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합참의 질타 “CIA도 6·25 남침 모르고 있었다”
1950년 7월10일/합참 합동정보단 1급 문서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전선을 시찰한 직후인 1950년 7월10일, 워싱턴에 있는 합참 합동정보단(Joint Intelligence Group)은 2쪽짜리 정보보고서를 작성한다. 미 공군 소속인 합동정보단의 레지널드 밴스 대령이 합참 정보처 부처장인 미 해병대 소속 V. E. 메기(Megee) 준장 앞으로 제출한 이 1급 비밀 보고서에는 ‘한국 상황: CIA의 북한군 침략 조기 경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CIA로부터 넘겨받은 한국 관련 정보를 놓고 합참 합동정보단이 나름대로 정보 가치를 평가한 일종의 정보 평가서였다.
합동정보단은 CIA가 작성한 일일·주간·월간 보고서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정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물론 합동정보단에 모이는 대부분의 정보는 군사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정치·경제 ·사회 각 분야의 정보 역시 유용하게 취급되었고, 한국 관련 정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발발 가능성의 사전 탐지야말로 정보기관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다. 한국전 당시 미 CIA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전쟁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합동정보단의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CIA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월1일부터 교전이 시작(6월25일)되기까지 CIA로부터 접수된 ‘CIA 일일 정보 요약’에는 한국에 대한 언급이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다. 보고서 첫머리에서부터 CIA를 물고들어간 이 보고서는 ‘같은 기간중 CIA의 주간 정보 요약에서 언급된 한국 관련 사항은 다음과 같다’면서 4가지 항목을 지적하고 있다.
a. 남한 선거에 관련된 3종의 보고
b. 남한의 퇴폐적인 경제와 정치 상황에 대한 3월31일의 장문의 보고 및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남한군 전력 증강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난.
c. 남한을 피난지로 활용하려는 대만의 장제스에 대해 언급한 6월2일 보고. 이 보고에서 CIA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음: 남한은 소련과 중공에 너무 근접해 있기 때문에 피난지로는 적당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비상사태시 임시 피난처나 불편을 감수한 피난처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임.
d.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에 대해 언급한 6월16일의 보고. 이날 보고에서도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CIA가 북한군의 움직임을 알고도 합참 정보라인에 정보를 주지 않았을 리는 없다. 결국 CIA는 1950년 3월1일부터 6월25일까지 한국전 발발 가능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38도선에 대한 병력 증가가 남침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CIA도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합동정보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5월15일에 작성 완료되어 6월19일 보고된 ‘북한 정권의 현 능력’이라는 제하의 ORE 18-50 문서가 북한군 침략에 대한 CIA의 가장 최근 언급이라고 볼 수 있음. 이 문서는 38도선상의 병력 증가가 ‘서울 점령을 포함, 남한에 대한 제한적인 단기 군사작전 전개를 가능케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
CIA는 국경 지대의 탱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국경 지대 마을의 주민 소개나 군사도로 건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G-2(정보참모부) 극동파견대(합참 합동정보단의 극동사령부 파견대)에 따르면 CIA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G-2가 북한군의 군사 능력에 대해 언급했음.
이것이 북한군 전력 평가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문서이며, 6월20일 六?절차를 거쳐 합동정보단에 접수된 바 있음.
이 비밀 보고서가 CIA의 정보 수집 능력을 질타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로 들이댄 것이 바로 북한의 국경 지대 마을 주민 소개와 군사도로 건설이다. 전쟁 발발의 대표적 징후들인 국경 지대 주민 소개와 도로 건설에 대해서는 CIA가 일언반구 없었다는 지적이다.
합동정보단 보고서는 이 두 가지 징후에 대한 현지 보고가 왜 누락되었는지, 그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 보고 계통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군 정보 계통과 CIA가 한국전 발발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군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커다란 이견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정보 수집 및 배포 책임자인 앤드루에 의하면 최근의 현지 답사 보고서 사본이 정보서비스단(SI, Service Intelligence) 요원들에게 연구 목적용으로 제출되었음. 마을 소개와 군사도로 건설 건에 대한 보고가 G-2에 제출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정밀 검사가 진행중임.
