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의 풍속정신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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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숙 (동덕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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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개념을 이렇게 풀이해 놓고 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생이라는 개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지오토(Gioto)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인이나 화가를 칭찬하고 싶을 때는 그의 작품이 고대의 것만큼 훌륭하다고 말했으며 지오토는 이런 식으로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낸
거장으로 칭송되었다. 즉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이 칭송했던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의 걸작만큼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이런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우리는 곰브리치가 이렇게 써놓은 문장에서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예술 내지는 그 정신적인
전통을 부활시킨다는 뜻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고대의 부활이 중세의 카톨릭 교회와 스콜라 철학, 그리고 금욕주의에 반하게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유독 14세기의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었으며, 또한 르네상스를 떠받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정신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중세역사의 전부를 한 줄에 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십자군 전쟁은
종교전쟁사에서 유례가 없이 지루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동양과 서양과의 지리적 거리를 더욱 좁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항만도시, 예컨데 배네치아, 라벤나, 제노바, 피사, 나폴리 등 봉건군주들이 다스리던 여러 공국들을 상업도시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유럽의 십자군은 전쟁수행에서 운수기술(運輸技術)상 이들 항만도시에서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항만도시에서 유럽 최초의 은행이 나타나고 상가들이 번성하는 소위 자본주의 경제가 그곳에서 싹텄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파사를 근거로 유럽산
견직물(絹織物)과 동방의 향료(香料)장사로 부를 축적해 온 피렌체는 드디어 1379년 키오기아(chioggia) 해전에서 베네치아를 격파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된다. 그런 뒤 피렌체는 잉글랜드나 에스파니아로부터 원료를 수입하는 양모공업(羊毛工業), 조선(造船), 유리제조, 도기공업
등 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금융자본가의 독재정치가 시작되고 동시에 시민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 거상인 메디치(Cosino
de Medici)가 등장하여 상인독재왕조를 건설하게 되고 그로부터 카톨릭(교황청)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호족과 시민연합간의
전쟁이 발생하여 상인조합이 시정(市政)을 장악하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정신이 제기되던 소위
17,18세기의 실학(實學)의 이념이 다름아닌 이 르네상스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르네상스를
고대의 부활이라고 했던 바로 그 고대의 모델이 그리스와 로마의 실용주의(합리주의, 과학정신)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는 기하학, 의학, 천문학,
논리학이 학문의 주류였으며 로마는 토목기술, 관개, 군사 등 공업적인 것을 숭상했다. 따라서 고대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역사의 맥락으로 볼 때
중세 기독교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동임을 알게 된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최초의 거장인 지오토는 그림을 마치 조각처럼 실감있게
그린 이른바 기하학적 회화공간의 개척자이다. 이 점을 쉬레인의 말을 빌어 요약하면 이렇다. ‘말하자면 지오토에 의한 원근법의 개발은 미술에
있어서 혁신적인 이정표였으며 고정된 시점(視點)으로 그린 장면은 기하학의 새축을 배열하여 그려내는 것이므로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명확하게 보이는
것을 의미하여 그 원근법은 새로움 즉, 삼차원적 깊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차원적 표면위에 투영된 원근법의 사용은 따라서 평평한 캔버스를
입체상의 환상적인 세계를 여는 하나의 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말은 세계를 탐험하는 항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 르네상스 미술가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막연한 공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수평선으로 내려 왔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따라서 화가의 가장 엄격한 방위는 직선이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그림에 있어서 지오토가 도입한 유클리드적 기하학의 공간이 과념적이고 추상적이었던 중세적인 전통과 그 원칙을 깨부수는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독자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아놀드 하우저(A. Hauser)도 지오토가
경험주의적으로 사물을 보는 법을 통해 인체해부와 원근법에 입각한 인체와 풍물의 면밀한 묘사와 자연에 충실한 재현이라는 엄격한 사실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중세의 형이상학적인 상징 표현은 그림자를 감추게 되고 예술가의 목표는 의식적으로 감각적 세계에 대한 묘사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변화는 사회나 경제가 교회의 교의(敎義)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도에 비례하여 차츰 분망하게
확산되었다. 또 『이태리 르네상스의 역사』를 쓴 부르크 할트는 한마디로 회화에서의 이런 변화를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고 정의하고, 그
미술정신의 핵심을 ‘개물(個物)에의 관심이며 자연법칙의 탑구’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지오토에 의해 제기된 회화정신이 실은 신학(형이상학)이
아니라 과학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오토는 종교화를 그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종교적이지만 과학, 이른바 현세적인 것(욕망)을
용인하는 의미의 새로운 종교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벨프린은 이 차이를 ‘자연주의적 형식’과 ‘이상주의적 형식’, 혹은 ‘남방적인 것과
북방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실제로 피렌체에서 일어난 르네상스기의 그림을 두고 말하면, 그런 구분이 매우 모호하거나 피상적인 관찰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카톨릭 교회를 상징하는 중세적인 것과 고대의 부활을 뜻하는 이교(異敎)적인 것을 남성
이데올로기와 여성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구분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우리의 17,18세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세기독교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피에타상(Pieta)과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Maesta)이 있다. 이 두 주제는 시대에 따라 동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예컨데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기독교 미술에서는 단연 피에타상이 우세하게 나타나지만,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입장은 역전되어
나타난다. 말하자면 르네상스 이전시대에 있어서 신학은 숭고함과 희생정신의 표본인 피에타가 주제였으나 도시 상업주의가 일어났던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이른바 생산과 풍요와 자비의 마에스타가 그 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피에타는 정신의
상징이고, 마에스타는 물질의 상징인 셈이다. 이 두 대립항이 왜, 남성과 여성 이데올로기로 표현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아야 한다.
