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09 22:53
[임진왜란 때 일본에 등 돌린 '왜장 사야카' 金忠善… 후손 김상보 종친회장]
"김충선은 한때는
'역적'… 이젠 명분 없는 침략전쟁
거부한 인도주의자 '韓·日우호모델'로 재평가"
"일제강점기 때 할아버지는 '가문을
망친다'며
아버지가 일본 여성과 결혼하려는 것을 반대해"
- 김상보씨는 “요즘 아베 정권을 보면 나도 반일감정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김상보(67) 종친회장은 다혈질이고 목청이 크고 화끈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金忠善)의 12세손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안쪽으로 들판과 마을이 숨어 있었다. 김충선을 시조로 한 '사성(賜姓) 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 황금색 복고양이 상(像)과 함께 '한일우호관'이 서있다. 문을 연 지 3년이 됐다.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일본 정계와 학계 인사들의 필수 방문코스다.
"작년에만 일본에서 3천여 명이 다녀갔다. 여기 오는 일본인들을 무조건 '친한파'로 만들어버린다. 일본 정계 거물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총무회장은 여러 번 방문했다.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도 일본 정계와 관광업계 인사 1400명을 이끌고 여기까지 내려왔다."
당시 니카이 도시히로 총무회장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우호교류행사'에 참석해 이렇게 연설했다.
"지금 한·일 관계가 힘든 상황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한·일 우호 모델'로 김충선 장군이 있다. 이분의 기념비가 내 지역구인 와카야마(和歌山)현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 속 인물 김충선. 일본명은 사야카(沙也可), 21세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동래에 상륙한 직후 "이 침략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조선군에 투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조선군에 편입됐고, 조총 제조법을 전수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가 이순신 장군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미 조총을 개발해서 훈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宣祖)가 그의 공을 인정해 직접 성(姓)과 이름을 내려준 게 '김충선'이다. 그 뒤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공을 세워 정2품까지 올랐다.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나온다.
'항왜영장(降倭領將·항복한 왜군 장수) 김충선은 담력과 용력이 뛰어나지만 성질은 매우 공손하고 근신합니다. 지난번 이괄의 난 당시 괄의 부장(副將) 서아지를 뒤쫓아 처단했습니다. 진실로 가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김충선이 임진왜란 때 출정하기 전 일본에서 무엇을 했고 어느 가문 출신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사야카'라는 이름 자체가 당시 일본의 출정 문서나 역사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한때 일본에서는 본국에 등 돌린 김충선에 대해 '가공인물' '비열한 조작'이라고 했는데?.
"과거에 그런 논쟁이 벌어졌지만 역사적 기록과 자료 등에 의해 이미 밝혀졌다. 일본의 국민작가라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72년 '한국기행'이라는 책에서 실존 인물로 언급했다. 그 뒤 일본의 12개 도시에서 '사야카 연구회'가 생겨났다. TV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고, 김충선을 모델로 한 소설 '바다의 가야금'도 나왔다."
―왜 조선을 치러 온 그가 조선땅에 닿자마자 귀화했는지는 미스터리하다.
"당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보낸 서신에는 '내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이다'라고 나온다. 하지만 조선땅에 닿자마자 귀순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김충선은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일본 입장에서 김충선은 '역적' '매국노'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1997년 일본 NHK는 '출병에 대의(大義) 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 돌린 사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무사의 의로운 결단,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거부한 인도주의자, 일본의 양심 등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 김충선은 특히 일본 쪽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한·일 양국 교과서에 김충선이 실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정유재란 4백주년인 1997년 오사카와 교토에서 '왜 또다시 사야카(沙也可)인가'라는 한·일 역사학자 심포지엄이 있었다. 그때 양국 교과서에 싣자고 합의했다. 이듬해인 1998년 일본은 고교 역사교과서에, 우리는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딱 한 번 게재했다."
"일본 학자나 언론인들이 여기에 오면 '일본인이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귀한 대접을 받게 됐느냐?'고 묻는다. 김충선은 정2품까지 올라갔고, 부인은 당시 진주목사의 딸이었다. '반일감정'이 있는 한국에서 이렇게 존경받는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내가 일본을 방문하면 '위대한 일본인'의 후손으로 대접받는다."
―니카이 도시히로 일본 자민당 총무회장은 자신의 지역구인 와카야마(和歌山)현이 김충선의 고향이라며 그곳에 김충선 기념비를 세웠다고 했는데?
