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최근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과 북한
권력층의 타락과 무자비한 독재에 관해 폭로하고 북한을 민주화하기 위한 운동을 하면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 아니냐' 라든지 '너무
선입관과 편견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명확히 '아니오'이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조금도
지나치지 않으며 오히려 북한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는데 오히려 부족한 측면이 더 많다. 북한에 관한 글을 쓰면서 글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북한인민의
그 비참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할 수 없어 오히려 불만이다. 북한인민의 비참한 상황은 그 어떤 글도 그것을 충분히 표현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경제상황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인권상황은 더욱 심각한 수준에 있다. 서구 사회의 잣대를
갖다 대서 비교해도 그렇고 북한 사회의 잣대를 갖다 대서 비교해도 그렇다. 40∼50년 전의 사회주의 신생 조국에 대한 높은 자부심이나 창조적
열정, 혁명적 기풍은 다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하루하루를 권력의 눈치만 보며 개돼지 취급받으며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북한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북한의 현 정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문제와 북한이라는 국가와 그 건국, 건국과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문제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본다. 북한의 건국은 현재의 북한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른 문제로서 접근해야 한다.
나는 작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건국의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고 했다. 이 건국이라는 것은 단순히 48년의 건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한의 건국이든
북한의 건국이든 53년에 가야 완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45년부터 53년까지의 과정을 통째로 보아야 한다. 내가 북한 건국의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고 말한 것은 45년부터 53년까지의 건국과정 전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한국전쟁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북한혁명을 하자고 나서니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우리가 남한의 입장과 남한의 관점에서 하자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니다. 북한혁명(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선혁명 혹은 북조선혁명이라고 해야 한다)은 철두철미 북한 인민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북한민주화를
주장하면서 이를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북한민주화는 철저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북한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 혁명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투철하게 뚫고 나갈 수 있고 모든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북한 인민의 인권에 대해 떠들고 북한 인민을 가장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북한 인민 이외의 다른 것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스스로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 인민의 인권과 해방과 복지 앞에 '대한민국 국익'을 앞세운다든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앞세운다든지 종교적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정말 심각하게 스스로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평소에 대한민국의 국익을
생각하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고수하고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북한 인민의 해방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는 우선 북한
인민을 중심에 놓고 북한 인민의 이익을 앞세우고 북한 인민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북한의 김정일정권이 무너지고
통일이 이루어질 때 남북이 완전히 동등한 지위에서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은 조건에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건국과 초기 건설과정 및 북한이라는 국가에 대한 북한 인민의 자존심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이에 대해 최대한 공정하게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독일 통일 당시의 서독 사람들은
통일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최대한 관대하고 원만하게 처리했고, 자기들의 희생을 감수해가면서 엄청난 물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제대로 배려해주지 못했고, 동독인들의 그 동안의 이상과 열정과 노력과 좌절 등이 공정하게 평가되지 못했으며, 동독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멸시의 대상으로 되었다. 그 때문에 통일 후 구 서독인들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으면서도 구 동독인들에게 심한 욕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국민적 통합을 위한 정치기술 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정치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들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현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한 역사와 그 결과물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가 훨씬 더 빨리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서독 정부나 서독 사람들은 승자와 패자의 관계에서 과거 그 어떤 경우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동독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발전의 속도, 사람들의 의식 발전의 속도, 사람들의 욕구 발전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다. 인민의 주인의식, 주인으로 확실히 대접받고자 하는 의식, 주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의식, 다시 말해 민주주의 의식은 서독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발전해온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경험에서 냉철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재 북한은 구 동독보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더 낙후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도 훨씬 더 낙후되고 경직되어 있다. 통일 직전
