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古代史 최초 異國여성 許黃玉은 누구인가? - 가락국의 허왕후는 인도 아닌 ‘한반도倭’ 출신

이강기 2015. 10. 4. 10:34

古代史 최초 異國여성 許黃玉은 누구인가?

 

가락국의 허왕후는 인도 아닌 한반도출신

 

·이희근 역사학자;사진·권태균 월간중앙 기자(;)

 

 

 

신비의 왕국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 그의 출신지를 추적하는 작업은 한반도 남부와 중국, 그리고 인도·태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넘나들어야 하는 어렵고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허왕후는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초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으로 알려진 김해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는 삼국유사가락국기조(駕洛國記條)에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허왕후의 출생과 관련된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천지개벽후 이 땅에는 나라가 없었다. 후한(後漢) 광무제 건무(建武) 18(서기 42) 3월 계욕( )날 황금알 여섯개가 든 황금상자가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왔다. 다음날 새벽에 알 여섯개가 사내아이로 변하였고, 그중 한 사람이 김해에 나라를 세웠다.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다. 6년후 아유타국(阿踰 國)의 공주인 허황옥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를 왕비로 맞았다는 것이다.

 

추측 무성한 기존의 허왕후 출생론

 

허왕후가 왔다는 아유타국이 어느 나라인가를 두고 지금껏 추측과 추적이 난무했다. 일찍이 한 아동문학가는 문제의 아유타국이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읍에 위치한 고대 인도의 아요디아국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허왕후는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출신의 왕녀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특히 김해에 남아있는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懸板) 좌우에 있는 네개의 장식판(裝飾板)에 그려진 쌍어문(雙魚文)이 바로 아요디아국의 문장(紋章)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후 김병모(金秉模) 교수는 쌍어문의 조사를 더욱 심화시켰다. 허왕후의 후손인 허 적(許積:161080)이 조선조에 세운 허왕후 능비에 나타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글귀에 착안해 그럴싸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 주요 얼개는 허왕후 일행이 쌍어문을 나라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普州:四川城 安岳縣) 일대로 왔다가 다시 김해의 가락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로왕릉 정문에 쌍어문이 그려졌고, 허왕후 능비에는 보주태후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아요디아국의 문장이고, 그것도 서기 1세기 허왕후 때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또 그 그림이 있는 수로왕릉 정문과 안향각(安香閣)이 그뒤로 보수되면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는지도 함께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 기록에는 그것을 입증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다.

 

다만 삼국유사가락국기조는 수로왕릉 묘역(墓域) 안에 사당이 존재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사당조차 조선 초까지만 해도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묘역도 거의 폐허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은 세종실록” 2010월 기묘조에 나타나 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이 선(李宣)의 보고 내용이다.

신이 순행하여 김해에 이르러 읍성 서쪽 길 옆을 살펴보았는데, 가락 시조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 기르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수로왕릉 雙魚紋은 조선 정조 이후 조성된 것

 

조정은 그후 수로왕릉과 그 부속시설을 수축(修築)하는 조치를 여러 차례 취했다. “정조실록정조 164월 을사조에 관련 기록이 있다.

가락왕릉은 김해부의 성 서쪽 2리쯤 되는 평야 가운데 있습니다.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魂遊石) 1(), 향로석(香爐石) 1, 진생석(陳牲石)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이란 네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돌에 세워 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1780)에 특별 전교로 인해 고쳐 세운 것입니다. (또한) 돌담으로 둘러 쌓았는데 앞은 제각(祭閣)까지 닿았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지금의 쌍어문이 그려진 수로왕릉 정문이나 안향각에 대한 언급은 한줄도 나타나 있지 않다. 결국 쌍어문은 그 건물들의 건립과 더불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면 이 건물들은 과연 어느 시기에 조성된 것일까?

 

정조 16(1792) 이후 왕명에 따라 수로왕릉에 배치된 능감(陵監)들의 기록을 정리한 숭선전지”(崇善展誌)에 따르면, 순조 24(1824)에 제각 동쪽에 안향각을 신축했다. 그후 내신루(內神樓) 3()이 기울어져 전복될 염려 때문에, 헌종 8(1843)에 내신루를 헐고 그 자리에 단층 건물인 외삼문(外三門)을 옮겨 세워 정문으로 삼았다. 이 외삼문은 정조 17(1793)에 세운 건물이다. 따라서 정문의 쌍어문은 정조 17년의 신축 때이거나 헌종 8년의 이전 때, 안향각의 쌍어문은 순조 24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쌍어문을 새긴 주체는 누구일까? “숭선전지에 따르면, 수로왕릉의 정문과 안향각 등을 세울 때 승려들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이 쌍어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쌍어문은 본래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장으로, 왕릉 정문의 현판에는 그밖에도 불교와 밀접한 그림들이 다수 등장한다. 현판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 그려진 남방식 불탑이 그렇고, 두 마리의 코끼리나 연꽃 봉우리가 그렇다. 더구나 쌍어문이 정말 아요디아국 문장이라면 오히려 수로왕릉이 아니라 허왕후릉쪽에 그려져 있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허왕후의 출신지를 둘러싼 종래의 주장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아 말 그대로 가설에 머물러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조에는 허왕후 본인의 입을 빌려 이런 기사가 등장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허왕후는 이렇게 스스로 아유타국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이 아유타국과 아요디아국의 가설이 성립한다면 아유타국은 분명히 불교가 크게 융성한 나라였을 것이다. 그곳에는 오늘날까지 아소카왕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보이라다(寶利邏多무저(無著세친(世親) 등의 쟁쟁한 불조사(佛祖師)들이 머물렀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확실한 점은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후라야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야인들로서는 당시 수만리 인도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터이고, 아유타국의 존재도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불교가 전래된 후에야 비로소 불교의 성지인 인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을 것이다.

결국 허왕후가 불교의 성지인 인도 출신으로 윤색된 것은 후대인들이 허왕후 시조전승의 신성화 작업을 하면서 불교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으로 필자는 믿고 있다. 허왕후가 한반도로 온 시기는 1세기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허왕후의 시조전승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화들은 일반적으로 불교·유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세부내용이나 요소들이 상당히 윤색·변용된 것이 사실이다. 그중 불교의 영향은 단연 컸다.

예컨대, 단군신화의 환인이라든지, 부여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가섭원은 좋은 예다. 혁거세신화 가운데 알영이 계룡(鷄龍)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다름아닌 마야부인의 석가 출생 이야기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수로신화에서 수로가 나라터를 잡으면서 말했다는 이 땅은 여뀌잎만큼 좁고 작지만 산천이 수려하여 16나한이 거주할 만한 곳이다라는 구절 또한 우리 신화 속에 불교적 관념이 투영된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듯 우리 신화는 불교적 관념과 요소를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윤색되어 왔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영향력이 커지자 신화도 불교의 권위를 빌어 신성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허왕후는 애시당초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허왕후 신화는 역사 속에서 신성화되어 가면서 불교의 권위를 빌리면서 다시 꾸며졌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 시기를 가늠해 보는 것이 중요한 수순이 된다.

수로왕을 비롯한 허왕후 신화가 불교와 접목된 것은 대략 가야에 불교가 정착된 시기로 보이는 질지왕대(8) 이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정은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월간조선200006월호 | 입력날짜 2001.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