<봄>, <비너스탄생>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메디치가의 총애받는 신하로서 그는 당대의 시민적이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고대의 이교적 부흥의 기수라고 할 수
있다. <봄>과 <비너스탄생>은 메디치가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우저가 지적했듯 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고대 문명 유적지와 그 전통을 옹호하려는 국수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의
계관시인이었던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와 같은 민족주의 시인 등의 활동은 이탈리아의 고대문명, 이른바 에투루스칸 문화에 대한 재발견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17,18세기의 단원의 시대를 좀 더 실감있게 전망하기 위해서 이들 에투루스칸 문화가 다름아닌 우리의 고분문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레므스와 로므로스의 신화, 그리고 사냥이 그 주제가 되는 에투르스칸 문화는 웅녀의 신화와 고구려
고분벽화와 같은 문화사적인 배경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거명한 보티첼리의 두 작품은 그리스신화가 주제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구별되는 이교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두 작품은 아프로디테가 경쟁자인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딸 아테네를 물리치고 생산의 여신을 상징하는
황금의 사과를 획득하는 이야기를 조형화하고 있다. 그림의 대부분은 풍만한 몸매의 여성들로 채워져 있으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활을 들고 시위를
댕기는 큐피트(Venus Cupid)의 모습이다. 그것은 사랑(Amore)의 상징이며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주장했듯이
고대종교의 소위 ‘씨뿌리기’의 상징인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봄>의 조형적인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봄>이 여성적 이데올로기, 이른바 물질과 생산, 풍요로움을 이념적으로 고양시키는 회화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너스탄생>은 여성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의 탄생설화를 그린 것으로 <봄>과 마찬가지로
메디치의 정치적인 위상(상공업세력)을 대변한다.
올림프스신화는 크로노스가 반란을 일으켜 우라노스를 쳐 죽이고 생산권(우라노스의
성기)을 지중해에다 버린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러나 그 버려진 생산권은 지중해 속에서 거품으로 되살아나 아름다운 아프로디테 여신으로 재생되고,
드디어 그 여신은 올림푸스로 쳐 들어가 시간의 신(남성 이데올로기)인 크로노스 일당을 처단하고 승리를 거둔다. 보티첼리의
<비너스탄생>은 아프로디테가 지중해로부터 조개를 타고 싸이프러스로 상륙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 모습은 분명히 승리의 모습으로
그리스 신화와는 다소 다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를 복수하기 위해 싸이프러스로 상륙하는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지만,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복수의 여신이 아니라, 복수할 대상도 없는 완벽한 승리자의 모습인 것이다. 비너스는 주체못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다른쪽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아래쪽을 가리고 있다. 그것이 복수가 아니라 생산과 풍요를 상징한다는 것은 좌우의 신들이
아름다운 여신을 맞이하기 위해 외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보티첼리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 실제로 메디치가의
한 왕족의 연인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이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이 그림이 다름아닌 메디치 왕궁을 장식하는 그림으로 후세에 남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메디치가의 상인독재왕조는 15세기 후반에 등장한 사보나로라(Savonarola)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보나로라는 도미니크 수도원의 승려로 당시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수도원을 근거로 종말론적인 교리를 전파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상공업적인 자본주의는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와 인간을 멸망시킨다고 외쳤고 성실함과 헌신적인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고 갈파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의 외침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급기야 그는 시정을 장학하게 되고 종내에는 독재자로
변신하였다. 결국 수년 후 그의 정치는 실패하고 그 자신은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지만, 그의 출현은 여성 이데올로기를 견제하기 위한 남성
이데올로기의 대응이었던 의미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사보나로라는 이교적 미술을 배격하고 중세적인 종교화를 장려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보티첼리는
사보나로라에 심취한 나머지 그의 열렬한 신도가 되었으며 중세적인 스토이즘으로 되돌아가 비록 원근법은 유지하였으나 주제적으로는 중세적인 것으로
회귀하였다. 보티첼리의 <그리스도의 처형>, <비밀의 탄생>은 비록 성모마리아가 등장하지만 화면에는 그리스도가 주인공이다.
