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을 안고
김 기 림
녹두(綠豆)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寒帶)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
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풍채는 나로 하여금 때때
로 그 주위를
'몽·파르나스'로 환각 시킨다. 그렇건마는 며칠 전 어느날 오후에 그의 시집
『사슴』을 받아 들고는 외모와는 너무나 딴판인 그의
육체의 또 다른 비밀에 부딪쳤을때
나의 놀램은 오히려 당황에 가까운 것이었다.
표장(表裝)으로부터 종이·활자·여백의 배정에
이르기까지 그 시인의 주관의 호흡과 맥
박과 취미를 이처럼 강하고 솔직하게 나타낸 시집을 나는 조선서는 처음
보았다.
백석의 시에 대해서는 벌써 《조광》지상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친분을 느꺼오던 터이지
만 이번에 한 권의
시집으로 성과된 것과 대면하고는 나의 머리의 한구석에 아직까지는 다
소 몽롱했던 시인 白石의 너무나 뚜렷한 존재의 굳센 자기 주장에 거의
압도되었다.
'유니크'하다고 하는 것은 한 시인, 한 작품의 생명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어떠한 시인이나
작품에 우리가
매혹하는 것은 그의 또는 그것의 '유니크'한 풍모에 틀림없다.
시집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다. 그리
고 그 속에서 실로 속임없는 향토의 얼굴이 표정한다. 그렇건마는 우리는 거기서 아무러한
회상적인
감상주의에도, 불어오는 복고주의에도 만나지 않아서 더없이 유쾌하다.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哀傷的)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 그것 속에 빠
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차라리
거의
철석(鐵石)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주선다.
그 점에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
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유니크'하다는 것은 그의 작품의
성격에 대한 형용이지만 또한 그태도에 있어서 우리를
경복(敬服)시키는 것은 한걸음의 양보의 여지조차를 보이지 않는 그 치열한
비타협성이다.
어디까지든지 그 일류의 풍모를 잃지 아니한 한 권의 시집을 그는 실로 한 개의 포탄을 던
지는 것처럼 새해 첫머리에
시단에 내던졌다.
그러나 그는 그가 내던진 포탄의 영향에 대하여는 도무지 고려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결코 일부러 사람들에게
향하여 그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유(阿諛 : 빌붙
임. 아첨함) 라고 하는 것은 그하고는 무릇 거리가 먼 예외다.
그러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그를 인정시키고야 만다. 누가 그 순결한 자세에 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온실
속의 고사리가 아니다. 표본실의 인조 사슴은 더군다나 아니다.
심산유곡의 영기를 그대로 감춘 한 마리의 '사슴'은 이미 시인의 품을
떠나서 달려가고 있
다.
그가 가지고 온 산나물은 우리들의 미각에 한 경이임을 잊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 아담하고
초연한『사슴』을 안고 느낀 감격의 일단이나마 동호의 여러 벗에게 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상기같은 기쁨을 가지기를 독자에게 권하려
한다. 妄言多識.
(《朝鮮日報》
1936. 1.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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