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취재]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 ‘94년 6월’과 ‘98년 가을’사이
미스터리 추적! 94년6월 美 北포격 D데이 H아워
◇1994년 6월16일,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영변 핵단지 폭격?
◇주한 미대사관 직원가족에 소개령 내렸다
◇운명의 카운트다운 1시간 전, 평양에서 걸려온 카터의 전화
한통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1994년 6월16일, 미국은 북한 영변지역에 대한 폭격의 H아워까지 결정해놓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있었다』
지난 9월16일 저녁, 미국 수도 워싱턴 DC 도심의 회원제 식당인 시티클럽. YS정부 시절 장관을 역임한 인사의 모임인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NDI·마포포럼) 관계자들에 대한 국가정책센터(CNP)측의 환영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미 민주당의 외곽단체인 CNP는 NDI의 미국측 자매기관.
NDI 이사장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 남북관계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던 박관용(朴寬用) 의원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나온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94년 당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핵비확산 담당 보좌관였던 다니엘 포네만(Daniel Poneman). 계속해서 포네만의 말이다.
『H아워 한 시간 전에 북한 강석주 외교부부장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와 북한이 미국측 요구를 수용한다는 의사를 전달해오면서 위기는 일단 진정됐다』
(한국측 참석자)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달라』
(포네만)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을 지낸 레온 시걸(Leon Sigal)이 최근 「이방인 무장해제시키기」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한번 읽어보라. 나로선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한국측 참석자) 『미 정보공개법 규정에 따라 30년 뒤라면 얘기할 수 있겠나?』
(포네만) 『사안에 따라선 30년이 지나도 얘기할 수 없는 게 있다』
당시 그 자리에 동석했던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 사무국장 이승태 박사의 말.
『그 자리에서 북폭 얘기는 꽤 길게 계속됐다. 포네만은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가족들에 대한 소개령까지 발동됐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전율했다. 94년 6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 의원도 처음 듣는 얘기라며, 미국이 한국정부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만약 그 때 북폭이 실행됐다면 한반도 전쟁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포네만은 레온 시걸의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책 내용이 미국 정부의 핵심적인 입장 부분에선 조금 차이가 나지만, 당시 상황 전반에 대한 설명은 대단히 정확하다』고 말했다고 이박사는 전했다.
운명의 94년 6월.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북한 핵문제가 브레이크 풀린 기관차처럼 위기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돌진하던 그 시점. 당시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핵연료봉을 추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었고, 한반도 상공에는 전운(戰雲)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때 상황에 대한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은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이 방북하면서 남북한 정상회담에 도출해내고 위기의 불길을 잡았다는 것. 과연 당시 미국은 북한 폭격의 D데이 H아워까지 결정했을까?
그로부터 4년 여 세월이 흐른 98년 8월31일, 북한은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 쪽으로 미사일(혹은 실패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반사적으로 나온 첫 반응은 경악, 그리고 심각한 우려.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깡패정권(rogue regime)」에 미사일이라니.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조야도 들끓었다.
94년 6월과 98년 가을. 그 4년 여의 간극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약에 북한이 다시 한번 위험한 불장난을 벌인다면? 그리고 만약에 미국이 다시 한번 북폭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온다면? 미국이 그런 「무서운」 결정을 내리는 데에 고려할 여러 가지 「변수」들은 그동안 어떤 질적·화학적 변화를 겪어왔을까.
현 시점에 94년 6월 당시 미국이 과연 북폭 결정을 내렸느냐의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안위를 좌우할 중대한 사건이, 당사자인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재점검이다.
