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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복 루트’ 수에즈 운하, 런던-봄베이 24일 단축
● 1820년부터 100년간 유럽→북미 3600만 이민
● 英 방사형 철도 유럽 확산…현대 국민국가 형성 기여
● 시카고~샌프란시스코 美 대륙횡단열차, 태평양 시대 열어
20년 전, 인터넷 발달에 의한 ‘정보화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정보망 속에서 새로운 산업이 꽃을 피웠고 구글, 알리바바 등 초대형 정보통신(IT) 기업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덕분에 세계경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최근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셰일가스 혁명’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정된 석유 자원의 풀(Pool) 자체를 늘려주는 무진장(無盡藏) 자원 공급이 가능할지, 얼마나 싸고 효율적으로 공급될지, 가능하다면 시점은 언제부터일지 등등.
혁명이란, 기존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옛날 ‘산업혁명’에 비하면 사실 요즘은 혁명이란 게 좀 가볍게 느껴진다.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중심이 되어 일궈낸 육상 및 해상 인프라 혁신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혁명’을 넘어 ‘천지개벽’에 가깝다.
역마차 시대를 끝낸 ‘철도교통’을 통해 개조(改造)에 가까운 국가 및 지역개발을 일궈내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원자재(금광)가 발굴되기도 했다. 누적인원 수천만 명이 이민을 통해 혁신된 인프라의 혜택을 누렸고, 혹자는 대대적인 자본을 축적했다. 제국주의의 발현과 패권국을 향한 경쟁 구도가 교직(交織)돼 ‘많이 누린 자와 덜 누린 자’는 분명 존재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인류사회의 진화를 재촉했다. 당시의 혁신 노하우가 DNA로 남아 전수를 거듭했기에 옛 유럽 및 오늘날의 미국계 주류가 아직도 ‘창의적 선도자(First Mover)’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패권을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시장 진출 교두보
망망대해 대서양이 ‘거대한 호수’처럼 변한 데는, 1840년부터 증기선이 범선(帆船·돛단배)을 대체한 영향이 컸다. 미국이 영국과 함께 ‘대유럽(Greater Europe)’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은 것도 증기선의 등장과 무관치 않다. 증기선에는 오늘날에도 쓰이는 3개의 스크루가 장착돼 배의 추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동시에 목조 위주의 선체를 철판으로 대체하면서 항해 효율도 높여갔다. 항로상 요충지에 해당하는 항구에 석탄저장고를 만들어놓고, 항해하면서 연료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물류이동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감축했다.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의 ‘정복 루트’로 쓰였다는 게 좀 그렇지만, 1869년 개통된 수에즈 운하는 당시만 해도 미개척의 땅이던 아시아와 유럽의 거리를 대폭 줄여주는 기능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지중해에서 인도양으로 곧바로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된 이 운하 덕분에 당시 런던과 인도 봄베이(현재 뭄바이)까지의 거리가 이전의 3분의 1에 불과한 약 5300km로 줄었다. 시간상으로는 24일이나 단축됐다. 한마디로 혁명적 고속 수로(水路)였던 셈이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레셉스(1804~1894)가, 자신이 승마를 가르치던 이집트의 태수 무함마드 사이드를 설득해 ‘만국수에즈운하회사’를 설립한 뒤 10년 동안 1억 달러의 건설비를 투입해 완공했다. 이후 보수비용으로만 건설비의 3배 이상이 들 정도로 대공사였다. 결국 1875년 재정난에 빠져 곤경을 겪던 무함마드 사이드는 운하 주식을 매각하게 되고, 당시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는 재빨리 유대계 금융자본 로스차일드의 힘을 빌려 매입을 결정한다. 이후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아시아 시장 진출’ 교두보 노릇을 했다.
1867년에는 독일 지멘스가 세계 최초로 발전기를 발명하면서 증기기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동력으로서 전력(電力)이 새롭게 부상했다. 오늘날 풍력과 태양광발전의 대중화보다 더 파격적인 변화였다. 이 때문에 전력의 등장은 ‘제2차 산업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882년에는 세계 최초의 발전소가 뉴욕에서 가동됐다. 송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발전 초기에는 주로 공장의 야간 조명용으로 공급됐다.
