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을 비평한다 - 중앙대 신문에서 문학비평을 비평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안쓰러운 일이다.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문학의 다양한 영역 중에서도 가장 귀퉁이에서 가냘픈 숨을 몰아쉬는 게 사실 비평이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은 여전히 전통적인 독자층이 있고 새로운 연령층을 흡수하는 반면, 문학비평은 기존의 독자에게 외면당하고 젊은 학생층도 끌어들이지 못해 고립무원의 상황이다. 이것은 문학의 영역을 넘어 비평이라는 문필활동 일반이 처한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비평, 미술비평, 공연비평 등을 누가 제대로 쳐다보기나 하는 지 의문이다. 쉬리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부터 몇 년간 쏟아졌던 영화평론집들이 요즘 뜸한 걸 보면 영화나 문학이나 비평집은 시장에 나오는 족족 깨지고 있다는 것을 담박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문학비평집은 거의 일주일에 한권 꼴로 ‘비평의 모험’이니 ‘근대성의 탐색’이니 하는 거창한 간판을 붙이고 출간된다. 비공식통계이지만 가장 넓은 독자층을 거느린 이명원 씨의 책이, 그것도 화제와 논란이 됐었던 경우 1만부 정도가 소화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그 많은 비평가 중에 그야말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극소수이고, 좀 읽힌다는 20~30명의 비평가군이 대개 1천부 수준을 맴돌 것으로 예상된다. 나머지는 2백부에서 5백부의 판매실적을 올린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 같다. 이 가운데 저자가 자기 책을 많이 사 갈테니 서점에서 팔린 걸로 따지면 1~2백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씨니컬과 샤프함으로 먹고 산다는 비평가 집단이 스스로의 설자리를 갉아먹으며 점점 침몰하는 미련곰퉁이 같은 융통성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글이 안 읽히고 안 팔리면 재빨리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하는데, 맨날 독자들이 수준이 낮다느니 인문학이 외면당한다느니 하는 비겁한 변명만 해대며, 이놈인지 저놈인지 구별되지 않는 비슷비슷한 먹성과 글빨로 토해내기만 하니 그 몰려오는 악취를 무슨 비위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문학비평이 외면당하는 이유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제목과 목차의 문제점이다. 요즘 비평집들은 제목들이 하나같이 근사하다. ‘켄타우로스의 비평’, ‘미래파’, ‘변장한 유토피아’, ‘경이로운 차이들’, ‘비평극장의 유령들’, ‘뒤돌아보지 않는 오르페우스’ 등등. 그 안의 목차는 또 어떤가. ‘은유의 정치학과 자생적 운명의 발견’, ‘망각과 기억의 정치 혹은 원한의 멜랑콜리’, ‘리토리넬로, 혹은 생을 이끌어가는 힘에 대한 사유’, ‘스키조와 아나키’ 등등. 쳐다만 봐도 해골이 뱅뱅 돌 정도로 현란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렇게들 겉멋을 부릴까 한심할 정도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평언어로 변장’한 뼛속 깊이 본질화 된 겉멋들인 셈이다. 겉멋은 그를 따라다니는 소수의 고삐리 여중생들에게는 통할지 모르나,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적 독서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하기 일쑤다. 나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꾸며서 남보다 돋보이게 하는 수사학의 기본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버터 냄새 진동하는 동어반복이 계속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1만부가 팔린 이명원의 ‘파문’이나, 그리고 꽤 많은 독자들이 손길을 뻗었을 권성우의 ‘논쟁과 상처’를 앞서의 비평집 제목들과 비교해보자. 먼저 이명원의 책은 문단에 문제를 제기해 잔잔한 호수에 파문(波紋)을 일으켰던 논쟁적인 글들을 모았다는 뜻에서 붙인 제목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 제목엔 성역 없는 비평행위로 인해 주류문단에서 축출당했다(破門)는 의미도 함께 들어있다. 사실 그러한 사실이 독자들의 마음에 주는 파문도 만만치 않게 제목을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책의 내용을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권성우 또한 마찬가지다. ‘논쟁과 상처’는 이젠 젊은 날의 논쟁을 좀 접고 논쟁 과정에서 자신이 입었던 혹은 가했던 상처를 보듬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은 제목이다. 제목 자체가 실존적이고 당대적이고, 동료 비평가나 문인들과의 대화관계 속에 놓여있다. 자고로 제목은 이런 것이다. 맘대로 갖다 부친다고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니다. 직업이 문학기자인지라 앞에서 언급한 겉멋들린 책들을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한다. 여기엔 혹시나 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나의 선입견과 돼먹지 않은 취향 때문에 이들의 진정성이 짓밟히고 묻혀버리면 어쩌지 하는 노파심도 물론 있다. 하지만 절망은 쭈욱 계속된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시인이나 소설가 이름 뒤에 ‘論’을 붙여가지고 시인은 시인끼리, 소설가는 소설가끼리 모으거나, 아니면 비슷한 경향의 문인들을 우리에 몰아넣듯이 대충 구획하여 장(章)을 구성해놓는 것이다. 이것은 비평가들이 저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때그때 청탁에 응하여 작가론이나 시인론을 쓰고 그것이 쌓이면 책으로 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런 방식도 거를 건 거르고 나름대로 책으로 묶어내도 될만한 것들을 엮어내는 최소한의 성의 속에서 진행된다면 나쁘진 않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해설’이나 ‘발문’이라는 이름으로 씌어진 글들까지 아무런 자의식 없이 비평집 속에 포함시키니 무슨무슨 論자가 붙은 책들은 자연스럽게 꺼리게 된다. 읽기 전부터 이런 상황들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책을 읽어싶을 리가 없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계속 읽어보고자 한다. 