우선, 94년 6월 당시 미국 백악관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를 레온 시걸이 쓴 문제의 책(『Disarming Strangers : Nuclear Diplomacy with North Kore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 워싱턴 시간으로 6월16일,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북제재에 대비해서 한반도에 군사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승인하기 위한 안보회의(council of war)를 소집했다. 펜타곤에서는 제재 강도에 따라서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그 중 펜타곤이 선호한 대안은 병참 부문을 담당할 2만3000명의 병력을 우선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 장군이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기존 주한미군 병력 이외에)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 40만 병력의 선발대 격이었다. 두 번째 대안은 추가로 전투기를 포함해 30∼40대의 항공기를 한국에 파견하고, 괌에도 F 117 스텔스 전폭기 등 폭격기들을 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더욱 강력한 대안은 한반도 지역에 두 번째 항모를 배치하고, 추가적인 육군·해병대 병력을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경보 담당 국가정보관(National Intelligence Officer for Warning) 찰스 알렌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이 이러한 군사력 강화에 대응해서 전격적으로 동원체제로 전환, 선제공격을 가해올지도 모른다』고 보고했다. 그런 식의 전쟁경보는 통상적으로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된 경우에만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것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고위 관리는 『당시 정말로 심각한 경보가 울렸던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이유 한 가지는 중앙정보국(CIA)와 국방정보국(DIA)이 이러한 조치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CIA는 당시 훨씬 심각하게 전쟁발발 위험을 걱정하고 있었다.
한편, 추가 병력을 파견하지 않을 경우의 위험성도 분명했다. 페리 국방장관과 샬리카쉬빌리 합참의장이 이런 위험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대통령은 결국 펜타곤이 제출한 계획안을 승인했다. 한반도에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뉴스는 다음날 「뉴욕타임스」의 1면 머리기사였다. 평양에 간 카터가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뉴스는 신문 안쪽에 파묻혀버렸다…』
당시 이렇게까지 위기가 증폭된 논란의 핵심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영변 핵단지의 5MW급 원자로에서 핵연료봉을 추출하겠다고 위협한 데에 있었다. 북한이 사용 후 연료봉을 추출하면 그후 그들이 그것을 재처리해서 추가로 핵무기용 플루토늄을 추출할지 예측불허의 상황이 된다. 더욱이 당시 북한은 방북해 있던 IAEA 검사관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북한은 결국 6월13일 일방적으로 IAEA 탈퇴를 선언해버렸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통한 점진적인 대북제재를 모색했다. 6월15일 미국이 작성한 유엔 안보리 제재안에 의하면, 안보리 의장이 경고 성명을 내고 30일의 유예기간을 둔 뒤 정치·경제적 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이러한 대북제재는 북한이 ▲북한에 잔류해 있는 IAEA 사찰단을 축출하거나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거나 ▲플루토늄을 다시 재처리할 경우에 가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중 미국에 초미의 관심사는 북한에 들어가 있던 IAEA 사찰단이 쫓겨나오느냐의 여부였다.
미국 조야는 강경론으로 들끓었다. 일례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안보보좌관과 아놀드 캔터 전 국무차관 등 부시행정부 시절 고위 관료 두 사람은 6월15일자 「워싱턴 포스트」에서 대북 강경책을 주장했다. 이들은 클린턴 행정부가 「더 단호한 행동」을 취해야 하며 『평양정권이 계속적이고 무제한적인 IAEA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미국이 나서서 북한 내의 핵재처리시설을 제거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평화의 전도사」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91, 92년에 이어서 93년 말에 세 번째로 방북 초청을 받은 카터는 당시 한반도 긴장이 극적으로 에스컬레이트되는 상황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 6월5일 갈루치 당시 국무부 차관보가 카터를 달래려고 애틀랜타로 날아가 당시 상황을 브리핑했지만, 오히려 카터의 방북 의지를 더 굳히는 결과를 불렀을 뿐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에 카터의 방북은 도박이었다. 카터가 개인자격으로 방북한다면 클린턴 행정부로서는 정치적 부담은 있겠지만 언제라도 그와의 공적 관계를 부인할 수 있다. 반면 카터의 방북 제의를 클린턴 행정부가 거절한다면, 그 사실이 공개될 경우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을 기회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클린턴은 결국 6월7일 카터의 방북제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안보보좌관 앤소니 레이크는 6월10일 방북관련 브리핑을 받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온 카터에게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자격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 때도 갈루치를 비롯한 관료들이 카터에게 상황을 브리핑했지만, 해군 시절 핵 엔지니어로 근무, 핵문제에 나름대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카터는 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터는 북한에 가서 말할 요점을 자신이 직접 작성해서 갈루치에게 보여줬다. 