"시내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신사의 정문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제막식에 나도 참석했다. 니카이 회장과 친분 있는 박삼구 아시아나 회장이 모든 경비를 댔다. 박 회장은 전세기로 기념비 석재를 싣고 갔다. 내가 '일본 현지에서 석재를 구해 만들면 될 일을 번거롭게 그러느냐'고 하니, '세월이 흘러 비문이 지워지면 다시 쓰면 되지만 돌은 썩어 허물어지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와카야마현에 기념비를 세웠으니, 김충선은 그 지역 출신이라는 게 확인된 건가?
"일본에서는 와카야마현을 비롯해 구마모토·쓰시마·신시로·교토 등 다섯 개 지역에서 자기 고향 출신이라고 다투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와카야마현 지역의 철포 부대를 지휘했던 인물이 가장 유력하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나?
"일본에는 임진왜란 당시 출정한 16만 명의 신상 기록이 남아 있다. 사망·행방불명·귀화한 인물이 다 적혀 있다는 뜻이다. 각 지역마다 출정한 뒤 돌아오지 않은 인물 중에서 몇 가지 조건에 부합하면 김충선일 것이라는 식이다. 그럼에도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결정적인 증거인 집안 족보가 나오지 않는 한 말이다."
―'사야카'라는 이름이 일본 문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내 생각에 '사야카'는 가명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일족을 멸할 반역 행위를 했으니 자신의 신분을 감췄을 것이다. 후대에 엮은 문집에는 일본에 일곱 형제가 있었고 두 부인을 남겨두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우록마을에 들어오는 순간 산에 둘러싸여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형적으로 좁은 입구만 막으면 누구도 못 들어오게 돼 있다. 자연 요새였던 셈이다. 지금은 40가호쯤 산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200가호가 넘었다. 자급자족한 집성촌이었다. 바깥세상에서 호롱불을 쓸 때 우리는 물레방아로 전기를 만들어 썼다. 초가지붕을 이을 때 우리 동네만 기와를 덮었고. 마을 자체적으로 초등학교를 세울 만큼 교육열도 높았다."
―본인이 일본 핏줄과 연결돼 있는 사실을 언제 처음 알게 됐나?
"집성촌이라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
-학교에 진학하면서 '왜놈 후손'이라는 놀림을 받지 않았나?
"왜 안 그랬겠나. '쪽바리 후손'이라고 핍박과 놀림을 많이 받고 살았다. 가끔은 참지 못해 싸우기도 했고."
―출신을 감추고 싶었을 텐데.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사실인데 어떻게 하나. 요즘도 일본 매스컴에서 찾아오면 '일본인 후예로서 살면서 고초를 많이 겪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꼭 한다.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후손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당당하게 살아왔다. 훌륭한 시조님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유학을 가서 정착한 뒤 히로시마에서 줄 공장을 운영했다. 종업원 3천여 명이 됐다고 한다. 일본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가문을 망친다'며 반대해 이루지 못했다."
―시조가 일본인인데, 일본 여자와 결혼하면 가문을 망친다?
"어쨌든 일본 여자와 결혼을 못했다. 롯데가(家)와 같은 재벌가가 될 뻔했는데(웃음).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있은 뒤 할아버지의 종용으로 귀국했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할아버지에 의해 좌절됐다. 광복이 된 뒤 일본돈을 한국돈과 바꾸는 화폐교환이 있었다. 1인당 바꿀 수 있는 돈 액수가 얼마 안 됐다. 그때 아버지가 갖고 있던 엄청난 일본돈은 휴지가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마을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선생의 정체성은 한국인과 일본인 중 어느 쪽인가?
"가끔은 내 칼 같은 성격에 대해 '왜놈 성질 같다'는 말은 듣지만, 솔직히 420년이 흘렀는데 아직 일본 피가 남아 있겠나. 대대손손 한국 부인을 만나 자식을 낳아왔는데."
―일본에서는 선생을 같은 핏줄로 보지 않는가?
"몇 년 전 일본에서 태풍 피해가 심했다. 우리 국민들이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성금을 모아 보냈다. 우리 문중과 대구의 '사야카 연구회'에서 2백만원을 보냈다. 일본 신문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제목으로 그걸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다른 데서도 성금이 많이 들어왔을 텐데 얼마 안 되는 돈을 보낸 우리를 조명한 것이다. '이걸 보면 우리 국민 감정이 어떨까' 하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 확산되는 '반일감정'이 불편하지 않나?
"요즘 아베 정권이 하는 처사를 보면 나도 반일감정이 생긴다. 일본인들을 만나면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하게 얘기한다. 내가 그런 비판을 하면 다들 경청한다. 당초 우리 시조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반기를 들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