극동파견대에 따르면 만약 그러한 정보가 접수되었다면 매우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었을 것이나 두 건에 대한 정보는 전혀 그들에게 접수된 바 없다고 함.
3월에 작성된 두 종의 주간 정보 요약에서 G-2가 북한의 전시 대비 태세 강화와 전력 증강, 춘계 침략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움.
북한 병력 증강 상황에 대해 언급한 CIA의 ORE 18-50은 G-2의 요청에 의해 18개월 만에 처음 작성된 것인데, 북한군 병력 증강을 지적한 극동파견대 맥내어 대령의 의견을 CIA가 반대했음. 북한군의 군사 능력이 ORE 18-50에서 지적된 것만큼 높지 않다는 것이었음.
우리는 CIA로부터 북한군의 침략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결코 접수한 바 없음. 세계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북한 관련 정보에 관한 한 우리가 CIA로부터 북한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
남한 주요 인사 2만명 극비 소개 계획
1951년 1월9일/극동사령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한국전의 전황을 180도 바꾸어 놓는다. 미군 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의 후퇴가 거듭되면서 1951년 1월10일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미 합참에 긴급 전문을 보낸다.
‘현재 여건 하에서는 남한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다. 유엔군 철수는 불가피하다.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한반도를 지킬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열흘 전인 1950년 12월30일 맥아더는 중국 본토 폭격을 합참에 건의한 바 있다. 맥아더의 기본 구상은 중국 공격을 통한 확전이었다.
사흘 후인 1월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친서를 발송한다. 전쟁은 한반도 내에 국한시켜야 하며, 38도선에서 휴전 협의를 시도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미 8군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는 한반도에서의 전면 철수에 대비한 한국 정부 피난 계획을 수립한다. 1월9일 작성된 미 극동사령부의 1급 비밀 (Top Secret) 보고서는 한반도 철수 및 한국 고위 인사를 포함한 요인들의 소개 계획을 소개 인원수까지 구체적으로 밝혀놓고 있다.
이 소개 계획에 따르면 미 극동사령부는 한국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100만명을 제주도로 소개시키는 ‘대규모 소개’와, 주요 인사 2만명만 선정해 제주도가 아닌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제한 소개’의 두 방법이 검토되었다.
또한 이 보고서는 제주도를 소개지로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을 분석하면서, 소개지 선택에 따른 고려 사항을 열거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 완전 포기시 한국군과 미군의 병합(incorporation)을 제안한 점이다.
한국군 병력을 오키나와로 이전시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고, 200명의 한국 망명정부 요인을 하와이나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으로 망명시키는 계획도 입안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마지막 부분에 난민 소개 및 망명정부 계획이 ‘토의를 위한 시안(試案)’이라는 단서를 달아놓기는 했지만, 소개 대상 및 소개 예상지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극동사령부와 합참 군 고위층에서 한반도의 완전 포기를 상정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보고서 가운데 주요 부분을 옮긴 것이다.
제주도로 대규모 소개(80만~100만명)시킬 것인지, 아니면 제한된 인원(1만~2만명)만 선정해 세계 각지의 최적지로 분산시킬 것인지가 소개의 문제점임. 한국 정부 이전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제주도로 소개시킬 경우의 이점은 다음과 같음.
1. 공산주의자의 보복으로부터 많은 인원을 구할 수 있음.
2. 공산주의자의 완전 승리를 부인할 수 있음.
3. 미국과 유엔이 결단력을 가지고 반격할 수 있다는 지속적인 상징이 될 수 있음.
4. 자유 한국 정부가 한국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지속적인 상징이 될 수 있음.
5. 제주도에서 비정규전(게릴라전)을 지원하고 심리전을 펼 수 있음.
6. 한국 정부의 힘(energy)을 지속적으로 방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따라서 망명정부라는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있음.
