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비판 : 이태진 교수의 '實證' 문제있다 - 개방적 시장환경의 영향 고려하지 않아

이강기 2015. 10. 4. 10:18

 

 

 

비판 : 이태진 교수의 '實證' 문제있다

 

 

 

개방적 시장환경의 영향 고려하지 않아

 

 

20041105일 이영훈 서울대

 

 

 

<1>경제부분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양반가문의 족보를 자료로 한 최근의 인구사 연구는 189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인구가 이전의 정체와 감소로부터 증가의 추세로 반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서 조사된 양반가문의 추수기를 자료로 한 몇 사례연구는 단위토지당 지대량이 매우 장기간 감소하다가 1890년대 중반을 저점으로 하여 다시 반등하기 시작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태진 교수는 이 새롭게 알려진 두 추세와 이미 잘 알려진 같은 시기의 몇 가지 사실들, 예컨대 種痘法 도입에 따른 인구 증가, 식량 수입에 의한 기근 해소, 1895-1900년간 경상도에서 있었던 수리시설의 확충 등과 같은 사실들을 그가 근대국가로 그 역사적 위상을 설정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정책효과로 적극 평가하고 있다.(교수신문 330)

 

 

이 교수가 주목한 인구와 지대량의 두 추세는 그의 대한제국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김재호 교수나 필자 등의 경제사 연구자들이 주로 밝힌 것이다. 논쟁 상대방의 연구성과를 자설의 근거로 채택하고 있는 일견 당혹스러운 국면을 맞아 김 교수는 이 교수가 열거한 여러 긍정적인 사실들이 대한제국이 취한 근대화정책의 성과로 해석되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면이 있을 뿐 아니라 개항 이후 개방경제로의 이행, 새로운 기술과 자본의 도입, 갑오개혁에 의한 제도의 변화 등과 같은 여러 다른 요인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331) 필자는 이러한 비판을 맞은 이 교수가 과연 어떠한 대응을 보일까 내심 궁금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난 교수신문에 실린 그의 대답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333)

 

 

 

지석영

어떤 새롭게 관찰된 현상의 요인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논리와 실증의 면에서 상정 가능한 여러 요인을 하나씩 차례로 검토하고 그 경중을 따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교수는 그러한 마땅한 수순을 밟고 있지 않다. 신중한 연구자라면 문제의 시기가 개항기임을 고려하여 개항과 더불어 성립한 개방적 시장환경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종두법은 개항 직후 제 1修信使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곧바로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경상도부터였는데, 그 점은 앞의 인구사 연구에서 제시된 대로 인구의 증가추세가 전라도보다 경상도 양반가문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에서 잘 입증된다. 개항 이전 조선경제의 대외의존도는 1%에 못 미쳤다. 그랬던 폐쇄경제가 1910년까지 16%의 개방경제로 변모하였다. 개방경제가 폐쇄경제의 고질인 기근을 해소시키는 미덕을 발휘함은 개항기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로 큰 흉년이 있었지만 기근과 아사는 더 이상 없었다. 당대의 여러 사람이 시장경제의 덕목으로 지적하고 있는 그 사실을 혹 집권자가 베푼 선정의 덕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만큼 엉뚱한 일도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상정 가능한 요인은 동학농민혁명의 진압에 따른 농촌사회의 질서 회복이다. 필자가 보기에 18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단위토지당 지대량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에는 이 미증유의 정치적 대사건이 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혁명의 열정과 소란이 가라앉은 후 사회질서가 정상으로 돌아서고 노동규율이 다시 잡히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지대량이 증가추세로 올라선 것과 관련해서는 전라도 영광의 민사소송들을 분석한 정승진 박사의 연구를 소개할 수 있다. 필자도 이전에 경상도 예천의 모 양반가의 일기를 통해 동학혁명 이후 농촌의 수리질서가 회복되는 과정을 추적한 적이 있다. 이 교수가 소개하고 있는 경상도 수리시설의 사례, 1895년 이전에는 수리시설이 주로 폐기되다가 이후 주로 신설되는 추세로 반전한 것도, 농촌사회에서 인간들이 수리공동체를 다시 건설하기 시작한 효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교수처럼 이 모든 긍정적 신호를 대한제국의 정책효과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순차와 수준의 논증이 필요하다. 첫째 집권자의 정책 의지의 화폐적 표현이라고 할 중앙재정의 구성에 있어서 관련 산업비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분명히 할 것, 둘째 당국의 정책이 농촌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집행됨에 필요한 인적 물적 여건은 과연 구비되어 있었는지를 확인할 것, 셋째 모든 정책이 다 그러하듯이 정책의 효과가 발휘되기까지의 시차와 비용은 얼마였는지를 계산할 것, 넷째 무엇보다 그 정책요인이 앞의 시장요인이나 사회요인보다 더 결정적이었는지 판별할 것 등이다. 그렇지만 이 교수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는 1897년 대한제국이 출발하자마자 무슨 마술처럼 아무런 정책시차도 없이 동시기 향촌사회의 모든 변화를 이끌어 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참고로 대한제국의 재정구조를 보면 농상공부 예산의 비중은 18973.6%에서 1900년에 6.9%로 약간 증대하였다가 1901년에 0.8%, 1904년에는 0.4%로 급감하여 사실상 1901년부터 어떠한 수준의 산업정책도 포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재정구조의 정부를 어찌 식산흥업의 근대국가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중앙은행 허가서

