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다중매체 시대에 있어서 문학의 기능

이강기 2015. 10. 2. 08:34

다중매체 시대에 있어서 문학의 기능

                               - 김래현
(서울여자대학교)

서문

“다중매체 시대에 있어서 문학의 기능”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우선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토론의 대상인 “문학”의 미래가 확실치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에 문학의 내용과 형식, 또는 장르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다중매체 시대에 문학이 과연 지금까지의 문화적, 사회적 가치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을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소위 정보혁명의 물결은 문학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 예견을 외면할 수 없게 할만큼 인쇄문화와 문자문화에 “압박”을 가하고 있고, 이러한 배경에서 문학이 미래에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종이 위에 손으로 씌어진, 또는 인쇄된 문자텍스트의 매체를 통해 표현될 것인가 아니면 전자매체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쇄, 출판과정을 거쳐 출판되는 책이 정보시대의 가장 중요한 척도인 “속도”에 부응하기 어렵고, 따라서 많은 영역에서 인쇄매체로부터 전자매체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리라고 본다면, 정보혁명은 문자문화의 시작 이후 필사 또는 인쇄에 의해 종이 위에 고정된 텍스트로서 작가와 독자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해온 문학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과연 책은 사라지게 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문학은 인쇄매체를 단념하고 새로운 (전자)매체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게 될 것인가, 아니면, 빌렘 플루써(Vilem Flusser)가 말하고 있듯이, 문자가 아니라 전자코드로 프로그래밍되는 컴퓨터문학에 의해 대치될 것인가? 또는 책을 매체로 하는 종래의 고전적 의미의 문학과 새로운 전자문학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궤도로 발전해나가게 될 것인가? 최근 문학이론가들 사이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지금으로서 대부분 사변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역시 정보시대에 있어서 문학에 관한 토론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어도 좋을 듯하다.

비록 빌렘 플루써의 예견을 비롯하여 문자텍스트, 또는 인쇄된 텍스트로서의 문학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예견을 현재로서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정보혁명으로부터 초연하게 지금까지의 형태로 존재를 계속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소박한 것일 수 있다. 매체의 변환은 단순히 도구의 기술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표현형식과 인식형식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술문학으로부터 오늘날 인쇄매체를 통한 문학으로 이어져 오면서 문학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문학의 생산, 수용의 방식이 변화되어온 사실에 유추해볼 때, 미래에 인쇄매체로부터 전자매체로의 전환이 문학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음을 예견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전자매체로의 전환은 지금까지의 매체의 발전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어쩌면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될지 모른다.

전자혁명은 한마디로 “속도주의”(Tachokratie)를 가치의 척도로 하고 있다. 정보혁명을 선도하고 있는 컴퓨터 기술은 바야흐로 인류를 끝없는 속도경쟁, 또는 속도전쟁으로 이끌어가고 있고, 속도는 이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정보의 가치를 결정하며, 그것은 곧 생산성과 효율성, 그리고 나아가서는 경쟁력을 결정한다. 이처럼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모든 텍스트, 모든 담론의 의미와 가치가 일차적으로 “속도주의” 또는 “정보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때 문학이 미래에 여전히 지금까지와 같은 문화적, 사회적 가치룰 주장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해서, 정보시대에 “정보”의 중재를 일차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 문학이 파울 첼란(Paul Celan)의 말을 원용하자면, ‘인지하는 자, 주의를 기울이는 자, 나타나 보이는 것에 관심을 받치는 자, 그리고 그것에 물음을 던지고 말을 거는 자’(die eines Wahrnehmenden und Aufmerksamen, dem Erscheinen Zugewandten, das Erscheinende Befragenden und Ansprechenden)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티아스 루제르케(Matthias Luserke)가 문학을 “느린 동작의 몸짓”(die Geste der langsamen Bewegung)으로 규정하고 있듯이, 문학은 정보사회의 속도경쟁에 결코 동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속도의 독재” (seine Macht auf die Herrschaft der Schnelligkeit)를 거부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토마스 만(Thomas Mann)의 표현대로,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인류의 동반자로서“, 굳이 자신의 존재의 당위성을 해명해야하는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존재해왔다. 그런데 기존의 미디어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소위 정보혁명의 시대에 문학이 여전히 “자율성”의 논리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문학의 기능과 연관하여, 인간이 “말을 타고 다니든, 기차를 타고 다니든, 아니면 로켓트를 타고 대륙과 대륙 사이를, 달과 달 사이를 오가더라도 시가 하는 일은 항상 동일하다”는 시인 힐데 도민(Hilde Domin)의 주장이 “속도”와 “정보”가 사회적 가치를 규정하는 정보시대에도 여전히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검토를 요하고 있다.

다중매체 시대에 있어서 문학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일은 이처럼 불확실한, 또는 비관적인 문학의 미래를 전제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전제는 일차적으로 정보시대에 있어서 문학의 존재의 당위성에 대한 해명을 불가피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정보가치가 모든 담론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그리고 대중매체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고 있는 시대에 문학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일차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문학이론가들 사이에서 간혹 ‘문학적 텍스트’와 ‘비문학적 텍스트’사이의 경계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도 문학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정보시대에 문학이 ‘문학성’(Literaritat)를 포기하고 대중에게 다가섬으로써 능동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일부 이론가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 과연 이들의 주장처럼 정보시대의 이념에 부응하여 정보시대의 대중문화에 동참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학은 오히려 대중의 요구에 초연하게, 다시 말해서 정보시대의 “속도주의”(Tachokratie)에 초연하게 “대중문화의 독재” (Tyrannei der Massenkultur)로부터 자신의 “자율성”을 지켜나가야 할 것인가?

다중매체 시대의 문학의 기능을 밝히는 일은 문학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과제와 기능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환언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의 시도를 위해서는 다중매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더불어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정보기술”과 “인간”의 상호 영향관계를 폭 넓게 규명하는 일은 미디어과학 또는 미디어사회학의 과제로서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 글은 TV와 인터넷, 그리고 문학텍스트의 담론적 특징을 비교함으로써 다중매체의 올바른 인식과 더불어 문학의 가치와 기능에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 다중매체를 통한 정보 수용과 문학텍스트의 독서가 각기 인간의 사고와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비교함으로써 다중매체의 맹목적 소비의 문제점을 밝히고 나아가서 정보시대의 문학의 가치와 기능에 눈을 돌리게 하고자 한다.


Ⅰ. 정보혁명과 인쇄매체

1. 구텐베르크시대의 종말?


21세기로의 전환기에 소위 “정보혁명”을 선도하고 있는 컴퓨터는 매스커뮤니케이션, 텔레커뮤니케이션 등 종래의 정보통신 매체들을 통합하는 ’매체‘로 자리잡으면서 지금까지의 커뮤니케이션의 제반 조건과 환경을 바꾸어놓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처럼 거대한 조직의 기관이나 송신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보내지는 메시지를 수신하던 단방향 커뮤니케이션 대신에 수신자로 하여금 직접 정보(텍스트)의 작성과 변형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송신자와 수신자의 경계가 해체되는 소위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열고 있다. 또한 컴퓨터 기술은 문자, 영상, 음성을 통합하는 정보 텍스트를 다양하게 작성하고 저장시킬 수 있게 해주며, 통신네트워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개인과 개인, 그리고 공동체간의 커뮤니케이션의 폭을 거의 무제한 확대시킴으로써 정보의 생산과 교환에 혁명적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오늘날 정보혁명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말대로,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중추신경체계까지를 확장시킴으로써, 어쩌면 기계화시대 이후 시작된 “인간의 확장”을 완성시켜가고 있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모든 미디어 또는 모든 기술이 그래왔듯이, 컴퓨터의 디지털 매체는 인간과 사회에 새로운 ‘속도’와 ‘척도’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 혁명이 수반하게 될 속도와 척도는 미래에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행동은 물론 인간의 의식과 사고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컴퓨터의 정보처리 기술은 이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중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생산, 교환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과학이나 의학 등 학문의 분야에서 인간의 인지능력을 벗어나는 현상의 실험과 모델을 가능케 하기도 하고, 문학, 예술, 그리고 오락과 레크레이션 영역에 있어서 소위 “가상공간”의 체험을 가능케 하고 있다. 컴퓨터 기술이 실현시키고 있는 실용적 가치는 이미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고 있고, 이러한 변화가 미래에 더욱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것을 예견하기 어렵지 않다.