제주도로 소개시킬 경우 불리한 점은 다음과 같음.
1. 언제까지 한국을 방위하고 한국민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음.
2. 제주도 유지를 위한 유엔의 지속적인 지원을 얻기 힘들고, 참전 동맹국들 간의 이견이 증폭될 수 있음.
3.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타결될 경우 제주도를 포기하고 내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무력 대결의 결과로 지금 제주도를 포기했을 때보다 미국이나 유엔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
4. 제주도에 유입된 대규모 소개민을 원조하는 데 따른 심리적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음.
5. 제주도가 대만과 같이 인식되리라는 것이 불가피함.
따라서 제주도를 피난지로 선택할 것인지는 아래 사안들을 포함한 관련 제반 사항들을 검토해 결정해야 함.
1. 한국 본토에 대한 작전을 지속하기 위해 한국인을 활용할 것인가.
2. 제주도를 차지해 공산 진영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 군사적으로 중요하며 실용적인 것인가.
3. 미국이 일본에 준하는 우선순위를 가지고 제주도를 방어하고 지원하기 위한 군사력과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책임을 떠맡을 용의가 있는가.
4. 제주도를 차지하거나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경우 한국 영토 및 피난지에서 한국 정부와 상당수의 요인들을 유지하는 데 따른 정치적 이익이 군사적 불이익보다 과연 클 것인가.
만약 제주도로 소개시키지 않기로 결정될 경우 다음과 같은 우선순위와 일반적 중요도에 입각해 제한적 소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
1. 대통령, 내각, 국회의원, 중앙 및 지방 고위 경찰을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와 가족들(4,000명)
2. 한국군 선임 장교 및 기술 요원과 가족들(3,000명)
3. 종교계 및 교육계 인사 등 사회 지도자를 포함한 비정부기관 요인들과 가족들(1만명)
4. 정보 계통에 의해 선정된 주요 전쟁포로 및 요원들
5. 한국군
한국군 소개는, 그들을 어디로 소개할지 소개 지역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요인이 되기는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한국군의 잠재력에 대한 군사적 판단에 기초해야 함.
즉, 만약 제주도를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나거나 한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계속하는 것으로 결정날 경우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날 경우 한국군 소개는 기본적으로 한국군이 미군에 병합(incorporation into US armed forces)된다는 관점에서 시행되어야 함.
그러나 이런 관계가 설정된다 하더라도 한국군에 대한 극동 지역 전반의 시각을 공정하게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한·미 병합군은 오키나와 같은 고립된 지역에 기지를 두고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해야 할 것임.
망명정부
유엔과 미국이 원칙적으로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 정부의 존재는 계속 인정받고 지원받을 것임. 정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대통령과 내각 및 국회로, 대략 200명의 인원임.
유엔의 책임 하에 한국 정부를 존속시킨다는 원칙이 유지된다면 한국 정부에 하와이나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에 피난지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위에 언급한 것들은 다만 토의를 위해 마련된 시안일 뿐임. 합동참모부의 일반적 견해 외에, 하기 질의 사항에 대한 답변을 특별히 요청함.
1. 군사적 관점에서 제주도를 차지하고 공산 진영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실용적인가.
2. 상기 질의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일 경우, 국방부는 제주도에 거주하게 될 약 8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방어하고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준하는 우선순위를 가지고 군사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한국 정부와 대규모 피난민들이 현재 제주도로 이동중임을 감안할 때 위 사항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며, 제주도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정내려질 경우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
미, 박정희의 과음과 변덕, 북한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다
1968년 미 국무부 기밀문서 : 무장공비 청와대 침투 기도와 푸에블로호 납치
다음은 칼럼니스트인 짐 만(Jim Mann)이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를 바탕으로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와 북한 무장 공비의 청와대 침투 기도 사건을 주제로 ‘로스엔젤레스 타임스’(2001년 1월28일자)에 쓴 기사 가운데 주요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최근 비밀해제된 미 행정부 문서에 따르면 냉전이 한창이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과음과 변덕스러운 행동(heavy drinking and erratic behavior) 때문에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고 보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집권했고 한국 ‘경제 기적’의 설계사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동안 강인하고 엄격한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북한 무장공비들이 박대통령 살해를 기도하고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직후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존슨 행정부는 박대통령의 동요를 무척 우려(fear)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문서 사본에 따르면 특사로 한국에 가 박대통령을 만났던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내각 관리들에게 “그는 변덕스럽고 잘 흥분하며 술을 많이 마신다”고 보고하고 있다. “박이 느닷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인가”라는 존슨의 질문에 밴스는 “아니다. 꽤 된 일”이라면서 “부인에게 재떨이를 던지기도 했고, 보좌진에게도 몇 차례 재떨이를 던진 일이 있다”고 답했다.