위와 같은 순차 및 수준과 무관하게 이 교수가 고종황제를 변호하기 위해 거듭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 증거들은 우선 그 기초적 사실관계에서 동의할 수 없는 면이 너무 많다. 이 교수는 고종이 1898년 외자를 도입해 금융제도의 근대화를 본격화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느 나라가 당시 망해가는 왕조에 돈을 빌려 주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 교수는 1899년에 설립된 天一銀行의 작용으로 당시의 인플레가 진정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럼 당시 경향각지에서 1904년까지 오르기만 하고 있음을 보이는 수많은 물가 데이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교수는 천일은행으로 백동화의 유통권역이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동 은행의 元帳을 직접 분석해 본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는 찬성하기 곤란한 주장이다. 은행이 통화권역을 확대함에 요구되는 지점의 설치는 천일은행의 경우 개성과 인천에 국한되었고, 여타 다른 지방과의 환금융 네트워크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종은 무슨 영문인지 자신의 사금고와 다를 바 없는 천일은행을 승격시킬 요량은 않고 별도의 중앙은행을 설립할 조례를 반포하였다. 이 교수는 고종이 그 중앙은행의 주식 매집을 위해 많은 자금을 비축했으리라고 추측하지만, 막상 중앙은행의 주식이 공개 모집되었을 때 황실이 투자했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도 나온 적이 없었다. 중앙은행은 끝내 종이 은행에 불과하였다.

 

이태진 교수와 김재호 교수는 고종 황제가 공적 재원을 이속시켜 정부재정의 절반 정도로까지 팽창시킨 내장원이 황제에게 상납한 자금이나 심지어 내장원을 통하지 않고 황제가 직접 챙긴 거대 규모의 비자금이 얼마나 생산적인 용도로 지출되었는지를 둘러싸고 한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 교수는 1904년의 경우 고종이 약 5백만 원의 내장원 상납금을 전시비상금으로 비축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미 그 해 2월에 일본군의 대한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이 완료된 마당에 그 돈이 군사비에 쓰였을 가능성은 희소하다. 반면에 김 교수는 고종의 막대한 비자금이 그를 둘러싼 궁중과 신흥세력의 사치스럽거나 부패한 재분배경제의 자금으로 낭비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 하지만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추측과 가설을 둘러싸고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으며, 앞으로 이 방면에 관한 본격적인 실증 연구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당시에 작성된 황실의 재정지출부가 방대한 양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논쟁이 해결될 전망은 밝다. 아마도 그 결과는 쌍방이 어물어물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일방에 엄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2>사상부분

 

 

고종이 개명군주라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은 고종이 계승하고 있다는 民國 정치이념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예컨대 군왕과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간주하는 정치이념을 말한다. 필자는 지난 332호의 이 지면에서 그러한 내용이라면 그것은 순수 성리학적인 것이며, 정치와 경제 또는 공과 사의 분리를 특색으로 하는 근대지향적인 정치이념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표하였다.

