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韓, 南北關係

金正日 러시아 방문 때 한 달 간 그를 안내한 프리코프스키의 手記

이강기 2015. 10. 10. 09:57
金正日 러시아 방문 때 한 달 간 그를 안내한 프리코프스키의 手記
 
『마약 밀매자는 현장에서 射殺합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많아 계속 죽여도 문제 없습니다』
 
[편집자 注:작년 7월26일부터 8월18일에 걸쳐 북한의 金正日은 왕복 2만km가 넘는 시베리아 철도 여행에 나섰다.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것에 대한 答訪 차원에서 이뤄진 金正日의 첫 해외 공식 방문이었다.

24일 간에 걸친 「긴 여행」의 안내인으로서 여행기간 내내 金正日과 동행한 사람은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全權 대표인 콘스탄틴 보린비치 프리코프스키씨였다. 과거 金正日과 친교를 갖고 있던 외국인으로는 이탈리아人 실업가 카를로 바에리씨 등의 존재가 부각된 적은 있지만, 약 1개월에 걸쳐 金正日과 지낸 외국인으로서는 그가 처음이다. 金正日의 「본모습」을 아주 가까운 데서 바라본 최초의 외국인인 셈이다.

프리코프스키씨는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 이후 6개월 동안 세계 도처의 매스컴으로부터 끈질긴 취재요청을 거절해 오다 결국 격주간 「SAPIO」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月刊朝鮮은 격주간誌 「SAPIO」의 허가를 받아 지난 4월23일자에 실린, 「한지붕 밑」에서 수수께끼에 가득찬 「장군님」과 寢食(침식)을 함께 한 프리코프스키씨의 「시베리아 여행 동행기」를 轉載한다〕

 방문 前夜의 어수선함
 
 
  당초, 金正日의 방문은 2001년 초여름이나 늦가을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러시아 신문기자가 특종 보도하게 되었고, 金正日이 격노함으로써 러시아 방문이 중지된 사연이 있었다. 그로 인해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 일정은 조정됐고, 7월26일부터 시작되는 그의 러시아 방문계획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계획의 전모를 알고 있던 것은 푸틴 대통령과 일부 측근, 외무성과 철도성의 간부들뿐이었다.
 
  金正日의 러시아 입국 후 스케줄은 그가 국경 마을 하산에 도착하고 나서야 결정됐다. 실제 계획에서는 내가 全여정을 金正日과 동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열차에 동승한 것은 극동연방관구內뿐이며, 이웃 시베리아 연방관구부터는 다른 인물에게 인계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돌연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모스크바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쁜 예감은 적중했다. 대통령은 『러시아 방문 도중 안내인을 여러 명씩 바꾸면 실례이니까 당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해 주길 바란다』고 지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쁘지만은 않았다. 대통령의 명령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알겠습니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측 차량은 事前에 시험운전 차원에서 국경을 넘어 238km를 여섯 시간에 걸쳐 달렸다. 실제 운행속도도 시속 40~50km였다. 또한 故障(고장)에 대비해 한밤중에 차량 교환 연습도 이뤄졌다.
 
  내가 金正日을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2000년 7월, 푸틴 대통령이 平壤(평양)을 방문했을 때 나도 동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떨어져 서 있었기 때문에 그와 대화를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一國의 지도자를 안내하는 총책임자인 것이다. 나에게는 一國의 지도자와 마주앉아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긴장됐다.
 
  북한, 더욱이 金正日은 국경에 접해 있는 러시아 사람에게 있어서도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특히 1990년 한국이 러시아(당시는 소련)와 國交를 맺은 이래 러시아의 언론은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도했다. 때문에 나를 포함한 러시아人은 북한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도 긴장의 한 원인이었다.
 
  金正日을 태운 열차는 오전 8시에 러시아에 入國했고, 20분 정도 후에 우리들이 마중할 하산驛에 도착했다. 金正日은 손을 흔들고 미소 지으며 트랩을 내려왔다. 나는 트랩 앞까지 나가서 『러시아에 잘 오셨습니다』고 손을 내밀었다. 金正日은 내 손을 강하게 잡았다. 살찐 모습이지만 나 정도는 아니었다. 키는 나보다 상당히 작았지만, 손을 잡았을 때의 강한 힘에는 놀랐다. 그는 악수를 하면서 상냥하게 『앞으로 매일 만납시다』고 나의 환영의 말에 답했다.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그때부터 길고도 짧았던 24일 간의 여정이 시작됐다.
 
