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오정희(60). 1990년대에 등장한 여성작가들이 오늘날 낙양의 지가에 관여하고 있다지만 오씨야말로 시련과 갈등을 넘어 자기 발견의 과제를 완수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원류에 자리한다. 4월의 마지막 주말,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는 40여 문학지망생들의 눈망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정희씨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를 주제로 강연하는 자리였다.
“작가란 늘 의심의 베개를 베고 자야하면서도 지성적이어야 하는 존재지요. 잠자면서도 지성이 다닐 수 있는 한 길을 열어놓아야 하는 존재. 이념이나 체제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유목민처럼 끊임없이 떠도는 경계인이 작가입니다. 지나친 충족이나 슬픔은 글을 못쓰게 합니다. 그 사이에 균형을 이루게하는 가느다란 실을 매어놓고 지상에서 한발 띄운 채 불안하게 앞 뒤를 바라보는 게 작가죠.”
오정희 문학은 불안과 초조에서 발원한다.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세살때 한국전쟁이 터지자 충남 홍성으로 피란한 이래 인천 중앙동, 서울 신수동을 전전하던 소녀시절의 기억은 작품 ‘유년의 뜰’ ‘중국인 거리’ ‘저녁의 게임’ 등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거미처럼 여윈 그 애는, 할머니의 빈 젖을 빨 때 외에는 늘 가늘고 약하게 울었다. 모처럼 잠이 들었을 때도 힘없이 벌린 입에는 잔 울음 끝이 물려 흐득였다. …밭 가운데, 혹은 둔덕에서는 잔돌 무더기가 흔히 있었다. 애기무덤이라고 했다. 우리는 언젠간 그 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날 밤, 할머니와 어머니의 소리 죽인 울음을 들으며 홑이불에 감긴 그 애는 조그만 보퉁이처럼 지겟짐으로 얹혀 나가게 될 것이다.”(‘유년의 뜰’)
오씨의 눈길은 오랜 기억의 저편을 더듬고 있었다. “내 최초의 기억은 캄캄한 곳에 들어갔을 때 투박하고 끈끈한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던 아주 불쾌한 기억입니다. 또하나는 장대에 검은개가 매달려 있던 기억인데, 처음엔 그게 꿈인가 현실인가, 어리둥절 했어요. 그게 다 6·25전쟁 때입니다. 두살 반의 계집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방공호에 들어갔어요. 누군가 내 울음을 막으려고 입을 막은 것인데…. 대포소리에 개들이 미친다해서 어른들이 개를 잡아죽였는데 어머니가 나중에 검은 세퍼드를 동네사람들이 장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하더군요.”
그의 문학에서 근대화 시기를 살았던 우리 여성들의 삶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한 편의 성장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충남 홍성군 홍주읍 오관리로 피란을 갔어요. 전쟁 직후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지로 장사를 하러 떠나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지요. 명절 때 엄마가 한번씩 들여다보곤 했는데 저는 엄마가 곧 떠날까봐 나를 찾지 못하도록 숨어있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면 어김없이 엄마가 없었지요. 엄마가 없어질까봐 불안해하던 소녀, 저에겐 원천적인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한없이 이어지는 공원 층계에서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저물녘의 쓸쓸하고 초라한 거리 풍경을 내려다보거나 어디론가 달아날 궁리로 선창가를 배회하며 외로움과 불안 속에서 생에 눈떠가던 작은 아이의 모습은 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은 이야기이되 이야기를 넘어선 어떤 것이죠. 이야기는 소설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지요. ‘파로호’(1989)를 집필할 당시 막 착공한 평화의 댐에 가봤어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수장되었다는 댐 바닥에 수통이 박혀 있더군요. 그 폐허의 잔재에서 문학은 시작되는 것이죠.”
작가가 된 이래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는 가정과 문학의 양립이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길들여진 여성성과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여성성 사이의 갈등. 가정이라는 폐쇄 구조 안에서 창작의 초조함과 긴장을 붙들기 위한 고투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떠나고자 하는 욕망과 안주하고자 하는 상반된 욕망들이 맞부딪히며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내 안의 활화산을 어떻게 다스리며 조화를 이룰 것인가, 어찌해 볼 길 없는 사랑과 슬픔, 열망의 시간들을 살아낼 것인가를 혼자 묻곤 했지요. 유치원에 가는 제 아이가 ‘엄마 바람이 불어. 바람이 무서워. 바람은 어디에 살지’라는 말에서 ‘바람의 넋’이라는 소설을 썼고 어느 무더운 여름날 창밖에서 들리던 ‘기주야’ 하는 목멘 부름에서 이미지를 얻어 소설을 쓰기도 했어요. 저녁밥을 짓다가 부엌창문으로 보이는 짙은 노을에서 한 편의 소설을 얻기도 하고요.”
