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适 반란군 서울 무혈입성…백성 黃土 깔아 환영
“인조반정 功 다툼 밀리자 ‘위험한 도박’…부하 장수, 이괄 머리 베고 투항”
신병주_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인조가 공주로 피난갔을 당시 머물렀던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의 정자와 사적비.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타고난 무장이었던 이괄. 그는 정말 2등공신에 책봉된 것에만 불만을 품고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했던 것일까? 지방군을 이끌고 서울을 점령해 인조를 피난길에 오르게 한 이괄은 정녕 조선의 1인자가 되기를 꿈꾸었는가?
"이괄(李适)은 참판 육(陸)의 후손으로 무과에 합격했으며, 글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써 명성이 있었다. 1623년 북병사에 임명돼 부임하기 전 김류·이귀 등이 괄이 재주와 지혜가 많다 하여 그에게 반정의 비밀 계획을 말하였더니, 괄이 강개(慷慨)하여 좇았다.
반정하던 날 부서를 나누는 등 모든 계획을 괄이 했으나, 공(功)의 등급을 논할 때 늦게 참석했다 하여 2등으로 낮추었으므로 괄이 매우 불평했고, 공론 역시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할 때 유자광은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자였으나, 반정하던 날 그의 계책을 썼으므로 1등공신이 되었다.
오늘날 괄의 한 일이 자광과 같은데 공을 책정하는 데는 오히려 낮추었다’ 하며 자못 억울하게 여겼다. 이 해 여름 평안도에 오랑캐의 침입이 우려되어 괄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자 괄이 크게 노해 마침내 속으로 다른 마음을 품었다.”
<연려실기술>의 ‘하담록’을 인용해 쓴 ‘이괄의 변’ 부분이다. 논공행상이 이괄 반란의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다.
1623년 3월13일 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일군의 무리가 긴장감이 역력한 채 속속 홍제원 근처로 집결했다. 반정군에 합류한 능양군(후의 인조) 또한 친위부대를 거느리고 연서역 근처에 주둔하면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사를 앞둔 이 급박한 시간에 대장으로 추대되었던 김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술렁이던 무리들은 임시로 이괄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거사를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김류가 뒤늦게 황급히 도착하자 예정대로 다시 김류를 총대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이괄은 한때나마 반정군의 대장으로까지 추대되었다. 거사 전 반정군을 총지휘하기로 내정되었던 김류는 이미 조정에 고변돼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약속 장소인 홍제원으로 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귀는 이괄로 하여금 대장을 맡게 하고 군사를 출발시키고자 했다. 순간 이 정보를 입수한 김류는 홍제원에 도착했고, 예정된 계획대로 대장으로서 반정을 주도해 나갔다. 김류를 총대장으로 추대한 반정의 주도세력은 세검정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물에서 칼을 씻으며 함께 죽기를 맹약하면서 반정을 꼭 실현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창의문(彰義門:창덕궁의 북문)을 넘은 반정군은 곧바로 돈화문에 이르렀다. 이미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명에 의해 문은 쉽게 열렸고, 반정군은 창덕궁의 전각들에 불을 지르며 광해군의 침소를 급습했다. 반정군은 창덕궁 안 함춘원 나무 풀숲에 불을 지르며 반정 성공의 신호로 삼았다. 만약 불길이 치솟지 않으면 자결하라고 가족들에게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세검정에서 칼을 씻으며
▶이괄의 글씨.이괄은 무신이면서도 글을 잘 짓고 글씨에 능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반정의 주도세력은 이이와 이항복의 제자인 김류·이귀·김자점·신경진·이괄 등 서인이 대부분이었다. 광해군 시절 정권은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북인들이 장악했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서인과 남인들은 북인들에게 정치적 불만을 가지고 점차 세력을 결집했다. 서인들이 내세운 반정의 명분은 ‘폐모살제’였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사건을 반정의 도화선으로 삼은 것이다.