이 문서들은 국무부의 정기적인 정보 문서 해제 작업의 일환으로 공개된 것인데,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을 당시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터질까봐 존슨 행정부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백악관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와 똑같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했다.
한 회의에서 CIA의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 국장은 “북한에 푸에블로호를 지정된 날짜에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중대한 사태를 맞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묻자 존슨은 즉각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중국·소련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되쏘았다.
이 문서들은 냉전 당시의 역학관계가 한반도의 현 정세와는 전혀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과 보다 평화적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는 가운데 김대통령 지지자들은 북한에 대해 미국이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1968년 당시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미국은 협상을 선호하면서 지나치게 호전적인 박정권을 우려했던 것이다.
한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1968년 통일원을 설립했을 때 미 관리들은 서울의 의도가 분명히 ‘평화적 통일’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은밀히 애썼고, 한국은 그런 확답을 주지 않았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8년간 정권을 유지한 박대통령은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서울CIA 지국장과 주한 미 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는 최근 소식통들에게 박이 “술꾼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68년 서울에서 근무했던 다른 관리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박이 과음하고 미국에 대해 대노하자 “전쟁이 일어날까봐 아주 걱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1968년부터 78년까지 박의 개인비서로 일했던 김두영 씨는 이달 서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박대통령이 점점 더 북한의 공격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박대통령이 북침을 머리 속에 두었다고는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양쪽 모두 공멸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박의 음주에 대해 “박대통령은 항상 술을 좋아했고, 과음하고는 했다”고 말했다. 박은 1979년 암살당했다. 박의 딸이자 한국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 박근혜 씨는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공개된 문서들은 또한 미 정부가 1960년대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박대통령에게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개방을 종용하기는 했지만 워싱턴의 일부 관리들은 박대통령의 권위 독재주의 정권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국가안보위원회 관리였던 로버트 코머(Robert Komer)는 1964년의 한 메모에서 ‘대체적으로 볼 때 한국을 좀더 민주화시키라고 박을 몰아붙이는 대신 우리는 이 어수선한 땅에서 약간의 독재는 너그럽게 봐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쓰고 있다.
30여 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한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한 직후인 1968년 1월 존슨 행정부와 박대통령 간에는 위기가 고조되었다. 생포된 무장공비는 나중에 자신들의 임무가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암살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공비들은 관저 입구에까지 침투했고 총격전을 벌여 한국인 수명을 사살했다.
북한의 무장공비는 전원이 죽고 오직 1명(김신조)만 생포됐다. 사건 발생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1월23일, 북한은 북한 영해 바깥에서 첩보 수집 활동중이던 푸에블로호와 83명의 승무원을 납치했다. 문서에 의하면 처음에 존슨 대통령과 그의 고위 측근들은 푸에블로호와 그에 딸린 정보 장비를 회수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신중하게 고려했다.
