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현대사 연구의 방향과
과제 시대정신, 2013년 가을호 |
I. 문제제기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에 대한 평가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기본 잣대가 분명해야 한다. 명확한 기준 없는 평가는 자의적이거나 정치선전의 일부가 되고 경우에 따라 역사왜곡을 기도하는 세력에게 이용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시대(1945-2012)는 물론이고 특정 시대사 연구의 첫째 기준은 그 시대가 물려받은 출발점과 그 시대가 맞이한 상황적 조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신대륙 건설이나 식민국가가 아닌 이상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시 처음부터 진공상태에서 새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봉건왕조체제와 일본의 식민체제를 물려받아 시작했던 나라다. 주어진 조건과 맞이해야 하는 구조적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야 했던 한국은 영국이나 독일처럼 일찍부터 근대화되었던 나라도 아니었고 미국이나 호주처럼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경험을 갖춘 유럽인들이 이주해 만든 나라도 아니었다. 출발시점에서 받아든 역사상황적 조건과 지정학적 여건을 포함하여 주어진 환경만큼 시대를 규정짓는 요소는 없다. 유럽대륙에 아프리카와 같은 문명수준을 유지하는 국가가 없고 남미대륙에 서유럽수준의 국가가 아직 나오지 않는 것도 역사상황적 조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은 유럽의 네덜란드나 미주대륙의 멕시코나 콜롬비아처럼 주변에 비슷한 문명적 환경을 함께 하는 나라들과 공존했던 그런 평범한 나라가 아니다. 잘 알다시피 늦어진 근대화를 받아들고 전체주의 거대국가인 소련과 중국과 국경선을 마주하며 공산혁명이란 폭력과 침략전쟁에 맞서야 했던 나라다. 또 다른 주변국가인 일본은 제국주의적 식민체제를 만들었던 나라로서 몇 십년간 국교수립도 없이 긴장하며 대립해야 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분석과 연구도 당연히 봉건 및 식민체제를 물려받아 정치경제적으로 극도의 고립된 섬과 같은 상황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연구에서 흔들릴 수 없는 또 다른 잣대는 결과에 따른 평가와 보편가치에 의거한 평가다. 결과적으로 어떤 나라가 되었느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역사는 결과로 평가될 뿐이지 누구나 주장하고 있는 바의 ‘동기의 순수성’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조건과 환경이 나빴다고 해서 좋지 않은 결과를 합리화해서도 안 된다. 근세 말의 중국과 러시아가 서유럽문명에 비해 뒤쳐졌고 심지어 아시아국가인 일본과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결국 급진적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로 가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는 있어도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기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결과는 누구에게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 대한 역사연구도 자주독립국가가 건설된 이래 30년 뒤, 혹은 60년 뒤에 어떤 길에 있었는지에 대한 결과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잣대가 되어야 한다. 결과에 대한 평가와 함께 지켜져야 할 잣대는 보편가치의 구현 여부다. 보편가치에는 모두가 지향하는 공통된 미래를 담고 있다. 개인소유권을 포함한 기본권 보장과 자유의 확대, 민주주의의 도입과 성숙은 물론 다양성 및 개방성에 입각한 기회 균등 등의 사회 가치가 정립되고 구현되어 있느냐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연구의 잣대다. 특히 계량화된 통계수치로 명백히 입증 가능한 삶의 질 향상과 같은 번영의 성취 여부도 기본가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태극기를 내걸고 60여 년 전 시작한 대한민국의 현대사 연구는 보편적 기본가치의 정립과 구현 여부, 그리고 번영의 수준이란 절대적 평가기준에 입각해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대한민국 시대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와 종적으로 비교해야 할뿐만 아니라, 주변과 세계에 비슷한 조건에 있었던 다른 국가들과 횡적으로도 비교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입체적이고 균형 잡힌 평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가 가야할 몇 가지 방향과 과제는 다음과 같다.