반정의 주체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능양군(후의 인조)은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으로, 동생 능창군이 역모 혐의로 처형된 아픈 과거가 있어 쉽게 반정군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반정을 주도했던 이귀는 1622년 평산부사로 부임한 후 관내에서 자주 발생하던 호환(虎患:호랑이의 공격)을 구실로 많은 군사를 모집해 점차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이귀의 막강한 군사와 훈련대장 이흥립의 합류, 북병사 이괄의 참여로 반정군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다.
권신 김자점은 미리 술과 안주를 준비해 광해군과 가까웠던 김상궁(일명 김개똥)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전두환 세력이 준장 진급 모임에 자신들의 반대파를 대거 참여시켜 쿠데타 성공에 일조한 것과 유사한 방법이다.
조직적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반정군은 거사일을 3월13일로 정했다. 반정의 주역 최명길이 점을 쳐 정한 날짜였다. 인조반정 주도세력이 동원한 군사는 대략 1,000명 정도. 조선군의 최정예 군사인 훈련도감군에 비한다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반정군은 권력의 중심부를 집중강타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1961년 해병대 병력을 중심으로 5·16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나 1979년 12월12일 하나회 출신 부대를 중심으로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전두환의 경우와 유사하다. 이들이 주도한 쿠데타군도 진압군에 비해 수적으로는 훨씬 열세였으나 권력의 포스트를 장악함으로써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조반정은 현대사의 군사 쿠데타와 비교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갑작스러운 반정군의 공격에 놀란 광해군은 잠을 자다 황급하게 일어나 내시에게 업혀 궁궐 담을 넘었다. 그리고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해 있었으나 의관 정남신의 고변으로 곧 끌려나왔다. 광해군은 자신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다는 반정군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선 역사상 두번째 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광해군은 황급히 달아나면서 내시에게 종묘에 불이 났는지 물었다. 종묘에 불이 났다면 반드시 역성혁명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폐위하려는 사건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런데 종묘와 가까운 함춘원 근처에 불이 붙은 것을 본 내시는 “종묘에 불이 난 것 같다”고 보고 했다. 자포자기한 광해군은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반정군에 체포되어 끌려왔던 것이다.
북인의 최후와 공신 간의 갈등
한편 광해군을 보좌했던 대북세력의 핵심들도 거의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은 인목대비의 교서를 통해 반정의 정당성을 다시금 공표했다.
“적신(賊臣)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악행을 부추겨 임해군을 해치고 영창대군을 죽이며 조카(능창군)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을 해쳤다. 또 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가 하면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은 명(明)에 배은망덕하여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에 인조가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종묘와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볼 수 없어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 1년 3월14일)
이처럼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은 ‘폐모살제’와 광해군대의 중립외교에 대한 비판이 주원인이었다. 이후 광해군대의 잘못된 정책을 만회하기 위해 재성청(裁省廳) 등의 기구가 만들어졌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권세가들에게 빼앗은 토지는 반정공신에게 다시 불하되는 등 공신들의 배를 불리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특히 공신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나는 등 반정 주체세력은 통일되지 못했다.
또한 시대를 한탄하는 아래의 <상시가(傷時歌)>(인조 3년 6월19일)도 민간에서 유행했다고 하는데, 반정 주체세력의 선전과 달리 인조반정이 백성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아 훈신들이여 /잘난 척하지 말아라
그들의 집에 살고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또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
당신들과 그들이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
1623년 인조반정은 성공했지만 집권 서인들이 북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조롱 섞인 노래들이 민간에 유행하고, 명분 없는 반정에 대한 모역과 고변 사건이 인조 초반 줄을 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반정 주체세력 간의 알력에서 빚어진 ‘이괄의 난’이었다.
감시와 의심이 불러온 반란
1624년(인조 2) 1월22일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이 그의 아들 이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반정 때 김류의 지각으로 임시로 대장에 추대될 만큼 반정군의 핵심이었던 이괄이었지만, 반정 후 그는 1등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한마디로 반정 주체들 간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것이었다.
