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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일 중국에서 열린
韓中戰에서 중국응원단들이 대형 중국 국기를 들고 한국응원단을 향해 위협을 하려 하자 공안들이 제지하고 있다(MBC
T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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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일 중국 남부 湖南省(호남성) 長沙(장사)에서 한국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長沙는 毛澤東을 비롯하여 劉少奇, 朱鎔基 등 중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지만, 그날 賀龍(하룡)체육관에 모인 중국의
축구 팬들은 그 같은 명성에 먹칠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이날 韓中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간 경기가 벌어지기 전부터 중국의
球迷(구미: 열성 축구 팬)들은 붉은색 셔츠에 붉은색 두건을 쓴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을 가로막고 두건을 뺏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들의 무례하고 난폭한 행동은 경기가 시작되자 더욱 노골화했다. 경기 시작 40여 분이 지났을 즈음 「붉은 악마」를 둘러싸고 야유를
보내던 중국 축구광들은 한국응원석을 향해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물병과 플라스틱통 등이 날아들었다. 그때 한국응원석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중국응원석에서 누군가 던진 열쇠 뭉치에 머리가 맞아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붉은 악마」 동료들이 황급히 여자를 감싸 안고 피를
닦으며 후송해 응급치료를 받게 했다. 「붉은 악마」 회원들이 중국 경찰에 강력히 항의하자, 그때까지 못 본 척하던 중국 경찰은 그제야 한국응원석
주변에 헬멧을 쓴 경찰을 배치했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네티즌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중국팀과 축구를 하지마라』,
『한국 정부는 뭘하고 있느냐』 등의 비판이 인터넷을 가득 채웠다. 이번 사건은 2000년
7월28일 北京에서 발생한 중국 관중의 한국응원단 집단폭행사건의 再版이었다. 당시 北京 노동자체육관(工人體育館)에서 개최된 韓中 친선축구대회가
끝났을 때 수십 명의 한국응원단은 황급히 체육관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패배의 굴욕감과 흥분을 자제하지 못한 중국 축구
팬들은 여학생이 포함된 한국 응원단을 에워싸고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고 물병 등을 던졌다. 한 한국인
여학생은 중국인 남자의 발길질에 배와 가슴 등을 채였고, 天津(천진)에 사는 한국인 고등학생은 물병에 맞아 눈 밑이 찢어졌다.
이 사고가 알려진 이후에도 駐中 한국대사관은 한동안 사태파악조차 하지 않다가 인터넷에 분노의 글이 빗발치자 뒤늦게 중국의 외교부와
公安(공안·경찰)당국에 유감을 표시하는 데 그쳤다. 그때로부터 4년 만에 재발한 長沙 사고 직후, 일부 한국 축구 팬들은 『한국의 저자세 외교와
미온적인 대응이 이 같은 사태의 재발을 불러 왔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便法 이용해 돈벌이 즐기는 중국인 중국 축구 팬들의 한국인 폭행사건은
우리 정부의 미온적 대책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인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중국인들의 의식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중국인들의 한국인 「무시 행위」는 축구장 폭력과 같은 우발적인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유학생과 일반 한국인 거주자, 그리고 기자와
외교관에게까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北京대학과 淸華대학 등 주요 대학들이 모여 있는 海淀區(해전구) 주변에서
살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중국 행정 당국의 통보에 큰 고통과 애로를 겪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각 아파트 입구에 붙은 「통지문」은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학교 밖인 校外에 거주하는 유학생들은 1주일 이내에 現 거주지에서 退去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외국인
거주에 따른 치안과 범죄 문제 등이 거론됐다. 당시 대학가 주변 아파트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유학생은 한국인들이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北京大를 포함한 중국 대학들은 「외화벌이」를 위해 자체 기숙사의 수용범위를 넘어서는 많은 유학생을 유치했고,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외국 유학생들은 부득이 학교 주변의 아파트 등에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각 대학의 유학생 담당부서는 이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중국 땅을 밟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문제는 「중국인 거주 지역」인 주변 아파트에 외국인 유학생이 살기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거주허가 절차를 밟고 이를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한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은 적법절차를 밟지 않은 채 알음알음으로 아파트를 임대함으로써 「不法 거주자」가 되고
만 것이다. 한국인 유학생이 많은 지역에서 한국인과 현지인(조선족 포함) 간에 마찰이 잦고, 현지인의 범죄(강도·절도
등)가 늘어나자, 현지 公安은 前後 사정을 무시하고 유학생 단속에 나섰다. 이 때문에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은 급작스레 짐들을 옮기고 경찰조사를
피하기 위해 친구집으로 피신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몇 달치 임대료를 미리 낸 학생들은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외국인이 사법적 문제 등으로 곤경에 처할 경우, 이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얻어 내는 데는 선수들이다. 한국의 중소기업인들이 사소한