Ⅱ. 한국현대사를 보는 방향과 과제
1. 대한민국 건국(1948)의 정당성과 의의
근대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은 그 이전의 질서와 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국가다. 세계적인 근대화 물결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왕조질서와 폐쇄사회에 머무르다 연이어 식민시대를 겪었던 한반도는 자주독립적인 대한민국 건국을 기점으로 민족사에 빛나는 전혀 다른 길과 체제로 들어섰다. 개방사회를 지향하며 근대 문명질서를 전면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나 자유민주적 선거에 따른 제헌헌법을 근간으로 민주공화제의 길을 연 것이나 모두 획기적인 역사였다. 우리 민족이 자유민주적 기본 가치체제를 확립하고 국민대표로 이루어진 의회민주주의 시대와 법치질서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민족사적 사건이다. 그런 면에서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며 봉건과 식민을 극복하고 새 길을 가게 된 것은 그 어떤 기준으로라도 5천년 민족사에 가장 기념해야할 역사적 사건이다. 실제 모든 지표는 대한민국 건국이후 펼쳐진 60년 역사가 민족사적 관점으로나 세계사적 관점으로 빛나는 성공모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대한민국 건국의 민족사적 의의를 기리기보다 오히려 폄훼하는 역사인식론이 확산되어 있다. 그 인식론은 상당부분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같은 인식에 의거한 역사기술은 공산 전체주의와 좌우합작(左右合作)으로 통일정부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 1948년 건국 당시는 자유민주체제의 길이냐 공산 전체주의의 길이냐의 선택의 문제였지 결코 ‘중도적 합작’으로 결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좌우합작정부는 가능하지도 않았지만 성공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실제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 세계사의 사례가 없다. 건국 2년도 되지 않은 자유민주적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적 침략전쟁을 감행한 북한 공산체제의 도발이나 몇 십 년이 지난 1990년대 독일의 자유민주적 통일과 소련 공산주의 해체 등 이미 역사적 결론이 확고하게 나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타협하여 좌우합작으로 통일정부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훼손하거나 실패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었고 통일이란 남겨진 과제일 뿐이다.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 전체가 보편가치에 입각한 문명체제와 성공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중간 과정이었다. 사회주의자인 여운형이나 좌우합작정부를 주도했던 민족지도자 김구와 김규식의 길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잘못된 것이거나 실패한 것은 아니다. 공산 전체주의세력과 타협하여 좌우합작에 따른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더 성공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허구일 뿐이다. 그런 가정에 근거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이 악의적으로 훼손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이나 자유민주적 통일의 독일, 그리고 사회주의적 통일의 베트남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통일국가가 되지 못하고 한반도 북부에 공산주의체제가 형성되어 아직까지 존속하게 된 것은 건국 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과제를 아직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국가정체성을 함께 할 때 만들어지는 것일 때 대한민국의 기원이 된 건국의 정당성과 의의는 결코 훼손될 대상이 아닌 것이다. 특히 지난 세계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봉건체제에서 근현대로 이전하는 과정과 식민체제 내지 발전도상국에서 자주독립체제로 가는 과정에서 만족할 만한 성공을 이룬 나라는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성숙된 자유민주체제를 만들지 못했고 정체와 혼란이 반복되었거나 공산체제의 길을 가야 했다. 대한민국만큼 성공한 나라가 없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결코 잘못된 길에 접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공산주의로 가지 않았고 전근대체제로 남아있지도 않았고 성장이 정체되고 질서와 무질서가 반복된 것도 아니다. 일관되게 번영의 길을 걸었고 가장 성공적인 국가의 길을 만들며 오히려 발전도상국의 모델이 되었다.