반정 다음날 이귀는 인조에게 이괄의 활약상을 말하며 병조판서에 제수하도록 요청했다. 그런데 이괄은 이 자리에서 갑자기 형세를 관망하다 뒤늦게 반정군에 합류한 김류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창의문을 거쳐 궁궐안으로 쳐들어갔다.
“신에게 무슨 공적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을 당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하게 했는데, 김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했으나 이귀가 적극 말려 시행하지 못했습니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이괄의 변’)라면서 괄괄한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반정에서 기회주의적 성향을 보인 김류의 행동을 노골적으로 비난한 것이었다.
이 발언은 조정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고, 김류를 비롯한 반정 주체세력들이 이괄을 부담스러운 인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괄은 반정의 논공을 정하는 과정에서 2등공신으로 내려앉았다. 김류·이귀·김자점·심기원·이흥립 등 반정 주모자들이 모두 1등공신에 책봉된 것과 그의 활약상을 비교하면 충분히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처사였다.
1623년 5월 이괄은 여진족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돼 북방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사실 이괄은 손꼽히는 일류 무장이었다. 그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형조좌랑·태안군수·제주목사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광해군대에는 이항복에게 장수의 재질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무신임에도 특이하게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즉, 이괄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문무를 겸비한 장수감으로 널리 인정받았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후금의 위협이 늘어나는 가운데 그가 부원수에 임명된 데는 반정 참여자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병사(兵事)에 능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정의 주체세력들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이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아들 이전 또한 상당한 무재(武才)를 지닌 인물로 반정 주체세력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기운을 감지한 조정에서는 이괄 부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감시에 나섰고, 이것이 오히려 이들 부자를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라는 심정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1624년 인조는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한명련·기자헌 등이 군사를 일으켜 변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즉시 추국청(推鞫廳)이 소집되어 기자헌이 문초받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귀는 즉시 이괄을 잡아들일 것을 건의했다.
‘이괄의 반역 음모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들 이전이 반역 음모를 꾀한 만큼 이괄이 충분히 반역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처럼 조정에서는 이괄 부자를 압박해 갔다. 이괄 부자는 그동안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조정의 감시와 의심의 눈초리가 가해지자 인조를 상대로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게 된다.
반란군의 서울 점령과 인조의 피난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 있는 인조 친필.
1624년 1월21일 이괄은 급히 휘하 군관들을 소집했다. 그의 휘하에는 평안도 토병(土兵)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부방군(赴防軍) 1만2,000명, 그리고 항왜(降倭: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일본 군인) 130여 명이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군사를 일으켜도 승산이 있을 듯싶었다.
특히 항왜는 칼을 잘 쓰기 때문에 기습작전에 능했다. 서울(한정)로부터 아들 이전을 잡으려고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이 내려오고 있다는 첩보는 반란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 1월22일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본거지인 영변을 출발했다.
이괄의 군대는 빠른 기동력을 발판으로 황주 부근, 임진강 전투 등지에서 연이어 관군을 격파하고 서울 진격을 서둘렀다. 도원수 장만은 “적이 교활하게 샛길로 출몰해 위치를 종잡을 수 없다”는 첩보까지 올릴 정도로 이괄 부대의 기동력과 전투력은 뛰어났다.
그리고 2월9일 이괄의 군대는 마침내 서울에 입성했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군대가 서울을 점령한 것은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반란군이 서울 근방에 이르렀다는 첩보를 접한 인조 정권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에 긴급히 피난 대책을 강구했다.
인조가 종실과 신하들을 이끌고 먼저 남쪽으로 피난했고, 인목대비 일행이 뒤따라 내려오도록 했다. 인조 일행은 남쪽으로 피난 가면서 가도에 머무르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또 부산의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왜인을 동원할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인조 정권의 다급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정황들이다.