카터는 대사 따위가 주는 협상 지침에 구속될 사람이 아니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6월13일 서울을 거쳐서 15일 평양에 들어갔다. 도착한 날 김영남 외교부장을 만난 카터는 김영남으로부터 『IAEA 사찰단이 곧 축출될 것이며, 3단계 고위급 회담이 재개돼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카터는 북한측의 강경자세에 실망하고 놀란 나머지 다음날 새벽 3시에 잠자다 말고 일어나 보좌관 마리온 크릭모어(전직 대사)를 판문점으로 보냈다. 판문점에서는 보안전화선을 통해 워싱턴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카터는 크릭모어에게 『백악관에 3단계 고위급 회담에 합의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하라』는 지침을 주면서, 그 날 오전 중으로 예정돼 있던 김일성 면담이 끝나기 전에는 그 지침을 백악관으로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일성과의 면담에는 국무부 코리아 데스크 딕 크리스텐슨 부과장(현재 주한 미 부대사)이 통역을 맡았다. 카터는 워싱턴을 떠날 때 갈루치에게 읽어줬던 예의 그 메모를 꺼내 들고 IAEA 감시하에 핵시설을 동결할 것을 김일성에게 제의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일성은 또 북한의 기존 원자로를 더 안전한 신형 원자로로 교체할 수 있다면 영구적인 핵동결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보장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회담 결과에 만족한 카터는 크리스텐슨에게 판문점에 가 있는 크릭모어에게 전화해서 「새벽에 준 지침을 백악관에 보내지 말고 그냥 평양으로 돌아오라」고 전하라고 시켰다.
『… 그 날(16일) 저녁식사 후, 카터는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오전 10시30분 경, 안보회의가 열리고 있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갈루치가 전화를 받기 위해서 회의가 열리고 있던 캐비닛룸에서 나갔고 두 사람은 보안에 신경을 쓰면서 대화를 나눴다. 전화는 북한측이 도청할 수 있는 일반회선이었다.
15분 뒤 갈루치가 방에 들어와 모인 사람들에게 「김일성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핵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는 데에 동의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갈루치는 또 사람들에게 카터가 협상내용을 CNN을 통해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카터가 방북할 때 CNN을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한 최고위 관료는 『완전히 허를 찔렸군』하고 중얼거렸다. 안보보좌관 레이크는 갈루치에게 『카터에게 기자회견을 하지 말라고 전하시오』라고 했지만, 전화통화에서 가능성이 희박함을 이미 확인했던 갈루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의장은 분노로 일시에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난 9월 방미한 박관용의원 일행이 당시 NSC 멤버였던 포네만에게서 들었다는 내용과 레온 시걸의 책에서 서술되는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상당 부분이 다르다. 포네만은 자세한 설명을 회피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히 그가 『북폭 D데이 H아워까지 정해놓고 카운트다운을 하던 도중에 강석주 북한 외교 부부장이 H아워 한 시간 전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미국측 조건을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기자는 현재 워싱턴의 한 대형 법률회사에 몸담고 있는 포네만에게 전자메일을 보내 사실관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반면에 시걸은 『백악관 안보회의 도중에 평양에 가 있던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김일성의 핵동결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당시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당사자의 발언도 있다. 작년 9월에 방한했던 페리 전 국방장관의 증언.
『… 94년 6월 대북제재를 막 단행하려고 할 무렵, 나와 샬리카쉬빌리 장군은 군사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백악관 캐비닛룸에서 대통령과 국가안보위 멤버들을 만났다.
존 갤브레이스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란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대안과, 별로 달갑지 않은 대안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옵션」 즉 언젠가는 미국을 겨냥하게 될 핵무기를 북한이 보유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안과, 「달갑지 않은 옵션」, 즉 재래식 전쟁의 위험성이 있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적극 저지하는 대안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게 했다. 대통령은 「달갑지 않은 옵션」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막을 대안 세 가지를 마련했다. 이 세 가지 대안은 모두 한국 내 미군병력 증강을 요하는 내용이었으며, 그중 한 가지는 꽤 큰 규모의 병력배치를 요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분명 이 모두를 도발적인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었다.
