 사실이다. 우선 외국 학계와 영어로 경쟁하니까 경쟁이 안 된다는 측면도 있고, 아직 수준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종교학 분야만 해도 일본인들이 20년대에 썼던 책들이 80년대 중반에 우리말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건 단적으로 그동안 이런 책들을 능가할 만한 연구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과거를 한번 돌이켜보자. 광복 직후 우리 대학 교단에 설 만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나? 일본에서 학부만 졸업한 분들이 교수가 됐을 정도로 불모상태였다. 나는 7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읽을 책이 없어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보면서 공부했을 정도였다. 그게 불과 20년전 얘기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번역서도 쏟아져 나오고, 외국 전공서적도 금방 들어온다. 국내에서 나오는 논문도 적지 않다. 게다가 요즘엔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논문을 바로 입수할 수도 있다.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학문의 절대적 수준은 외국에 비해서 한참 뒤떨어져 있지만, 성장 속도는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말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놔두기만 해도 미래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예를 봐도 초창기에는 미국이나 유럽 학문을 베끼다가 지금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지 않았나. 그러니까, 베끼는 일도 제대로 해나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 독자적인 우리 것이 나오는 것이지, 어느 세월에 외국 것을 따라가느냐고 해서 그건 아예 포기하고 독자적인 것을 개발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김종서)

 

 

 

얄팍한 학문, 천박한 사회

    생님의 전공분야에서, 특히 90년대 이후의 학문적 성취,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려는 노력, 사회발전 기여도 등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이 부정적인 쪽에 무게 중심이 두어진다면, 그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 대학에 국문학이나 영문학은 존재할지 모르나 인문학은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인문학 내에서 전공학문간의 높은 장벽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학풍을 조성하여 인문학 자체의 정체성을 구미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인문학이 전체 대학사회에서 주변화되고 심지어 ‘게토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 현실이다”(최갑수 논문. ‘인문학의 자기 혁신을 위한 제언’ 중에서)

몇몇 ‘급진적인’ 인문학자들은 “한국에 인문학은 없다”고까지 말한다. 전국 방방곡곡의 대학마다 인문대학은 있으되 세상에 ‘인문의 빛’은 스러져가고, 그것은 인문학자들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냐는 자책이다. 이 땅의 인문학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철학 부문에 국한해 말하면, 90년대 이후 국제적 추세의 ‘수용’에서는 이제 더 이상의 성취가 무의미할 정도로 역량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일제 식민지와 분단상황으로 인해 단절됐던 전통사상의 ‘복원’ 작업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 정도 재연결이 가능한 의식수준은 회복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학문상의 기초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려는 노력이라든가 사회발전에의 기여를 염두에 둔 연구의식은 아직 학계에서 주류적 흐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외국 또는 전통의 맥락에서 거론되는 특정 인물의 이론을 명시하지 않으면 전공으로 인정받기가 아직은 극히 어렵다. 이른바 한국 현대철학을 거론할 정도의 ‘자생성’ 담론은 여전히 전공에 부수적인 사항이다.

한국 철학계는 아직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공서적에 대한 독후감 내지 세미나 철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결과 철학이 만학의 왕,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전통적 선입견에 걸맞지 않게, 한국의 철학은 타 학문과 의사소통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실에 내재하는 일반 대중의 철학적 욕구에 대한 직업적 각성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특정 영역이 없는 철학이 발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현실의 삶에 사실로서 존재하는 철학들’에 완전하고 고차적인 철학적 표현을 부여하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철학의 역사에는 그런 방식에 대한 노하우가 충분하게 축적돼 있는데도 우리 한국 철학계는 ‘맥락 없는 철학’에 갇혀 ‘철학의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 of philosophy)’라는 과업을 계속 도외시하고 있다”(홍윤기)

“한국학 종사자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고 본다. 인문학의 다른 전공에서도 한국학은 인정해주는 추세다. 일각에선 서양학문을 한 사람들이 자기 영역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우리 문제를 다루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내고 있는데, 그 수준은 아직 갈 길이 멀다”(안병욱)