2. 군국주의와 공산주의와의 연속 대결과 극복
근현대 역사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존속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연속된 전체주의의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첫째는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이고, 둘째는 소련을 중심으로 했던 공산주의(共産主義)다. 두 가지 전체주의를 모두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문명되고 번영된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1941년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이승만이 가장 정확히 지적하고 강조했듯 당시의 세계사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Democracy vs. Totalitarianism-이었고 전체주의의 편에는 일본 군국주의도 있었지만 소련 공산주의도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이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고 자유민주적 국가체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소련 전체주의이란 두 단계의 연이은 자주독립과 국가수호에 대한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더구나 자주독립과 국가체제의 존속의 근간이 된 일본제국의 항복이나 공산제국과의 대결과정은 모두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국가 탄생은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체를 점령하고 있던 거대 군국체제인 일본에 맞서 자유와 민주라는 근대보편 가치를 지향하고 산업문명을 앞서 만든 전 세계의 세력이 승리해야 했다. 실제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와 민주,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가치추구 보장의 자유시장경제를 함께하는 전 세계의 문명국이 나섬으로써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을 가져올 수 있었다. 특히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펼쳐진 태평양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진영과 일본 제국주의 간의 대혈투였고 미군 30만 명 사망이라는 희생을 딛고 이룬 승리에 의해 한반도는 물론 중국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거의 모든 아시아국가에 해방과 자주독립의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현대사 연구에서는 한국의 해방과 독립이 일본 군국주의를 대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4년에 걸친 세계적 차원의 자유민주체제의 승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과 만주에서의 항일운동만이 전부였던 것처럼 되어 있거나 이미 항복의사를 표했던 일본을 대상으로 항복선언 6일전인 1945년 8월 9일 참전한 소련군의 대일본전만 부각되어 있다. 4년 전쟁과 30만 명의 희생을 만든 미국을 6일간 참전한 소련과 동등하게 평가하거나 모두 똑같은 점령군이자 분단 책임자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도 고귀한 것이지만 일본 패망을 만든 국제적 노력도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태평양전쟁의 진행 등 일본 패망과정에 대한 몰이해는 한반도질서에 대한 이해와 국제협력 구도를 정확히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일본 패방이후의 한반도에서의 역사전개를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근대문명이라는 세계사의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미-소 및 좌-우간의 권력투쟁과 각 세력의 정치선전 및 자기 정당화라는 차원에서 한반도 역사를 연구 평가하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6.25 침략전쟁을 비롯한 공산 전체주의의 도전을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1945년 공산 스탈린(Stalin)군의 노도와 같은 한반도 전개이후 대한민국 역사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전체주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새로운 대결의 시작이었다. 소련군 전개지역은 모두 공산제국의 일원으로 떨어졌고 그 지역에선 소비에트(Soviet) 전체주의혁명이 진행되었다. 동유럽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나 동아시아도 예외가 없었다. 소련은 일본에 대항하는 참전 대가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게 끈질기게 요구하였고, 포츠담(Potsdam)회담 이후 대일본전 참전을 위한 소련의 모든 작전지도에는 서울(京城)을 포함 한반도전역에 소련군을 전개시키고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도 소련 스탈린군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소련군 전개지역인 북한에 만든 체제는 “마적질 해먹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해방군이라 하며 말썽을 부리”는 세력에 불과했다는 함석헌 선행의 지적처럼 정당성도 없고 업적도 없는 스탈린군의 꼭두각시였다. 결국 오늘 우리가 만들고 지켜온 자유민주적 대한민국이란 일본 패망의 결과이면서도 소련 공산주의의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라는 목적을 저지시키고 막아내고 만든 결과다. 