  많은 언론인들이 金正日이 타고 온 열차를 「日本製(일본제)」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 열차는 일찍이 스탈린이 金日成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또한 완전 防彈(방탄) 열차라고 보도되었지만 수행하고 있던 러시아 철도성 전문가에 따르면 『방탄이 돼 있는 것은 金正日 개인이 사용하는 차량뿐』이라는 것이었다.
 
  북한 측 차량은 金正日 전용 차량, 연회용 차량, 레스토랑, 車庫(차고) 등이 있었다. 차고의 중간에는 방탄 시설을 갖춘 벤츠 차량 두 대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金正日이 차를 사용할 때에는 모두 러시아측에서 준비를 해 주었기 때문에 결국 이 차들은 한 번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연회용 차량은 상당히 지내기가 좋았다. 안에는 대형 스크린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영화와 텔레비전 감상용이며, 또 다른 하나는 열차가 달리고 있는 지역의 地圖를 표시한 것이다.
 
 
  기쁨조로는 歌手들만 대동
 
 
  그 지도에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주변도시의 市場 이름과 가축의 數 등 경제정보까지 표시돼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각 차량에는 컴퓨터가 설치돼 있었으며, 그 스크린만 봐도 데이터 베이스의 정보는 놀랄 정도로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金正日 자신도 이 데이터 베이스와 인터넷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연회를 할 때는 반드시 전날 마지막 화제를 기억하여,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아내 그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추가로 조사, 다음 만남에서 이야기했다. 연회장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느 연회에서든 젊고 매력적인 한 여성이 同席했다는 것이다. 金正日의 「비서역」인 듯한 그녀는 마지막까지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북한 측이 데려온 여러 명의 여성들은 「總書記 전속 기쁨조」로서 아름다웠다. 게다가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들의 뛰어난 노래 솜씨였다. 회식 등의 餘興(여흥)에서 그녀들이 민요 등을 부르는데,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국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로도 노래했다. 『그녀들은 볼쇼이극장의 솔리스트를 능가한다』고 해 화제가 됐다.
 
  이 열차에도 부족한 점은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계절상 한여름으로 상당히 무더웠다. 연회용 방과 간부들의 공간에는 冷房(냉방) 시설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더웠고, 나는 긴소매의 상의를 입는 것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金正日이 머무는 차량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때 그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교섭 때는 언제나 인민복을 입고 나왔고, 긴 소매일 때도 있고 반소매일 때도 있었다.
 
 
  팔씨름 대회가 인기 이벤트
 
 
  시베리아 철도의 철길 주변은 최고 수준의 경계가 펼쳐졌다. 우선 우리들 열차 앞에는 약 7분 간격으로 「偵察(정찰) 열차」가 先行했다. 이 열차는 線路(선로)에 위험물 有無를 확인하고 만일 지뢰 등이 설치돼 있어도 「本隊(본대)」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페이스로 뒤에도 연결 차량이 달렸다. 뒤 차량들은 다른 열차가 金正日의 열차를 따라오는지, 그리고 스피드가 늦은 「本隊」에 실수로 追突(추돌)하는 열차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본대」의 선두 차량에는 러시아 측의 저격수 두 명이 항시 감시했다.
 
  驛에 정차할 때의 경비는 국제규칙에 따라 방문을 받는 측인 러시아가 主임무를 담당하고 북한 측 스태프는 지원을 했다. 대통령이 뽑은 저격수는 정예 병력 50人이며, 그들을 위해서 러시아 측은 두 개 차량을 할당했다.
 
  驛에 정차하기 전에 그들은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플랫폼과 열차의 지붕 위로 흩어져 만반의 경계태세를 취했다. 더욱이 러시아 측은 약 20명씩 비밀경호원을 동승시켰다.
 
  북한 측도 25명의 저격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 35세 이상이며, 무기를 감추기 위해 큰 양복에 넥타이 차림, 金日成 배지를 부착하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160cm도 안 되는 작은 남자를 항상 金正日 측이 대기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兩國의 비밀경호원들은 서로 빈번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쌍방의 열차 연락부분에는 24시간 경계태세로 호위와 통역이 한 명씩 서서 왕래하는 사람을 확인하고 있었다. 비밀경호 요원들은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에 고생했지만, 금세 同志(동지)가 된 것처럼 허물없이 가까워졌다. 팔씨름 대회를 통해 양측 요원들은 힘자랑을 했고, 대회(?)가 열린 연회장 차량은 복도까지 구경꾼들이 넘쳐날 정도로 인기 이벤트였다.
 