유럽의 혁명이 지구촌 각지로 전파된 주요인의 하나는 해외 이민이었다. 1912년 청나라 멸망 이후 중국인의 해외 이민도 급증했지만, 역시 유럽인의 이민율이 가장 높았다. 1820년부터 100년 동안 3600만여 명이 유럽에서 미국과 캐나다로, 360여만 명이 아르헨티나 등 남미대륙으로, 200여만 명이 호주와 뉴질랜드로 옮겨갔다.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이동이다.
유럽의 이민자들은 유럽에서 이미 경험한 화학비료를 새 터전에서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대륙 곳곳에는 대농장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먼저 진행된 유럽 대륙으로 곡물과 쇠고기 등을 수출함에 따라 서양인들이 쇠고기를 주식으로 먹는 문화가 본격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민은 사람들을 운반해주는 대형 여객선(Passenger Ship) 등 각종 해운산업을 꽃피우는 데도 일조했다.
1865~1894년 30여 년간 미국 뉴욕항에 입항한 이민자 분포를 보면 1880년대 말까지는 영국인 12만 명, 독일인 11만 명 등 서유럽 출신 비중이 높았으나 1890년이 넘어서면서 동유럽과 남유럽의 비중이 높아져 1907년부터는 이 지역 출신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민대국’ 미국은 1850년 2300만 명이던 인구가 60년이 지난 1910년에는 91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영토도 빠르게 확대됐다. 독립선언(1776년) 당시 대서양 연안에 국한된 영국 식민지 13개 주에 불과하던 미국은 1803년 프랑스에 1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 주를 매입하면서 영토를 2배로 넓혔다. 서부 진출이 활발해진 1820년부터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국경을 확장해나갔다.
1845년에는 미국의 면화농장주들이 멕시코로 이주해 살다가 독립해서 세운 공화국을 텍사스 주로 병합했다. 이듬해인 1846년에는 캐나다와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오리건 주를 병합하고, 이후 2년 동안 이어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지역까지 차지했다. 이로써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된 거대한 대륙국가가 건설됐다. 독립 당시의 4배에 달하는 엄청난 영토다.
서부로 간 포티나이너스(49ers)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영국이 자국 통화 파운드를 금에 연동시켜 운영하던 금본위제 시대라 그 여파는 엄청났다. 멕시코전쟁 후 불경기에 빠진 미국 동부에서만 약 10만 명이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유럽 등지에서 출발한 이민자 20만 명도 개발 대열에 가세했다. 주로 이동한 시기가 1849년이라 이들을 ‘포티나이너스(49ers)’라 한다.
금광 개발 5년여 동안 2억8500만 달러어치가 채굴됐다. 직전까지 미국 금 산출량의 21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요즘 중국이 서부 인프라 개발을 주창하며 ‘프런티어(Frontier)’라 이름 붙인 것은 미국 서부 개발 당시의 ‘개발’과 ‘희망’ 이미지를 참고했음에 틀림없다. 황무지 캘리포니아로 사람과 기술이 몰려들었고 덕분에 1850년 미국의 31번째 주로 승격됐다.
요즘도 흔히 쓰이는 ‘아메리칸 드림’의 어원 역시 서부개척 시대로 올라간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링컨 대통령이 서부의 신흥 주(州)들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홈스테드법(Homestead Act · 자작농창설법)’을 제정한 것과 연관이 깊다. 5년간 서부 개척에 종사한 21세 이상 남성의 경우 서류 수속 비용만 대면 20만 평의 국유지를 무상으로 분양해주는 제도였다. ‘깃발만 꽂으면 땅을 준다’는 거짓말 같은 진실이 통하던 시기다.
모든 철도는 런던發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올 하반기에 정식 발족할 전망이다. AIIB의 주사업은 아시아 신흥국들의 인프라 개발 지원사업이다. 한국과 북한, 실크로드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향하는 철도 인프라 건설사업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비행기가 있어도 역시 철로를 통한 인적, 물적 교류의 활성화 및 파생산업으로 인한 경제발전 등은 도시는 물론 국가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필수적인 인프라임에 틀림없다. 성장률이 3% 초반대로 떨어진 한국으로서도 신(新)성장엔진 기능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이다.
