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文學」 論議, 文一平 毛允淑 兩氏 一問一答記 (「신라문학」 론의, 문일평 모윤숙 량씨
일문일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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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방금 조반을
잡수시다가 대단히 반가히 맞어주신다. |
毛允淑 = 先生任 바쁘신데 미안합니다. 특히 先生任께 오늘
신라문학에 관한 것을 좀 엿주어 보랴고 하는데요. |
文一平 = 신라문학에 그리 큰 연구가 없는 이상 떳떳히<206>
말슴듸리기 어렵슴니다. |
문 = 사양하시지 마시고
말슴해 주십시오. 대개 신라문학하면 어듸에 중요점을 두게 됨니까? |
답 = 네. 신라문학의
근원에 드러가 말하라면 아마도 향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
문 = 지금 우리가
보기는 향가라고 별노 몃 수 없는 듯 한데 모도 그 뿐인지요? |
답 = 아니지요, 근본은
퍽 많었는데 중간에 오다가 다 소멸되고 지금 남은 것이 모두 25수뿐이지요. 신라문학이란 이 가요(향가)에서 발달되였다고 볼 수 있지요. 불행이
여러번 兵亂을 당했든 관게로 이 좋은 향가들이 보존이 못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내지의 萬葉集이나 支那의 詩經같은 것이 아마 우리 향가와 동류의
것이 될 것임니다. |
문 = 신라때에도 가장
이것이 왕성한 때가 어느 때일가요. |
답 = 아마
진성여왕때지요. 그 때 삼대목(鄕歌勅選集)이란 책이 大炬和像이란 분과 다른 한 분이 합해서 편찬한 것이 있는데 삼대목 내용은 지금 알 수
없읍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남은 14수와 합해서 (均安大師에게 남어있는 것) 24수인데 均安大師에게 남은 14수는 대개로 종교에 관한 것이니까
말할 것 없고 아마 가장 완성된 가요로는 處容歌일 것입니다. |
문 = 신라이전에는
문학이란 것이 없었든가요? |
답 = 高麗秘詞에 보면
문학적 기록은 고조선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였다고 합듸다. |
문 = 신라향가를 보면
대단히 자유스럽고 씩씩한 기운이 보이는데 그들의 생활이 그래서 그럴까요? |
답 = 그럿슴니다.
신라사람은 생활이 유쾌하고 여유가 있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이란 도모지 없었읍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정신의 표현이란 것은 신라인
아니면 못할만한 일입니다. 석굴암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표현점이지요. |
답 = 저 월명대사가
지은 慧星歌같은 것을 보면 화랑들이 풍악(지금 금강산)을 구경가려든 차에 혜성이 떠돌고 해서 못가고 물너났는데 적이 왔다가 혜성 때문에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거기 보면 도모지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한 마음이 없고<207> 대단히 관대하고 이해력이 강하였읍니다. 그렇게
명랑한 기질은 화랑에게서만 발할 수 있는 기질이였지요. |
답 = 관계가 퍽
깊지요. 화랑들은 먼저 자아를 완성식히려고 뢰력했음니다. 山水間에 방랑하기를 조와했고 노래와 시를 즐겨 생활했음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들은
무사면서도 예술지상주의자들 같기도 했지요. |
문 = 그런대 그들의
도의관념은 어떠했을까요? |
답 = 네. 물론
그이들은 도덕과 의리에 충실하고 종교와 윤리가 밝었음니다. 그래서 예술적이면서도 종교적이요. 윤리적인 그들의 생활이 내가 생각하기는 가장 이상적
생활양식이였다고 생각함니다. |
문 = 그들의
종교관념이란 어듸서 발했음니까? |
답 = 퍽 원시적이지요.
사맨이즘과 다른 여러 가지 윤리 관염이 결합해서 맨드러진 종교관염이겠지요. 즉 그들의 종교관염이란 생활관염이나 마찬가지로 되여있었음니다. 그 때
그들의 윤리나 종교는 조곰도 그들의 생활에 어떤 부자유를 주지않고 명랑과 유쾌와 자유를 주었으니까요. 그들은 종교와 윤리를 조곰도 의무적으로
직히지 안었음니다. |
문 = 그러한 적극적인
관염들이 종합된 그 때였든만큼 여성를은 어떠했음니까? |
답 = 요새 조선
여성들은 생각도 못하리만치 활발하고 씩씩하고 자유사상이 농후했지요. |
문 = 화랑도는 있는데
화랑과 비슷한 女性群은 모르겠든데요? |
답 = 잇지요.
신라사회에 있어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활발하고 담대했음니다. 화랑이란 것도 처음엔 여성화랑들이 중심이 되여가지고 남녀분별없이 회합하고 일을
했음니다. 먼저 여성들이 중심을 해가지고 화랑정신을 고취하고 남자들을 있글어서
놀았지요. |
문 = 대단 통쾌함니다.
그런데 웨 그 중심회합이 게속지 못했음니까? |
답 = 그것도 그렇지요.
아모리 자기들을 잘 비판한다 하더라도 남녀가 항상 같이 모히니까 좀 감상적 흥분을 갖기 쉬운데서 그리된 것
갔음니다.<208> |
그들은 혼인도 거진 혈족
혼인을 하다싶이 자유로웠으니까요. |
답 = 바로 김유신씨
어머니 만명이도 자기 어머니 말을 안듯고 舒玄이라는 남자와 길에서 눈이 맞어 갖이고 혼인했음니다. 바로 김유신씨 아버지가
舒玄임니다. |
문 = 김유신씨 어머니
만명이란 여자는 어떤 게급에 여자였든가요? |
답 = 바로 왕실의
딸임니다. 그러니 귀족이나 왕실의 혼인 사상이 그러했으니까 그 아래 게급이야 말할 거 무어 있음니까? 그 때에는 사회제도가 사람들께 평안한 감을
주게되고 사람들의 인생관이 살었든 만큼 문학도 씩식하고 활발하였지요.」「 그러면서도 情緖를
잃지않고. |
답 = 웨요? 그 때
한참 당나라가 詩가 많이 드러왔음니다. 신라사람들이 어떻게 시를 조와했든지 시인이 아닌 상인이라도 支那로 行商을 떠났다가는 꼭 白樂天의 시
1편은 사가지고 온다니까요. |
답 = 천원식 주고
사다가 다시 귀족들에게 천원을 더 받고 넹긴다 했음니다. |
문 = 그걸보면
신라사람들은 향가로만은 만족지 못했나 보지요? |
답 = 그렇지요.
白樂天의 시에서 꼭 같은 향기를 감할 수 있었다 함니다. 그 때는 白樂天의 시가 支那에서 가장 유명했고 신라향가 비슷한 경향이 있었든
모양임니다. |
문 = 그러니까
신라민중은 모두가 문학적 감상안이 퍽 발달되였든 셈이지요. |
답 = 그렇지요. 여하간
속아서 白樂天의 시를 사와도 보고난 후면 정말 그의 시ㄴ지 아닌지를 꼭 안다니까요. 일반적으로 문학적 意識感이 예민했든 것이
실사이지요. |
답 = 웨요, 많겠지요.
아마 발표된 것은 별로 없으나 그 때 형편으로 보아 남자보다 더욱 세였을지 모름니다. |
답 = 발달식히고 힘써야
될 줄 암니다. 지도적 입장에서 큰 역할을 해야되리라고 믿슴니다.<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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