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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프 니덤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 |
니덤이 살았던 시기는 중국 대륙에서 청(淸) 왕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때였다. 현대 중국 경제에 밝은 미국의 경제학자 배리 노턴(Barry Naughton)은 1812년에 전 세계 GDP(국내총생산)의 32%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것으로 추산되는 부국(富國) 청 왕조는 1840년에 시작된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반(半)식민지가 됐다고 했다. 니덤이 태어난 1900년 청의 수도 베이징(北京)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열강 8개국에 분할 점령당했다. 중국은 지금도 당시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베이징 북서쪽의 원명원(圓明園)에 부서지고 불탄 궁궐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화약과 나침반을 먼저 발명한 중국이 대포와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유럽 전함(戰艦)의 공격에 꼼짝없이 무너진 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청말(淸末)의 중국 지식인은 청이 유럽에 맥을 못 춘 이유를 ‘사이(賽) 선생’과 ‘터(特) 선생’이 중국 대륙에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이 선생’은 영어 ‘사이언스(science)’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고, ‘터 선생’은 영어 ‘테크놀러지(technology)’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청말 지식인들의 그런 반성은 현대 중국에도 이어져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중심가 동쪽 젠궈먼(建國門) 부근에 ‘사이터(賽特·science and technology)’라는 이름의 백화점을 세워놓았다.
이 이름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셋째 딸 덩룽(鄧榕)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징의학원 출신의 덩룽은 아버지가 생전에 “과학기술이 곧 생산력”이라고 강조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그런 이름을 지어놓은 것으로 베이징 사람들은 알고 있다. 과학과 기술을 중시해야 한다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 덩샤오핑의 교훈은 그가 지명한 후계 정치지도자들,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두 사람이 모두 자동차 엔진 전공과 수리(水利) 공정 전공의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에도 나타나 있다. 그런 덩샤오핑의 영향을 받아 장쩌민이 배후에서 지명한 현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역시 법학박사 출신이기는 하지만 이공계 최고 대학인 칭화(淸華)대 출신이다.
그러나 그런 과거사와는 달리 중국의 현실에서, 현대 중국인들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니덤이 평생 가지고 있던 퍼즐, ‘왜 화약과 나침반, 종이와 인쇄술을 먼저 발명한 중국이 과학기술 축적에서 유럽에 뒤졌나’, 그리고 ‘왜 산업혁명이 영국에서는 일어났는데,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나’라는 물음에 대해 상하이에서 만난 중국 지식인들은 이런 조크로 대답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제임스 와트(Watt)가 찻물을 끓이다가 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리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차를 끓인 역사로 말하면 영국은 중국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찻물을 끓이는 중국의 주전자는 뚜껑이 무거운 철 주전자였기 때문에 들썩거리지 않았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중국 지식인들의 그런 대답은 조크에 불과하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날 즈음에 이미 관련 과학지식이 축적돼 있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의 발명도, 산업혁명도 가능했다. 기체에 열을 가하면 기체의 부피가 늘어나고, 어느 정도의 열을 가하면 기체의 부피가 얼마나 늘어나는지에 대한 보일·샤를(Boyle·Charles)의 법칙과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의 법칙을 비롯한 기체화학 지식의 축적이 이미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었다.
- ▲ 베이징 사이터백화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재빨리 유럽의 과학기술을 습득해서 살아남았다. 그 흔적은 영어의 ‘사이언스(science)’를 ‘과학(科學)’이라는 한자(漢字)로 번역한 것은 중국도 조선도 아닌 일본이었다는 사실에도 남아있다. 중국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 따르면 일본의 계몽사상가들이 1888년에 영어 ‘science’를 중국의 ‘과거지학(科擧之學·인재로 선발될 사람이 꼭 알아야 하는 학문)’이라는 말에서 따서 ‘과학’이라고 했고, 이 과학이라는 말을 1893년 개혁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가 공식적으로는 처음 사용하기 시작해서 중국에 퍼졌다고 되어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수신사로 처음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발전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기록한 책 일동기유(日東記遊)에는 일본이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 만든 철선(鐵船)을 인천에서 타고 일본으로 가면서 놀라워 하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세월호의 비극이, 일본에서 사온 철선이 어떻게 바다 위에서 뜨고 균형을 잡는지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선사 직원들이 평형수를 빼고 과적한 데서 비롯됐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우리의 근대화는 아직도 이뤄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의 저 너머에서 아직도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괜찮아”, 그리고 청말부터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인의 비과학적 사고방식의 표출이라고 지적해온 “차부두어(差不多·그게 그거야)”란 말이 귀에 들린다. 과학이 지배하는 물질세계에서는 어느 선에 이르면 괜찮지 않게 되고, 어느 선에 이르면 그게 그것이 아닌 때가 오는 법인데도 말이다.

상하이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 한반도연구소 방문교수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