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거침없이 사랑했고 연기 없이 살 수 없던 배우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원제 Ingrid Bergman:In Her Own Words, 10월 15일 개봉, 스티그 비요크만 감독)은 스웨덴 태생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1915~82)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영화다. 젊은 시절 버그만이 직접 촬영한 필름 푸티지 등 미공개 영상·사진과 그를 기억하는 여러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배우 이전에 한 여자이자 어머니로 살았던 버그만의 내밀한 순간을 보여준다.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은 매우 독특한 다큐멘터리다. 『우디가 말하는 앨런』(한나래)의 저자이자 잉마르 베리만·라스 폰 트리에 같은 영화감독에 대한 다큐도 만들었던 스웨덴 감독 스티그 비요크만은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버그만을 조명했다. 그가 버그만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일반적인 스타 다큐멘터리 양식을 벗어난다. 이를테면 불세출의 스타를 칭송하기 위해 수많은 셀러브리티를 인터뷰이로 동원하고 명장면을 삽입해 완성한 작품이 아니다. 물론 이 다큐에도 버그만의 주요 출연작 클립과 오스카 수상 장면 같은 기록 필름이 삽입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버그만이 남긴 기록(일기·홈무비·사진)으로 채워지며, 인터뷰이도 가족 정도로 제한해 극도로 사적인 버그만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 다큐의 목적은 100년 전에 태어났고, 33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여배우의 진짜 모습을 관객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과연 그는 유년기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연기를 한다는 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스캔들에 휘말려 할리우드를 떠나야 했을 때, 그의 진짜 심정은 어땠을까.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타의 화려함과 영광이 아닌 버그만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타오르는 내면>
다큐에 기록된 ‘자연인 버그만’의 모습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접했던 ‘배우 버그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자막으로 제시되는 버그만이 남긴 인상적인 말은 그의 삶과 영화를 모두 아우르는 듯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수줍음 많은 사람이지만, 내 안의 사자는 끊임없이 으르렁댔다.” 약간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타오르는 내면을 지닌 여인.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일사,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3, 샘 우드 감독)의 마리아, ‘잔 다르크’(1948, 빅터 플레밍 감독)의 잔 다르크를 기억한다면 이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 열정은 나이와 무관했다. ‘아나스타샤’(1956,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안나와 ‘가을 소나타’(1978,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샤를로트 그리고 유작인 TV 영화 ‘골다라는 이름의 여자’(1982, 앨런 깁슨 감독)에서 연기했던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까지, 버그만은 데뷔 후 중년과 노년에 이르는 세월을 ‘열정의 연기자’로 살았다.
<카메라 앞의 자유를 선물한 아버지>
이런 기질은 유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버그만은 1915년 8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외로웠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도 열세 살이 된 딸을 홀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형제·자매도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버그만을 데려온 숙모도 6주 후에 죽었다. 이런 환경은 어린 버그만을 내성적으로 만들었고, 그는 상상 속의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랬다.
혼자만의 유희를 즐기던 버그만은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 왕립연극학교에 입학한다. 그녀가 배우를 꿈꾼 데에는 화가이자 사진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시간날 때마다 어린 딸을 카메라 앞에 앉히고 다양한 소품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버그만은 카메라 앞에서 포토제닉하게 보이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이것은 그가 배우로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버그만은 당대 그 어떤 배우보다 자연스러웠고, 메이크업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우연한 기회로 영화에 출연하게 된 버그만은 학교를 그만두고 직업 배우의 길을 간다. 38년까지 스웨덴 영화계에서 열 편 가까이 되는 작품을 찍으며 주연급으로 발돋움하던 그는 인생의 결정적인 기회를 잡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빅터 플레밍 감독)의 제작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손짓한 것. 할리우드에서 스웨덴 영화 ‘인터메조’(1936, 구스타프 몰란더 감독)를 리메이크하면서, 셀즈닉은 주연 배우 버그만도 함께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버그만은 망설이지 않고 대서양을 건넜다. 셀즈닉은 버그만이 스타가 되는 초석을 마련해 준 사람이었고, 버그만의 진가를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었다. “버그만은 내가 함께 일했던 배우 중 가장 성실했다. 그는 일밖에 몰랐다. 분장실을 숙소로 꾸며놓고 촬영 기간엔 스튜디오를 떠나지 않았다.” 리메이크된 ‘인터메조’(1939, 그레고리 라토프 감독)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인들은 화장기 없이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버그만의 모습에 열광했다.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우아함과 진정성이 매력>
‘지킬 박사와 하이드’(1941, 빅터 플레밍 감독)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거쳐, 버그만은 ‘가스등’(1944, 조지 쿠커 감독)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을 만나 ‘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염소자리’(1949)를 찍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버그만처럼 다양한 캐릭터를, 섬세한 감성으로 소화하는 배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건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진정성’이다. 작가 제임스 아지는 버그만이 “시적인 우아함 속에 리얼리즘의 톤을 지녔다”며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는 배우”라고 평했다. 조지 쿠커 감독은 “카메라가 사랑하는 아름다움과 연기 방식 그리고 개성을 지녔다”라고 이야기했다. 후세의 연구가인 데이비드 톰슨은 “버그만은 항상 ‘진실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고, 관객은 바로 그 모습에 매료됐다”라고 분석했다.