그들은 북한 함정의 나포 또는 격침, 항구 지뢰 부설, 해상 봉쇄, 공습 또는 비무장지대 습격 가능성 등을 검토했으나 존슨과 측근들은 재빨리 푸에블로호 선원의 송환을 위해 북한과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1월29일 점심식사 자리에서 존슨과 고위 측근들은 그들의 목표가 선원들을 송환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미군과 계속 협력하도록 만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 제2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미 관리들은 한국 대통령이 청와대 습격 사건에 격분했다고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공비 침투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 대해 군사행동으로 북한을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는 ‘박대통령이 거의 이성을 잃은 채 북한을 칠 필요가 있다는 데 사로잡혀 있다’고 워싱턴에 타전했다. 박대통령은 북한의 훈련소들을 공격해 없애 버리고 싶어했으며, 미국이 청와대 사건보다 푸에블로호 사건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존슨 대통령은 사이러스 밴스를 서울에 보내면서 백악관이 북한과 협상하기로 한 결정 뒤에는 미 국내정치라는 요인이 있다는 것을 한국 대통령에게 이야기해줄 것을 지시했다고 문서는 밝히고 있다. 밴스에게 전달된 서면 지시서에는 ‘올해는 미 선거가 있는 해이고, 푸에블로호 문제는 한·미 관계 및 동남아에서의 미국의 입장과 관련, 선거의 주요 현안이 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존슨 행정부는 이렇게 한국을 달래는 한편 경고 메시지도 보냈다. 만약 박대통령이 베트남에서 한국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할 경우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밴스는 존슨에게 박대통령이 “위험한 인물이고 다소 불안하다”(a danger and rather unsafe)고 말했다.
밴스는 “박대통령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모든 명령을 내린다”면서 “박대통령의 장군들은 그 명령에 따른 모든 조치를 이튿날 아침까지 연기해 놓으며, 다음날 아침 박대통령이 아무 말이 없으면 간밤에 박이 말했던 것을 잊어버린다”고 말했다.
결국 박은 푸에블로호 선원 송환을 위해 북한과 협상하려는 미국에 협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근심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내부 문서에 따르면 2개월 후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이 ‘병력 이동’을 고려하고 있으며 심지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워싱턴에 경고했다.
푸에블로호 선원은 미국 협상팀이 북한에 사과한 후 1968년 12월에 풀려났고, 미국은 선원들이 석방되자 즉각 혐의 내용을 부인했다. 박대통령은 그의 부인을 살해한 북한의 또 다른 1974년 암살 사건에서 살아남아 그 후로도 10년 동안 권좌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북한이 아닌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1979년 살해당했다.
박대통령,
무릎을 떨며 포터 주미 대사와 일대 설전 벌이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박정희 면담록-
1970년 8월3일/국무부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닉슨 미 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에 군사물자는 지원할 수 있어도 더 이상의 병력 지원은 없다’는 내용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 발효된 것은 1970년 2월이다. 닉슨은 이미 1969년 7월 괌에서 미국의 이 새로운 외교정책의 기본 개념을 밝힌 바 있다.
당장 문제된 것이 주한 미군의 철수였다. 닉슨 독트린이 선언된 직후부터 한·미 간에는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비밀 교섭이 시작된다. 주한 미 지상군 2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을 철수시킨다는 것이 골격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미군 철수에는 반대라는 것이 한국의 강경한 입장이었다. 미국도 좀체 물러설 기미가 아니었다. 마침내 주한미군 철수 건은 양국 간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1970년 8월3일. 윌리엄 포터 대사가 미8군 사령관 마이클리스(Michaelis)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박대통령을 찾아간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한·미 양측 모두 긴장된 분위기였다.
오후 4시30분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약 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포터 대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박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국무부에 전송한다. 8월4일 오전 1시56분과 2시24분, 7시5분 등 세 차례에 걸쳐 보낸 이 극비 전문은 총 8쪽 분량. 국가 안보에 직결된 사안인만큼 박대통령과 포터 대사 사이에는 열띤 논쟁과 서로 밀고 당기는 한판 신경전이 펼쳐졌다.
박정희 면담록
1. 요약 : 미군 감축에 대한 협조나 감축에 대한 합동계획을 계속 완강하게 거부하던 박대통령은 우리가 점점 더 압력을 넣자 현재 진행중인 한국군 현대화 작업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런 계획을 시행하지 말 것을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했다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음.
