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新羅文學」 論議, 文一平 毛允淑 兩氏 一問一答記

이강기 2015. 9. 30. 16:01
잡지명 삼천리문학 제2집
발행년월일 1938년 04월 01일
기사제목 「新羅文學」 論議, 文一平 毛允淑 兩氏 一問一答記
필자
기사형태 대담·좌담

「新羅文學」 論議, 文一平 毛允淑 兩氏 一問一答記 (「신라문학」 론의, 문일평 모윤숙 량씨 일문일답기)

선생은 방금 조반을 잡수시다가 대단히 반가히 맞어주신다.
毛允淑 = 先生任 바쁘신데 미안합니다. 특히 先生任께 오늘 신라문학에 관한 것을 좀 엿주어 보랴고 하는데요.
文一平 = 신라문학에 그리 큰 연구가 없는 이상 떳떳히<206> 말슴듸리기 어렵슴니다.
문 = 사양하시지 마시고 말슴해 주십시오. 대개 신라문학하면 어듸에 중요점을 두게 됨니까?
답 = 네. 신라문학의 근원에 드러가 말하라면 아마도 향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문 = 지금 우리가 보기는 향가라고 별노 몃 수 없는 듯 한데 모도 그 뿐인지요?
답 = 아니지요, 근본은 퍽 많었는데 중간에 오다가 다 소멸되고 지금 남은 것이 모두 25수뿐이지요. 신라문학이란 이 가요(향가)에서 발달되였다고 볼 수 있지요. 불행이 여러번 兵亂을 당했든 관게로 이 좋은 향가들이 보존이 못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내지의 萬葉集이나 支那의 詩經같은 것이 아마 우리 향가와 동류의 것이 될 것임니다.
문 = 신라때에도 가장 이것이 왕성한 때가 어느 때일가요.
답 = 아마 진성여왕때지요. 그 때 삼대목(鄕歌勅選集)이란 책이 大炬和像이란 분과 다른 한 분이 합해서 편찬한 것이 있는데 삼대목 내용은 지금 알 수 없읍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남은 14수와 합해서 (均安大師에게 남어있는 것) 24수인데 均安大師에게 남은 14수는 대개로 종교에 관한 것이니까 말할 것 없고 아마 가장 완성된 가요로는 處容歌일 것입니다.
문 = 신라이전에는 문학이란 것이 없었든가요?
답 = 高麗秘詞에 보면 문학적 기록은 고조선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였다고 합듸다.
문 = 신라향가를 보면 대단히 자유스럽고 씩씩한 기운이 보이는데 그들의 생활이 그래서 그럴까요?
답 = 그럿슴니다. 신라사람은 생활이 유쾌하고 여유가 있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이란 도모지 없었읍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정신의 표현이란 것은 신라인 아니면 못할만한 일입니다. 석굴암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표현점이지요.
문 = 향가에 좋은 예를 이야기해 주십시오.
답 = 저 월명대사가 지은 慧星歌같은 것을 보면 화랑들이 풍악(지금 금강산)을 구경가려든 차에 혜성이 떠돌고 해서 못가고 물너났는데 적이 왔다가 혜성 때문에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거기 보면 도모지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한 마음이 없고<207> 대단히 관대하고 이해력이 강하였읍니다. 그렇게 명랑한 기질은 화랑에게서만 발할 수 있는 기질이였지요.
문 = 화랑과 문학의 관계는 어떻슴니까?