이것은 버그만의 삶이 지닌 단순성에서 비롯됐다. 그는 일하지 않으면 가족과 쉬고, 쉼이 끝나면 다시 일했다. 무엇을 결정할 땐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소신껏 행동했다. 딸이자 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에게 했던 충고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철학이다. “연기할 땐 단순성을 지녀야 한다. 표정 없이 얼굴을 비운다면, 영화음악이나 스토리가 빈 얼굴을 채워줄 것이다.”
같은 스웨덴 출신 배우인 그레타 가르보가 신비주의로 아우라를 만들었다면, 버그만은 솔직함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175㎝의 큰 키에 조각상 같은 위엄과 고귀한 여성성이 결합된 그의 외모는 대중을 압도하는 동시에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본능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은 그에게 힘든 세월을 안긴다.
<감정에 충실했던 삶>
버그만은 48년 당시 미국에서 개봉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1946)을 보고 거칠고 강렬한 힘에 전율했다. 버그만은 로셀리니 감독에게 편지를 보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들은 곧 사랑에 빠졌다. 당시 버그만에겐 의사인 남편 페터 린드스트롬과 딸 피아가 있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리고 1949년 6월, 버그만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셀리니 감독과의 ‘불륜’은 보수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행이었다. 상원 의원 에드윈 존슨은 ‘타락의 사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영화 ‘잔 다르크’는 불매 운동에 직면했다. 결국 버그만은 할리우드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 감독과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7년 6개월 만에 로셀리니 감독과 이혼하고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버그만은 ‘아나스타샤’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진 않았다. 그리고 59년, 할리우드는 시상자로 모습을 드러낸 버그만을 기립 박수로 맞이했다. 이후 버그만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 시드니 루멧 감독)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간다. 이 시기에 암 투병이 시작됐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 8년 동안 카메라 앞을 떠나지 않았다.
5개 국어가 가능했던 그는 유럽과 할리우드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활동했던 ‘영화사상 최초의 국제 스타’였고, 아카데미 시상식(영화)·에미상(TV)·토니상(연극)을 석권한 위대한 엔터테이너였다. “나는 성녀에서 창녀가 되었다가 다시 성녀가 되었다”라는 스스로의 말처럼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던 버그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삶의 결과로 받아들였고,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나에게 연기를 앗아간다면, 곧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버그만은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연소하고 떠났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원제 Ingrid Bergman:In Her Own Words, 10월 15일 개봉, 스티그 비요크만 감독)은 스웨덴 태생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1915~82)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영화다. 젊은 시절 버그만이 직접 촬영한 필름 푸티지 등 미공개 영상·사진과 그를 기억하는 여러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배우 이전에 한 여자이자 어머니로 살았던 버그만의 내밀한 순간을 보여준다.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은 매우 독특한 다큐멘터리다. 『우디가 말하는 앨런』(한나래)의 저자이자 잉마르 베리만·라스 폰 트리에 같은 영화감독에 대한 다큐도 만들었던 스웨덴 감독 스티그 비요크만은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버그만을 조명했다. 그가 버그만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일반적인 스타 다큐멘터리 양식을 벗어난다. 이를테면 불세출의 스타를 칭송하기 위해 수많은 셀러브리티를 인터뷰이로 동원하고 명장면을 삽입해 완성한 작품이 아니다. 물론 이 다큐에도 버그만의 주요 출연작 클립과 오스카 수상 장면 같은 기록 필름이 삽입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버그만이 남긴 기록(일기·홈무비·사진)으로 채워지며, 인터뷰이도 가족 정도로 제한해 극도로 사적인 버그만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 다큐의 목적은 100년 전에 태어났고, 33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여배우의 진짜 모습을 관객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과연 그는 유년기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연기를 한다는 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스캔들에 휘말려 할리우드를 떠나야 했을 때, 그의 진짜 심정은 어땠을까.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타의 화려함과 영광이 아닌 버그만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타오르는 내면>
다큐에 기록된 ‘자연인 버그만’의 모습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접했던 ‘배우 버그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자막으로 제시되는 버그만이 남긴 인상적인 말은 그의 삶과 영화를 모두 아우르는 듯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수줍음 많은 사람이지만, 내 안의 사자는 끊임없이 으르렁댔다.” 약간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타오르는 내면을 지닌 여인.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일사,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3, 샘 우드 감독)의 마리아, ‘잔 다르크’(1948, 빅터 플레밍 감독)의 잔 다르크를 기억한다면 이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 열정은 나이와 무관했다. ‘아나스타샤’(1956,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안나와 ‘가을 소나타’(1978,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샤를로트 그리고 유작인 TV 영화 ‘골다라는 이름의 여자’(1982, 앨런 깁슨 감독)에서 연기했던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까지, 버그만은 데뷔 후 중년과 노년에 이르는 세월을 ‘열정의 연기자’로 살았다.