나중에는 결국, 아직 현대화 작업 그룹의 중간보고를 받지 못했으니 보고를 받을 때까지는 합동계획에 대한 견해를 유보할 것이며, 보고를 받은 다음에 우리를 다시 만나겠다고 함으로써 입장을 약간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보였음.
그에게 철군 문제를 제기하자 말투가 거칠기는 했지만 결심을 못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의 협조가 있든 없든 미국의 결정은 그대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그에게 분명히 전달했음. 그는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반복해 거론하면서 자주 ‘불쾌감’을 표시했음.
그는 호놀룰루에서 타진된 미국의 의사표시에 대해 모르고 있었음. 사전에 국무총리가 우리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 배석할 것이라고 했지만, 박대통령은 인터뷰 자리에 장관들이 배석하지 못하게 했으며, 통역자를 포함해 청와대 참모 2명만 참석시켰음.
2. 우리의 입장을 점검하고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협조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라고 내가 말문을 열었음. 나는 철군에 대한 한·미 간의 합동계획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더욱이 미 의회에서 현대화 문제를 호의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좋으며, 괜스레 문제를 복잡하거나 위태롭게 만들 필요는 없으므로 공개적인 논쟁이나 문제점은 최소화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음.
또 호놀룰루에서 우리가 제공한 해명자료대로 하면 이 문제들을 잘 처리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며 현대화에 대한 대화가 진행중인만큼 그에 필요한 유익한 밑그림이 그려지리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이제는 미군 감축에 대한 합동계획으로 진전시켜볼 만하지 않은가 하고 물었음.
3. 박대통령은 대답하기를 한국의 입장에는 변동이 없다고 했음. 그의 견해는 호놀룰루에서 미국에 전달된 바 있음. 다음은 박대통령의 답변임.
“현대화 협의의 성과물이 없고 한국 국민에게 안보에 대한 보장이 있기 전까지는 병력 감축 계획에 관한 한 어떠한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일이 선행되고 나면 합동 협의가 시작될 것이며, 미국의 입장은 이해하나 어렵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이 더 어렵다.
한국 국민 100%가 미군 감축을 반대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만약 감축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협정(agreement)이 있지 않는 한 감축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토의가 일반 대중을 안심시킬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 가서는 미군 감축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그때 가서 협정에 따라 규모나 시간, 조치 등을 토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보장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한국 정부가 감축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4. 박대통령의 이런 답변에 대해 나는 우리와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에 대해 유감을 전달하면서 미군 감축 논의에 따른 관련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음.
“우리의 계획은 이렇다. 불행하게도 한국 정부가 참여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측이 단독으로 마련한 안이다. 1970년 12월까지 5,000명을 감축하고, 71년 3월까지는 8,500명을 추가 감축하며, 71년 6월30일까지 4,900명의 병력을 추가로 감축하는 것이다.”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박대통령은 눈을 감고 앉아 스트레스를 받는지 무릎을 떨다 커피를 시켰음.
5. 박대통령은 거듭 말하기를, 의회를 포함해 미국이 어려워하는 점을 잘 알고는 있지만 한국군 현대화와 관련해 쌍방이 받아들일 만한 결론이 없는 한 한국 정부는 대화에 응할 수 없다고 했음.
“만약 미국이 감축을 진행시킨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협조할 수는 없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한국 정부가 비협조적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했음. 왜냐하면 이 결정이 나기에 앞서 한국 정부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임.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또 한번 강조했음.
6. 나는 우리가 합동해서 계획을 세우자고 한국 정부에 제안했을 당시에는 미군 감축에 대해 결정된 사안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대답했음. 다음은 본인의 발언 내용임.
“따라서 국민감정, 정책, 예산, 인적자원 등을 고려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정부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계획 입안 과정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합동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력 감축을 한 직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군 장비의 처분 같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이런 문제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일반 국민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한국 정부가 우리와 같이 계획을 짜고 입안하는 작업을 거절함으로써 그 장비를 다른 곳에 보내게 된다면, 그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장비 목록은 아주 대단하다. 예를 들면 수백 대의 탱크와 한국 공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장비가 포함되어 있다.”