한 시간 뒤면 클린턴 대통령이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병력배치를 승인하게 될 그런 역사적인 순간에 북한에 가 있던 카터 전 대통령의 전화가 걸려왔다. 회의는 중단됐다. 카터는 북한이 모든 재처리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핵동결을 위한 협상에 임할 것임을 알려왔다…』(97년 9월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페리 전장관 증언의 골자는 대체로 시걸의 책에 나오는 설명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날 페리는 사석에서 당시 전쟁위기를 진정시킨 카터의 역할을 평가절하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고 당시 그와 대화했던 사람들은 전했다. 한편 포네만은 올해 9월 박의원 일행과의 면담에서 『시걸의 책이 설명하는 당시의 대체적인 정황은 90% 이상 정확하지만, 북한 문제를 대하는 미국정부의 기본 어프로치나 전망 부분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이런 석연찮은 부분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시 시걸의 책으로 돌아가보자.
『… 가장 중요한 사실은 카터가 CNN과의 기자회견에서 대북제재를 가하는 전략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는 점이었다. 카터는 카메라 앞에서 「현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하면 안 됩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기자회견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CNN 인터뷰는 백악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한 참석자는 「우리가 수립한 외교정책에서 우리 자신이 방관자가 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 그렇게 한참 동안 각자가 격한 감정을 토로한 뒤 고어 부통령이 적절한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가 얻게 된 이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을까요?』
카터·김일성 회담을 워싱턴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한편, 역시 올해 출간된 카터 전 대통령의 자서전 『끝나지 않은 대통령직(The Unfinished Presidency)』(Penguin Group. 더글러스 브링클리 저)에는 당시 백악관의 상황이 좀 더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갑작스러운 카터의 CNN 기자회견에 말문이 막힐 정도로 놀란 클린턴 대통령과 그의 외교팀은 (기자회견을 시청한 뒤) 다시 캐비닛룸에 모였다. 카터의 「원거리외교(telediplomacy)」는 당시 상황의 모든 역학관계를 뒤바꿔 놓았다. 카터의 CNN 등장으로 인해 그들은 갑자기 수세에 몰리게 됐고, 카터가 「새로운 돌파구」라고 표현한 상황에 대응을 강요당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김일성이 단순히 위기를 빠져나갈 구실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터가 김일성에게 속은 건 아닌지, 북한이 유엔제재를 효과적으로 차단한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좌중을 지배했다. 한 사람이 걸프전 당시 카터가 이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던 사실을 기억해내곤 「국가에 반역한 녀석(treasonous prick)」이라며 카터를 욕했다. 고어 부통령은 카터를 변호하면서 행정부가 취할 다음 조치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카터를 무시하고 제재조치를 계속 밀고나가자고 제의했다. NSC 보좌관 스탠리 로스(현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국제적 차원이 아니라 미국 차원에서 북한의 핵동결을 수용하고, 이번 기회에 펜타곤측에서 별무소용이라고 생각해온 북한의 과거 핵개발 규명 조건을 벗어버리자고 제안했다.
그 후 다섯 시간 동안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대응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갈루치는 북한 핵동결에 대한 미국의 새 요구사항을 담은 초안을 작성해서 좌중이 읽어가며 수정해가는 한편 카터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한참 뒤 전화가 연결되자 긴장된 상황에도 항상 침착성을 유지하는 레이크가 전화를 받아서 새로 작성한 미국 정부의 조건들을 카터에게 전달했다.
그 내용은 추출해낸 연료봉을 새 것으로 교체하지 않기로 북한이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이크는 「대통령은 당신이 김일성에 대한 개인적 신뢰로 단지 악수하고 합의하는 방식이 아닌, 구체적이고 명확한 합의를 원한다」고 카터에게 말했다.
카터는 화를 냈다. 「위대한 지도자」에게 시시콜콜 조건을 갖다 붙이는 것이 북한엔 모욕적인 행동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부드럽게 말하는 레이크도 이 때엔 언성을 높였다.
카터는 결국 레이크가 부르는 조건들을 받아 적어서 김일성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레이크는 이 「통제가 안 되는 사절」에게 다른 기회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즉시 이 조건을 뉴욕주재 북한 유엔대표부에 보내 즉시 강석주에게 보내도록 조치했다.
클린턴은 「오늘의 진전이 북한이 진정으로 핵개발을 동결하겠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고위급 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상 시걸의 책과 카터 자서전, 포네만과 페리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94년 6월16일 백악관이 중요한 결정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는 점은 모두 일치한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결정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한국에 중요한 점은 단순히 한반도에 병력을 증강배치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 의원의 예처럼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카터의 전화를 받은 백악관 캐비닛룸은 한동안 분노에 차서 어쩔 줄 몰라 했다는 점도 대체로 일치한다.