한반도의 분단과 북부지역에의 공산체제의 성립이란 곧 소련이 4년간 일본과 전쟁하며 3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던 미국을 대상으로 소련이 대일본전 참전 대가로 만들어낸 조건이자 확보해간 권리이자 국제질서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서들은 미국과 소련을 동일한 국제 강국으로 평가하고 그 강대국 간의 타협과 점령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었다는 식으로 '중립'을 가장한 왜곡된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일전쟁에 의한 일본 제국의 패망과정을 전혀 보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다가온 것처럼 기술하고 자유민주적 미국과 전체주의적 소련을 동일하게 인식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 연구는 여전히 일본 제국은 물론 소련이라는 전체주의와의 대결과 극복을 정립시키지 않고 있다. 그것은 공산 전체주의로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한 민족사적 투쟁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1945년 이전까지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1945년부터 1953년 정전(停戰)까지 9년간의 역사는 곧 공산전체주의와의 체제대립과 전쟁의 시기였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1945년부터 시작된 좌우대립에서 시작되어 1948년의 각각의 좌우정부 수립, 그리고 좌우체제간의 대결과 전 세계적 차원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좌우세력간의 전면전쟁까지 계속된 대결의 산물이자 승리한 결과다. 그렇기에 한국 근현대사 연구는 민족에 의한 독립운동도 중요하지만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체제의 근거가 된 태평양전쟁의 진행과정 및 그에 따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연구와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적 가치를 향한 투쟁의 성격과 의의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3. 조선시대와 한국시대의 단절과 연속성
1948년 이후 60여 년 간 전개된 대한민국의 기원과 발전을 보기위해서는 그 전의 518년간 계속된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불가피한 것이다. 봉건왕조라는 전근대 제도와 중국(明-凊)과의 특수관계를 중심으로 한 극도의 폐쇄체제를 유지했던 조선시대는 근대를 지향하는 노력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남들은 근대화를 기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가고 있을 때 봉건과 폐쇄 체제 속에서 연평균 1%의 성장도 없는 정체사회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생산성과 기본권의 보장 등의 기준에 따른 근대 지향성에서 유럽국가들의 대표적 성공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이 근대적 문명사회를 지향하는데 뒤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중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주변 국가였던 일본이 16세기 이후의 개방적 문물 흡수, 그리고 19세기의 근대화와 비교하면 너무도 대비된다. 그렇기에 일제시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목적으로 굳이 그 전의 조선시대를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미화시켜서는 안 된다. 조선 중기이후의 전근대적 봉건체제와 폐쇄체제의 유지는 매우 명확한 것이다. 조선이 자생력을 상실했다며 그것을 식민체제의 정당성으로 연결시키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식민지만 되지 않았으면 정상적으로 훌륭한 근대 문명국가로 갈 수 있었다는 식의 시각도 근거가 없다. 조선은 실질적인 독립국가도 아니었고 중화(中華主義)체제에서 왕조적 폐쇄국가였을 뿐이다. 사회질서가 분열되고 정치적 통합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경제산업적 생산성까지 정체되었음에도 구심력 있는 지향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실학을 접한 윤치호, 서재필, 유길준, 이승만 등 근대를 지향했던 수많은 노력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조선의 본질이자 주도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특정시대를 실패와 성공이란 이분법적 잣대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조선 중후기 역사가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길을 가지 못한 것은 명확하다. 따라서 조선이 왜 근대적 민족국가의 길을 가지 못했고 오히려 일제 식민지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인식에는 ‘정상적이었던 조선’이라거나 ‘스스로 근대를 개척해가던 조선’이라는 허구를 강조하며 조선의 전근대적 봉건성과 폐쇄가 면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의 폐쇄적 전근대성의 지속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은 함께 지적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자 교훈일 뿐이다. 일제 지배의 참혹성을 부각하기 위해 조선후기를 정상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근대화가 진행되던 세계사에서 조선의 참혹함과 폐쇄성, 그리고 중국에 대한 일방적 종속성을 감춰보겠다는 것에 불과한 논리이자 보편사적 역사기술에 반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관계였지 근대적 자주독립 국가로 보기도 어려웠다. 