7. 일방적으로 선언만 해대던 분위기에서 좀더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박대통령은 목록에는 단위 부대 장비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음.
8. 나는 또 말하기를, 한국측의 생각이 전혀 접수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계획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음. 한국의 생각은 아주 유익하겠지만 참여하려고 하지 않고 있으며, 마이클리스 장군이 이 문제의 군사적 측면에 대해 답변할 것이라고 말했음.
9. 박대통령은 이에 대해 오히려 화를 내면서, 3월27일에 미국의 입장을 밝힌 최초의 공식 문건을 받고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는데도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은 유감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음. 그는 계속해서 향후 몇 년 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 문제를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그러나 미 국내의 상황이 정 어려워 기다리기 힘들다면 한국군이 침략을 저지할 만큼 강화되고 단독으로 안보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조건 하에서는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음.
박대통령은 또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토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성실한 자세가 부족하고 한국의 요구 사항이 미국의 입장과 상충되어 절충점을 찾지 못하게 될까봐 한국에서의 병력 감축을 반대하는 것이며, 미국이 계획대로 병력을 빼내간다면 미국군은 미국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했음.
10. 이에 대해 나는 이런 모든 문제들이 결국 신뢰의 문제에 귀착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음.
“우리는 한국군 현대화에 대해 최고위급에서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보장을 제공했으며, 한반도 안보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취한 것 이상의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의도와 언급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11. 박대통령은 그때 내가 언급한 ‘불가능하다’는 표현을 딱 꼬집어냈는데, 내가 한국측의 추가적인 안보 보장을 미국이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음. 나는 이렇게 대답했음.
“만약 한국 정부가 조약(treaty) 이상의 어떤 언질(commitment)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조약의 한계를 넘어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한국 정부가 추가적 보장을 위해 조약의 재협상을 원한다면 현 상황에서는 그런 재협상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12. 박대통령은 이어 말하기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믿음, 미국에 대한 한국의 믿음 등 양국 간에 신뢰와 믿음이 부족한 것은 사실일 수 있다고 했음.
“상호방위조약에 크게 의지하지는 않고 있다. 한국전이 터졌을 당시에 그런 방위조약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적시에 아주 귀한 도움을 주었다.” (이때 박대통령은 약간 흥분했음) 양측의 신뢰성 문제에 대해 박대통령은 1년 전 닉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를 상기시켰음.
1년 전 닉슨 대통령은 그의 독트린과 해외 미군 감축의 의도를 설명했음. 닉슨 대통령은 한국에는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미군이 더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음. 이런 언급은 실질적으로 공동선언에서 나타나 있음.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때도 비치 장군(General Beach)은 서신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는 한 한국에서 미군이 빠져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음.
이때 내가 뭔가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박대통령을 바라보자 그는 내 시선을 피했음. 그는 흥분된 상태였고, 나는 잠시 생각 끝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음. 비서실장과 통역자가 있는 앞에서 박대통령이 틀렸다고 고쳐주기보다 일단 넘어가기로 한 것임. 어떤 경우에라도 그는 상대방이 잘못을 지적하려는 틈을 주지 않았음.
박대통령의 말이 빨라졌음. “이제 한국이 경제 발전과 자주 국방을 할 때가 왔다. 한국이 이제는 자립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략)
12. 마이클리스 장군이 실질적인 장비와 자금 조달, 우선순위, 훈련에 필요한 시간 등 한국군현대화위원회에서 토의하고 결정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설명했음.
13. 마이클리스 장군과 나는 박대통령이 지적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보장’을 충족시키기에는 정말 시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언급한 병력과 장비 감축은 곧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음. 장비를 싣고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우리는 다시 박대통령에게 물었음.