정보의 생산과 교환의 관점에서 볼 때, 컴퓨터 기술에 따른 디지털혁명은 한마디로 지금까지 물리적으로 기록, 또는 인쇄된 매체를 전자매체로 전환시키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붓이나 펜, 또는 타자기로 물리적 표면 위에 문자, 또는 숫자를 기록해온 것과 달리 전자시대의 인간은 키보드를 두드려 화면에 디지털 문자, 또는 숫자를 써넣음으로써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화면에 기록된 디지털 문자와 숫자는 종이 위의 그것들과는 달리 마음대로 변형, 편집할 수도 있고, 흔적 없이 지워버리거나 쉽게 저장할 수도 있으며, 네트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지구촌 곳곳에 송신할 수도 있다.

오늘날 키보드로 모니터에 글을 쓰고 금속활자 대신 디지털 코드로 인쇄하는 일은 빠른 속도로 일상화되고 있다. 사무실에서의 문서나 학생들의 보고서, 그리고 작가들의 창작물에 이르기까지 키보드와 모니터가 이미 가장 편리한 글쓰기의 도구로 자리잡아 가면서 이제 그것이 머지 않아 우리의 책상으로부터 펜과 종이를 사라지게 만들 것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또한 컴퓨터는 누구나 텍스트의 생산에 참여하여 문자, 음향, 영상을 통합하는 텍스트의 편집, 작성, 저장, 송신을 가능케 함으로써 문자저장매체인 책이나 음성저장매체인 녹음기, 영상저장매체인 비디오, 그리고 전신이나 텔레팩스와 같은 종래의 통신매체를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컴퓨터는 정보의 작성, 편집, 복사, 저장을 용이케 할뿐만 아니라, 작성된 정보를 공간적 제약 없이 거의 실시간에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그 동안 인류가 사용해온 기존의 정보, 통신수단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기능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시켜가고 있다.

사실 컴퓨터 기술이 제공하는 편의성과 효율성을 외면한 채 미래에도 종래의 도구로 글쓰기를 고집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예견해도 좋다. 컴퓨터가 대중화되어 가는 시대에 있어서 종이제조와 인쇄과정은 이제 속도와 생산성에 대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고, 엄청난 정보의 수요와 공급을 감당하기에 종래의 인쇄매체는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미 신문이나 잡지는 물론 책의 인쇄에 있어서 금속활자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이제 서서히 구텐베르크 시대의 막을 내려가고 있다고 보는 것을 성급한 견해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일부 미디어학자들은 금속활자 시대나 책의 종말을 예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쩌면 “문자” 자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견을 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가 고대문자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문자. 글쓰기에 미래가 있는가?(Die Schrift. Hat Schreiben Zukunft?)>라는 제목의 책에서 빌렘 플루써는, “자모음과 문자기호로의 글쓰기에는 전혀 혹은 거의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내다보고 있다. 문자기호라는 코드보다 정보를 더 잘 전달하는 코드들이 계속 개발, 발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문자로 기록되던 많은 것들이 카세트테이프, 음반, 필름, 비디오테이프, 마이크로필름 또는 디스켓으로 더 잘 보존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지금까지는 문자로 기록될 수 없었던 것들이 이러한 새로운 코드들로는 기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새로운 코드의 정보들은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들보다 더 간편하게 생산, 수용, 저장될 수 있으며, 따라서 미래에는 새로운 코드를 이용해서 기존의 알파벳이나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정치를 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플루써는 예견한다. 플루써는, “그렇게 된다면 문자코드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인도의 매듭문자가 그랬던 것처럼 도태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고 전망한다.

문자(코드)가 마치 고대의 상형문자와 마찬가지로 도태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플루써의 예견에 당장 수긍하기는 쉽지 않다. 미디어의 역사에 있어서 문자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저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부재중이거나 미지의 사람에게 메시지의 전달을 최초로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나아가서 문자는 한마디로 그것이 없이는 인간의 존재자체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수 천년 동안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형성해 왔고, 역사와 문화, 학문과 기술을 가능케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플루써의 예견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새로운 매체에 대한 거부감, 또는 플루써의 말대로, 수 천년 동안 쌓여진 인습 때문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그것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있었고 문자의 가치 또한 처음부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었던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책과 전자매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문자나 인쇄매체가 인간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고 있지만,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idros)>에서 소크라테스가 들려주는 타무스(Thamus)와 토이트(Theuth)의 대화는 문자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그것의 유용성에 대해 긍정적 시각 못지 않게 비판적 시각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자가 인간의 기억력을 풍부하게 해주며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칭송하는 토이트에게 이집트의 왕 타무스는, 문자는 오히려 기억을 소홀히 함으로써 배우는 사람의 영혼에 망각을 불어넣어줄 뿐이라고 응답한다. “왜냐하면 그들[배우는 사람들]은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회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기호를 수단으로 회상하기 때문이다”라고 타무스는 말한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경계와 비판은 인쇄술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쇄시대 초기에 베이컨은 인쇄매체가 인간의 회상을 상실케 하리라는 우려에서, 그것이 인간을 “제 2의 중세”(ein zweites Mittelalter)에 빠뜨리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었다.

물론 문자매체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이나 베이컨의 이러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책이 없이 오늘날과 같은 학문과 문화의 발전이 가능했으리라고 믿을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은, 베이컨의 염려와는 달리, 인류를 중세의 암흑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었다. 한마디로 목판활자, 그리고 15세기 금속활자의 발명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텍스트의 대량 복사를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텍스트에 대한 중세의 신비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정보의 저장과 교환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었다. 그것이 또한 교육의 민주화, 정치의 민주화의 초석이었고, 학문과 문화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책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지금까지 가장 훌륭한 정보매체의 자리를 지켜왔다. 책이란 표지 안에 인쇄되어 있는 여러 가지 크기의 텍스트로서 손으로 집어서 만져볼 수도 있고, 펴서 들춰보거나 읽을 수도 있는 이용이 편리한 정보매체였다. 그것은 어느 때나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그 안에 메모를 할 수도 있으며, 읽는 속도를 빨리 할 수도 있고 느리게 할 수도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무수히 반복할 수 있고, 재미없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가장 이용이 편리한 정보매체였다.

그러나 한편 책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장점과 특징들이 오늘날 더 이상 책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 특히 노트북 컴퓨터는 이미 이러한 책의 일부 특성을 지니고 있거나 또는 그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물론 텍스트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서 필요한 낱말이나 텍스트의 위치를 불과 몇 초 내에 찾아내어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지금까지의 책과는 달리, 언어, 음성, 영상을 합성하고 변형시켜 저장하게 해줌으로써 인쇄매체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차원의 텍스트를 실현시키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장이나 정전으로 인해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앞으로 기술의 발달에 따라 최소화될 수 있다고 볼 때, ‘배가 파선되어 외딴 섬에 고립된 경우에도 책이 여전히 가장 유용한 매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주장이 미래에도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래에 인쇄매체가 전자매체의 경쟁대상이 될 수 없으리라는 징후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대표적 인쇄매체인 신문, 잡지가 가장 앞서서 인터넷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고, 백과사전이 속속 CD- ROM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학술논문 및 고전 문학작품들도 전자매체화 되고 있다. 1993년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에서 멀티미디어-상품들이 처음으로 한 전시관을 차지한 후 출판사들도 전자매체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발빠른 변화를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다도 텍스트의 편집에서부터 통신에 이르기까지 전자매체가 실로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인 동시에, 소위 “정보사회”에 있어서 종래 방식의 인쇄에 필요한 낭비와 지출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미래에 책이 전자매체에 의해 대치되리라는 일부 미디어 학자들의 예견을 전혀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외면할 수만은 없는 것이겠다.