이런 그림들은 남성 이데올로기가 여성 이데올로기를 대신함을 보여주며 이교적인 화제에서 기독교적인 화제로 다시 복귀함을 뜻한다. 물론 그 복귀는
전적으로 중세적 화풍의 답습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정신이 배어 있는 이른바 ‘세계와 인간’이 구체화되는 새로운 화풍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초기 메디치왕가와 함께 일어났던 고대의 부활은 피렌체의 도시 자본주의와 함께 나타나 인문주의사상과
자연과학을 촉진시켰으나 점차 자연과학(상공업)이 압도하며 인문주의를 억압하는 모순에 봉착한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보티첼리 이후의
화가들, 예컨데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 다빈치의 그림에서 두개의 이데올로기 즉 피에타와 마에스타가 절충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라파엘의 ‘성모자’의 주제화는 비록 성모가 주제처럼 다루어지지만 아기예수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반대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작품들은 예수가 주인공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마리아가 주인공처럼 비칠 때가 있다. 이렇게 절충(중성)적인 요인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한 상류시민(상인)의 아내를 모델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이교적이지는 않지만 여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주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다빈치는 상인의 아내 ‘리자’를 모델로 하면서 그녀의 몸을 남성화함으로써 중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점을 클라그(Kenneth Clark)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본질적으로 중세적 고딕적인 미소로서
프랑스의 랭스나 독일의 나움부르그에 있는 여왕이나 성자의 미소와 같으나 레오나르드의 이상 미(理想 美)는 고대의 이교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모나리자 쪽이 고딕성자들보다 부드럽고 육감적인 것이다. 그들은 투명하지만 그녀는 불투명하다. 또 그들의 미소는 순수한 영혼의 빛이지만 그녀의
미소는 무언가 현세적이며 자기만족적인 데가 있다.
크리크의 이런 지적은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대립되었던 남성
이데올로기와 여성 이데올로기를 절충하는 화해의 이념을 실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보지만 이런 정황은 조선 시대의 이기(理氣)의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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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檀園)이 살던 시대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비견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영·정조(英· 正祖),
1725~1800)시대를 앞에서 거론했던 피렌체의 상업적인 도시자본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무역이나 상인계층의 활발한
생산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정조시대에 그럴만한 상공업적인 실적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르네상스적인 여성 이데올로기가 부각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던 16세기에 중국 연경(燕京)에는 독일 선교사였던 아담 슈엘(Adam Schel, 1591~1666)이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르네상스 문화를 전파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 머물면서 이들과 교류하였으며 귀국할 때는
천문(天文), 산학(算學)에 관한 책과 지구의(地球儀)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학자들은 연경으로 가는 사신(使臣) 일행을 따라 서구 문물을 시찰하였으며 그들은 그런 경험을 토대로 나라를 부흥하기
위해서는 경제, 천문, 지리, 군사, 농업, 상업 등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인의 실제생활을 살펴 그 제도 문물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박제가는 『북학의(北學義)』라는 책을 저술하여 산업과 교통시설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을 서구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박지원이 실제로 르네상스시대의 소위 원근법회화를 직접 보았다는 사실인데 그는 그의
책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그 소감을 실감있게 적어놓기도 했다.
물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천주교가 들어왔다는 사실도
주목해야하며 특히 이 시기에 샤마니즘이 큰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은 여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이교적이라고 분류되었던 샤마니즘은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생산(상공업적)의 이념이면서도 정치적으로 영·정조 시대의 유교이념과 충돌하며
수난을 겪게 되었다.
예컨데 세조(世祖)때 ‘활인서(活人署)’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무당들을 모아 고약한 역질(疫疾)을 다스리는 일에
써 먹었는데 임진왜란 때 이들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화약을 다루는 등 그 공로가 다대해 백성의 주목을 받게 되자 유생들의 시기를 받기에 이른다.