“아마도 ‘문학의 위기’는 90년대 이후 많은 문학관계자들에게 피부로 느껴지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위기’를 부르짖는다고 무엇이 바뀌는가? 불난 집에 불이 났다고 외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문학의 위기, 나아가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원인의 저변에 ‘문자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즉 컴퓨터 문명의 확산과 영화·텔레비전 등 영상매체, 각종 대중문화의 활성화 등이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언론조차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구호로 정보화를 부추기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수반될 활자 문화의 위기를 선도하고 있다. 그것이 어차피 문명 진화의 당연한 행보라면, 우리가 문자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이를 내놓고 부정할 수 있는가? 오늘 인문학의 위기에는 이런 딜레마가 잠재해 있다고 생각한다”(한형구)

 

 

 

위기 느껴도 나는 안 나선다?

    생님의 전공분야에서는 현재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노력이 얼마나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하십니까? 그런 노력이 미흡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선생님이 생각하는 현 위기의 타개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국사 분야에서는 90년대 이후 연구자 수가 대폭 증가해 다양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다만 문제는 기존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계 내부 특정집단의 기득권 때문에 새로운 의견을 가진 연구자가 소외되고, 심지어 자기 견해를 발표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학계 내부의 활발한 비판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특정 집단 내부에서 자기네끼리 칭찬해주는 식의 비평이 제대로 된 비평인가? 이런 일도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려는 연구자를 좌절시킨다. 기존 학계의 입장과 다른 의견을 가진 연구자를 수용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본다”(이종욱·서강대·한국사)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잘 안 보인다. 학자들은 저마다 인문학의 위기를 얘기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회 전반의 문제로 인문학의 위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자기가 전공한 것이니까 얘기하는 수준이 아닌가 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밥그릇 싸움’이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인문학의 의의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인문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학계, 교육계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가령 학부제만 해도, 우리가 왜 학부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자료가 나와 있는 게 거의 없다. 대부분 짤막한 성명서 수준의 논리, 대증적이고 피상적인 논의만 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대학의 기능이 무엇이고, 어떤 인간을 길러내야 하며, 인문학이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기반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논의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인문학적 정신인데, 그런 점에서 대학사회 내에서 인문정신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생각이다”(이남호·고려대·국문학)

“철학계에서는 IMF 환란 이후 자기반성 기류가 상당히 있다. 그런데 그런 반성의 기운 자체가 일반 대중을 만나서 생활철학이나 성숙의 문화를 일구는 데에 기여하기보다는 수입담론의 흐름 속에 매몰돼 있는 게 일반적이고, 그 차원 역시 아직 상아탑 수준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완고한 세력이 철학자군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철학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여전히 서양 담론의 연장이다.

우리 사회에 철학자는 많은데 사상은 없다. 자기 색깔도 없이 철학을 한다고 한다. 오히려 자기 색깔을 가지면 집단에서 소외된다. 일부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지한 모색이 있다지만, 가령 독일철학, 영미철학, 프랑스철학 등 나라만 바뀔 뿐이지 우리 사회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서 자생력을 키우려는 철학을 하려는 자세는 보기 어렵다”(김영민)

 

 

인문학 위기의 사회적 대가
 

    금의 인문학 위기가 앞으로 계속될 경우에 초래될 결과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나아가 그렇게 될 때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칠 여파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달리 말하면, 인문학이 고사한 뒤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학문이 발전하는 것과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느 학문의 어느 경향이 세상에 해독을 끼치는 일은 항상 있지만, 학문 내부의 논란에서 진위판별이 바람직하게 전개되어 그런 차질이 시정된다. 학문발전과 역사발전이 병행해서 이루어진다고 낙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조동일 ‘인문학문의 사명’ 중에서).