3. 인쇄매체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

물론 책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리라는 예견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주장되고 있을 뿐, 현재로서는 많은 학자들이 인쇄매체가 위축될 수 있으되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페터 루스터홀쯔(Peter Rusterholz)에 의하면, ‘독서문화의 몰락을 예견하는 사람들의 비관주의가 그동안 오히려 수그러들고 있다’고 한다. 죠프리 눈베르크(Geoffrey Nunberg)는 미래에 인쇄매체의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넓은 의미의 책들 중 다수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으로 보지만, 그것들은 다만 어떤 분야의 책들에 한정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사라지게 될 것 중 대부분은 카탈로그, 사용설명서를 비롯하여 단순한 기록물 등, 문화적 의미는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눈베르크는, 어떤 것은 전자매체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어떤 것들은 인쇄매체와 전자매체 사이에서 계속 살아남게 될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전적으로 인쇄매체를 고집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눈베르크는 가령 ‘소설이나 정치적 회고록 등의 경우 전자매체로의 대치를 이야기하기엔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또한 최근 컴퓨터의 화면이 종이보다 읽기에 부적합하다는 연구발표는 일단 인쇄매체의 존재가치에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드레스덴에서 열린 제 41차 독일 심리학회에서의 발표에 의하면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를 읽는 사람이 모니터로 텍스트를 읽는 사람보다 실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읽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아헨의 심리학자 마티나 찌플레(Martina Ziefle)가 실험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시험대상자들은 모니터로 텍스트를 읽을 경우 평균 10%의 시간을 더 소비했다. 콘트라스트, 영상, 화소 등 화면의 질을 높임에 따라 성과는 높아졌지만, 가장 질이 좋은 화면의 경우에도 종이 위의 텍스트를 읽는 만큼의 성과에 미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역시 많은 영역에 있어서 전자매체의 실용성과 우수성을 인정하지만 책이 전자매체에 의해 완전히 대치될 수는 없다는 관점이다. 에코는 컴퓨터가 예를 들어 백과사전이나 사용설명서 등 여러 종류의 책들을 쓸모 없게 만들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옛날에 외국어를 책으로 배운 것과 달리 오늘날 레코드를 듣거나 영화를 보면서 외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낯선 나라에 대한 지리적 정보도 TV나 영화를 통해서 더욱 잘 알 수 있게 되며, 쇼팽의 음악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CD로 음악을 듣고 해설도 들을 수 있게 되는 등, 많은 경우 새로운 매체가 책을 쓸모 없게 만들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래에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기록된 커뮤니케이션’을 여러 분야에서 압도하게 될 것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는 문자기록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소멸될 가능성은 결코 없을 것으로 단정한다: "책은 문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사고하고 성찰하기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에코는 인류의 문화에서 어떤 새로운 기술이 이전의 기술의 역할을 없애버린 적은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영화와 문학, 사진과 미술을 예로 들어, 그것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퇴치, 또는 대치해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발전해왔음을 근거로 제시한다. 에코에 의하면, 사진의 발명은 화가들을 모방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킨 것이었다. 다게르(Daguerre)의 사진 이후 화가들은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현실을 재현하는 장인으로서 봉사할 의무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에코는 이와 비슷하게 영화의 등장 이후 문학이 전통적으로 수행해온 일종의 서사적 과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비록 새로운 미디어가 책을 변화시키고, 어떤 형태로든 자극을 주겠지만 책이 새 매체들에 의해 소멸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코는, 컴퓨터가 책을, 그리고 기록되거나 인쇄된 자료들을 쓸모 없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한 질문은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 뿐, 미디어의 이해와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Ⅱ. 현대인의 “2차 문맹”(Sekundarer Analphabetismus):
시각매체의 대중화와 독서능력, 독서문화


에코의 제언에 따라 인쇄매체의 소멸여부를 가리는 질문을 일단 유보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인쇄매체가 크게 위축될 운명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글의 주제와 연관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쇄매체의 위축이 단순히 출판물의 양적 감소에 그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눈베르크의 주장대로, 문학이 미래에 책을 고집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와 같은 독자의 관심과 이해를 전제로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파울 첼란의 말을 다시 한 번 원용하자면, 미래에도 문학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 그리고 ‘그것에 물음을 던지고 그것에 말을 거는 자’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어쩌면 컴퓨터가 지금까지 TV 등 대중매체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책과 인간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따라서 인쇄문화 또는 독서문화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볼 때, 미래에 인쇄매체는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인쇄문화 또는 독서문화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영상매체에 의해 변화를 겪어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비록 인쇄매체에 대한 컴퓨터의 영향을 영화나 TV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영상매체가 인쇄매체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다중매체 시대의 문학의 위치를 가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00여년 전 영화의 출현은, 그리고 전후 TV의 급속한 보급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책의 “무덤”(Totengraber)을 떠올리게 할만큼 책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책의 “무덤”을 떠올렸던 예견과는 달리, 영화와 TV의 대중화에도 불구하고 출판되는 책의 양은 최근까지도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일단 책의 미래에 대한 그 동안의 우려를 일축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양적 차원을 떠나 “독서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책의 위기에 대한 우려를 결코 그릇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영화나 TV는 그 동안 도서시장의 구조를 변화시켜왔을 뿐만 아니라, 독서문화에 다분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음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서시장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 동안 여가활용이나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도서가 증가한 반면, 문학, 철학 등 인간의 진지한 사고와 창의적 참여를 요구하는 도서의 수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문학, 철학 분야의 도서의 양적 감소에 그치지 않고, 현대인에게서 사고와 집중력을 요하는 “독서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 중 정보전달 이상의 복잡한 텍스트를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 읽을 능력도 없는 소위 “2차 문맹”(sekundarer Analphabetismus)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교육의 민주화가 실현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현대적 문맹 현상, 즉 “2차 문맹”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인의 이러한 2차 문맹현상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그 동안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연구조사가 뒷받침하고 있듯이, 현대인들의 일상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TV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트 뇔레-노이만 (Elisabeth Noelle-Neumann)에 의하면, TV가 일반화 된지 약 25년 후인 1970년대 미국에서 독서능력 감퇴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며, 미국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스위스에서 군에 입대하는 신병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조사에서도 같은 현상이 밝혀지고 있다.

독일인의 일과시간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성인이 TV를 시청하는 시간은 하루에 평균 두 시간, 그리고 성인 중 27%는 세시간 이상 TV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일수록 시청 시간이 많으며, 이들 중 절반은 거의 매일 19시 이전에 TV를 보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특별히 어느 범주의 방송을 선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기계적으로 TV를 시청하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TV 소비가 제공되는 내용과 거의 무관하게 정해진 일과가 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겠다. 이처럼 현대인의 일상에서 TV는 특별한 의도 없이 거의 기계적, 습관적으로 소비되고 있고,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청자의 의식, 행동방식, 가치관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여러 조사에서 충분히 밝혀지고 있다.