<카메라 앞의 자유를 선물한 아버지>
이런 기질은 유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버그만은 1915년 8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외로웠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도 열세 살이 된 딸을 홀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형제·자매도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버그만을 데려온 숙모도 6주 후에 죽었다. 이런 환경은 어린 버그만을 내성적으로 만들었고, 그는 상상 속의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랬다.
혼자만의 유희를 즐기던 버그만은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 왕립연극학교에 입학한다. 그녀가 배우를 꿈꾼 데에는 화가이자 사진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시간날 때마다 어린 딸을 카메라 앞에 앉히고 다양한 소품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버그만은 카메라 앞에서 포토제닉하게 보이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이것은 그가 배우로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버그만은 당대 그 어떤 배우보다 자연스러웠고, 메이크업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우연한 기회로 영화에 출연하게 된 버그만은 학교를 그만두고 직업 배우의 길을 간다. 38년까지 스웨덴 영화계에서 열 편 가까이 되는 작품을 찍으며 주연급으로 발돋움하던 그는 인생의 결정적인 기회를 잡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빅터 플레밍 감독)의 제작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손짓한 것. 할리우드에서 스웨덴 영화 ‘인터메조’(1936, 구스타프 몰란더 감독)를 리메이크하면서, 셀즈닉은 주연 배우 버그만도 함께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버그만은 망설이지 않고 대서양을 건넜다. 셀즈닉은 버그만이 스타가 되는 초석을 마련해 준 사람이었고, 버그만의 진가를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었다. “버그만은 내가 함께 일했던 배우 중 가장 성실했다. 그는 일밖에 몰랐다. 분장실을 숙소로 꾸며놓고 촬영 기간엔 스튜디오를 떠나지 않았다.” 리메이크된 ‘인터메조’(1939, 그레고리 라토프 감독)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인들은 화장기 없이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버그만의 모습에 열광했다.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우아함과 진정성이 매력>
‘지킬 박사와 하이드’(1941, 빅터 플레밍 감독)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거쳐, 버그만은 ‘가스등’(1944, 조지 쿠커 감독)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을 만나 ‘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염소자리’(1949)를 찍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버그만처럼 다양한 캐릭터를, 섬세한 감성으로 소화하는 배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건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진정성’이다. 작가 제임스 아지는 버그만이 “시적인 우아함 속에 리얼리즘의 톤을 지녔다”며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는 배우”라고 평했다. 조지 쿠커 감독은 “카메라가 사랑하는 아름다움과 연기 방식 그리고 개성을 지녔다”라고 이야기했다. 후세의 연구가인 데이비드 톰슨은 “버그만은 항상 ‘진실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고, 관객은 바로 그 모습에 매료됐다”라고 분석했다.
이것은 버그만의 삶이 지닌 단순성에서 비롯됐다. 그는 일하지 않으면 가족과 쉬고, 쉼이 끝나면 다시 일했다. 무엇을 결정할 땐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소신껏 행동했다. 딸이자 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에게 했던 충고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철학이다. “연기할 땐 단순성을 지녀야 한다. 표정 없이 얼굴을 비운다면, 영화음악이나 스토리가 빈 얼굴을 채워줄 것이다.”
같은 스웨덴 출신 배우인 그레타 가르보가 신비주의로 아우라를 만들었다면, 버그만은 솔직함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175㎝의 큰 키에 조각상 같은 위엄과 고귀한 여성성이 결합된 그의 외모는 대중을 압도하는 동시에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본능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은 그에게 힘든 세월을 안긴다.
<감정에 충실했던 삶>
버그만은 48년 당시 미국에서 개봉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1946)을 보고 거칠고 강렬한 힘에 전율했다. 버그만은 로셀리니 감독에게 편지를 보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들은 곧 사랑에 빠졌다. 당시 버그만에겐 의사인 남편 페터 린드스트롬과 딸 피아가 있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리고 1949년 6월, 버그만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셀리니 감독과의 ‘불륜’은 보수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행이었다. 상원 의원 에드윈 존슨은 ‘타락의 사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영화 ‘잔 다르크’는 불매 운동에 직면했다. 결국 버그만은 할리우드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 감독과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7년 6개월 만에 로셀리니 감독과 이혼하고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버그만은 ‘아나스타샤’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진 않았다. 그리고 59년, 할리우드는 시상자로 모습을 드러낸 버그만을 기립 박수로 맞이했다. 이후 버그만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 시드니 루멧 감독)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간다. 이 시기에 암 투병이 시작됐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 8년 동안 카메라 앞을 떠나지 않았다.
5개 국어가 가능했던 그는 유럽과 할리우드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활동했던 ‘영화사상 최초의 국제 스타’였고, 아카데미 시상식(영화)·에미상(TV)·토니상(연극)을 석권한 위대한 엔터테이너였다. “나는 성녀에서 창녀가 되었다가 다시 성녀가 되었다”라는 스스로의 말처럼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던 버그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삶의 결과로 받아들였고,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나에게 연기를 앗아간다면, 곧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버그만은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연소하고 떠났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