삶이 갈수록 살벌해지는 요즘, 많은 사람들은 ‘피난’을 꿈꾼다. “한국에선 자식 키우기가 겁난다”는 얘기가 더 이상 생경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중견 사회인들이, 멀쩡한 직업과 사회적 관계들을 내던지고, 외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산다. 이러다가 이 나라가 공동화(空洞化)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삶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인문학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 멀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아닐까? 그렇지만 만약 그것이 실패한다면 이 나라,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인문학 위기가 심화된 상황에 대해서는 인문학을 구성하는 기본 항목을 갖고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인문학은 선생이란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 텍스트나 글보다는 선생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인문학이 무너지면 우리 사회에 원로가 없어질 것이다. 전문가는 많지만 종합적인 시야를 제시할 수 있는 스승과 원로가 없는 사회, 기계화된 악평등이 심화되면서 인간에 대한 순도 있는 믿음이 사라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둘째, 인문학이 가진 소망은 자기에 대한 믿음이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공부다. 즉 ‘자기보다 큰 자기’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마음가짐’이 인문학의 핵심적인 소망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의 소멸은 자기에 대한 믿음이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적인 투명성이 한없이 확장되면서 자기 뿌리가 다 드러나보이고, 얄팍하고 재빠르고 매끄럽고 기계화된 인간들로 온 세상이 채워질 것이다. 이건 한 마디로 말해 비참한 사회다.

셋째, 인문학은 공간공부보다는 시간공부가 중심이다. 인문학적 성숙은 시간의 미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각을 묵히고 익히고 삭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정보사회, 속도주의 사회는 달리 표현하면 시간에 대한 참을성이 없는 사회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매우 분주하고, 정확하고, 빨라야 하고…, 그러다 보면 여유있는 공간, 참는 공간이 다 소멸된다. 그 결과 얻는 것은 우리 삶의 경박함뿐이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에서는 대화가 중시된다. 대화가 끊어지면 인문학은 죽는다. 이렇게 볼 때 기계문명이 가속되면 대화가 ‘접속’으로 바뀌고, 결국 인문학적 센스는 소실되고 말 것이다. 사람을 직접 만나 사귀면서 이해해나가는 전래의 방식은 사라지고, 빠르고 공간적이고 편리한 접속망을 통한 ‘관계’만 남게 된다. 이런 네트워크 사회는 편리할지는 몰라도 재미는 없다. 대략 이런 일들이 인문학이 쇠퇴한 이후의 우리 모습이 아닐까”(김영민).

“우회적으로 말해보면, 우리 영화가 왜 죽을 쑤고 있는가, 그건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그만큼 낮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를 다뤄도 외국 영화에 비해서 굉장히 상스럽고 촌스럽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형편없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나라 고급 관료들, 정치인, 예술가, 학자 등 소위 지도층 그룹의 문화수준이라는 게 고작 술집에서 부르는 뽕짝 정도 수준이다. 또, 보통 사람들 뿐 아니라 이런 지도층 그룹도 말도 안되는 TV 연속극에서 세상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우리나라에서 인문적 교양이 맥을 못추고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무리 경제가 잘되고 잘살게 된다 해도, 삶의 질과 만족도는 더더욱 떨어질 것이다”(이남호)

 

 

 

똑같은 단순논리, 쇄국정책과 세계화

    김대중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에 비교해서도 높은 수준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는 듯합니다. 작금의 인문학 위기와 관련, 김대중 정부의 지난 1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현 정부는 경제와 민주주의가 수레의 양바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양자의 관계가 대등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제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탐욕에 기초한다. 따라서 그 욕망을 견제하지 못하면 한탕주의, 천박한 자본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강조하는 여러 덕목은 그러한 탐욕을 견제하려는 것이다”(유평근)

“전임자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현 대통령의 개인적 능력은 평가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에 대한 평가로는 위 설문의 타당성이 대단히 의심스럽다. 현 정부의 업적이나 과실도, 프랑스 미테랑 정부에 대해서와는 달리, 인문학 차원에서 논할 수준이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이 사회의 위기로 볼 정도로 현 정부가 높은 수준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현정부 출범 전후 및 그 뒤에 시행된 일련의 개혁과정에 표출된 사회·정치적 위기는(경제위기까지 포함하여) 근본적으로 한국 인문학의 책임방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경제차원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박정희시대 이래 경제성장 뿐만 아니라 그 실패까지도 규정짓는 한국 사회운영의 기본 한계다.