굳이 왕위책봉이나 조공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1882년 고종의 선친이지 조선 최고의 권력자인 대원군이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납치되어 3년간이나 중국에 억류되었던 사건이나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이 중국에게만 통보하고 조선의 거문도-영국명 Hamilton-를 2년간 무단 점령하는 사건이나 고종의 아관파천 등에서 보듯 당시 조선은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지 못했다. 일본 나가사키를 왕래하며 이미 세계경영을 하던 네덜란드 상인 박연-벨테브레-이나 하멜 등이 무역활동 중에 조선 땅으로만 오면 억류되어 노예상태가 되어야 했다. 특히 난파․표류된 27명의 일행 중 하멜을 포함한 7명만이 13년 만에 탈출하여 다시 유럽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로 조선이 알려졌던 사실로도 폐쇄적 봉건사회의 성격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자주독립이나 근대 문명이란 측면에서 폐쇄적 봉건체제로서의 조선과 식민체제를 만든 일제는 함께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 결코 대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대비해야 한다면 일제시대와 그 후의 대한민국 시대가 대비되어야 한다. 일제시대에 펼쳐진 근대로의 진입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그랬듯 문명사적 변화의 일환이지 일본의 역할이 강조되거나 야만성이 묵인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제2차 대전 이후 펼쳐진 개발도상국이나 신생독립국 중 가장 번영을 만든 나라다. 유엔개발기구(UNDP)의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은 1960-95년이란 약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연평균 7.1%의 경제성장으로 세계 모든 나라들 중 가장 높은 성장을 이룬 나라다. 그랬기에 삶의 질(quality of life)이 가장 높아진 나라이기도 하고 세계적 경제성장 모델을 만들며 ‘기적’으로 평가받아왔다. 50년이라는 단기간에 세계 7위 전후의 산업국가를 만들었고 세계선진국 수준의 삶을 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건국 이후의 대한민국의 위대함이 강조될 일이지 조선후기를 미화시켜 이해시키는 것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한국의 성공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장애가 된다. 분명 조선의 전근대성과 폐쇄성, 그리고 중국에 대한 속방관계 등은 자주적 독립국가의 지향과 보편사적 문명화라는 관점에서 반영시키고 극복될 대상인 것이다.
4. 열전(Hot War)과 공산주의 도전의 극복
한국현대사에 있어 한국이 맞이한 최대 시련은 공산전체주의로부터 온 것이었다. 공산체제를 주도한 소련과 중국이란 거대국가와 국경선을 마주하며 그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로 가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근대가 봉건왕조체제 극복과 일본 식민체제로부터의 자주독립의 길을 지향하며 근대적 문명개화된 국가를 만드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건국 이후의 과제란 공산체제로 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좌우대립과 냉전은 다른 나라들이 겪은 좌우대립이나 냉전체제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한국은 유럽의 네덜란드나 벨기에, 혹은 남미의 콜롬비아나 멕시코처럼 유사한 문명체제를 함께 하는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던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 등 거대한 공산주의권으로부터 쓰나미 같은 확산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절반조차 공산전체주의를 함께하며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고자 하는 절대적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우리 스스로 공산주의로 가지 않는 한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치와 극복은 자유민주적 대한민국에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과제였다. 1946년 대구 10․1사건이나 1948년 제주 4․3사건. 혹은 여수와 순천지역의 제14연대 반란 등은 모두 공산 전체주의로 갈 것이냐, 자유민주체제로 갈 것이냐를 다투는 무장폭동이자 반란사건이었다. 한국은 지정학적 상황에서 공산체제로 끌고 가고자 했던 세력의 투쟁과 자유민주의 길을 가기 위한 세력 간에 갈등과 투쟁이 남달랐던 사회다. 공산주의와의 투쟁은 결국 6․25라는 전면 침략전쟁과 그 이후 전개된 공산주의의 만행과 도전으로 명백히 판명난 것이다. 그렇기에 국내 공산주의는 물론 북한과 소련 및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공산주의세력으로부터 자유와 민주를 지키는 투쟁과 역사적 의의가 정당히 기록되고 기려져야 한다. 지금도 공산체제와 맞서 대치하고 있는 남다른 상황이기에 그것은 더욱 중요한 역사적 문제이자 과제인 것이다. 특히 근대사회가 정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펼쳐진 미숙한 정부에 의한 과잉진압이나 무고한 희생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적되고 바로 잡혀져야 마땅한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공산전체주의를 지향했던 세력이 자유민주적 대한민국에 대항했던 사실이 흐려지거나 본질이 호도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와 대항했던 황해도 구월산 지역의 유격대 활동이나 신의주 반공의거와 참혹한 학살 희생 등은 우리 역사서에 일절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잊혀지게 만들면서도 지리산의 공산빨치산이 미화되는 그런 역사는 갈 길을 잃은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소련 군정에 맞섰던 고당 조만식선생의 저항이나 대전, 전주 등에서 펼쳐진 공산군에 의한 대량학살 등은 잊혀지고 공산군과 맞서 싸우며 4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냈던 미군에 의한 오인사격인 충북 노근리 사건 등이 우리 역사서에 부각되는 것은 본질을 오도시키고 잘못된 역사인식을 불어넣는 원인이 된다. 