미디어 소비가 독서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TV가 보급되던 초기에 부정적 시각 못지 않게 긍정적 시각이 있었던 사실은 흥미롭다. 1940년대-50년대에 라자르스펠드(Lazarsfeld)와 그의 연구팀은 소위 “그만큼 더욱 더의 법칙”(More-and-More-Regel)을 내세워 TV가 오히려 독서문화에 기여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 법칙의 내용인 즉, 어떤 한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은 다른 매체 역시 그만큼 더 많이 이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매체들이 서로 경쟁관계나 축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자극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TV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은 책을 읽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한때 현대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던 그러한 주장은 1970년대에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 이론이 TV, 신문, 잡지의 경우 통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한편 TV와 독서 사이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었다. 즉 TV를 많이 보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를 더 많이 읽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책“을 읽는 시간은 감소하며, 반면에 TV를 적게 시청하는 사람일수록 보다 많은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TV는 말하자면 ”책을 잡아먹는 적“(Fressfeind der Bucher)으로 판명이 된 것이다. 오늘날 신문, 잡지, 사용설명서 등 정보지의 독서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는 한편 문학작품 등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책들의 독서율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노이만의 도서시장 연구조사는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독서율의 감소는 단순히 책과 접하는 시간이 감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상대중매체인 TV가 책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담론의 형식과 내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고, 이러한 TV 고유의 특징이 곧 독서능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 TV와 인터넷의 담론적 특징

1. TV 프로그램의 오락성과 담론의 단편성


TV는, 닐 포스트맨(Neil Postman)이 정의하고 있듯이, 일차적으로 시각매체(visuelles Medium), 즉 낱말이 아니라 영상을 통한 정보 교환 매체이다. 물론 TV에서는 영상과 더불어 소리가 메시지의 전달에 이용되지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각적 연출을 통해 “보여주는 것”(presentation)이다. 포스트맨이 예로 들고 있듯이, 어떤 사람이 글을 쓰거나 또는 라디오를 통해서 청중에게 말을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외형적 측면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TV 담론의 형식은, 포스트맨에 의하면, 내용보다 외형에, 사고보다 시각에 가치를 부여하게 만든다. 영상매체의 이러한 담론 형식은 TV의 내용을 본질적으로 결정짓는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TV앞에 보는 사람으로 앉아 있는 것이지 독자나 청자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TV를 보는[필자 강조] 것이며”, “이것은 성인이나 어린이, 지식인이나 노동자, 영리한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라고 포스트맨은 말한다. 포스트맨은 낱말과 문장의 복합성에 있어서 변화무쌍하고 그에 따라 독자의 능력이 차이를 보이는 책의 경우와는 달리 TV 영상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하고, 또한 “TV는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능력을 발전시키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다머렐(Damerall)의 말을 인용하여, “아이나 어른이나 TV를 많이 본다고 해서 그만큼 더 훌륭한 TV시청자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쇄매체의 경우와 달리 TV의 시각 기호, 즉 영상의 수신에 있어서 특별한 능력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TV가 현대인의 일상에서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자리잡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TV 프로그램의 시청은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일보다 편하고 쉬운 일일 뿐 아니라, 집중력이나 긴장을 요하지도 않으며, 쉽게 정보와 오락에 대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TV가 이처럼 쉽고 편안하게 현대인의 오락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시각매체라는 사실은 TV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TV는 공영방송국에 의해 운영되던 초기와 달리 오늘날 대부분 상업성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 사설 방송국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근래 사설방송국의 수가 급증하고 있고, 위성 및 케이블네트워크를 통해 제공되는 TV 방송 프로그램은 거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TV 프로그램의 증가가 한편으로는 시청자에게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의 정보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설방송국의 급증은 소위 “문화기구로서의 방송”(Rundfunk als kulturelle Veranstaltung)을 “상품생산기구로서의 방송”(Rundfunk als Ware und Dienstleistung)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오락매체로서의 성격을 더욱 심화시켜가고 있다. 이러한 경쟁속에서는 정보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넓은 대중을 고객으로 만들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상품’이 일차적으로 중시되기 때문이다. 상업 TV방송국의 운영이 시청률과 결부되어 있음으로 해서 이들은 전적으로 집단대중의 취미와 기호에 따라 프로그램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이러한 경쟁은 오락물과 센세이션-저널리즘을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국경을 넘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정보제공을 통한 사회적 서비스나 교육적 내용의 프로그램 보다는 산업화된 오락물들을 경쟁무기로 앞세우고 있다. 즉, 대중의 기호에 부응해야 하는 대중매체의 상업성이 오늘날 대표적인 오락매체로 자리잡고 있는 TV 매체의 성격을 일차적으로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디어는 곧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맥루한의 명제나, 또는 “커뮤니케이션 내용이 미디어를 통해 전달될 때, 그것은 각기 아주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라는 페터 훈찌커(Peter Hunziker)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 결국 커뮤니케이션 참여자들의 태도가 필연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결정되며, 동시에 이러한 태도는 다시 또 프로그램의 내용과 편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TV의 오락성은 단순히 쇼나 코미디, 또는 멜로드라마 등의 오락프로그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TV가 진지한 내용의 프로그램에 있어서조차도 오락성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TV에서 흔히 정치적, 경제적 사건들이 스캔들 등으로 극화되어 묘사되며, “감추고 싶은 일마저도 바깥세상 것”으로 들추어지거나 “토크쇼, 또는 인터뷰의 소재”로 다루어지며, 가족관계나 성의 문제 등 인간과 사회의 문제들이 고정관념에 따라 단순화되는 것 등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실 텔레비젼은 그것 자체로서는 수준 높은 프로그램으로부터 오락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러나 오늘날 텔레비전의 기능이 진지한 조사와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나 토론보다 일차적으로 대중의 오락에 대한 욕구 충족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TV가 이처럼 매체 자체의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오락매체로 전락하는 이유는 역시 시각매체의 담론적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TV는 빠른 시간에 무수히 교체되는 화상을 통해 사건들을 전달한다. TV는, 포스트맨에 의하면, “부단히 바뀌면서 움직이고 있는, 그리고 한 시간에 1200개에 이르는 영상들을 보여준다”. 장편소설 <젊은 청년(Der junge Mann)>에서 보토 슈트라우스(Botho Strauß)가 묘사하고 있듯이, “방금 젊은 농학교수와 농림부의 관리 두 사람이 돼지고기 속의 약물과 에스트로젠 돼지에 관해 심각하게 논쟁을 벌리는 모습을 함부르크의 전람회장으로부터 생방송으로 본다. 우리가 좀 더 시선을 모아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때쯤이면 그때 막간에 취주악대가 끼어 들어, 우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소에스트(Soest)에 가서 단골식탁에 앉아 있게 되고, 베스트팔렌의 소시지 만드는 비법을 접한다. 벌써 약물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독이 든 음식은 지나가 버린 것이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처럼 빠른 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TV의 담론적 특징을 “세계를 이렇게 저렇게 난도질하는 TV의 통치” (sein weltzerstuckelndes Schalten und Walten)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난도질”이 오늘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보토 슈트라우스가 예시하고 있듯이, TV의 “일일뉴스”는 쉬지 않고 교체되는 화상들을 통해 무수한 단편적 사건들을 중재한다. TV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방화, 살인 등의 사건들을 빠르고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로 하여금 그러한 사건들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TV가 전달하는 이러한 무수한 사건들은, 좀 더 자세히 보면, 사건의 전체적인 배경과 관계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시청자의 의식을 “스쳐 지나가는” 단편적 사건들로서 연계성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Geschichte)로 경험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TV 앞에 앉아 있는 시청자에게는 같은 시각에 수 없이 많은 프로그램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시청자가 어느 한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고 음미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다. 리모콘을 손에 든 시청자들은 어느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거의 모든 채널의 프로그램들을 사냥하는 데 익숙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곧 이어 전혀 다른 프로그램의 시청을 계속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TV 시청자는 처음과 끝 사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결말을 향해 시청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시청자는 그 어떤 순서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것 저것을 골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책과의 비교를 명확히 해주는 가장 중요한 TV의 담론적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인쇄된 책의 경우에도 독자가 중단을 하거나 페이지를 뛰어넘기도 하지만 독자와 책과의 관계는 항상 동일한 순서로 되어 있는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서 비롯되며, 텍스트의 논점이나 이야기는 어떤 정해진 순서에 따라 결말을 향해 전개된다. 요한네스 안데렉(Johannes Anderegg)의 표현대로,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엔 독서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열어 가는 것”이다. 즉 TV를 비롯한 대중매체의 경우 텍스트의 수용에 있어서 시간성이 전제되지 않는 데 비해 독서는 시간성 속에서의 텍스트의 수용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비교는, TV의 습관적 소비가 독서의 습관과 능력에 미치게 될 부정적 영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2. 하이퍼텍스트: 온라인 텍스트의 담론적 특징