14. 박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다시 끼어들었음. 우리 얘기를 듣자니, 한국 대표는 감축 합동계획에 가 앉아서 미국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었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한국 대표들은 우리와 만나야 하며, 부대와 장비 정렬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하는데 한국측의 아이디어를 알 수 없으니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음.
15. 박대통령은 감축에 대한 미 대변인 성명을 보니 미국 정부는 그대로 실시할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화 작업 토의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결과가 도출된다면 미군 감축에 대해 토론할 용의가 있으며 미국측과도 만나겠다는 말이라고 했음. (중략)
16. 박대통령이 마이클리스 장군에게 자세한 감축 계획과 이미 승인된 사안의 윤곽을 알려달라면서, 부대 전체에 해당되는 것인지 부대 일부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음. 마이클리스 장군은 차트를 보여주면서 주한미군 철수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 설명했음.
17. 그러자 박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적인 계획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그때 내가 다시 나서서 한국측이 우리와 같이 작업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음. 박대통령은 유감스럽다, 불만스럽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미군이 비상시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그건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이번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면서 한국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음. (중략)
18. 나는 인터뷰 자리를 떠나면서 박대통령에게 우리의 견해를 밝힌 비공식 문건을 남겨놓았음.
19. 박대통령은 아무런 반응 없이 한동안 앉아 있더니 입을 열었음.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중간보고를 아직 받지 못했다. 보고받기 전까지는 합동계획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 보고받은 다음에 다시 만나자.” 이에 대해 나는 곧 뵐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음.
20. 박대통령의 태도에서 느낀 보다 구체적인 것은 차후 언급하겠음. 인터뷰가 끝났을 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음.
작별 인사를 하고 대통령 집무실을 막 나서기 직전에 나는 다시 한번 돌아서서 박대통령을 쳐다보았음. 박대통령은 마이클리스 장군이 건넨 감축승인계획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음. 이상하기 짝이 없었음. 인터뷰 내내 박대통령은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임.’
플레이보이 정일권과 김종필의 야망
1970년 12월/국무부
박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선거를 4개월 앞두고 70년 12월 말에 당정개편을 단행했을 때 주한 미 대사관은 이 주요 인사 개편에 대한 견해를 국무부로 보냈다. 당시 한국 언론은 당정개편에 대한 사실만 보도할 수 있었을 뿐, 개편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해설 기사 보도는 싣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을 때였다.
6년 반의 장수 국무총리 정일권이 물러나고,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김종필의 당 복귀는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 정치판 분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 정치판 분석
국무총리: 정일권의 퇴진이 예상되기는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음. 6년 반 만에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남. 사임의 표면상의 이유는 국회의원직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정일권은 최근 총리 업무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가 대통령에게 퇴진을 간청했음.
그의 플레이보이로서의 평판과 지난 봄 정인숙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 때문에 정치적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었음. 박대통령이 정일권을 백두진으로 교체한 주요 원인은 10년째의 행정부에 새 인물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나 근본적인 변화는 아님. 정일권과 마찬가지로 백두진 역시 개인적인 힘이 없고 이승만 때부터 이어져온 인물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김종필이 당 지도부로 복귀해 선거를 총괄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후락으로 하여금 중앙정보부를 맡게 한 놀라운 결정은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임. 이후락이야말로 KCP(김종필)가 당에서 얻게 될 힘을 견제할 수 있는 적임자로 평가되는데, 박대통령은 김종필이 이후락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간주하고 있음.’
김종필-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
1969년의 3선개헌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종필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에게 면담을 신청한다. 1970년 12월의 일이다. 국무부는 즉각 김종필의 최근 활동 및 정치적 입지, 방미 목적 등을 작성해 키신저에게 보고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좌에 오르게 만든 쿠데타의 설계사 김종필씨가 현재 개인 업무로 미국을 방문중인 바, 한국대사관을 통해 키신저 보좌관과의 면담 약속을 신청했음. 김종필 씨는 1963년 언젠가 하버드 국제 세미나에서 키신저 보좌관 밑에서 공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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