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부산 국제시장서 만난 진짜 '덕수'들

이강기 2015. 10. 5. 16:50
 원문출처 : "영화 안 봐도 다 보여… 쪼고레뜨 기브미(초콜릿 give me)? 우린 미군 담도 넘었다"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07/2015010701483.html
입력 : 2015.01.07 03:05 | 수정 : 2015.01.07 10:19

 

[부산 국제시장서 만난 진짜 '덕수'들]

- 71세 국제시장 1세대
월남戰서 돈 벌어 가게 내… 처음엔 미군 물건 팔다가 日 전기밥솥 등 밀수품 팔아

- 이북서 내려온 91세 할머니
아들 월남 간뒤 남편 쓰러져… 먹지 않고 눕지 않고 벌어 4남매와 시어머니 먹여살려

- 야시장의 외국인 '덕수'들
노점에서 만두 등 팔아… 낮엔 공장 다니고 밤엔 장사 "열심히 벌어 고향 갈 것"

영화 '국제시장'의 주 무대인 부산 국제시장(중구 신창동) 1층 '꽃분이네' 앞길은 지난 4일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꽃분이네'는 영화 속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이북에 두고 온 아버지를 기다리며 평생 지켜내는 한 칸짜리 수입상으로 나온다. 이 가게는 원래 '영신'이라는 의류점이었는데, 큰 인기를 끌자 아예 간판을 '꽃분이네'로 바꿔 달았다. 국제시장 번영회 김용운 회장은 "주말이면 한 1만 명은 '꽃분이네' 앞에 몰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국제시장’이 큰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 덕수가 운영한 가게‘꽃분이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원래 이름이‘영신’이었던 이 의류점은 간판을‘꽃분이네’로 바꿔 달았다. 지난 6일 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영화‘국제시장’이 큰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 덕수가 운영한 가게‘꽃분이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원래 이름이‘영신’이었던 이 의류점은 간판을‘꽃분이네’로 바꿔 달았다. 지난 6일 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종호 기자
영화의 배경이 된 시장은 국제시장, 그리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깡통시장이다. 영화의 주인공 '덕수'는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살면서 한국사의 고비고비를 몸뚱어리로 헤쳐나가는 인물로 나온다. 파독 광부, 파월 근로자를 거쳐 꼬장꼬장한 노인이 된 덕수가 "아부지, 저 참 힘들었심더"라고 흐느끼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시장에서 만난 국제시장의 몇 안 남은 진짜 '덕수'들은 '울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이 영화에 대해 담담했다. 시장 한쪽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던 양동일(71)씨는 영화에 대해 묻자 "안 볼 거다"라며 잘라 말했다. "그거 머 하러 보노. 눈에 그림이 다 비이는데(보이는데). 내가 다 경험을 했거든. 생각하면 머리 아프다, 마." 영화엔 어린 덕수의 친구 달구가 "쪼고레뜨 기브미"라고 재롱을 부려 미군에게 허쉬 초콜릿을 얻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경남 사천에 살다 1·4 후퇴 때 피란 와 부산에 정착했다는 양씨는 "다 얻어 묵고 컸다"며 웃었다. "'쪼고레뜨 기브미'가 문제가 아이다. 우리는 미군 부대 담장 넘고 그랬다. 일단 들어가믄 머 하나라도 먹는기래."

◇"힘들었다꼬 이야기하믄 모 하노. 기냥 살았다, 마"

야간 중학교를 졸업하고 '노가다'(막노동)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던 양씨는 군에 입대했다가 "돈 벌라꼬" 자원해서 월남전에 참전했다.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던 '고스톱 친구'가 "행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갔다꼬 해야재"라고 핀잔을 주자 양씨는 손사래를 쳤다. "하도 먹고살 게 없어서 '똥 아니믄 모!' 하고 돈 벌라꼬 갔다. 그 당시 한국 뱅장(병장) 월급이 900원인데, 월남 가서는 55불(달러)씩 받았다." 그는 제대 후 미군 PX(미군기지 매점)에서 나오는 물건을 떼다 국제시장 일대에서 팔다가 1971년 전파상을 열었다. '보따리 아줌마'들이 들여온, 일본에서 온 전자제품이 주요 취급품이었다. "옛날엔 최고가 '메이드인 재팬'이라. 밥솥 하믄 코끼리 아이가." 그는 40년 가까이 '1년 368일', 쉬지 않고 장사를 해 2남2녀를 길렀다고 했다. "힘들었다꼬 이야기하믄 모 하노. 내 잘 살았는지는 모르게꼬… 기냥 살았다, 마."


	영화‘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보다 더 힘겹게 한국사의 고비고비를 헤쳐온 진짜‘덕수’들을 만났다.
영화‘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보다 더 힘겹게 한국사의 고비고비를 헤쳐온 진짜‘덕수’들을 만났다. 파월 장병 출신 양동일(71·왼쪽)씨는“(영화 속 일들을) 내가 다 경험을 했다. 생각 하면 머리 아프다”며 영화를 볼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역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이영옥(70)씨는 부상당해 받은 보상금으로 장사 밑천을 삼아 귀금속 가게를 차려 지금까지 꾸려오고 있다. /김종호 기자
국제시장엔 월남에 가서 번 돈을 밑천 삼아 가게를 낸 파월 근로자 출신이 많았다. 깡통시장에서 귀금속 가게 '백금당'을 하고 있는 이영옥(70)씨도 '월남서 총 맞아 받은 보상금' 60만원을 밑천으로 삼았다. 파병 당시 그에겐 한 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직도 집사람이 한마디씩 해. 자식을 놓아 놓고 어찌 전쟁터에 가느냐고. 그래도 우리가 안 가면 누가 가요. 우리 덕에 나라가 외화 벌어서 길도 닦고 공장도 세우고, 경제 번영했잖아요."