  그들 경호요원들은 서로 갖고 있는 武器(무기)에 관심을 가졌다. 정보교환 차원에서 쌍방의 총기 일련번호를 교환했다. 북한 측 비밀경호 요원의 기본 장비는 두 정의 권총과 한 정의 칼라슈니코프 총이었다. 거리를 차로 이동할 때도 칼라슈니코프를 들고 있었다. 경비의 주도권은 러시아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측의 비밀경호 요원들이 경호에 나선 것은 한 번뿐이었다.
 
  어느 驛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아는 記者를 金正日에게 소개했을 때의 일이다. 그 기자가 金正日에게 악수하려고 예상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북한의 비밀경호 요원은 한순간에 등뒤에서 내리눌림을 했다. 정말로 훌륭한 솜씨였다. 이렇게 만반의 경호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돌발사고가 세 번 정도 있었다.
 
  첫 번째는 첫날, 하산驛을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돼 우스리스크 부근에서 여러 명이 차량에 돌을 던져 열차의 창문이 깨진 일이다. 두 번째로 8월5일 모스크바를 출발한 직후, 노숙자 소년들이 장난으로 돌을 던져 또다시 창문이 깨졌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8월7일에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도중, 線路에 장애물이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긴급 停止(정지)를 했다.
 
  「정찰 열차」가 통과한 후에 누군가가 장애물을 올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던 열차의 운전사가 발견해서 이를 통보, 연락을 받은 우리들이 긴급 정차해 아무 사고도 없었던 것이다.
 
 
  건강 위해 禁煙-節酒, 그래도 女子는 좋아해
 
 
  여행중 金正日은 러시아産 맥주와 워커(위스키)를 마시고 있었지만 그다지 많이 마시지 않았고, 맥주는 두 잔 정도를 마셨다. 그에게 어떤 술을 좋아하냐고 묻자, 『쉰 살 무렵까지는 위스키나 브랜디 등 강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못 마시게 해 지금은 보르도와 보르고뉴에서 나는 良質의 레드 와인을 반 병 정도 마시고 있습니다. 레드 와인은 프랑스에 있는 대사관 직원이 골라서 보내 줍니다』고 했다.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1999년부터 담배를 끊었습니다. 1982년에도 금연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실패했습니다』
 
  측근들도 金正日이 금연하자 함께 금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화제가 女性으로 돌아가면 매우 말이 많았다.
 
  『러시아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많지요. 프랑스 대사관 직원의 이야기로는 파리의 카바레에는 러시아 여성이 많고, 그래서 가장 인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2000년 7월에 푸틴 대통령과 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의 젊은 여성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金正日은 그녀가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에게 자주 말을 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는 친한 사람들 외에는 하지 않는 건배(잔을 쥐고 팔을 서로 휘감아 마시는 것)를 했고, 헤어질 때는 몇 번씩이나 키스를 했다. 그는 여성에 대해서는 매우 상냥하고 신사적인 인물로 보인다.
 
  3週 이상 함께 지내는 데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회식자리였다. 식도락가로 알려진 金正日에게 어떠한 식사를 제공할것인지 고민했다. 북한 측은 프랑스에서 배운 주방장을 대동시키고 있었다(기본적으로는 회식 식사는 그가 만들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가 만든 러시아 요리는 그다지 맛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식탁에는 언제나 화려한 색상의 귀티 나는 접시 15~20개가 놓여 있었다.
 
  金正日은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는 일은 없었다. 조금씩 모든 음식을 맛보는 게 그의 스타일이었다. 물론, 김치는 언제나 식탁에 있었다. 金正日은 『朝鮮人은 體內(체내)에 부족한 물질이 있어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언제나 김치를 먹는 것입니다』고 설명했다. 食材(식재)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실어온 것은 아니고, 도중에 평양에서 새로운 食材를 실은 비행기가 와서 옴스크,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에 보충해 주고 갔다.
 