철도의 역사는 1825년 영국 철도의 아버지이자 증기기관차(Steam Locomotive)를 발명한 스티븐슨이 만든 기관차에서 시작한다. 스탁턴~달링턴 사이 45km 구간에서 화물차와 객차 35량을 달고 시속 18km로 달린 이 기차는 주로 내륙 탄광지역에서 해안으로 석탄을 옮기는 용도로 쓰였다. 철도의 본격적인 실용화는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간 45km 구간에서 이뤄졌는데, 화물의 정기운항 외에 3년 간 하루 평균 1100명의 승객을 시속 40km의 속도로 실어 날랐다. 국고에서 충당한 부채를 모두 상환했을 뿐 아니라 주주들에게도 평균 9.5%의 수익을 안겨줬을 만큼 이익도 컸다.
이에 힘입어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철도 건설 붐이 일었다. 영국에선 수도 런던을 중심으로 방사(放射)형으로 펼쳐진 노선이 속속 착공됐다. 종점은 달라도 ‘시발점은 런던’이었다. 1845년 3277km이던 영국 철도의 총 연장(延長)은 10년 뒤 1855년 1만3411km로 4배 가까이 늘었다. 철도 건설 붐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철도 연결에 따른 생활권 단일화는 각국 시장 확대는 물론, 현대식 국민국가(Nation State)의 형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중심에 영국이 있었다. 유럽 각국으로부터 철도 부설에 필요한 레일과 기관차, 객차 등의 주문이 영국으로 집중됐고, 영국은 무명(목면·木綿) 무역 등 경공업 중심에서 탈피해 제철업과 기계공업 분야에서 괄목할 성장을 거뒀다. 이를 통해 영국은 ‘팍스 브리태니카(영국에 의한 평화)’의 절정을 구가했다. 19세기 후반 들어서야 비로소 독일이 기술표준을 향상시키며 등장해 영국보다 35% 저렴한 비용으로 철도 부설에 나섰다. 1860~1890년에는 그야말로 전(全) 지구적 철도 부설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 대륙별 철도 총연장은 유럽 5배, 북미 6.5배, 라틴아메리카 66.3배, 아시아 4.1배, 아프리카 36배 등으로 확장됐다.
당시 철도노선은 철저히 영국과 유럽 중심으로 그려졌다. 예를 들어 인도 철도는 홍콩에서부터 방사선형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는 인도의 자국 이해 중심 설계가 아니고 ‘영국에서 물류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받느냐’에 우선순위를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철도는 물론 항만과 증기선 항로 모두가 종내에는 유럽으로 부를 집중시키기 위한 라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유럽 종속’이 심화한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잠재력을 응집해 세계경제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인 1861~65년 벌어진 남북전쟁 이후다. 당시 미국은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품에 47%의 무거운 관세를 부과했고, 동부와 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를 부설해 상업과 산업 기반을 다졌다. 덕분에 내수경제가 급성장했다. 일례로 아이다 호에서 생산된 감자를 뉴욕에서 하루 만에 먹을 수 있게 됐을 정도로 운송비는 싸지고 유통은 촉진됐다.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대륙횡단열차 부설에 따라 미국의 경제영토는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으로 본격적으로 확장됐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 노무자, 가난과 기근에 몰려 대서양을 건너온 아일랜드인, 전과자, 부랑자, 제대 군인이 공사에 동원돼 원주민의 습격과 자연재해에 맞서 싸우며 일했다.
정치권력은 자본을 이길 수 없다
이민자들은 철도를 따라 ‘기회의 땅’ 서부로 몰렸고, 북부의 자본은 남부로 진출했다. 경제 이론대로 기술·자본·노동이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인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기틀이 닦였다. 특히 1860년부터 30년 동안 외국으로부터 이주해온 이민자 1037만 명의 대다수가 정착지로 서부를 선택했다. 1890년이 돼서는 황무지 개간과 지주(地主) 선정 ‘교통정리’가 일단락됐고, 이에 따라 더 이상 ‘프런티어(Frontier·서부개척자)’라는 수식은 붙지 않게 됐다.