동독의 1인당 GDP는 서독의 3분의 1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북한의 1인당 GDP는 남한의 20분의 1에서 40분의 1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의 인권탄압을 비롯한 정치적 낙후성도 구 동독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아마 구 동독의 인권상황 등을
탈북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그들은 아마 그곳을 천국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의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의 문화소양은 구 서독
사람들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통일이 되면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북한 사람들은 심한 모욕감과 절망을 느끼는
방향으로 갈 것이 너무나 뻔하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남한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는 길은 남한 사람들에게 억지로 북한 사람들을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 북한 사회와 북한 역사와 북한
사람들이 이룩해온 것에 대해 아무런 존중도 하지 않으면서 말만 존중하라고 한다면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북한 사회와 북한 역사와 북한 사람들이
이룩해온 것에 아무런 존중할 것이 없는데 억지로 만들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이제 투명한 눈으로 북한
사회와 북한 역사를 포함한 한반도 역사를 바라볼 때가 되었으며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체제경쟁은 벌써 끝났다. 체제경쟁이
끝나면서 정치적인 경쟁도 끝났다. 정치경쟁이 끝났다는 이야기는 군사적인 위협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냥 군사적 위협으로 끝나는 것이지 더 이상
정치적인 위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의 종합 전력은 한미연합군에 비해 크게 뒤지고 한국군에 비해서도 많이 뒤지지만 만의 하나 북한이
남한에 군사적으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그들의 붕괴의 시작이다. 북한군이 한국군에 완승해서 한반도 전체를 군사적으로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현 정권이 남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성공 가능성은 1%도 없다. 북한의 현 정권이
남한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남한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과 종합적으로 크게 발전된 남한 사회가 북한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 전쟁과
사회정치적 격변으로 인한 기존 체제의 이완 등으로 오히려 북한 체제붕괴의 본격적인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군사적으로 완승하고 그냥
철수해버린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전쟁과 대규모의 남북 접촉 자체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미쳐서 북한체제의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이다.
따라서 남북간의 체제경쟁이나
정치적인 경쟁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정말 깨끗이 끝났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남북간의 체제경쟁이나 체제대결 혹은 이데올로기
대결의 관점에서 보던 것에서 벗어나 정말 객관적으로 남북관계나 남북의 역사, 그리고 북한의 역사와 현실을 바라볼 때가 되었다.
과거에는 남북문제나 남북대결이 주된
측면이었다면 지금은 남북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북한문제가 중심이 되었다. 현재 한국정부나 정당 기타 많은 사회단체들이 북한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남북문제 혹은 남북관계의 문제로 보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남북문제가 아니라 '북한문제'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북한에,
북한체제에 있는 것이지 남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북관계를 아무리 잘 가지려고 하여도 북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장기적으로 잘
발전될 수 없다. 이제 '남북대결'의 시대는 지나갔고 '북조선혁명'의 시대로 되었다. 남한은 이제 체제대결의 한 축으로서의 지위는 아주
약해졌고, 북한 인민에게 새로운 길의 모델을 제시하고 북한인민의 해방을 지원하는 '북조선혁명'의 '민주기지'로서의 지위가 중심적 지위로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남북대결'의 관점에서 보던 것을 지양해 '북조선혁명'의 관점, '북조선인민'의 관점에서 북한문제나 남북문제, 남북관계의 역사,
북한역사를 바라볼 때가 되었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앞으로
북한혁명이 성공한 이후 한국전쟁에 관한 재평가, 김일성 등의 항일빨치산활동의 재평가, 김일성의 일생에 관한 글(전기가 아닌 논문)을 꼭 쓰고
싶었다. 김일성의 일생에 관해서도 '김일성이 젊었을 때부터 나쁜 놈이었고 만주에서도 비적처럼 활동했다'고 말한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해서는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얻을 수 없다. 김일성을 타락시킨 주체적, 객관적 요인과 그 과정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러한 글들을 북한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쓰려고 했던 것은 혹시 이러한 글들이 북한혁명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일생에 관한 글은
김일성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김일성의 주위 사람들의 광범한 증언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북한혁명 성공 이전에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다른
글들은 북한혁명 성공 후에 쓰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혁명이 성공하고 난 후 김일성-김정일정권의 그 엄청난 비행과 만행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면 대중정서상 김일성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듯한 말이나 글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김일성과 김일성의 활동들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려면 김일성-김정일 정권에게 직접적으로 핍박받은 현 세대가 거의 일선에서 물러서는 최소한 50년 이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만약 글을 쓰려면 아무래도 북한혁명이 성공하기 이전에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북한혁명운동에 주는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긍정적인 영향도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북한 지식인들에게 우리의 객관적인 입장이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도 많다.