그런데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다. 엉터리 번역서를 읽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비평이라면 작품을 꼼꼼히 읽고, 비평가의 내면과 잘 섞어서 풀이하고 부족한 것은 비판도 하면 될 것인데 이런 내용들은 잘 찾아볼 수가 없다. 몇 년 전에는 라캉, 푸코, 들뢰즈 같은 채 소화되지 않은 외국이론들로 도배가 되어있더니, 요즘은 알랭 바디우, 홉스봄, 프랑코 모레티 같은 사람들로 또 2차도배가 되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시(詩)라는 게 얼마나 어렵고 알쏭달쏭하고 미묘한 해석의 차이 속에 놓여있는 텍스트인가. 비평가는 1차적으로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잡아내면 된다. 그리고 의미전달 기능을 넘어선 감성적 기능들, 언어적 묘미들의 재현상태를 비평의 언어로 묘사하는 것도 당연한 비평의 기능일 것이다. 그런데 명료해져야 할 때 요즘의 비평들은 오히려 더 불투명해진다. 시를 이론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시에 등장하는 상징이나 비유들을 살살 간지럽혀서 탁 터지게 해줘야 하는데, 그 숨구멍을 오히려 개념으로 틀어막고 앉아있으니 도무지가 읽혀지지가 않는 것이다. 이건 정말 나쁜 습관이다. 시나 소설이 비평가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철저하게 추구하려기보다, 스스로 막히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럴 듯한 이론적 문맥을 불러와 덧입히고, 아니면 평소의 문학작품을 마루타로 삼아 자신이 읽은 외국이론들을 되새김질 하는 아름답지 못한 풍경은 더 이상 연출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과잉이론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학비평을 읽다보면 답답해진다. 의미가 통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손님을 초대해놓고 편하게 앉을 자리 하나 마련해 놓지 않은 주인장의 이상한 심보 때문이다. 여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단 공간이 없다. 글을 써내려가는 호흡도 가쁘고, 개념들이 코카콜라 속의 탄산처럼 많아서 목을 쏜다. 문체는 또 얼마나 건조한가. 아니면 얼마나 질척거리는가. 감수성이 풍부한 비평가는 감정을 글 속에 잘 발효시키지만, 그렇지 못한 비평가는 감정을 싣는 데 어색하거나 확 쏟아부어버린다. 상황이 이러니 비평이 읽히지 않는다고 독자 탓할 이유는 전혀 없다. 비평은 그와 동년배 비평가나 문인들부터 감동시키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자기 후배를 붙잡고 두드려 패서라도 좋은 책이니까 읽으라고 권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빡빡해서 미숫가루를 한웅큼 삼킨 것 같은 문학비평들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 건조해졌을까에 대해서 분석해야 한다. 이미 많은 원인들이 분석돼 있으나, 권하고 싶은 것은 작품을 도식(圖式)으로 읽지말고 흐름으로 읽으라는 것이다. 도식구조에서는 위와 아래, 좌와 우가 서로를 받치는 구조, 이것들이 복잡하게 늘어선 구조가 중요해진다. 초등학교 운동장 시이소 옆에 놓인 정글짐(상자사다리)처럼 격자구조가 되는 것이다. 맨날 근대적 사유의 격자구조를 비판하는 비평가들은 본인의 글이 딱 그 꼴이라는 점부터 알아줬으면 좋겠다. 흐름으로서의 작품에는 몸을 실을 수 있지만, 구조의 격자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빠져나올까부터 먼저 고민하게 된다. 요령껏 빠져나오더라도 그가 헤쳐나온 흔적은 앙상한 골조에 불과하다. 만약 비평가 스스로 그런 일이 재미있어 죽겠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제발 오만 상을 찌푸리면서, 아니면 현실 속의 본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과 숭고함에 도취되어서 사람들에게 부담 주는 그런 글쓰기는 제발 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오늘날 문학비평이 살아남는 방법 중의 가장 첩경은 스스로 소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하나 얘기하자면, 비평가들이 시나 소설을 인용하는 방식이 독서에 굉장히 큰 장애가 된다. 나는 이것도 논문식 글쓰기가 비평에 미친 악영향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겹따옴표 투성이의 글은 잘못 어설프게 사용하면 글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인용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의 글 속에 끌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것이다. 그 이질적인 것을 잘 활용해서 자신의 문맥 속에 녹이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고수들이나 패러프래이즈를 사용해야지 아무나 해서는 안 그래도 깨지기 쉬운 약한 문맥이나 문채가 회복불가능하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교육에서 유래한다. 제대로 기본을 가르치지 않는 비평교육부터 손봐야 하지만 너무 지난한 일이다. 아무튼 스스로 자라지 않고 양육되는 비평가, 심하게 얘기한다면 사육되는 비평가에게 압도적인 비평적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본인이 오랜기간 내적으로 다져온 문학적 세계관이나 고유의 글쓰기 관습 속에서 비평을 하는 게 아니라, 교육받을 당시의 주변환경, 대학원 지도교수나 선배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담론이나 소재거리에 도취적으로 빠져들면서 비평을 학습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컨베이어벨트화 된 비평가 양육제도 속에서의 자기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평생 별 쓸모없는 소리 하면서 늙어가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비평쓰레기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대해, 아니 적어도 비평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우려하지 않는다. 원래 제대로 된 비평가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비평가는 제대로 된 시인이나 소설가보다 더 적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감동을 주는 비평언어들이 우리 주변에 아직 남아있다. 이 원고는 중대신문 최근호에 게재된 글입니다(2006.5.28) (이선우 홈페이지에서 퍼 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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