답 = 관계가 퍽 깊지요. 화랑들은 먼저 자아를 완성식히려고 뢰력했음니다. 山水間에 방랑하기를 조와했고 노래와 시를 즐겨 생활했음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들은 무사면서도 예술지상주의자들 같기도 했지요.
문 = 그런대 그들의 도의관념은 어떠했을까요?
답 = 네. 물론 그이들은 도덕과 의리에 충실하고 종교와 윤리가 밝었음니다. 그래서 예술적이면서도 종교적이요. 윤리적인 그들의 생활이 내가 생각하기는 가장 이상적 생활양식이였다고 생각함니다.
문 = 그들의 종교관념이란 어듸서 발했음니까?
답 = 퍽 원시적이지요. 사맨이즘과 다른 여러 가지 윤리 관염이 결합해서 맨드러진 종교관염이겠지요. 즉 그들의 종교관염이란 생활관염이나 마찬가지로 되여있었음니다. 그 때 그들의 윤리나 종교는 조곰도 그들의 생활에 어떤 부자유를 주지않고 명랑과 유쾌와 자유를 주었으니까요. 그들은 종교와 윤리를 조곰도 의무적으로 직히지 안었음니다.
문 = 그러한 적극적인 관염들이 종합된 그 때였든만큼 여성를은 어떠했음니까?
답 = 요새 조선 여성들은 생각도 못하리만치 활발하고 씩씩하고 자유사상이 농후했지요.
문 = 화랑도는 있는데 화랑과 비슷한 女性群은 모르겠든데요?
답 = 잇지요. 신라사회에 있어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활발하고 담대했음니다. 화랑이란 것도 처음엔 여성화랑들이 중심이 되여가지고 남녀분별없이 회합하고 일을 했음니다. 먼저 여성들이 중심을 해가지고 화랑정신을 고취하고 남자들을 있글어서 놀았지요.
문 = 대단 통쾌함니다. 그런데 웨 그 중심회합이 게속지 못했음니까?
답 = 그것도 그렇지요. 아모리 자기들을 잘 비판한다 하더라도 남녀가 항상 같이 모히니까 좀 감상적 흥분을 갖기 쉬운데서 그리된 것 갔음니다.<208>
그들은 혼인도 거진 혈족 혼인을 하다싶이 자유로웠으니까요.
문 = 그런 예로 한 사람 알여주서요.
답 = 바로 김유신씨 어머니 만명이도 자기 어머니 말을 안듯고 舒玄이라는 남자와 길에서 눈이 맞어 갖이고 혼인했음니다. 바로 김유신씨 아버지가 舒玄임니다.
문 = 김유신씨 어머니 만명이란 여자는 어떤 게급에 여자였든가요?
답 = 바로 왕실의 딸임니다. 그러니 귀족이나 왕실의 혼인 사상이 그러했으니까 그 아래 게급이야 말할 거 무어 있음니까? 그 때에는 사회제도가 사람들께 평안한 감을 주게되고 사람들의 인생관이 살었든 만큼 문학도 씩식하고 활발하였지요.」「 그러면서도 情緖를 잃지않고.
문 = 외국문학수입은 없었든가요?
답 = 웨요? 그 때 한참 당나라가 詩가 많이 드러왔음니다. 신라사람들이 어떻게 시를 조와했든지 시인이 아닌 상인이라도 支那로 行商을 떠났다가는 꼭 白樂天의 시 1편은 사가지고 온다니까요.
문 = 시 한 편에 얼마나 주었을가요?
답 = 천원식 주고 사다가 다시 귀족들에게 천원을 더 받고 넹긴다 했음니다.
문 = 그걸보면 신라사람들은 향가로만은 만족지 못했나 보지요?
답 = 그렇지요. 白樂天의 시에서 꼭 같은 향기를 감할 수 있었다 함니다. 그 때는 白樂天의 시가 支那에서 가장 유명했고 신라향가 비슷한 경향이 있었든 모양임니다.
문 = 그러니까 신라민중은 모두가 문학적 감상안이 퍽 발달되였든 셈이지요.
답 = 그렇지요. 여하간 속아서 白樂天의 시를 사와도 보고난 후면 정말 그의 시ㄴ지 아닌지를 꼭 안다니까요. 일반적으로 문학적 意識感이 예민했든 것이 실사이지요.
문 = 여자들은 향가지은 일이 없을가요?
답 = 웨요, 많겠지요. 아마 발표된 것은 별로 없으나 그 때 형편으로 보아 남자보다 더욱 세였을지 모름니다.
문 = 조선문단의 미래를 엊이 생각하심니까?
답 = 발달식히고 힘써야 될 줄 암니다. 지도적 입장에서 큰 역할을 해야되리라고 믿슴니다.<209>
<206-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