당시 논란의 핵심 사안이었던 핵개발 동결에 북한이 동의했는데도 NSC 멤버들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것이 민간인 자격의 전직 대통령이 북한에 들어가 제멋대로 김일성과 협상하고 CNN 기자회견까지 해서 자기네 계획을 망쳐버렸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카터의 역할 덕분에 일단 위기가 진정됐는데도 그들이 계속 화를 냈다는 것은, 애초의 계획이 뭔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는 가정은 지나친 추측일까?
모든 증언자가 최소한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현상황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극히 민감한 부분」은 아직 베일 속에 가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 부분이 바로 「북한폭격론」은 아니었을까? 그레나다 침공 등 미국의 외교사에서는 외국에 기습공격을 가한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가까운 시일 안에 이 부분에 대한 사실관계를 명백하게 가리지는 못할는지도 모른다.
기자는 지난 9월9일 잠시 서울을 방문한, 『이방인 무장해제시키기』의 저자 레온 시걸을 만났다. 기술적 측면을 포함한 핵문제와 안보문제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90년대 대부분 기간을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으로 일했고, 지금은 뉴욕 소재 사회과학연구위원회(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의 컨설턴트 겸 콜럼비아 대학 교수로 있다. 다음은 인터뷰의 주요 내용.
―미국에서 제기된 「북한 폭격론」의 배경에 대해서 말해달라.
『미국은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옵션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가 주목한 핵심 문제는 북한에서 가동되고 있던 원자로(5MW급)였다. 미국은 당시 모든 정보로 판단해볼 때 그 원자로가 정상적인 용도 이외에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북한 원자로는 「캘더홀」이라는 영국산 원자로와 같은 모델이기 때문에, 영국측 자료도 판단 근거로 활용했다.
그 자료의 이론적 근거에 따르면, 북한은 1991년까지 3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었고, 그 후로도 추출량이 계속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미국은 생각했다. 여기서 미국이 중요하게 고려했던 점은 북한이 언제 원자로를 폐쇄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는데, 원자로를 폐쇄하면 핵 연료봉을 꺼내 일단 냉각저수조에 넣어 보관하지만, 언제든 그것에서 무기제조용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북한은 90년 이후로는 언제라도 원자로 가동을 중단시키고 무기제조용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진의를 모르는 미국으로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이란 북한이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사용후 연료봉을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그 후 북한이 플루토늄을 추출할지 여부를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 때가 바로 영변의 냉각저수조를 폭격해야 할 시점이 된다. 그러나 영변을 폭격하면 한반도 상공의 대기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될 수 있으므로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
한편 북한은 흥미롭게도 미국 정보기관이나 IAEA의 당초 예상보다도 훨씬 뒤까지 원자로 가동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북한은 의도적으로 원자로를 계속 가동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이 원자로 가동을 중단시킬 경우에 영변을 폭격할 계획이었다는 말인가?
『부시 행정부의 결정은 「북한이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면 그 때 폭격할 수 있도록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클린턴 행정부에 와서도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그것은 북한의 과거 핵개발 문제로, 88년과 89년 그 원자로 가동이 중단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였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이 80년대에 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IAEA측에 보고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면 미국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IAEA에 일부 연료봉을 꺼냈다는 얘기도 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다면 왜 그 사실을 IAEA에 보고했을까?
『모르겠다. 북한이 미국의 의심을 받을 경우 폭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정말로 핵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중요한 부분에서 북한이 IAEA에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단 한 차례 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고 말했지만, IAEA가 북한에서 수거한 샘플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세 차례에 걸쳐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원자로 가동을 중단한 것과는 무관하게 세 차례에 걸쳐 재처리과정을 밟아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이 얼마만큼인 모른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과거 핵활동에 대한 문제의 핵심이다. 미 정보기관은 그 북한이 과거에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은 핵무기 한두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추정했다.