현대인의 “2차 문맹”현상과 연관하여 새로운 통합매체인 컴퓨터를 TV와 같은 차원에서 토론의 대상으로 하는 데에는 이견이 제기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TV가 조직되어진 거대한 기구로부터의 단방향적 커뮤니케이션 매체인데 반해 컴퓨터는 무엇보다도 송신자와 수신자의 엄격한 구분이 해체되는 양방향적 커뮤니케이션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TV의 시청자가 수동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면 컴퓨터의 이용자는 능동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송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컴퓨터의 문서편집 기능과 온라인 기능이 지식, 정보의 교환에 있어서 TV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가능성을 기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와 TV의 단순비교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가, 특히 그것의 온라인 기능에 있어서, 오락이나 단편적 지식 또는 사건을 중재하는 정보매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TV와의 비교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여진다. 지식과 정보의 교환을 위한 웹사이트와 더불어 상업적인 웹사이트가 급증하면서, 음란사이트 등의 오락물이 인터넷을 통해 거의 무제한 제공되고 있으며, 이미 인터넷이 일부 비판가들에게서 “정보의 쓰레기장”으로 불리울 만큼 단편적 정보의 집하장이 되어가고 있다. 소위 “정보사냥”이 유용한 정보 못지 않게 쓸모 없는 정보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 많은 청소년들이 오랜 시간을 오락물이나 에로틱한 프로그램의 탐색에 소비하고 있는 현상이 교육적,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거니와, 사실 청소년들이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에 노출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폐해는 오히려 TV나 비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물론 이러한 폐해를 일반화시켜 컴퓨터의 효용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건전한 이용과 프로그램의 건전한 소비가 전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서문화, 또는 독서능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의 이용이 단순히 책과 접하는 시간을 감소시키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웹사이트의 상업성이나 그것들이 제공하는 오락물들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컴퓨터 매체 특유의 담론 형식, 즉 하이퍼텍스트의 특성 때문이다.

온라인 텍스트 또는 하이퍼텍스트는 시간성과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담론의 형식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이퍼텍스트는 개별적인 텍스트들을, 또는 개별적인 요소들을 서로 연결하는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담론형식이다. 하이퍼텍스트의 저자는 문자, 그라픽, 에니메이션 등의 요소들을 링크(Link)라는 참조지시로 서로 연결시켜놓고 독자는 링크로 표시되어진 낱말이나 그라픽의 일부를 클릭하여 작동시킴으로써 다른 항목이나 페이지, 또는 다른 책으로 안내되는 것이다. 독자가 링크를 마음대로 선택하여 읽는 순서를 마음대로 조작하기도 하고 텍스트들 사이를 넘나들기도 하며 다른 텍스트와 합성할 수 있음으로 해서, 하이퍼텍스트에서 모든 사용자는 텍스트를 새로이 규정하거나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저작권이 존중되는 책과 달리, 작가와 독자의 엄격한 구분이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이퍼텍스트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또는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개개의 독자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변화하는 텍스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이퍼텍스트는 처음부터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텍스트를 끝까지 읽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독서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중단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의 구조적 특징이며,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에서는 독자가 자신의 관심을 사로잡지 않는 내용에 머무를 필요가 없는 것이 극히 당연시되는 것이다.

에코의 비교에 따르자면, 책이 완결된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인 한편, 하이퍼텍스트는 낱말사전 또는 백과사전식의 언어체계(a linguistik or an encyclopedic system)와 같은 구조적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체계”(System)로서의 하이퍼텍스트에서는 모든 항목들, 예를 들어 한 낱말은 정의(Definition)를 통해, 그리고 사건은 보기를 통해 “나선형” 모양의 해석이 무한히 계속된다. 한편 텍스트는 어느 “체계”의 무한한 가능성들을 완결된 하나의 “세계”로 압축시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완결된 “세계”의 이해가 아니라 처음부터 “단편적 지식과 정보”의 “사냥”이 목적이 된다. 이렇게 볼 때 하이퍼텍스트는, 위에서 살펴본 바 있는 TV의 담론적 특징, 즉 “정보의 단편성”을 다시 한번 극대화시키는 담론형식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인터넷 특유의 담론적 형식과 특징은, 문학작품이 요구하는 연속성 속에서의 독서를 사실상 어렵게 한다. 비록 같은 문학작품이 인터넷을 통해 읽혀지게 될 경우라 해도 독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내용은 인터넷의 담론 형식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이퍼텍스트는 문학작품을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최근 실험되고 있는 소위 “온라인문학”, “사이버문학” 역시 이러한 인터넷 특유의 담론적 성격과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의미의 문학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글쓰기로 간주되어 마땅할 것이다.


Ⅳ. 문학텍스트의 담론적 특징: “연계성 있는 이야기”

컴퓨터 기술의 발달은 오늘날 정보의 양과 정보교환의 속도를 부단히 증가시키고 있다. 컴퓨터는 지구촌 곳곳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정보를 매우 빠른 속도로 전달하면서, 현대인의 일상을 단편적 정보의 홍수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 “속도”와 “정보”가 최고 가치로 자리잡고 있는 정보사회에 있어서 문학은 사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설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고 보아 마땅하다. 문학은 단편적 지식과 정보를 빠른 속도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보시대에 대중으로 하여금 문학을 외면하게 하는 이유인 동시에 바로 문학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어떤 행위나 사건의 인간적, 사회적, 도덕적 가치와 의미를 "관계", 또는 총체적 현실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게 하는 문학이야말로 어쩌면 정보시대가 안고 있는 기계적, 단편적 사고의 위험을 견제하는 유일한 가능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닐 포스트맨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정보에 압도되는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이 퇴보하고 있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매일 전달되는 단편적 정보들은 우리가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한 답변이 아니고, 또한 행동을 위해 우리가 찾는 정보가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정보들은 인간을 오히려 무기력하게 할뿐이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터넷에 있어서 전달된 정보는 다음 순간 곧 낡은 것이 되어 또 다른 메시지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이처럼 매일 쌓였다가 의미 없이 사라져 가는 단편적 정보들은 우리 일상의 대화의 소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의미 있는 사고와 행위의 동기가 되지 못한다. 정보시대의 속도주의는 전달되는 메시지들을 자세히 검토하거나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 권의 책을 쓰거나 읽는 일은 “시간”을 요한다. 닐 포스트맨의 말대로, “내용을 설명하고 그것의 가치와 서술형식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세우기까지 시간을 요하는 것이다”. 글쓰기와 읽기의 이러한 “느린 동작의 몸짓”(die Geste der langsamen Bewegung)이 정보사회의 "속도주의“(Tachokratie)에 부응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문학은 어쩌면, 루제르케의 말대로, “속도의 독재”(die Herrschaft der Schnelligkeit)로부터 인간적 가치에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일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소설 <젊은 청년>에서 보토 슈트라우스는 연극 연출자를 지망했으나 좌절을 경험해야하는 젊은 주인공 레온(Leon)과 옛날 그에게 연극 연출을 지도해주었으나 지금은 연극을 떠나 코미디 영화의 감독 겸 배우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바이거르트(Weigert)를 대비시키고 있다. 연극 연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연극을 떠나야 했던 레온과, 한 때 인정받는 연극연출자였고, 지금은 코미디 영화의 감독과 배우로 성공을 거둔 바이거르트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바이거르트가 레온에게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하지만 레온은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제발 토막극 나부랭이는 집어쳐요. 이제 당신은 다시 또 연계성이 있는 위대한 이야기(eine große bundige Geschichte)를 찾아내야 해요.”