인조 일행이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이 이괄의 반란군은 2월9일 서울로 무혈입성했다.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선조의 아들이며 온빈 한씨의 소생인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곳곳에 방을 붙여 민심을 수습해 나갔다. 흥안군은 인조를 따라 한강을 건넜다 중도에서 도망쳐 이괄에게 온 인물이다. 이괄은 흥안군의 인물됨이 왕재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자 왕으로 추대했다.
많은 백성이 ‘승리자’인 이괄의 군대를 환영했다. 이괄은 선봉대로 기병 30명을 파견해 ‘도성 사람들은 동요하지 말고 평상시대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알린 다음 한명련과 더불어 서울로 들어왔다. 이때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 이들을 영접했으며, 도성민들은 황토를 깔고 이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피난차 한강을 건널 때 사공들이 모두 숨어 버려 발을 동동 굴렸던 인조 일행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이괄의 반란군이 백성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괄은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한 뒤 서울에 남아 있던 사대부를 불러들여 새로운 조정을 구성했다. 이괄이 조선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조선에는 두 명의 국왕과 두 개의 조정이 생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직 인조가 명나라로부터 국왕 책봉을 받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괄이 옹립한 흥안군이나 인조 어느 쪽이든 공식적으로 조선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군사적 힘만이 양측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반란군을 뒤쫓아 오던 정부군은 인조의 피난과 반란군의 서울 점령 소식을 듣고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정부의 지휘관들은 도원수 장만을 중심으로 대책회의를 한 끝에 서울의 인심이 이괄 쪽으로 굳어지기 전에 일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도성이 내려다보이는 안현(安峴)을 기습점령하고 병력을 전후좌우로 배치해 반란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정부군이 안현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 역시 군대를 정비해 정부군과의 일전에 나섰다. 그러나 서울 점령으로 자만에 빠진 반군은 정부군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했고, 결국 수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이괄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 이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숭례문·광희문(光熙門)을 거쳐 경기도 광주 방향으로 달아났다.
반란군의 내분과 이괄의 최후
인조 일행은 정부군이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직 이괄이 살아 있음을 의식해 좀더 안전한 공주로 피난 장소를 옮겼다. 한편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자 부하 장수와 핵심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던 이괄은 광주 경안역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이곳에서 반군 간에 내분이 발생했다. 안현 전투에서의 패배 후 정부군의 군사력에 지레 겁을 먹은 이괄의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 등 반란 핵심들의 목을 벤 뒤 전격적으로 투항한 것이었다.
‘이괄의 목을 베어 오는 자는 부원군에 봉하고 천금을 내려 주겠다’고 한 정부의 선무공작의 효과도 컸다. 이괄의 부장 이수백과 기익헌은 이괄 부자와 한명련의 머리를 베어 인조의 피난지인 공주로 달려가 항복했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고 국왕까지 피난시킨 반란군의 초기 위세에 비하면 너무 허망한 결말이었다. 이로써 20여 일에 걸쳐 진행되었던 이괄의 난은 종결되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시대 일어났던 반란 가운데 유일하게 수도 서울을 점령한 반란으로 무엇보다 반정 이후 인조 정권이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정권은 정적인 북인의 숙청에만 주력했지, 일반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사회·경제 정책들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이괄의 반군이 서울로 들어왔을 때 백성들이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백성들의 눈에는 인조반정 후에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라는 내전으로 한 차례의 큰 홍역을 치른 인조 정권의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반란 종결 후에도 인조 정권은 민심수습보다 정권 유지에 필요한 정보정치에 주력함으로써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반정의 명분인 ‘친명배금’이라는 강경한 대외정책에 주력했다. 더욱이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들은 후금으로 도망쳐 조선의 불안한 정세를 전하면서 이들의 침입을 유도했다. 이러한 악재가 겹치면서 조선은 신흥 강국 후금과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펼치게 되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괄의 난은 민심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했던 반정 주체세력의 부적절한 처신이 얼마나 엄청난 변란을 초래하는가를 역사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이괄의 난을 한 개인의 불만과 공명심에서 발생한 정변으로 가볍게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월간중앙2005년 03월호 | 입력날짜 200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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