여기서 다시 영변단지 폭격 문제로 돌아가면, 그 아이디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영변 핵단지를 폭격한다 해도 그 곳에 북한이 과거에 추출한 플루토늄이 보관돼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둘째, 영변을 폭격하면 바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폭격론은 언제나 최악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선택 가능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격을 하면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원자로와 저수조를 파괴하면 북한 핵개발의 과거를 캐낼 근거가 다 날아가버린다. 이 역시 미국에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폭격론은 항상 마지막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냉각저수조에서 연료봉을 꺼내면 그 때가 폭격을 감행해야 할 순간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군사적 공격은 선택하기 어려운 대안이다. 한편 군부에서는 항상 전쟁발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명해왔고, 따라서 군사적 대안이 배제된 적은 없었다』
―당신의 책에서 설명한 1994년 6월16일의 백악관 회의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달라.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정책 대안들은 군부, 특히 합참에서 준비했다. 그들은 영변 핵단지에 대한 폭격 뿐만 아니라 대북제재가 가해질 경우에 벌어질 사태에 대해서도 고려했다. 군부는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거기에 맞춰 계획을 수립한다.
국제사회의 현실에서 대북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실질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함을 의미한다. 즉 제재는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 단계라는 것이다. 북한은 당연히 이에 대해 전쟁행위라고 비난하고 나설 것이고, 따라서 미군도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실제로 제재가 시작되면 북한경제가 영향을 받을 것이므로 북한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게 된다. 아무튼 대북 경제제재에 들어가면 미국은 전쟁에 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93년 가을, 대북 경제제재 압력이 점점 거세졌을 때,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게리 럭 장군은 「제재에 들어가면 주한미군 증강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이 얘기는 사실 그의 전임자인 리스카시 장군 때도 나왔었다. 대북제재가 시작되면 전쟁이 터질 것이고, 병력증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함참의장이 구상하고 준비한 것은 걸프전에서 보여준 「사막의 방패」 작전과 유사한 형태의 전쟁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나는 93년 10월 초순 「뉴욕타임스」에 「왜 이렇게 서둘러서 전쟁을 하려는 건가」라는 내용의 사설을 썼었다』
―책 서문에서 당신은 두 차례 당신의 사설을 고치도록 요구받았다고 했는데….
『그건 93년 때의 상황과는 무관하다. 1994년 6월의 경우 그들은 좀 더 강경한 논조로 써보라고 요구했다. 원래 내용은 「잠깐, 카터가 방북한다니까 좀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몇 년 전부터 북한의 행태를 주의깊게 관찰해왔고, 94년 6월에도 북한이 결국은 협상쪽을 선택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내 사설 중간을 뚝 잘라서 다시 쓰라고 요구했다. 그 글을 본 사람들은 내 논조가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그들」이란 누구인가. 정부 쪽 사람들인가?
『회사 내부에서였다. 물론 당시 내 상사가 국무장관과 내밀하게 통했는지는 알수 없지만(웃음).
다시 6월16일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럭 장군과 합참의장이 대통령에게 병력증강을 건의했다. 제재가 가해지면 북한은 1993년 위기 때나 팀 스피리트 훈련 때보다 훨씬 강력한 동원체제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동원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동원체제란 단순히 병력만 증강하는 게 아니라 항공기가 증강배치되고 헬기가 비무장지대를 따라서 수시로 비행하는 등 상당히 소란스러운 일이다. 그럴 경우 우발적인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전쟁은 아니지만, 북한은 미국이 전쟁을 하려 한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전쟁경보 담당 국가정보관은 94년 2월에도 전쟁경보를 발하고 있었는데, 북한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6월16일 안보회의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병력증강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건 전쟁을 하거나 북한을 폭격하겠다는 결정이 아니다. 그건 대북 제재 국면으로 접어들 것에 대비해 병력을 증강한다는 결정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내려진 회의가 열리던 시각, 카터가 평양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이에 따라 그 결정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카터는 위기 진정에 큰 역할을 했다』
―지난 9월 워싱턴을 방문한 한 국회의원 말에 따르면, 이번 방미길에 당시 백악관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를 만났는데, 그가 『미국 정부가 당시 북폭 D데이 H아워까지 정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는데….