레온의 이 말은 어쩌면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그러나 그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작가 슈트라우스 자신의 외로운 외침일 수 있다. ‘이렇다 할 사건의 틀이 없고 분산된 순서에 따라 이야기되어지는 코미디가 대단한 관객을 끌어들이고 성공을 거두는 시대’에 굳이 “연계성 있는 위대한 이야기”(’eine große bundige Geschichte)로 되돌아가라는 레온의 충고는 TV 등 대중매체의 홍수 속에서 ‘연계성 있는 이야기’를 지켜야 하는 당위성을 재확인하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서 그것은 곧 다중매체시대에 있어서 문학의 중요한 기능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빌렘 플루써는, 글쓰기 행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문자기호들의 선형적 진행”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문자기호를 선형적 행으로 질서화하는 글쓰기를 통해서 비로소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계산하고 비판하고 학문을 하며 철학을 할 수 있게 되고, 또한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글쓰기 행위가 인간의 역사의식을 비로소 가능케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플루써는, “문자의 발명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역사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고 모든 것은 단지 그저 사건으로서 발생(ereignen)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자로 글을 쓰기 이전에는 “일어난 일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플루써는 말하고 있다. 즉 “어떤 것이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떤 의식에 의해서 일어난 일(과정)로서 지각되고 파악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학의 기능은, 일단 플루써가 설명하고 있는 이러한 글쓰기의 근본적 의미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문학은 어떤 사건들을 “과정”으로서 지각하고 파악하며 문자기호를 통해 선형적으로 질서화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문학을 역사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이러한 글쓰기의 근본적 의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이 “일어난 일들”을 지각하고 파악하며 문자기호를 통해 질서화한다면, 작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듯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문자기호를 통해 질서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글쓰기와 독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논리적, 비판적 해석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사건, 또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하다가 자살하는 사건 등은 오늘날 흔히 대중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전형적 사건들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될 경우 그러한 사건들은 전체적인 배경이나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한동안 대중의 화제거리에 그치는 것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이, 작가 도스토예브스키나 괴테에 의해 “관계”, 또는 “연계성”속에서 독자에게 전달될 때, 독자는 살해, 또는 자살의 내적 동기와 내적 갈등을 “과정” (Prozeß)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이며, 이 때 그러한 사건들은 나와 무관한 단편적 스캔들을 넘어서서 하나의 “이야기”(Geschichte)로서 현실의 경험과 역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게 되는 것이다. 독일어에서 “Geschichte”라는 낱말이 “역사”, “이야기”, 또는 “소설”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듯이, 독일문학의 전통에서 괴테를 비롯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이 문학의 중요한 기능을 역사인식, 또는 역사해석에서 찾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이야기인 문학이 “일어난 일들”의 기술인 역사보다 더욱 진정한 역사라는 괴테의 주장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문학이 인간의 역사인식, 또는 역사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자임해온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만약 다중매체 시대가 인간을 단편적 정보와 오락프로그램의 홍수 속에 빠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의 “연계성 있는 이야기”를 통해 총체적 현실을 경험하게 하고 해석하게 하는 문학의 기능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어 마땅하다.


Ⅴ. 유용성의 강요와 문학의 과제/기능

이미 1960년대에 시인 힐데 도민(Hilde Domin)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행한 시학강연에서 오늘날 과학의 발달과 컴퓨터 등의 출현으로 “인간과 현실의 관계가 파괴, 해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오늘날 시는 무엇을 위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시를 읽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시를 쓰는가?”라는 제목의 이 강연에서 힐데 도민은 시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의 요구를 다시 한 번 토론에 부치고 있다. 언뜻 보아 강연의 제목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 참여가 문학의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는 1960년대의 대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도민은, 시인 곳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과 같은 관점에서, 시가 현실의 변화 또는 개선에 대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힐데 도민은 학문, 특히 자연과학이 문자 그대로 우리의 현실을 바꾸어 놓고 있지만 자연과학과 기술이 바꾸어 놓는 것은 ‘어떻게’(Wie)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삶의 조건이지, 우리의 삶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의 조건들을 제시한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힐데 도민은, 사회의 변화는 그것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인간의 자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변화는 무가치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비해 시는 우리에게 다른 무엇을 위한 준비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연의 자아와의 만남”(Begegnung mit uns selbst)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도민은 말한다.

“오늘날 시는 무엇을 위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시를 읽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시를 쓰는가?” - 강연의 제목이 이미 시사하고 있듯이, 힐데 도민은 20세기 후반에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시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 수 있는가를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도민은, 이처럼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시를 읽고 쓰는 것보다 신문의 정치면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 것인가?’라고 자조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이 질문으로 도민은 삶의 조건이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유용성이 시의 가치를 부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없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겠다. 도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변화는,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그것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학은 아도르노(Adorno)의 표현대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업” (gesellschaftlich nutzliche Arbeit)을 해내거나 또는 “삶의 물질적 재생산”(zur materiellen Reproduktion des Lebens)에 기여하는 매체가 아니다. 말하자면 문학은 실용적 정보와 지식, 또는 이념을 중재하는 매체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문학에서 역사적, 사회적 정보나 지식을 얻는 경우도 없지 않다. 문학작품이 역사가들에 의해 어느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도큐먼트로 활용되기도 하고, 낯선 세계에 대한 간접 체험을 가능케 하기도 하며, 심리학이나 사회학에 인간개체의, 또는 인간관계의 모델을 제공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 이 외에도 작가가 어느 시대의 도덕적 사표가 되거나, 또는 문학이 정치적, 사회적 이념의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일차적으로 그러한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이념을 선도하는 매체를 추구하지 않는다. 문학은, 르네 웰렉(Rene Wellek)의 표현에 따르자면, “다른 것들에 의해 그대로 성취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효과,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문학은 “다른 것들”에 의해 대신될 수 없는 고유의 기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문학이 만약 자신의 존재를 굳이 정당화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정보시대, 다중매체시대에 있어서도 오로지 문학 고유의 본질과 기능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대중과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거나 이념의 선도를 표방하는 문학이 긴 생명을 가질 수 없음은 사회주의 문학의 예가 잘 보여주고 있다. 문학은 사회적 유용성을 표방할 때 오히려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문학이 지식, 또는 정보를 중재하는 매체를 자처할 경우, 힐데 도민의 말대로, 신문, 잡지의 분석이나 텔레비전의 르뽀따쥐의 경쟁대상이 될 수도 없을 것이며, 나아가서 문학이 오락성으로 대중에게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이것 역시 오늘날 TV나 인터넷의 경쟁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산업화 이후 작가들은 강도 높게 문학의 기능을 사회와의 관계에서 해명하도록 요구받아 왔고, 문학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요구와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관점의 대립은 오늘날까지 문학론의 중요한 흐름을 이끌어왔다. 사실 정보시대에 거론되고 있는 소위 “문학의 위기”는 사회적 요구와 자율성 사이의 논쟁을 재개시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동안의 문학논쟁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요구가 대부분 작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로 실용주의자들과 도덕주의자들,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말하자면 문학 외적 영역의 대변자들에 의해 제기되어온 한편 대부분의 작가들은 문학의 사회적 가치와 유용성보다는 문학의 자율성을 변호해온 것이 사실이다.