현 정부가 홍보하고 있는 ‘신지식인’ 개념은 대학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부 정당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내세운 신지식인 내지 두뇌강국이라는 개념은 크게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이란 정보획득 수준에서는 필요의 산물이지만, 그 자급적 생산의 측면에서는 ‘진리에 대한 사회적 확신’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진리에 대한 사회적 확신을 체제화시킬 그 어떤 뚜렷한 정책의지 내지 학계의 태도변화는 실감되지 않는다”(홍윤기)

“현정권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포괄적으로 역대 정권의 인문학적, 철학적 기반을 100년 전 대원군 때와 비교해보자. 당시 대원군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개방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문호를 개방한단 말인가’ 생각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쇄국정책을 폈을 것이다.

정책방향은 달랐어도 쇄국정책의 현대적 재판(再版)이 김영삼정부의 세계화 논리다. 세계화 정책의 정신적 기조는 대원군의 단순논리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IMF를 맞았다. 김대중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 정치인들이 최소한 대원군이 가졌던 정도의 고민이라도 하고 있을까 지극히 회의스럽다. 이제 곧 21세기를 맞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20세기적 수준에서, 그것도 지극히 한국적 수준에서, 21세기 한국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대원군이 다가오는 20세기를 몰랐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21세기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그동안 군사정권 하에서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깊숙이 뿌리내린 결과다”(안병욱)

 

 

 

미지의 미래, 인문학의 미래

    생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 인문학의 장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낙관적(혹은 부정적)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인문학의 중흥과 관련해서 나는 몇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 첫째, 탁월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마치 바둑에서 조훈현, 이창호 같은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나와야 우리 인문학 수준이 확 올라간다. 그런 학문적 지도자가 한국에는 참 드물었는데, 그런 이들의 얘기가 설득력 있게 사회에 전달되고, 자기 이론을 펴다가 극단적으론 감옥에도 갔다오고 해야 우리 학문 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인문학이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앞으로 한결 적극적으로 사회운동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학문이 상아탑 속에 있으면서 현실에 대해 적확한 진단을 내리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학문과 사회는 상호교류 속에서 진전할 수 있다. 앞에서 인문학적 주장을 갖고 ‘사고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될 때 그동안 원론 수준에 머물거나 파편화해 있던 우리 인문학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강내희)

“현재로서는 인문학이 대학체제 내에서조차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 사회 각 영역에서 드러나고 있는 갖가지 문제점들을 보면 현실의 위기는 이미 철학 내지 인문학의 새로운 분발을 요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회발전은 이제 물질적인 성장만으로 측정되는 단계를 지나고 있다. 이제 발전의 결과를 놓고 고민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제2차 세계화 내지는 반성적 현대화의 핵심이다. 이것이 실패하면 기왕에 획득했던 양적 성장도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IMF 위기도 ‘생산의 위기’가 아니라 ‘생산관리의 위기’라는 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지 않은가.

실업, 환경, 정보화, 유전공학 등 이 모든 문제들이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로는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노동력이 쓸모없다는 선고를 받은 대규모 인간군, 언제든지 복제할 수 있는 개성,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는 물자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기가 그만큼 힘들어지고 있다. 이럴 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모색이 없다면, 하나하나의 변화가 곧바로 위기로 전환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안정되고 자신있는 인생을 꾸려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적 발상은 앞으로도 사회적 의미구조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어떤 형태로든 잔존하겠지만, 나의 바람은 이런 위기의식이 국민적으로 확산되고 공감을 얻음으로써 인문학이 건강한 삶을 위한 자산으로 기능했으면 하는 것이다”(홍윤기)

“우리 인문학의 장래에 대해서 나는 매우 낙관적이다. 인문학의 위상이 더 이상 떨어질 자리가 없을 만큼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앞으로는 나아질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IMF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인문학의 붕괴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킨다. 대학이 무너지면 출판이 무너지고, 언론이 무너진다. 한 나라의 지성이 다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짐승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지금 학계에 이런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희망의 징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한영우) (신동아 1999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