  그들은 성실하게도 돌아가는 길에 열차안에 있던 쓰레기를 비행기에 실어 평양으로 가져갔다. 食後에는 언제나 여러 종류의 케이크와 커피가 나왔다. 그는 반드시 커피를 마셨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 커피가 싫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홍차가 나오게 되었다. 金正日 자신이 주방장에게 지시를 한 모양이다.
 
  옴스크 부근에서 金正日로부터 『본격적인 러시아 요리를 먹어 보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 우리들은 허둥지둥 옴스크에서 식재를 조달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사로(소와 새의 지방질 부분 요리)」와 「페리메뉴(러시아풍 물만두)」를 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때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것은 진짜 러시아 요리가 아니군요』라고 감상을 말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우리는 다시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러시아 요리를 金正日에게 제공했다. 이번에 그는 『이 맛은 평양에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습니다』고 말해 우리들도 체면을 살릴 수 있었다.
 
 
  金正日, 푸틴 대통령 전용 화장실을 사용
 
 
  金正日의 시베리아 철도 여행의 최대 목적은 물론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이었다. 그것은 푸틴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열차는 8월3일 저녁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金正日은 크렘린 궁에 묵고, 나는 모스크바의 집으로 돌아갔다. 더욱이 나는 대통령의 배려로 8월5일 「휴가」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즐거웠다. 모스크바 滯在(체재) 중에는 라슈코프 외무차관이 안내를 맡았다.
 
  도착 다음날인 8월4일 아침, 金正日은 붉은광장의 무명용사 묘와 레닌 묘를 방문했다. 레닌 묘에 바치는 화환에는 한국어로 「金正日로부터 레닌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레닌 묘 獻花(헌화)는 前年 푸틴 대통령이 金日成 묘에 헌화한 것에 대한 답례였다. 헌화한 것은 레닌 묘뿐이며 스탈린과 브레즈네프 묘는 가지 않았다.
 
  오후 頂上회담은 두 사람 외에 통역 정도만을 배석시킨 채 이뤄졌다. 화제는 미국, 중국, 일본, 한국과의 외교관계와 군사문제가 중심이었던 듯하다. 특히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정책를 金正日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마음에 두었다. 金正日은 시베리아 철도를 연장해 한국에 연결하는 계획을 화제로 삼았다.
 
  이번 열차를 이용한 러시아 방문에 대해서 「金正日은 비행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자신의 눈으로 시베리아 곳곳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목적이었다.
 
  頂上회담 후 「모스크바선언」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선언」이라는 이름은 金正日이 강하게 희망해 붙여진 명칭이었다. 8월3일부터 8월5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金正日은 상당히 과묵했다. 전날까지의 관계는 어디 가고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고, 나는 무시당한 느낌이들었다. 그는 外國에서 공식석상에 나가면, 갑자기 「외교적인 행동」으로 바뀌는 타입이었다.
 
  金正日과 푸틴 대통령의 頂上회담은 모스크바선언이 서명된 8월4일 회담만 클로즈업되었지만, 歸路 도중인 8월8일에도 오찬 회담이 있었다. 이 회담은 직전까지 전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전날이 돼서야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내일 시간이 있으면 다시 한 번 金총서기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와 金正日도 쾌히 승낙했기 때문에 실현됐던 것이다.
 
  당일엔 미술관 견학 등이 예정돼 있었지만 급히 취소됐다. 金正日은 평상시 유머가 넘치는데, 공식석상에서는 위엄을 나타내려고 과묵해져 외교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날은 상당히 허물없는 분위기로 회담이 진행됐다.
 
  장소가 대통령 官邸(관저)였던 것도 金正日을 편안하게 한 요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金正日은 대통령밖에 사용하지 않는 「전용 화장실」도 이용했다. 金正日은 이 「예정 외의 頂上회담」에 몹시 감격했다. 대통령 관저를 떠날 때는 여러 해 동안 사귄 친구처럼 헤어졌고, 열차에 타고 나서도 이때 장면을 자주 입에 담아 『외교석상에서는 외교적인 얼굴을 하고, 친구로서 만나야 할 자리에서는 친구로서 만납니다. 이것이 나의 방법입니다』고 말했다.
 