곳트프리트 벤이나 힐데 도민처럼 작가들이 문학의 실용적 기능을 앞세우지 않는 것은 그러나 문학이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또는 현실과 무관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념이나 유용성에 대한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지 ‘사회와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가치의 맹목적 숭앙에 대한 작가들의 비판은 사회적 가치의 강요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 곧 문학의 소중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도 좋다. 맹목적인 사회적 가치의 추구는, 보토 슈트라우스의 말대로, 우리를 “미쳐버리게 하거나 또는 멍텅구리(flachkopfig)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풍요가 눈에 보이고, 누구나 수천 가지의 방면에서 관심이 이끌리는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방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가치를, 즉 사회를 관심의 중심에 세우도록 교육받고 있다. 그런데 끊임없이 사회적인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결실 있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쳐버리거나 또는 멍텅구리가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최상의 힘을 허비하는 셈이 될 것이다.

아도르노는 문학이 맹목적인 사회적 가치의 추구로부터 자유로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용성의 강요, 어리석은 자기보존의 강요로부터 자유로운, 순결한 낱말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사회적이다.

유용성의 강요로부터 자유로운, “순결한 언어의 추구”자체를 통해서 문학이 사회적 기능을 지닌다는 아도르노의 명제는, 문학의 기능이 어떤 관점에서 토론되든 간에, 다시 말해서 문학의 기능이 미학적, 사회적, 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토론되든 간에 그것은 일차적으로 문학의 언어사용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아도르노는,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사회적 가치, 또는 유용성의 강요로부터의 자유를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필수요건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글쓰기란 언어를 그것의 일상적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고 “언어에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이다”라는 로버트 무질(Robert Musil)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무질에 의하면, 문학은 우리의 일상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지만 언어의 사용과정에서 그들 일상언어가 지니고 있는 고정된 의미를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를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언어에 내재하는 논리와 질서에 따라- 새로운 ‘제 3의 의미’를 창출함으로써 문학은 다른 개념적 사고와 이성적 논리가 미치지 못하는 현실, 또는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독자적 가능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 문학의 미학적 기능, 나아가서 현실인식의 기능이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겠다.

실용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문학의 언어가 다의성을 본질로 하고 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학문적, 또는 실용적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언어가 낱말과 대상간의 명확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학의 언어는 처음부터 낱말과 사물의 고정된 관계의 해체를 이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의 언어가 컴퓨터의 기억장치를 통해 기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낱말 또는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성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용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문학이 정보시대에 대중으로부터 더욱 더 외면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의 본질과 과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반성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유용성의 강요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에서, 그리고 대중의 요구로부터 초연하게 사회적 통념과 고정관념의 극복을 추구하는 데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아왔고, 이러한 문학의 존재 근거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용성의 강요, 어리석은 자기보존의 강요로부터 자유로운, 순결한 낱말의 추구는 그것 자체로서 사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이 시사하고 있듯이, 문학은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로부터 인간의 자유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그리고 정보 기술에 대한 맹목적 열광으로부터 삶의 주체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사회적 기능”, 또는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맺음말

미디어 환경학자 닐 포스트맨은 <어린 시절의 실종(Das Verschwinden der Kindheit)>이라는 저서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12-13세 소녀들이 미국에서 가장 보수를 많이 받는 사진모델 그룹에 속한다. 모든 시각매체의 광고에서 그들은 에로틱하게 조성된 환경에서 아주 자연스러워하며, 성욕을 자극하는 능숙한 성인으로서 시청자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있다.” 이어서 포스트맨은, TV가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어린이와 성인 사이의 구분을 해체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TV의 형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교육이 필요치 않으며, 둘째, TV는 사고와 행동에 복잡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셋째 TV는 시청자를 분류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트맨은 이러한 전자매체의 특징이 비밀을 간직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곧 “어린 시절의 실종”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포스트맨에 의하면, “비밀이 없이는 어린 시절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쉼 없이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컴퓨터의 “마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인류를 열광에 빠뜨리고 있다. 그런데 컴퓨터는, 그것이 제공하는 수많은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포스트맨이 지적하고 있는 TV의 부정적 영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단방향매체인 TV와는 달리 컴퓨터에 있어서는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전제된다. 그러나 인터넷을 포함하여 컴퓨터의 이용이 더 이상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닌지 오래이다. 오늘날 컴퓨터의 프로그램들은 이미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도 짧은 기간의 교육을 통해 익힐 수 있을 만큼 이용이 쉽고 편리하게 개발되어 있고 실제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문서작성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컴퓨터 통신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다만 인터넷이나 컴퓨터 통신이 이들 청소년들에게서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학습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일단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사용자가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종류와 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오락에 이르기까지 이미 무한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정보란 오로지 활용됨으로써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접속 가능한 모든 웹사이트, 모든 정보가 곧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제공되는 모든 정보들이 곧 유익한 활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인터넷은 오늘날 적지 않은 역작용의 위험을 보이고 있다. 아직 학습 연령에 있는, 그리고 전문적 지식이나 정보의 활용이 일차적 목적이 아닌 이들의 호기심이 쉽게 컴퓨터게임이나 (성인)오락물에 머물게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성인 음란 사이트가 청소년들에게 무방비로 열려 있고, 이들로부터 “은밀한 영역을 지킬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음으로 해서 컴퓨터는 TV에 이어 ‘청소년기’를 보다 강도 높게 위협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닐 포스트맨이 지적하고 있는 이러한 위협이 ‘청소년기’에 국한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극히 소박한 생각이다. “비밀이 없이는 어린 시절이 실종될”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사회학자 쟝 보오드릴라르(Jean Baudrillard.)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밀이 없이는 주체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개인적 영역’이 상실될 위기에 있는 것이다. 보오드릴라르는 ‘고통, 쾌락, 죽음 등, 지금까지 아주 은밀하게 여겨지던 순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개인적 영역이 미디어의 시각 하에서 공적인 것으로 전파되고 무의미한 스펙타클로 전락해 버린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보기술에 대한 현대인의 열광은 사실 보오드릴라르가 지적하고 있는 미디어의 이러한 ‘폭력’을 쉽게 간과하게 만들고 있다. 맥루한은, 이러한 “미디어의 힘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미디어를 이용하는 인간을 벽이 없는 감옥 속에 가두는 셈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고는 본격적인 정보시대의 문턱에서 새로운 정보기술과 매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매체의 본질과 특징,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학문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미디어 사회학, 또는 미디어 환경학의 과제일 것이며, 이러한 학문적 연구는 정보시대에 “미디어의 힘”으로부터 인간의 개인적 영역을 지키고 사고와 행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매우 절실하다. 한편 정보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매체와 인간의 문제는 문학에도 소재를 제공할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문학은 정보혁명이 수반하게 될 사회적 변화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힐데 도민의 시학강연과 보토 슈트라우스의 소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컴퓨터가 선도하고 있는 새로운 정보기술이 인간과 현실의 문제를 단순화, 도식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사고와 행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곳에서 문학은 인간 주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에 더욱 더 많은 동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로운 정보매체는 다분히 인간을 단순한 감각적 만족과 단편적 사고에 빠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구촌 곳곳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에도 불구하고 정보시대에 인간은 오히려 세계를 총체성, 또는 역사성 속에서 수용하는 시각과 능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보의 “속도”를 최고 가치로 하는 정보시대에 있어서 단편적 정보의 소비 습관은 긴 시각에서 볼 때 인간과 현실의 문제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성 속에서 경험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감퇴시킬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단편적 데이터의 집합에 불과한 인터넷의 정보들은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에 의해 어떤 “관계”속에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정보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의미부여 과정에서의 창의적, 비판적 사고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 마땅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정보의 인간적, 사회적, 도덕적 가치는 “관계”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보기술이 인간의 사고를 대신할 수 없으며, 정보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의 창의적, 비판적 사고가 수반될 때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정보기술의 신화로부터 정보 이용의 주체에 눈을 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바로 여기에서 문학은 “계몽적” 기능을 맡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학의 “계몽적” 기능이란, 가령 미디어윤리학(Medienethik)이나 미디어교육학(Medienpadagogik)“ 에서처럼 미디어의 건전한 이용을 “가르치고”(belehren) “지도하는”(unterweisen) 것과는 달리, 정보기술에 대한 맹목적 열광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취하게 하고 나아가서 인간이 삶의 주체임을 “밝힌다”(aufhellen)는 기본적 의미에서이다. 문학은, 다시 한 번 힐데 도민의 말을 인용하자면, ”삶의 조건“이 아니라 ”삶 자체“를, 그리고 ”다른 무엇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본연의 자아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속도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정보시대에 주체로서의 인간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가능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문학은, ‘감각적 만족’과 ‘유용성’이 인간의 일상과 문화를 지배하고, 또한 ”삶의 조건“이 ”삶 자체“를 압도할 위험을 안고 있는 정보시대에,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자신의 과제와 기능을 지켜나가야 할 동기와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Literaturverzeich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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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Die Funktion der Literatur im multimedialen Zeitalter