『클린턴 대통령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연료봉이 냉각저수조에서 꺼내졌을 경우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을 뿐이다. 북한이 그런 행동을 할 경우 미국은 그 지역을 폭격하는 방안이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국회의원이 들은 얘기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연료봉이 냉각저수조에 보관돼 있었고, IAEA 검사관들도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군사적 대안을 브리핑하는 것과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고, 대안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 말은 결국 카터 전대통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인데….
『그렇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카터는 평양에 들어가기 전에 김일성이 얘기해오던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카터 방북 때 오고간 대화를 옆에서 들은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했던 말은 바로 카터 방북 직전에 샐리그 해리슨(당시 카네기재단 연구원)이 방북해서 들었던 것과 같은 얘기였다』
―백악관 회의에서 관계 부서간에 이견이 표출됐었나.
『부서간에 견해가 갈렸던 사안은 이 회의 이전에 있었다. 그건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가는 것을 허용하느냐의 문제였는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카터가 북한에 가는 것에 반대했다. 크리스토퍼는 북한을 강하게 몰아세우자는 강경파였다. 앤소니 레이크 안보보좌관은 어정쩡한 입장이었고, 페리 국방장관은 카터 방북에 찬성했다.
페리는 원래 샘 넌 상원의원과 루가 상원의원을 북한에 보내기를 원하고 있었다. 93년 12월 경부터 페리는 「미국이 결정적인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최후 수단으로 고위급 인사를 특사 형식으로 북한에 보내서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카터는 북한에 보내기에 적합지 않은 인물이라고 페리는 생각했지만, 반대하고 나서진 않았다』
―국방부측에서 카터를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카터는 그들 말을 고분고분 들을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어 부통령도 카터 방북에 찬성했다. 이들이 대통령을 설득해서 카터가 가게 된 것이다. 클린턴이 카터를 북한에 보낸 것은 문제 해결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카터 방북을 허용하지 않았을 경우에 자신이 받을지도 모를 정치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북한은 태평양 상공에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이에 대해 한국 내 일각에선 미국의 대북 강경론과 그로 인한 위기감 고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94년 6월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해본다면?
『그런 사람들은 현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 때와 지금은 근본적으로 상황이 다르다. 93, 94년 당시 한국정부가 어떻게 한미간에 합의된 사전조율 절차를 어겼고,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내 책 속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문제는 한국정부의 이런 문제가 당시 미 행정부 안의 의견도 분열시켰다는 점이다. 페리 국방장관과 고어 부통령은 대화파였고, 크리스토퍼는 강경파였는데, 이들은 한국 관료들의 영향을 받았다.
내 생각에 지금과 94년 상황을 비교해볼 때 가장 큰 차이는 한국의 현 정부는 자기가 무얼 원하는지 어느 길로 가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햇볕정책은 남북의 평화공존을 도모하는 것이고, 북한 정권의 붕괴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이 정책의 근본적인 배경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시급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서울을 향하고 있는 북한의 장거리 포를 휴전선 후방으로 후퇴시키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북한이 앞으로 붕괴되건 붕괴되지 않건 간에 이 일이 선행되지 않는 한 서울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북한정권이 붕괴하더라도, 그 붕괴가 파국적인 결과를 낳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북한과 협조해야 한다』
8월31일 북한은 일본 영공을 지나 태평양을 향해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북한의 이번 미사일(혹은 실패한 인공위성) 발사시험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또 한 번의 시위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 즉 대북 경제제재를 풀기 위한 「대미·대일 협상용」이라는 것이다. 대화 통로를 열기 위해서 먼저 상대방을 위협하는 방식은, 한편으론 약자의 어쩔 수 없는 고육책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지난 몇 년간 북한이 즐겨 사용해온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 올리자 일본은 역시 예상대로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TMD(전역방위구상) 등 군비증강의 기회로 삼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북한의 의도」를 간파한(?) 한국정부는 예전보다 한결 「담담하게」 사태를 지켜봤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반응이었다. 한 정보 전문가의 말.