어떤 노력에 의해 대한민국이 존속됐고 번영할 수 있었는가라는 기준에 따른 역사적 사건의 재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나라들은 냉전(Cold War)시대를 살아갔지만 한국은 열전(Hot War)의 시대를 살얼음 걷듯 걸어온 나라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분단된 상태로 전대미문의 3대 세습적 전체주의 독재체제와 대치를 계속하는 유일무이한 나라다. 그런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성격과 자유민주체제와 전체주의체제로 분단되어 대치하는 한국의 특수성이 역사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공허한 이상론이거나 의도적인 정치선전일 뿐이다. 흔히 언급되는 민족동질성의 확립이란 공산전체주의의 부정과 자유민주체제의 지향이란 방향성의 정립에서 오는 것이지 전체주의를 미화하고 문제점을 덮는 것으로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에 대한 공산 전체주의의 도전은 명백한 실존적 위협으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2천 3백만 명의 우리 민족의 삶을 옥죄고 있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에서 펼쳐진 각종 역사적 사건을 북한 전체주의가 선전하는 거의 그대로 기술하는 것은 우리가 전체주의 사관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미흡했지만 해방이후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친일세력에 대한 처벌’은 극도로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전혀 있지도 않았던 북한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매우 철저하게 진행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나, 봉건적 토지관계를 극복했던 한국에서의 농지개혁은 수많은 문제점을 가진 것처럼 지적하면서도, 오히려 소비에트혁명의 일환으로 진행된 북한의 집단농장화와 토지국유화는 ‘토지개혁’이라며 북한의 선전 그대를 반영하는 것 등은 아직 사실로서의 역사나 보편가치에 입각한 사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굳이 한국현대사를 민족주의 사관을 갖고 접근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펼쳐진 민족사적 문명변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2천 3백만에 대한 민족해방이란 시각의 설정되어야 한다. 문명파괴와 민족유린이 70년간 자행되는 한반도 북부지역에 대한 민족해방과 구원이란 시각을 갖지 않고는 민족주의적 시각에 따른 역사인식이란 애초부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민족주의란 민족의 자유와 번영, 그리고 민주주의를 성숙시켜나가는 힘으로 나타나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자유민주나 번영체제로부터 격리된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자유와 번영이 확산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 역사에서 반영시켜야 할 민족주의의 과제일 뿐이다.
5. 민주주의 혁명과 성숙에 대한 비교사적 이해
자유와 민주라는 보편가치의 확산과 성숙은 일시적 혁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진적 민주체제를 이뤄낸 선진국들조차 민주주의는 한 두 번의 사건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몇 백 년에 걸친 성숙과정의 결과다. 물론 다 완성된 것도 아니고 지금도 시행착오와 논란을 거쳐 진화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조차도 프랑스혁명(1789)이래로 공화정과 왕정, 다시 나폴레옹과 보나파르트 황제정과 파리코뮌 등 수없는 극단적 체제변화를 거쳐 점진적으로 민주주의 성숙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사는 극단 체제가 반복되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와 같은 것이었다. 민주주의에 관한 한 세계적 모범국이라 할 영국과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물론이고 독일이나 스페인 등 민주주의가 앞섰다는 모든 나라도 예외 없는 백년이상의 진통과 혼란을 거치게 마련이다. 산업화만큼이나 민주화만도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되고 성숙되는 것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공화제적 헌정질서를 선언했다고 성숙한 민주체제가 작동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공화제를 내걸고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시작부터 성공한 나라도 없다. 수십 년은 물론이고 수백 년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중국이나 북한은 물론이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아니면 베트남이나 태국 등 아시아의 각국에서 민주주의가 쉽게 정착되고 성숙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오랜 역사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1948년 민주공화제를 시작한 것 차제를 가지고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평가하는 연구경향이 높다. 