Prof. Dr. Rae-Hyeon Kim(Seoul Women`s Uni.)

Die Computertechnologie, die heute fast alle Lebensbereiche ubergreift, gilt fur manche Wissenschaftsbereiche schon als unverzichtbar, und ihre Rolle in der Gesellschaft nimmt immer mehr zu, sowohl im politisch -wirtschaftlichen Bereich als auch im kulturellen. Auch Literatur wird in Zukunft offensichtlich von der technischen und gesellschaftlichen Entwicklung durch den Computer unberuhrt bleiben. Seit geraumer Zeit bildet die Problematik “Literatur im multimedialen Zeitalter” immer wieder unter den Literaturwissenschaftlern Gegenstand einer breiten offentlichen Diskussion. Befurchtungen uber die Zukunft der Literatur, uber die Zukunft des Buches uberhaupt, - derer sind schon viele laut geworden, und so werden haufig Fragen gestellt, ob Literatur in der modernen Medien- und Informationsgesellschaft weiter auf ihren Platz behaupten konnte.
An der Schwelle zum 21. Jahrhundert werden wir also noch einmal mit der Frage konfrontiert, worin Literatur ihre Existenz begrundet sieht. Um dieser Frage nachzugehen, erscheint es mir unumganglich, zum einen uns mit dem Diskurscharakter der elektronischen Medien auseinanderzusetzen, und zum anderen klarzustellen, wie konkret sich die Nutzung der elektronischen Medien auf das Rezeptionsverhalten auswirkt.
Grundlegend fur die Medienwirkungen aller Art ist, wie P. Hunziker konstatiert, die Tatsache, daß die Kommunikationsinhalte, wenn sie durch Medien vermittelt werden, ganz besondere Formen annehmen. Das Fernsehen z. B., das heute als das Medium der Unterhaltung schlechthin verstanden wird, kann durchaus anspruchsvolle Themen verarbeiten und in einer anschaulicher Form ubertragen. Der schlechte Ruf des Fernsehens liegt also nicht darin, daß es nicht in der Lage ist, anspruchsvolle Stoffe und Themen zu behandeln, sondern vielmehr darin, daß “es jedes Thema als Unterhaltung prasentiert”. Zwar laßt der Computer mit seinen unschatzbaren technischen Vorteilen nicht ohne weiteres den Vergleich zum Fernsehen zu. Im Hinblick auf den Diskurscharakter der beiden Medien liegt es jedoch nahe, daß die beiden elektronischen Medien bei der Ubermittlung der Kommunikationsinhalte durchaus vergleichbare Auswirkung auf das Verhalten der Kommunikationsteilnehmer haben.
Die elektronischen Medien machen es heute moglich, wie N.Postman hervorhebt, “aus dem Zusammenhang gerissene Informationen in unvorstellbarer Geschwindigkeit uber riesige Entfernungen zu transportieren”. Dies bedeutet, daß man in den elektronischen Medien eigentlich mit einer Aneinanderreihung von Fakten und Daten zu tun, die zwar den Wert der Information haben konnen, die jedoch, um in Anlehnung an B. Strauß zu sprechen, lange noch keine “bundige Geschichte” in die Hand geben. Dieser Fragmentcharakter wird im Computer/Internet durch die sog. Hypertextualitat noch einmal zugespitzt. Das Link im online-Text ist namlich eine Aufforderung an den Leser, einen rezeptiven Sprung zwischen verschiedenen Ebenen zu vollziehen. Das elektronische Medium ist also nicht auf eine durchgehende Textaufnahme angelegt, sondern vielmehr auf das standige Hin- und Herspringen zwischen den Textstellen.
Im Vergleich zur Ubermittlung der Informationen in den elektronischen Medien kann das Erzahlen der Geschichte in der Literatur als ein Versuch verstanden werden, die Geschehnisse von einer komplexen zeitlichen Ordnung doch in “bundige Geschichte”, d. h. in einen Zusammenhang zu bringen. Im Vorgang des Schreibens und Lesens wird namlich Geschichte fur uns erfahr- und deutbar. Diese Funktion der Literatur ist in einem Zeitalter, in dem die Gefahr besteht, sich mit den fragmentarischen Informationen und trivialen Unterhaltungsprogrammen uberhauft zu werden, um so mehr unverzichtbar.
Es wundert uns eigentlich nicht, daß Literatur in diesem Jahrhundert, wo der Information immer mehr Bedeutung zugeschrieben wird, ins abseits gedrangt wird. Denn es wird in der Literatur nicht darauf abgezielt, Information zu vermitteln. Oder um es etwas vorsichtiger auszudrucken, hat Literatur mit der Information fur einen praktischen Zweck wenig zu tun. Sobald Literatur Informationen fur einen praktischen Zweck zu vermitteln strebt, ist sie, um uns hier auf H. Domin zu stutzen, “meist schwachere Konkurrent publizistischer Analyse oder auch einer guten Fernsehreportage”.
Gewiß konnte Literatur in Zukunft in immer engerem Kreis betrieben und wahrgenommen werden, wenn wir mit P. Celan davon ausgehen, daß literarische Texte immer schon die “eines Wahrnehmenden und Aufmerksamen, dem Erscheinen Zugewandten, das Erscheinende Befragenden und Ansprechenden” sind. Denn in einer Gesellschaft, in der der materielle Wert der Information immer mehr verabsolutiert wird, leistet Literatur vielleicht weder “gesellschaftlich nutzliche Arbeit”, noch tragt sie “nichts zur materiellen Reproduktion des Lebens” bei, um in Anlehnung an Adorno zu sprechen. Literatur ist aber, wenn nicht die einzige, doch eine der wenigen Ausdrucksformen des Menschen, die “alles Bewußtsein [reprasentieren], das uber den blinden Zwang der materiellen Verhaltnisse hinausweist”. Oder ladt Literatur uns, wie H. Domin formuliert, “zu der einfachsten
und schwierigsten all(출처: 이선우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