문제(예를 들어 술집 여성과의 갈등, 작은 법규 위반 등)로 인해 중국 사법 당국의 「과잉 조사」를 받는 동안, 현지 파트너들이 회사를 통째로
빼앗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회는 이 같은 사실을 대사관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우리 外交
당국은 이미 유학생들이 고통을 다 겪고 난 뒤에 뒤늦게 나서서 「사후 약방문」格으로 단속을 완화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데 그쳤다. 중국 당국의
부당함을 따지고 대학 측의 대책 마련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현지 韓人사회의 여론이 무서워 마지못해 한마디 하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외국인은 돈 뜯어 내는 대상』
대학 주변 五道口(오도구) 거리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인 식당 상점 주인들도 비슷한 경우를 당해야 했다. 이들 역시 「몇월 며칠까지
도시 재개발을 위해 건물을 모두 철거하니 이곳에서 퇴거하라」는 중국 당국의 통지문 하나만 보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했다. 당시 중국은
식당·의류점·미용실 등 소규모 개인 서비스업 시장을 개방하지 않아, 많은 한국인들은 부득이 조선족이나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당국은 이 같은 사실을 다 알면서도 세금을 받을 수 있고, 「뒷돈」까지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이를 눈감고
봐주었던 것이다. 현지 행정 당국은 실제 상점의 명의가 모두 自國人(한족이든 조선족이든)으로 되어 있어 필요하면 언제든지 철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철거 통보」를 받은 한국인들은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본인들이 스스로 「편법」이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를 중국 사법 당국에 제소할 수 없었다. 철거 당일 중국 정부는 포크레인과 불도저를 동원해 건물들을 일제히 밀어 버렸고,
한국인들의 사업 터전은 일거에 사라졌다. 그동안 쏟아 부은 투자액과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區정부로부터 주변
거리의 광고판 권한을 따낸 한 한국인 광고사업가는 얼마 뒤 구청 정부에 불려가, 『이 거리를 재개발하려고 하니 돈을 5배 더 내고 계속
광고사업을 하든지 아니면 포기하라』는 통보를 들어야 했다. 이 사업가는 『區정부가 가격을 2배 정도 올리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터무니없이 많이
올려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기존의 계약서는 합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찢어 버리면 그만인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그
사업가는 『중국 관리들의 눈에 외국인은 돈을 뜯어 내는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외교관 폭행해 놓고「공무집행」 중국의 「한국 무시」 행위는
2002년 6월13일 北京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서 벌어진 중국 公安의 한국 외교관과 특파원 폭행사건에서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당일 오전 11시쯤 탈북자 원모(당시 56세)씨가 아들과 함께 한국영사관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중국 경비요원들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당황한 원씨 일행이 영사관 안으로 뛰어들자 경비원들은 한국의 동의도 없이 따라 들어와 강제로 이들을 끌어낸 뒤 영사부 밖에 있는
경비초소에 두 사람을 수용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 측 영사와 직원 8명이 밖으로 나와 외교공관에 대한 불가침권을 규정한 빈 영사협약을 들며
원씨의 신병반환을 요구했으나, 중국 보안요원들은 이를 거부했다. 양측의 대치가 5시간 가량 계속되던 중, 오후 4시쯤
승합차를 타고 온 중국 공안요원 10여 명이 『여기는 중국 땅이다. 중국 법률에 의거해 탈북자를 데려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초소를
둘러싸고 있던 한국 영사부 직원들을 힘으로 밀치고 강제연행을 시도했다. 양측의 몸싸움이 2분 정도 계속되자 갑자기 중국 공안들이 욕설을 하며
한국 영사부 직원과 한국특파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변철환 서기관은 왼쪽 다리가 10cm
가량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고, 박기준 영사는 이들에게 끌려 다니며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를 취재하던 연합뉴스 이상민 특파원은 공안들에게 발길질을
당해 오른쪽 다리와 옆구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중국 당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폭행 장면을 담은 촬영화면을
CC(중국 중앙)TV 위성송신망을 이용해 한국에 送出하려던 한국 각 방송사의 작업까지 거부했다. 그동안 CCTV 측은 비싼 송출 비용을 받고
全세계 방송에 이 같은 서비스를 해 왔으나, 당일 自國에 불리한 화면의 방송을 막기 위해 송출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 劉建超(유건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다음 날 탈북자 강제 연행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사태에 대해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에도 한국 측이 탈북자의 영사관 진입을 바라지 않고 우리에게 막아 달라고 요청했었다』면서 『우리는 한국 외교관들이 중국 공안요원들의
法 집행을 방해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고 주장했다. 사건 후 한국기자협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중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 정부 역시 「빈 협약 침해행위」라며 공식사과와 재발방지, 관련자 문책을 요구해 모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나 밀실에서 행해진 양국 외교 당국자 간의 협상 결과, 중국은 『6월13일 사건에 유감을 표시했다』는 언급으로 사과를