1860년만 해도 세계 4위이던 미국의 공업생산량은 철도가 일궈낸 경제개발을 통해 1900년이 되면서 전 세계 물량의 23.4%를 차지, 18.5%에 그친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한다. 국민총생산(GNP)은 영국의 2배로 커졌다. 미국 정부는 난(難)구간의 철도 부설을 촉진하려고 철도법을 개정해 철로 주변 국유지나 광업권을 무상으로 철도회사에 양도하는 유인책을 썼는데, 이는 훗날 금융(JP모건)까지 휘어잡는 모건가(家) 재벌을 잉태하는 씨앗이 됐다. 철도 부설에 필요한 제철(US스틸), 석탄업 등도 지속적으로 합병되며 덩치를 키웠다.
모건가에 이어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까지 등장하며 미국의 부(富)는 급속히 과점 재벌 가문으로 쏠리게 된다. 정부와 재벌의 합의 아래, 오늘날 우리 정서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1913년 탄생한다. 이미 19세기부터 소소하게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재벌들은 막강한 자본력으로 정부를 구해준 바 있다. 이런 전력을 감안하면, 재벌들이 정부가 지폐를 발권해 주도권을 거머쥐려 하는 움직임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했다. 대신 재벌의 축적된 자본을 기준으로 금과 등가(等價)에 교환되는 태환지폐를 발권하는(금본위제) 중앙은행 성격을 대리하기로 합의를 봤다.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의 중앙은행 출자자가 전부 민간 금융기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도 “올해 안에 금리 인상 검토” 한마디로 전 세계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는 1914년에 창설돼 연방준비은행의 집행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 전역 12개 연방준비은행을 총괄 감독하면서 공정할인율, 예금준비율 변경 및 공개시장 조작 등을 행한다. FRB 의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승인을 거치지만 형식적인 절차다. ‘정치권력은 자본을 이길 수 없다’는 미국식 논리는 이때부터 유효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 개발이 궤도에 오르자 미국은 해상 패권에 눈을 떴다. 때마침 미국의 해군제독 알프레드 마한은 1890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양제국으로써 쌓아올린 위상을 분석한 ‘해상권력사론(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을 출간해 미국 정부에 해양 패권 장악을 위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다. 미국이 추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태평양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패권을 향한 길’이라는 측면에서, 서부 개발에 이어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 영향권을 점차 늘려가는 오늘의 중국이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패권을 향한 길, 파나마
미국은 먼저 태평양과 대서양을 ‘동일 권역’으로 이어주는 대륙 남단의 카리브 해로 공력을 투입했다. 지정학적 요충지 카리브 해를 ‘내해화(內海化)’하자는 심산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미국과 국교 정상화 급물살을 타게 된 쿠바는 1세기 전만 해도 미국의 해양확대 전략을 돕는 최우방국 노릇을 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 식민지이던 쿠바에서 대(對)스페인 반란운동이 일어나자 쿠바의 아바나 항에 최신예 전함 메인호를 파견해 무력시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메인 호가 스페인의 공격으로 침몰하면서 승무원 266명이 사망하자 미국은 지체 없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미 최강 전력을 갖춘 미국에 스페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쟁은 4개월 만에 끝났으며 미국은 카리브 해 연안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물론 괌과 필리핀까지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이때부터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면 대서양에서 최단거리를 거쳐 태평양에 진출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앞서 수에즈 운하를 창안한 프랑스 외교관 레셉스의 주도로 1881년 착공됐으나, 말라리아 황열병 등 대규모 전염병의 창궐로 건설회사가 중도 파산했다. 미국은 당시 운하 건설의 이권을 쥐고 있던 콜롬비아와 협상이 여의치 않자 파나마 주 지주들의 반란을 부추겨 콜롬비아로부터 파나마공화국이 독립하도록 손을 썼다.
결국 파나마공화국으로부터 운하 공사권, 운하지대 조차권을 얻어낸 미국은 1904년부터 10년 동안 3억7500만 달러를 투입하는 대공사 끝에 1914년 파나마 운하를 완공했다. 미국 동부와 서부 바닷길은 마치 굵은 파이프로 연결된 모양새가 됐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바닷길은 기존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의 태평양 진출도 이때부터 한층 더 본격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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