 
  金正日을 기쁘게 한 한 자루의 총
 
 
  金正日은 역사적인 날을 歸路의 치타 부근에서 맞았다. 8월15일, 북한해방일이었다. 이날, 나는 金正日에게 『역사적인 기념일을 러시아에서 맞게 된 것에 대해 많은 신문기자를 열차로 불러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 어떤가』 하고 제안했다. 그는 그다지 언론 취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때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래서 기념파티에는 양국 기자도 10명씩 참가하게 되었다. 金正日은 기자들에게 『이제 러시아와 北朝鮮은 최고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11일 전에 발표한 모스크바선언의 意義를 全세계에 알렸다.
 
  곤란했던 것은 그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하는 문제였다. 그의 마음에 들 만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치타 부근에 사는 나의 군대시절 친구인 보르다레프 장군에게 의논한 결과, 장군은 멋진 선물을 생각해 냈다.
 
  보르다레프 장군이 준비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사용한 기관총이었다. 그는 『우리들은 이 무기로 유럽을 파시즘으로부터 지켰고, 朝鮮人을 비롯한 아시아인을 日本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것은 양국 友好의 증거입니다』고 설명하면서 金正日에게 총을 건네 주었다. 金正日은 『대단히 감동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상당히 기뻐했다.
 
  다섯 시간에 걸친 파티의 마지막은 러시아와 북한의 노래로 마무리됐다. 그는 CD를 수만 장 소장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 북한 측의 스튜어디스와 내가 초청한 가수도 노래를 불렀지만 金正日도 흥에 겨워 러시아 민요 「광활한 우리나라」를 함께 불렀다.
 
  金正日과 지낸 지난 24일 간의 여행 중 내게 가장 큰 이벤트는 귀로 도중인 8월17일 하바로프스크 시내 시찰이었다. 우선 8월10일경, 경찰과 방문 예정 장소에 미리 경호를 철저하게 하라고 지시를 전달했다. 그 지시에 따라 하바로프스크 경찰은 일주일에 걸쳐 하바로프스크 시내 시찰 코스에서 모든 차량주차를 금지했다. 金正日 이하 북한 측이 사용하는 차량에 封印(봉인)을 하는 등 24시간 경비태세에 들어갔다.
 
 
  金正日의 굽 높은 구두
 
 
  당일 아침, 우리 열차는 역에 도착했고, 9시경 하바로프스크 시내 시찰을 위해 출발했다. 차는 아무도 없는 길을 시속 80km의 속도로 달렸다. 경호는 완벽했다. 주변의 모든 빌딩은 金正日이 지나기 직전에 경찰들이 검색을 했고,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으며, 지하실도 봉쇄했다.
 
  주요한 길목의 빌딩 옥상에는 저격수가 배치됐고, 「의심스러운 사람은 즉시 발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더욱이 金正日이 방문하는 백화점의 손님들은 몽땅 밖으로 내몰렸고, 폭발물 탐색견이 구석구석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녔다. 이 개는 내가 일찍이 參戰한 적이 있는 체첸전쟁에서도 활약한 적이 있는 「엘리트犬」이었다.
 
  하바로프스크 시내에 도착한 金正日이 처음 들른 곳은 화장품 매장이었다. 그는 프랑스産, 미국産 여성용 화장품을 몇 개인가 손에 들고 있었다. 의외로 그가 가장 흥미를 보인 것은 스포츠 용품이었다. 그가 스키를 탈 줄 아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스키 용품을 조심스럽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몇 개의 스키 용품을 손에 들고는 디자인과 성능을 체크해 보기도 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신사복 매장. 옷단이 팔랑팔랑한 바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자, 안내를 맡은 백화점 점장이 『이 디자인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고 설명을 하자 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 구두 매장에는 1만2000루블(한화 50여 만원)이나 하는 스페인제, 이탈리아제 구두의 가격표를 보고, 『누가 이런 비싼 구두를 삽니까』라고 점장에게 물었다. 점장이 『그래도 하루 한두 켤레는 팔립니다』고 대답하자 金正日은 놀랐다.
 
  이때 내가 알게 된 것은 金正日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뒷굽이 높고 발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희한한 구두」는 金正日을 본 하바로프스크 시민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그후 2층에 있는 미용실과 장난감 매장 등을 둘러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하지만 구두 매장을 둘러본 직후였다고 생각되는데, 곁에 있던 수행원에게 귓전에 대고 뭔가를 소곤거렸고, 그 수행원은 열심히 메모를 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수행원이 金正日 대신 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金正日은 백화점 시찰을 대단히 즐겁게 생각했다. 예정시간은 10분 정도였는데, 결국 백화점에 30분 이상 머물렀을 정도였다.
 