◇"피란 오던 생각, 하루에 한 번씩 그 생각 해라"

초창기 국제시장의 주축은 영화 속 덕수네 가족같이 이북에서 온 실향민들이었다. 가진 것 없는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 치열함은 국제시장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35년째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삼성도기' 권영현(60) 사장은 "이북 사람들의 철두철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다"고 했다. "이북 분들은 식당을 안 가요. 밥하고 김치를 싸와서 그것만 먹어요. 집도 보수동 판자촌에 살면서 새벽 6시에 나오면은 밤 10시까지 일을 해요. 한 어르신은 남들이 쓰다 버린 노끈을 모아, 그걸 이어서 쓰고 그랬어요. 저희도 그분한테 배워서 지금까지 노끈 주워다 이어 씁니다." 그 꼬장꼬장한 어르신이 국제시장에서 1평짜리 '메리야스'(속옷) 가게 '일흥상회'를 하다 후일 패션 사업가로 대성한, 베이직하우스 우한곤 회장이다.

이북에서 내려온 1세대는 시장에 이제 10명이 채 남지 않았다. 주단 가게인 '황해상회'의 이겸복(91) 할머니가 그 중 한 명이다. 5일 만난 이 할머니는 2평이 채 되지 않는 주단 가게에 난방도 켜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그는 1·4후퇴 때 네 살배기 아들을 업고 남편과 함께 황해도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노점을 해서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아이들 먹을 쪼고레뜨에다가 껌도 팔고 했지. 그 돈 뭉쳐가지고 요 점방을 오십몇년 전에 얻었소." 남편은 1969년 세상을 떴다. 강원도 양구에서 군 복무를 하던 아들이 월남전에 자원해서 입대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3개월을 채 버티지 못했다. 이후 이 할머니 혼자 4남매와 시어머니를 먹여 살렸다. "남편 죽고 나니까 한 도매상 언니가 그래. '동생, 울고불고하면 안 돼. 아이들 고아 맨들라카나.' 그 후로 먹지 않고 눕지 않고 돈 뭉쳐서 악착같이 네 아이 다 대학에 보냈소."

그는 힘들 때마다 남편의 유언을 되새겼다고 했다. "영감님이 그랬어. '피란 오던 생각, 하루에 한 번씩 그 생각 해라.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유언을 하고 죽었어. 내 그 후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살았어." 그는 자녀들이 공무원·교사 같이 번듯한 일을 한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우리 살아온 건 안 겪어 본 사람은 몰라. 활동사진(영화) 보고 어찌 아나. 나도 과거에 힘들었지만… 근데, 과거에 잘 살아서 뭐 하겠소. 현재가 문제지 않소."

◇야시장 밝히는 또 다른 '덕수'들


	국제시장.
깡통시장의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할 즈음, 골목에 매대 30개가 들어선다. 요깃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노점을 모아둔 '깡통야시장'은 인기가 좋아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다. 4일 찾은 이 야시장에선 파독 광부였던 덕수처럼, 어느덧 꽤 잘사는 나라가 된 한국에 돈 벌기 위해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국제시장에서 꿈을 기르는 또 다른 '덕수'들이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한단(韓丹·34)씨의 가게엔 '(1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드디어 7년 만에 고향에 가겠습니다. 잘 다녀오고 더 열심히 냉면구이 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베트남에서 온 원앤니(27)씨는 낮에는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시장서 만두를 판다고 했다. 터키인 에르캄 신칸(28)씨는 케밥을 팔아서 한 달에 170만원 정도를 번다. 그는 휴대폰 속 한 살배기 딸 사진을 보여줬다. "열심히 열심히 벌어서 딱 1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는 게 목표예요." 깡통야시장의 외국인 '덕수'들이 "이거 하나 드시고 가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는 자정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국제시장은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 즈음에 형성됐다.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비축했던 '전시 통제 물자'를 내다 팔았는데, 공터였던 지금의 국제시장 자리가 그 물건들을 취급하는 장터 노릇을 한 것이 시초였다. 6·25 전쟁 이후엔 미군에서 흘러나온 물품들과 외제 밀수품이 많아 '국제시장'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미군에서 나온 물건 중에 통조림이 많아 '깡통시장'이라는 이름도 통용됐다.


	2015년1월6일 오전 부산 중구 국제시장 부산철물 김윤곤(79세) 사장이 가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2015년1월6일 오전 부산 중구 국제시장 부산철물 김윤곤(79세) 사장이 가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2015년1월6일 오전 부산 중구 국제시장 인근에 위치한 보수동 책방골목. /김종호 기자
2015년1월6일 오전 부산 중구 국제시장 인근에 위치한 보수동 책방골목. /김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