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국방경비대 제 14연대가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군당국은 '4·3항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군대를 증파하고자 했는데, 이때 선택된 부대가 여수
14연대였어요.
여순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인사계 업무를 맡고 있던 지창수 상사였습니다. 그는 남로당과 직접
관련된 인물로 보입니다. 지창수는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남진중이다"라고 선전하였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 '남북통일'을 주장하면서 반란을 주도하였습니다.
지창수를 비롯한 40여명의 주도세력들은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곧 영내를 장악하고 여수시내로 진출했어요. 여수경찰서를 점거하고 주요 관공서들을 장악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죠. 여수 지역내 좌익 세력들의
도움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14연대원들만 약 2500여명 가량 되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여수 장악후 병력을 나누어
순천과 여타 인접 군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어요. 10월 22일까지 이들은 순천, 보성, 광양, 고흥, 곡성, 구례 등이 완전 장악되었고,
남원, 하동, 화순, 장흥 등지의 일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엄청난 기세였다고 밖에 할 말이 없죠.
반면에 여순사건에 대한
이승만정부의 초기 진압은 완전한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초기 진압에 동원된 4연대 일부 중대 등은 반란군에 합류했죠. 군당국은 송호성준장을
반군토벌사령관에 임명하면서 광주, 남원, 하동을 포위하여 산악지대로의 연결선을 끊고 해안으로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요, 4연대와 15연대의
일부 포위선이 뚫리면서 작전의 의미를 잃게 됐어요. 또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반란군에 대해서 진압군은 그리 적극적이 않았어요. 서로 대치는
하면서도 제대로 싸우지 않았죠. 이렇게 초기진압에 실패하게 되니까 정부는 급히 계엄령을 발표하고 병력을 증원하게 됩니다.
10월
23일 증원된 군대와 무기, 미군사고문단의 도움으로 진압군은 겨우 순천과 구례, 곡성 등을 탈환합니다. 이때 반란군의 또 다른 지휘관 김지회와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의 산간지대로 후퇴하게 되죠.
10월 23일 진압군의 여수에 대한 1차 공격은 선상 박격포 사격과 함께 시작된
상륙작전이었는데요, 박격포 사격에 미숙하고 상륙작전의 무모함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어요. 더 참혹한 실패는 24일 송호성 준장이 직접 지휘한
미평전투였는데, 이때 송호성이 부상당하고 AP통신 종군기자가 죽는 바람에 여순사건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답니다. 이승만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회의로, 미국을 비롯한 국내외의 시선들이 따갑게 정부당국을 압박했겠죠. 결국 군당국은 동원된 진압군 모두를 여수 탈환 작전에 사용하게
되요. 그 결과 김지회가 지휘하는 광양쪽의 반군은 안전하게 백운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입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장기적인 유격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10월 25일 여수탈환작전이 재개되었고 27일에야 완결되었습니다. 진압군은 동원가능한 모든 군대와 박격포, 장갑차,
경비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진압군은 민가와 일반 시민들을 구별하지 않는 초토화작전을 사용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또 당시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초법적인 계엄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부역자 색출과정에서도 무고한 많은
시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아야 했구요.
여하튼 현상적으로 여순사건은 이렇게 종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지창수와 김지회, 그들의 주력부대는 대부분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기 때문에 정말 끝난 것은 아니었죠. 정부 기록에 의하면, 김지회는 1949년
5월에야 사살된 것으로 나옵니다. 적어도 여순사건의 주역들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유격대로 활약하면서 이승만정부를 괴롭혔던 거죠. 더구나 이 지역
탈환과정과 수습과정에서 있었던 이승만정부의 많은 불법적인 행위들과 이후 독재정부들의 억압적 행태는 여순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여순사건으로 인한 많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여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거든요. (20세기 현대사연구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