특히 미숙한 상황이나 경험해보지 못했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진통과 과정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며 매도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민주주의 초기에 나타나는 미성숙과 시행착오를 모두 독재시대나 반민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식의 역사연구 방법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들거나 의도적으로 대한민국 지도자 모두를 독재자이거나 잘못된 지도자로 보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분명한 것은 1948년 건국체제는 민족사적으로 보나 한반도에 펼쳐진 그 모든 평가기준으로 보더라도 혁명적 민주주의였다. 비록 납세자들만의 도와 부․면 선거로 일제시대에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첫 단계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대한민국 건국으로 민주공화제 출범은 물론이고 남녀 모두의 전 국민 참정권 시대를 열었고 3권분립에 의한 사법부독립과 법치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의회민주주의제가 출범되었고 누구나 정치세력을 만들어 경쟁할 수 있고 국민적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복수정당제가 시작되고 정착되어 갔다. 물론 왕조제와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개인재산권이 근본적으로 훼손되거나 부정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몇 백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도입되었던 것이 한국에서는 사회경제적 기반과 경험도 없이 일시적으로 전면 도입되었다. 1948년 5․10 제헌국회 선거는 물론이고 1950년 5월의 제2대 선거, 그리고 1952년 참혹한 전쟁 중에도 대통령선거는 물론, 시․읍․면 의회선거와 도(道)의회 선거 등 세 차례의 전국선거가 진행되었다. 1960년에는 무려 5번의 전국선거가 계속되었다. 결국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전쟁 3년을 포함하여 불과 12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전국선거만 15회가 진행되었을 만큼 ‘선거 공화국’에 가까웠다. 마치 선거가 곧 민주주의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선거의 반복이 곧 민주주의라는 편협한 기준에 매몰되기도 했다. 민주주의란 민주적 제도의 도입과 경험, 그리고 안정과 질서는 물론 산업적 토대와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가는 것이지 민주주의만 따로 발전한 나라란 있을 수 없다. 헌법을 만들었다고 민주주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거를 자주한다고 민주주의가 되는 것도 아니며, 독재자가 있었거나 없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란 그 제도의 도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산업화라는 토대와 재산과 교양을 갖춘 시민들의 공동체 운영에 대한 책임감에 따른 반복된 민주주의 경험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총체적 사회경제적 발전을 토대로 시민의식의 성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반복된 선거로나 특정 지도자의 의지 여부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의 정치발전사는 독재시대와 민주시대라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회경제적 발전을 토대로 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성숙도 없다. 오히려 미군정 및 이승만 정부 15년간의 ‘조숙한 민주주의’와 선거중심적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 ‘근대 산업화’를 지향하는 민족적 열망으로 전화된 것이다. 그것은 지도자가 결정했다기보다는 민족적 지향과 열망의 반영이었고 5.16사건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장준하나 함석헌 모두가 인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한국은 사회경제발전과 상관없이 도입된 조숙한 민주시대를 넘어 산업화시대를 거쳐 비로소 1987년부터는 민주와 산업성장의 균형과 성숙이라는 안정된 민주주의 성숙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 경제조사기관인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10년)와 이코노미스트지의 조사에 근거하면 현재 전 세계의 14%의 인구만인 ‘안정적 민주주의’체제에서 살고 있다고 평가되는데 한국 민주주의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라 일본이나 이탈리아보다도 높은 20위로 평가된다. 전통적 민주주의 평가기관인 Freedom House의 민주주의 수준에서도 적어도 1980년대 말부터는 아시아국가로서는 일본과 함께 유일하게 서유럽 수준의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구가하는 나라로 평가된다. 건국체제를 만들며 한국은 혁명적 민주주의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서는 성숙될 수 없었다. 한국은 가장 빠르고도 가장 적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민주주의 성숙을 만든 나라다. 권위주의 체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1987년 이전의 한국을 독재시대로 보아야 할 것도 아니다. 더구나 공산주의를 막아낸 것만큼 한국 민주주의에 크게 기여한 것도 없고 세계적 수준의 산업화를 통해 경제번영체제를 이룬 것도 모두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정치투쟁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의 극복, 사회경제적 안정과 발전 그리고 민주적 제도와 경험의 축적이라는 총체적 시각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는 전체주의 국가들에 둘러싸여 마치 ‘전체주의 바다에 떠있는 외로운 섬’처럼 주변국가와 달리 성숙한 민주주의이고 아시아국가중 극적이고도 예외적인 성공의 길을 개척한 것이기에 더 값진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Ⅲ. 결론