 
  麻藥 적발문제를 둘러싼 돌출 발언
 
 
  하바로프스크에서는 金正日에게 관광의 의미가 강한 시찰이었기 때문에, 金正日은 긴장이 풀린 듯 말이 많았다. 나 외에도 하바로프스크 부시장인 포보프씨는 안내역으로서 金正日을 뒤따르고 있었다. 포보프 부시장이 『하바로프스크에는 朝鮮人이 약 8000명이 있는데, 일꾼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지요』라고, 북한사람을 칭찬하자 金正日은 자랑스러워하며, 『조선민족은 鬪爭(투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이지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麻藥(마약)문제에 대한 金正日의 발언이었다. 극동연방관구에는 2만5000명의 마약중독자가 등록돼 있고, 작년 한 해만 해도 5000명이 마약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 상황을 포보프씨가 설명하자, 金正日은 『북조선에서는 마약 밀매자는 현장에서 射殺합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많아 계속 죽여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밀매자가 中國人이라면 사살은 하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때릴 뿐입니다. 포보프씨, 만일 하바로프스크에서 朝鮮人이 마약을 사용하는 것이 적발되면, 射殺해도 괜찮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내가 許可합니다』고 했다.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지함도 담겨 있었다. 나도 포보프씨도 너무 놀라 말이 안 나왔다.
 
 
  金正日이 좋아하는 「검은 빵」
 
 
  8월17일 오후에는 하바로프스크를 흐르는 아무르江 유람선상에서 식사를 했다.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모스크바 75호」라는 배였다. 그곳에도 열차의 경호원이 동승했고, 전방에는 경찰선이, 후방에는 유람선 「모스크바 205호」가 항해했다. 「205호」는, 만일 「75호」에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金正日을 이 배로 갈아태우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유람선에서의 회식은 도착 3일 전에 결정됐기 때문에, 연락을 받은 선장은 대단히 놀랐다. 「75호」는 하바로프스크에서 가장 유명한 유람선으로 과거에도 VIP를 태운 적이 있었지만, 金正日 정도 급에 해당하는 巨物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3일 밤낮으로 승무원이 총동원돼 배를 단장했고, 깨끗한 상태에서 金正日을 맞을 수 있었다. 식사는 하바로프스크의 유명 레스토랑인 「아쿠아리움」의 주방장이 승선해 조리했다.
 
  북한 사람은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어 생선을 主요리로 택했고, 金正日도 생선 요리를 대단히 만족해 해, 주방장에게 직접 찬사를 보냈다.
 
  金正日은 「아쿠아리움」에서 나오는 「검은 빵」을 특별히 좋아한 듯하다. 그의 지시를 받은 수행원 한 사람이 주방장에게 『검은 빵을 20斤(근) 정도 사고 싶다. 평양에서도 金正日 총서기가 먹게 하기 위해서다』고 부탁하자, 주방장은 『파는 것은 아니고 선물로 주겠다』면서, 러시아式 보존방법까지 조언해 주었다. 이 수행원은 그날 일행보다도 먼저 비행기편으로 하바로프스크에서 평양으로 돌아갔는데, 공항에서 가죽 부대에 가득 담긴 검은 빵을 짊어진 그의 모습이 화제가 됐다.
 
  金正日은 유람선상에서는 대단히 마음이 편해 보였다. 해방기념일 파티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청해서 러시아 民謠(민요)를 부르기도 했고, 배에 올라온 예술인들과 談笑(담소)를 나눴다. 나도 이곳 사람으로서 접대가 잘 되었기 때문에 안심했다. 배에서 내릴 때 『지금부터 또 열차를 타야 하는 것인가』라는 우울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날은 즐거웠다. 하지만 『열차여행도 앞으로 하루면 해방된다(다음날 열차는 하산에 도착)』고 스스로 자위하며, 24일 간 2만km에 이르는 시베리아 철도 왕복 여행을 마칠 수가 있었다.
 
 
  프리코스키씨는 현재 이 여행기록을 한 권의 책 「金正日과의 러시아 여행」으로 엮는 중이다. 이 인터뷰에서는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도 포함될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베일에 싸인 金正日의 「본모습」이 밝혀진다는 것에 의미가 클 것이다.●

월간조선 2002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