밥 짓는 손과 글쓰는 손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는 일상이 주는 구원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상이 있었기에 창작을 할 수 있었고 창작을 할 수 있었기에 그것이 주는 모든 미덕과 함께 치욕과 비루함도 살아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 작가들은 가정이냐 문학이냐를 한 저울에 놓고 재곤하는데 난 그걸 잴 겨를도 없이 다 끌어안고 살았던 것 같아요. 글을 쓸 때 아이가 울면 너무 속상해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까지 했으니까요. 내 시간 확보에 사투를 벌이며 살았어요.”
글은 영감에 의한 순간적인 탈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며 6각형 유엔표 성냥 에서 한 개피씩 꺼내 한 통을 전부 불사르던 시절, 의자에 자신을 묶어놓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치열한 글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국에는 소설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소설은 상처와 불안을 먹고 자라지요. 해결을 본 상태에서는 치열한 글이 나오지 않아요. 이미 초연히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말이죠.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은 삶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대로 ‘어디를 향해 짖어야 할 줄 모르는 사냥개’가 소설가인 것이죠. 모든 사랑하는 관계가 다 그러하듯 문학은 내 안의 천국이자 지옥입니다.”
글·지나온 날들 돌아보니…
[2007.05.06 17:26] | ||
오정희씨는 두번 가출한 적이 있다. 처음은 인천 신흥초등학교에 다니던 아홉살 무렵이었다. 고아가 되고 싶어서, 자유롭고 싶어서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배의 선실에 숨어 있다가 하루만에 잡혔다. 두번째는 이화여고 1학년 때였다. 등록금을 들고 무작정 집을 나갔다. 문학소녀였던 그에게 가정과 학교생활은 너무 시시해보였고 하루빨리 박차고 나와야할 어떤 것들로 보였다. 가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였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으리라라는 비장한 각오로 떠나간 길에 그는 ‘달과 6펜스’를 가방에 챙겨넣었다. ‘달과 6펜스’에는 영국 중산층 가정의 나무랄 데 없는 가장이자 주식중개인인 스트릭랜드가 등장한다. 어느날 갑자기 처자식에게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파리로 잠적해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는 그는 자신의 일탈을 두 마디로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스트릭랜드에게서 예술가의 근원적인 꿈을 본 오씨는 경기도 양평군 마룡리의 용문산 아래 민박집에서 한달여를 보낸다. 주인집 언니의 주선으로 춘천의 어느 병원 보조 간호사 일을 하기 위해 떠나기 직전 붙잡히는 바람에 귀가했지만 당시 읽은 작품들은 문학 인식의 기본틀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74년에 결혼한 그는 4년 뒤 강원대 사회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부군을 따라 춘천으로 이사해 30년째 살고 있으니 양평에서 춘천에 이르는 북한강 물길은 그의 문학적 인생을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외지인들은 춘천의 안개와 눈꽃, 도시를 둘러싼 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그안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그것들의 아름다움이나 아련한 분위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안개의 몽환과 눈꽃와 물의 아름다움이 드러내고 숨기는 것, 품고 있는 것들,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가지 않은 길과 갔던 길이 아스라히 해후하는 평화의 깊이가 깃들어 있다. 상처와 갈등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자의 평화. 인터뷰를 마칠 즈음, 토지문학관 옆에 거처하고 있는 박경리 선생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원주시와 토지문학관에서 열리는 문학강연 후원 문제를 매듭짓느라 몹시 피곤한 상태지만 오정희씨 만큼은 그냥 춘천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저녁식사 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오씨에 대한 박경리 선생의 각별한 애정이 느껴졌다. 카메라를 꺼내 다가가자 박경리 선생이 손을 저었다. “늙은 얼굴, 찍어 뭐하게.” 차에 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모녀지간처럼 편안하고 다감해보였다. 정철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