대신했고, 한국은 24명의 영사관內 탈북자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으로 그쳤다. 대만과 斷交하면서 중국에 약점 잡혀 중국의
한국 무시는 사실상 韓中수교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1992년 韓中수교는 한국 정부가 「오랜 친구」인 대만을 버리고 「새
친구」인 중국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의 盧泰愚 정부는 대만과의 斷交과정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해, 2500만
대만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사실상 대만을 먼저 저버린 나라는 미국·일본·영국 등이었으나,
대만인들은 가장 늦게까지 친구로 남았던 한국을 가장 미워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中國과 北韓을 의식한 나머지 斷交사실을
대만에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하지 못한 탓이 컸다. 중국 측은 자신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자기들 말이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를 존중해
주기보다 오히려 이때부터 얕잡아 보게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돌이켜 보면 1992년 수교의 필요성을 더 느낀 쪽은
중국이었다. 1989년 天安門사태 이후 서방의 경제제재로 「개혁·개방」 노선에 큰 차질을 빚던 중국으로서는 한국과의 수교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즉 세계의 투자가 끊긴 마당에 한국 기업들의 투자는 중국 입장에서는 「오랜 가뭄 뒤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은 당당하게
수교를 추진할 수 있었으나 우리 외교부는 중국이 요구하는 「비밀주의」를 고집스럽게 지키려다 대만을 잃고 중국의 멸시도 받는 결과가 되었다.
대만 陣水扁(진수편) 총통 취임식에 참석했던 與野 의원들에게 불참을 요구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던 駐韓 중국대사관의 행태는
그 백미에 해당하는 일이다. 3등 서기관에 불과한 중국대사관의 공보관이 『한국 정치인의 이번 취임식 참석은 중국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며 『다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욱이 중국 대사관 측은 5월20일 열린 대만 총통 취임식을 앞두고 한국의 국회의원들에게 미리 불참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은 『개별 정치인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발언에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발을
뺐다. 「內政간섭」이라는 말로 정식 논평을 내야 할 한국 정부는 중국대사관이 먼저 『취임식에 참석한 의원들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무시한 내정간섭』이라고 나서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분명히 지침을 받았을 이 발언을 놓고 駐韓 중국대사관의
발언으로 치부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두고두고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통일 후 외교팀을 北韓 외교관들로 바꿔야』
중국 역사와 중국인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자기들에게 당당하고 도전적인 국가나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중해 주지만, 약하고 비굴하게 구는 상대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시하고 짓밟는 특성을 보인다. 좀 다른 얘기지만, 한국이 축구에서라도 중국을 계속 이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인과
대화할 때 『한국의 축구와 바둑은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축구는 운동경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중국인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한국 다루기」는 수교 3년째인 1995년부터
高句麗·渤海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려는 東北工程을 추진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이 추진하는 東北工程의 바탕에는
『조선반도는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그들의 역사 인식이 깔려 있다. 작년 12월 高句麗史 문제를 놓고 한 중국 지식인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고조선 시대에 漢나라가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해 한반도를
통치했고,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그 영역이 (현재의) 중국 영역이었으므로 고구려史는 중국史의 일부분』이라는 논리를 폈다.
중국인들은 고구려와 고려가 중국 땅의 隨·唐·宋 나라와 벌인 치열한 전쟁이나, 그 전쟁에서 중국 측이 패함으로써 王朝의 교체를 가져온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중국 변방에서 중국에 흡수되어 간 무수한 민족과 달리, 한민족이 고유의 언어와 문화·역사를 보존했다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단지 고려와 조선이 朝貢을 바쳤다는 사실만을 들어 「속국론」만 기억하고 있다. 역사 교육도 그런 식이다. 그런 탓에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고유 언어인 한국어를 쓴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또 하나의 큰 원인은
우리 정부의 「저자세 外交」이다. 우리 정부의 파행적 外交 행태는 『죽어도 원칙은 양보 못 한다』는 北韓의 외교와
대조된다. 북한은 비록 국가파탄 상태에 있지만, 외교에 관한 한 자존심을 중시한다. 그 때문에 중국의 외교 관리들은 뒷전에서는 북한을 욕해도
정면에서는 북한을 무시하는 법이 없다. 오죽하면 『통일되면 외교팀을 모두 북한 외교팀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겠는가.