 

그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333호의 이 지면에서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필자가 고종이 1893大報壇에 제사하고 1898'皇明實錄'의 서문을 지은 것을 트집 잡은 데 대해 대보단에 제사한 것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의 의지를 담은 것이고 '황명실록'의 서문은 논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필자는 1882년 임오군란을 당하여 淸軍을 불러들임으로써 개화파 관료들의 자주외교 노력을 좌절시키고 결국 國亡의 길을 튼 고종의 과오가 너무 크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또 당시의 일중 대립의 국제정세 하에서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해준 의 은혜를 기리는 대보단 제사가 객관적으로는 반일본 친중국의 외교노선을 시사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종의 대보단 제사를 반청적인 것으로 보는 이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십보 양보하여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작 그러한 종교적 의례를 통해서 밖에 독립의 의지를 표명할 수 없었던 왕이라면 그 왕을 어찌 개명군주라고 칭송할 수 있겠는가. '황명실록'의 서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국공법 하 자주국의 황제가 된 사람이 어찌 한 때의 종주국이었던 나라에 대한 의리를 기리는 그 책의 서문을 아무렇게나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지난 332호에서 필자는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가 개명군주를 대망하였음을 지적하였다. 필자가 다산을 거론한 본의는 다산 이후 조선의 정치사상사에서 군왕을 개명군주로 만들 만한 사상적 토양이 朝野에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간접적으로, 아니 총체적으로, 이 교수의 고종 개명군주론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이 교수가 필자의 이러한 본의를 이해하였다면 필자에 대한 그의 대응은 다산 이후의 정치사상사가 그렇지 않았음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필자의 다산 이해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형태를 취함이 마땅하였다.

 

그렇지만 지난 333호에서 보인 이 교수의 대응은 고작 고종이 다산의 문집을 읽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방대한 문집 가운데 무엇을 읽었다는 말인가. 흔히들 읽었다는 '牧民心書''經世遺表'의 다산 경세론을 말하는가. 아니면 '喪禮四箋'에서 이미 전환의 단서를 표출하면서 '論語古今註''尙書古訓'에 이르러 조선 경학사상 최초로 성리학적 사유구조의 파쇄를 명확히 하는 일대 전환의 거기까지 이르렀다는 말인가. 필자가 알기론 지난 10년간의 최근에 이르러서야 다산의 經學은 겨우 여러 신진기예들에 의해 그 전모가 파악되고 그 나머지에 다산의 정치학으로서 개명군주론과 유사한 언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경학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은 120년 이전의 어떤 인물이 이미 다산의 모든 것을 이해하였다는 듯이 이 교수는 쓰고 있다.

 

 

이태진 교수는 1904년 고종이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알현한 자리에서 시한부로 그의 재상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던 건에서 현명한 재상을 갈구했던 고종의 개명군주로서의 상을 찾고 있다. 솔직히 말해 필자로서는 알지 못했던 일이라 이 교수의 가르침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관련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19043월 두 차례 두 사람이 나누었던 대화록을 검토한 필자의 소감은 이 교수와 달리 참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 해 2월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기습 점령한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할 제 1보로서 韓日議定書를 강요하였다. 그 일본의 사자로서 3월 서울에 도착한 이토오는 고종과 그 일족에게 일본 황제의 은사금을 내리면서 혹 다시 일본을 배반하는 일이 있으면 큰 변이 생길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명확히 그것은 새로운 종주국으로서의 위세와 공갈이었다.

 

그 사명을 띠고 온 이토오에게 고종은 이제부터 갑오개혁 당시에 유감스럽게 중단된 내정의 개혁을 단행할 터이니 思量輔導를 얻고 싶다고 하는데, 그 말을 재상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좋을지 모르겠다. 이어 두 번째 만남에서 고종은 자신의 주권을 내각의 신하들이 자꾸 침범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상의한다. 이토오는 마치 어린 학생을 가르치듯이 군주가 만 가지 정사를 다 살필 수는 없으니 신하들을 신임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넘기되 법률과 상벌로 그들을 통제함이 마땅하다는 훈계를 베푼다. , 그러한 임금으로부터 개명군주가 그 일신에 체현할 근대적 국가이성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