유생들은 어전 앞에 나가 무당들을 음사(淫祀)와 흑세무민으로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간하여 결국 ‘활인서’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영조(英祖)때에 이르러 다시 그 제도가 부활되었는데 그것은 시대가 바야흐로 실사구시(實事求是), 이른바 여성 이데올로기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영·정조시대의 무당들은 천문을 관측하는 일과 고약한 질병을 고치는 일, 관혼상제를 담당하거나 폭약을 제조하는
일, 혹은 점성술로 개인의 운세를 점치고 이를 상담하는 카운슬러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무당의 ‘굿’을 일명 백성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샤마니즘은 유교나 불교 이전에 존재했던 토착 종교이며 그것이 고분문화와 관련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무속의 활동은 결국 우리의 고대문화이며 토착문화였던 고분시대의 여성 이데올로기적 문화가 부활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기에 갑자기 고대의 민속놀이(탈춤놀이, 남사당놀이, 판소리)와 함께 무신도(巫神圖),
민화(民畵)가 널리 유행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신도는 여성 이데올로기적 신상의 복권을 뜻하며 그 심오한 뜻은 민화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 무신도나 민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으나 대표적인 예로 ‘까치호랑이’를 들 수 있다. 호랑이는 야행성 동물로서
초기 그리스신화에서도 달의 여신, 혹은 신모(神母)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조각가들의 손을 거쳐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인간화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경우에도 용호상쟁도(龍虎相爭圖)에서 보듯이 용은 양기(陽氣)이고 호랑이는 음기(陰氣)의 상징이다. 이런 점을 근거로 말하자면
‘까치호랑이’에서 호랑이는 여성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비너스이며 까치는 성적인 것,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사랑의 메신저인 큐피트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에 그려진 비너스(성모마리아)나 큐피트 그림에서 실제로 큐피트가 까치와 마찬가지로 날개를 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큐피트가 어린아이의 모습일 때도 그러하며 ‘수태고지’에서처럼 성인의 모습(천사)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호랑이는 성모(聖母)이고 까치는
씨앗의 운반자이고 나무는 하늘(남 성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호랑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보티펠리나 라파엘의 비너스나 성모에
관한 그림에서처럼 여성 이데올로기의 승리를 부각시키는 마에스타 양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된다. 실제로 우리의 만화에는 ‘미인 탄생도’가 있다.
바다로부터 용의 등을 타고 나타나는 세 미인은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도’에서처럼 누드로 그려지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그림에는 사과(석류?)로
보이는 열매가 그려져 있다. 또 작자미상이지만 천을 짜는 그림(耕織圖)도 이 시기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영·정조시대의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보부상의 활동과 상인 계층의 부각이 피렌체의 경우처럼, 완벽하게 도시 자본주의화를 뜻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농경사회가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쯤에서 단원과 함께 풍속화는 물론 춘화도를 그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혜원이 이 시기에 많은 무속화를
제작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은 단원의 풍속화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실사구시를 지향했던 영·정조시대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여성 이데올로기를 구가했던 르네상스맨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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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 중에서는 <개(犬)> 그림이 있다. 그가 전통적인 화법으로 산수 풍경을 그리다가 갑자기
개만 한 마리를 그렸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뿐만 아니라, 그 개그림은 화법상으로 그의 후기의 풍속화 양식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제의 개그림이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것이 단원의
것이든 아니든 문제의 르네상스적인 화법의 개그림이 그 시기에 누군가에 의해서는 그려졌다는 것은 여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주목할 일이다.
왜냐하면 작품 <개>는 사물의 개체성(個體性)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전체 속의 일부(부활)로 그려졌던 개는
이 작품에서는 완벽하게 개체이자 전체가 된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개는 모든 부분이 음영으로 묘사되어 대상이 확실하게 그 현장에
있는 삼차원적 실체(Volume)로 보인다. 연경에서 박지원이 르네상스시대의 그림을 보면서 실제로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이
작품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닌 것이다.