우리 정부의 對中 외교가 저자세로 일관돼 온 것은, 잘못된 논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韓中관계가 악화될 경우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核 문제 등 한반도 현안에서 중국의 협조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만에 하나
외교문제로 인해 韓中관계가 악화된다고 해도 중국은 한국 기업에 불이익을 줄 수 없다. 그런 차별적인 행위는 곧 중국 자신의 對外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안정과 平和는 누구보다 중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만약 한반도에 긴장국면이 조성되면 중국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경제발전을 계획대로 실천하기 어렵게 된다. 최근 북한 核 문제에 중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북한 核이란 시한폭탄을 방치할 경우 일본·대만의 核무장을 자극해 아시아의 軍備경쟁을 가져오고, 그것은 나아가 중국 자신의 경제발전 노선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근 외신들에 따르면, 중국이 적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은 盧武鉉 정부가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딕 체니 美 부통령이 중국 지도자들에게 『그동안 미국이 일본·대만의 核무장을 막았던 것처럼 중국이 북한 核을 막아라. 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일본의 核무장을 막을 명분이 없다』고 「협박」한 것이 더 효과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우리 정치권도 저자세 外交에 한몫 한국
외교관들이 저자세가 되는 또 하나의 큰 원인은 우리 정치권에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중국의 최고 지도자와 만나는 것을 하나의 정치적 誇示행위로
생각한다. 그래서 급작스레 중국 국가주석이나 총리 면담을 요청하게 된다. 외교통상부로서 이런 요청을 받으면, 부득이 중국 외교부나 공산당
대외연락부 관리들에게 통사정을 해야 한다. 1년 중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평상시에 우리 외교관들은 중국 외교부에 「많은 것을 부탁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原則과 名分을 강조하고 싶어도, 다음을 생각하면 강하게 나가기 어렵게 된다. 한번 강하게
나갔다가 다음 번에 부탁을 거절당하면 정치권으로부터 질타를 받는 쪽은 외교관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韓美 우호관계 유지하는 게 중요 중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위상이 날로 높아 가는 현실에서 한국인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중국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과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설사 경제규모는 작을지라도, 기술력에서 우위를 확보한다면 중국인들은 결코 한국 기업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와 정치권이 국가 경쟁력 문제를 외면하고 理念 논쟁과 정쟁에만 몰두할 경우, 기술逆轉은 시간 문제이다.
둘째, 정부는 원칙과 명분 위에서 對中외교를 펼치며, 특히 在中 한국인 보호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중국은 自國民 보호에 철저한
미국이나 독일, 일본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만, 교민보호를 귀찮게 여기는 한국 정부는 우습게 본다. 셋째, 한국 기업과
교민들은 스스로 약점과 허점을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중국 시장 자체가 法的으로 미비하고, 온갖 편법이 판치는 곳이다 보니, 그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개인 사업가들도 부득이 「편법」에 의존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편법은 언젠가는 보복과 불이익을 당하게
마련이다. 미비한 법일지라도 중국의 법을 최대한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중국에 진출하기 전에 현지 언어와 법률·문화를 익히는 것이 실패
가능성을 줄이고 無視를 당하지 않는 지름길이다. 끝으로, 韓美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으로부터 무시당하지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한국이 미국과 군사동맹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가정할 경우,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한국을 어떻게 다루었을지 모른다. 韓美동맹을
굳건히 하는 것은 한국이 중국을 상대할 때 제 목소리를 내는 든든한 뒷받침이 된다. 현재 국내에는 미국보다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 등에서 힘을 얻어 가고 있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仁祖 2년(1624)
주청사를 따라 明을 다녀온 竹泉 李德泂(죽천 이덕형) 선생이 쓴 「竹泉行錄」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明으로부터 仁祖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갖은
고생 끝에 燕京(연경: 지금의 북경)에 도착한 조선의 신하들은 면담조차 해 주지 않는 明나라 관리들을 만나기 위해 추운 겨울날 자금성 밖에서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눈물을 흘렸다. 역사를 경계 삼으라는 우리 선조들의 피맺힌 기록을 후손들이 외면한다면, 역사는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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