『발사 후 며칠간 미국 정부의 발표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들은 국무부와 국방부 발표에서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북한이 며칠 후 「발사한 것이 사실은 인공위성이었다」고 발표하자 국무부 쪽에선 대체로 북한측 주장을 받아들이는 듯한 반응을 보인 데 반해(잠정 결론은 「실패한 인공위성」이었다), 국방부 쪽에선 처음부터 미사일이라는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외교와 전쟁이라는 부처간 업무성격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북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미국 역시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한동안은 대단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미국 언론들은 그렇지 않아도 영변주변 지하핵시설에 대한 의구심으로 94년 10월 제네바합의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표시해오던 차에, 미사일 시험발사까지 나오자 미국 정부가 북한의 벼랑끝 외교에 놀아나고 있다고 비난해댔다.
의회에서도 대북정책은 클린턴 행정부를 공격하는 좋은 소재가 됐다. 보수계 공화당 의원들은 내년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예산안 심의를 빌미로 전면적인 대북정책의 재고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정말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정말로 모르고 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놀랐던 것일까? 한 정보 관계자는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최소한 일 주일 전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북한의 준비과정을 철저하게 스크리닝하고 있었다. 심지어 발사시험장에서 북한 과학자가 마이크로 야외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내용까지 감청했다. 발사 시각도 불과 몇 분 오차로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 우리가 짚어봐야 할 문제는, 94년 6월 위기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구성했던 제반 변수와 지금의 변수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땅에서 전쟁이 터질지도 모를 위험성에 대한 재점검이다.
그 4년 여의 세월 사이에 한반도 역학구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로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가 이뤄지면서 북한을 KEDO라는 국제 컨소시엄의 틀에 묶어둘 수 있게 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틀로서 뿐만 아니라 북·미간에 공식적인 대화채널이 개설됐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 뒤 4자회담이 열리면서 북미관계는 더욱 다양한 대화채널을 확보하게 됐다. 이제 북한과 미국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이방인」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북한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북한에 들어가게 됐다는 점도 4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점이다. 이들 국제기구들이 대부분 직간접으로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보 차원에서도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4년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됐음을 알 수있다.
한편 지난 4년간 남북관계에는 별진전이 없었다. 94년 7월 김일성 사망으로 불거진 조문파동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는 거의 제 자리를 맴돌아왔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으로 김영삼 정부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지만,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문제는, 전체 구도를 좌우할 여러 변수 중에서 「한국 변수」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즉 한국이 전체 한반도 상황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그동안 어떤 곡선을 그려왔는가 하는 문제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한반도 상황을 좌우해온 「주역」은 미국과 북한이 돼왔다는 점에서, 한국 변수의 핵심은 한국이 미국과 북한의 정책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94년 6월의 상황에선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조차 모르는 사이에 북폭이 결정됐을 정도로(당시 미국정부의 결정이 단순히 대북제재에 대비한 병력증강이었다고 해도 한국 정부가 그런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끼칠 힘이 미약했다는 기본 구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한국 변수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한미 양국은 겉으론 「빈틈없는 공조체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심각한 균열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적어도 외견상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햇볕정책은 가장 강력한 포용정책』이라는 게 미국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햇볕정책이건 봉쇄정책이건 기본적으로 대북정책은 북한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북한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역학구도에서 지난 4년 사이에 확연해진 것은 미국의 지배적인 영향력 강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배제한 대미 접근」이라는 기본 전략을 구사하는 북한의 이해와 맞물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해지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리고 그런 구도 속에서 한국의 햇볕정책은 종속변수로 전락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정보 전문가의 말.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미국과 북한은 햇볕정책의 실체와 역량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동안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6월 미국 의회연설에서 대북제재 해제를 제의하는 등 출범 초부터 이전 정부와는 너무나 다른 어프로치를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금강산 관광개발 등 몇 가지 현안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상당히 「안도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햇볕정책이 한반도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정책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런 이상을 뒷받침해줄 한국정부의 「역량」은 기대 이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이제 대한반도 정책결정에서 한국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한결 덜 수 있게 됐다』
그것이 초래할 결과는 무엇인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안위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이 재단하는 상황, 그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신동아 1998년 11월호)
'北韓, 南北關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0) | 2015.10.10 |
---|---|
이 치욕적인 한민족 수난기를… (0) | 2015.10.10 |
1964년 부터 1968년까지 펼친 미군의 대북심리작전 (0) | 2015.10.10 |
金正日 러시아 방문 때 한 달 간 그를 안내한 프리코프스키의 手記 (0) | 2015.10.10 |
최근 북한여성들의 옷차림 (0) | 201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