작품 <개>에는 원근법적인 배경이 존재하며 대상인 개에도 그림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고정된 시점이 존재하며 그 고정된 시점은 개인(화가)에 의해 공간과 시간이 선택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기성양식을
답습하거나 대가의 화풍을 모방하던 관행으로부터 자아(ego)의식이 탄생하며, 그 자아로서의 시점은 실존적으로 공간을 재단하고 시간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르크할트식으로 말하면 이는 ‘세계와 인간의 발견’일 뿐만 아니라 공간으로서의 참여이다. 부르크할트는 이러한 태도를
‘개물(個物)에의 관심이며 자연법칙의 함구’라고 했다. 같은 뜻이지만 하우저는 ‘인체와 풍물의 면밀한 묘사이자 충실한 재현’으로, 이런 변화가
모두 상공업의 부흥과 함께 나타난 도시자본주의적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작품 <개>의 회화적 의미는 과히
혁명에 비유될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왜, 단원이 그 한 작품만을 남겼는지가 궁금하며 만일 그것이 단원의 작품이 분명하다면 그가 조형에
있어서의 그 자신감이 왜 진전되어 또 다른 작품으로 나타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의 선구적인 미의식이 자리잡을 만한 여성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뒤따르지 않았다는 시대적인 운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제기한 과제에서 비록 단원이 조형사고에서
그 구체적인 실천이 이어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정신의 핵심이었던 여성 이데올로기에 관한 한 그는 분명하게 시대적 소명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화시(畵試)를 주관하면서 풍속적은 주제를 출제했다는 사실도 증거가 되겠지만, 그가 남긴 풍속화는 시종일관하게
생산자(상공업)의 삶을 부각시켰던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그의 노중상봉(路中相逢)은 말과 소에 음영을 가미하여 입체감을 시도했으나
인물들은 모두 명쾌한 선으로 그렸다. 당대 중인계층의 세태를 묘사한 이 그림은 화제가 말하듯이 시장(市場)의 동정을 엿보게 한다. 말을 탄 갓쓴
남자는 장으로 가는 길이고 소를 탄 아낙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서로 엇갈리는 이들이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전혀 타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갓쓴 남자는 동자를 거느린 품으로 보아 당시 쇠락하는 양반으로 보이며 소를 탄 아낙네는 장옷을 걸쳤지만 아이를 안은
품은 여염집 아낙같이 보인다. 하지만 이 부인이 아이를 등짐에 올리고 뒤따르고 있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옷으로부터 얼굴을 드러내 눈인사를
하거나 당당하게 소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제법 돈깨나 모은 중인계층의 위세가 풍기는 것은 바로 화가가 의도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이 그림에서만
보자면 분명 여성이념(음)이 남성이념(양)을 압도하고 있다. 그림에서 양반의 말은 망아지가 젖을 빨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지만 아낙이 탄 소는
의젓하게 그것도 아낙의 남편을 시종처럼 달고 가고 있다. 말이 남성적 이데올로기(피에타)라면 소는 여성적 이데올로기(마에스타)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그의 <행상>에서는 18세기에 등장한 보부상(褓負商)의 모습을 그렸는데 <노중상>에서처럼 대비구도법을 사용하여
이야기에 생동감을 부여 하고 있다. 지게에 등짐을 진 남성은 앞쪽을 향하지만 아기를 등에 업은 여인은 머리에 짐을 이고 있으나 옆면으로 그렸다.
두 인물은 부부가 아니라 이웃이거나 아니면 장터에서 알게 된 상인들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지켜지던 남녀의 내외하는 예의는 완전히 무너졌으며,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땀 흘리는 보부상들의 고달픈 삶이야말로 화가가 드러내 보이고 싶은 주제인 것이다.
그의
<기와이기>와 <벼타작>에서는 노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에는 각기 오른쪽에 노동을 독려하거나 지휘하는
감독자가 있지만 노동하는 인물들은 그들과는 아랑곳 없이 그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하며 즐거워하는 표정들이 얼굴에 나타나 있다. 노동은 생산활동이며
그것은 여신(神母)의 축복받는 신성한 직무인 것이다. <벼타작>에서는 사람들이 고된 노동이 아니라 유희를 하는 것처럼 신나게 일하고
있다. <벼타작>이 농민이라면 <기와이기>는 노동자<工人>가 주제이다. 목수는 열심히 대패질을 하고 추를 든
기술자는 기둥이 바로 섰는지 어떤지를 확인하려고 한쪽 눈을 실눈같이 뜨고 가늠질하며 지붕 위와 아래에서는 기와와 흙덩이를 주고 받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빠르고 정확한 선으로 그려지지만 두개의 기둥이나 목수가 쥔 대패와 작업대는 약간의 음영이 그려져서
<노중상봉>에 보이는 말이나 소처럼 어느 정도 공간감이 반영되기도 한다. 만일 이런 그림들이 작품 <개>에서처럼 그
음명법이 전면화(全面化)된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결과가 반드시 르네상스적인 사실주의와 일치한다고 생각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단원의 회화에서 그 나름의 입체감과 사물의 무게(질량)가 실감됨으로써 우리의 회화사에서도 기하학과 물리학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