역사인식은 국가 정체성과 방향성의 공유다. 국가 공동체적 차원에서 살아온 과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잘못을 바로잡는 교훈을 만들면서 다른 한편 성공을 기리고 계승함으로써 미래를 만드는 토대를 형성시키는 일이다.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은 오히려 사회분열과 막대한 사회 비용을 만들며 국민통합과 국가방향성의 정립을 해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인식은 곧 국가적 사회간접자본(SOC)에 해당한다. 본 글은 대한민국 현대역사를 연구하고 평가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방향과 과제를 설정해보고자 하였다. 특정시기를 연구하는 모든 시대사 연구가 그렇듯 연구와 평가에는 기준과 잣대가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나라를, 어떤 상황적 조건에서 물려받아 시작해야 했느냐는 것은 물론 그 시대에 주어진 문명사적 과제를 진행시키고 발전시켜 왔느냐하는 것을 보편가치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평가는 역사적 성취라는 결과에 의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약 150년의 근현대사, 특히 아직 70년에도 못 미치는 대한민국사는 국가공동체의 존속과 지속가능한 번영은 물론이고, 안정과 평화에 기반한 국민의 자유와 민주가치의 도입과 성숙, 그리고 개방성과 다양성의 보장이라는 기본 잣대에 의거하여 연구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60년사는 세계가 함께 기릴 모델에 가까울 정도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봉건체제와 식민체제를 넘어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공산전체주의의 도전을 막아내고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며 세계적 수준의 산업국가이자 민주국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요약될 것이다. 비록 뒤늦게 근대화를 시작했지만 대한민국은 세계 13위 전후의 경제대국, 8대 무역국가, 그리고 세계 20위 수준의 민주주의 선진국이자 세계 15위 전후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 나라로 각종 통계에 의해 평가된다. 대한민국 역사는 그 모든 극적 요건을 다 갖추며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보편가치를 지향하고 자유민주체제를 포기하지 않으며 번영체제를 만들어온 인류사의 금자탑과 같은 성공 사례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연구의 과제와 방향도 기본적으로 민족사 최고의 시대를 만든 대한민국시대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도 성공역사라는 평가가 유지되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 의의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가 맞이하고 전체주의와의 대결과 극복이라는 방향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한국은 일본 군국주의와 소련 전체주의를 뛰어넘으며 자주독립의 길을 열고 국가체제를 수호한 특별한 나라이다. 냉전시대에 열전을 겪었고 여전히 전체주의와 대치하며 한반도 전체의 자유민주적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민족사 빛나는 시대를 연 대한민국이 이룩하고 성취한 고귀한 업적이 평가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번영과 삶의 질 개선과정은 물론 세계무대로의 진출과 국제사회에의 기여라는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가 필요하다. 특정 사건과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시대와 독재시대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오랜 기간 수많은 제도와 경험,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통사적이고 비교사적 입장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빛나는 성공의 의의가 중시되지 않는 것이나 공산전체주의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중시하지 되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우리 역사를 보편가치라는 기준을 설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론 전체주의가 만든 역사인식론이 우리의 역사연구와 평가에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역사서들의 상당수는 북한 전체주의가 만든 역사인식의 틀에 벗어나지 못했고 그 틀을 함께 쓰는 형편이다. 전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투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역사연구와 기술이 대한민국 체제와 기본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의 수단이자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특히 민족가치가 강조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자유와 민주 및 번영체제를 거부하는 세력과 체제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극복 방향을 정립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민족의 자유와 번영을 향한 노력은 회피하며 ‘민족’과 ‘통일’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실제로는 민족유린과 억압적 체제를 엄호하는 것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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