나는 김정일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대합작을 강력히 주장해왔다. 이러한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처음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이 글이 김정일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통일전선에 균열을 가져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합작은 서로의 입장이 모호한 상황에서 하는 것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는 조건에서 하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좌우통일전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사실적인 문제를 입증하는 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지면도 모자라고 연구시간도 불충분하며 그만큼 충분한 자료를
접하기도 어려우며 대부분의 중요한 사실적인 문제들은 이미 너무나 명확해져서 진지한 한국전쟁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주요 논객들의 다수가 입증한 것들을 모두 사실로서 인정하고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 시중에는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아주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특히 김영호 박사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과 박명림 박사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는 방대한 자료에 대한 치밀한 실증적 분석에 기초해서 쓰여진 한국전쟁에 관한 아주 훌륭한 책들이니 한국전쟁에 관한 사실적인 문제들이
의심스럽거나 사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이 위의 책들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논조를 담고 있지만 의견이 같은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밝히는 바이다.
2. 한국전쟁은 어떤 성격의
전쟁이었나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들어온 말 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들이 '동족상잔의 비극' 이라는 말과 '김일성의 적화야욕'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들에는 한국전쟁의 핵심적인 성격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한국전쟁이 본질적으로 내전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고, 둘째로
개전을 주도하고 개전에 주된 책임이 있는 것은 바로 김일성이라는 것이며, 셋째로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이런 문제가 여러 측면에서 불분명했었다. 남침설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었을 뿐 아니라 김일성은 전쟁에 대해
극히 소극적이고 신중했지만 처음부터 스탈린이 강력히 전쟁을 주장했다든지 아니면 허가이와 박헌영 등이 스탈린과 내통하여 조선노동당을 전쟁 분위기로
몰고 갔다든지 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수없이 많은 증거들로 분명해졌다.
1) 한국전쟁은
내전이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적인
문제들이 거의 밝혀진 조건에서 한국전쟁이 내전이었나 아니었나 하는 문제는 거의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이 자칫 공리공담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전쟁의 본질적 성격을 이해하는데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최소한 한 번은 서로의 관점을 분명히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전쟁이 내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서 크게 나누어 다음의 3가지 주장이 있다. 그 하나는 내전에서 출발해서 국제전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며, 또 하나는 국제전에서 출발해서
국제전으로 끝났다는 주장이며, 또 하나는 내전에서 출발해서 내전으로 끝났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 중에서 내전에서 출발해서 내전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은 내전, 좀 더 구체적으로
'외부세력이 개입된 내전'인 것이다. 내전이 국제전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한국전쟁은 그 발전과정에서 다른 나라 군대가 많이
개입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출발할 때도 내전이었고 끝날 때도 내전이었다. '앙골라 내전'을 외국군대가 많이 개입되어 있다고 해서 내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소련이나 쿠바, 남아공 등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전쟁을 벌였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앙골라 내전'과 관련해서만 전쟁을 벌였을
뿐이다. 미국과 중국도 역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전쟁을 벌였던 것이 아니라(맥아더는 이렇게 확대되기를 원했지만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단지
'한국 내전'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만 전쟁을 벌였을 뿐이다. 미국은 중국을 공격하지 않았고 중국은 한반도 밖에 있는 미군이나 미국인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은 그 출발에 있어서도 내전이었고 끝날 때도 내전으로 끝났다.
한국전쟁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성격이 내전이라는 것이 나의 일관된 주장이지만 한국전쟁은 단순히 내전으로서의 성격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은 단지 내전으로만
설명하기에는 한 층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좀 더 압축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과
반공세력 간의 권력다툼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발전과 확장
과정에서 생겨난 충돌
-국제 공산주의운동세력과 국제
반공세력 간의 전쟁
-국제 공산주의운동세력과 최강국인
미국 간의 전쟁
한국전쟁은 물론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국제반공세력(혹은 미국)의 충돌 혹은 대결'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이는 내전이라는 성격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내전은
'국제파시즘세력과 국제진보세력의 대결'의 성격이 대단히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전의 성격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에서 권력을 누가
잡느냐를 놓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나라에서 아무리 많은 외국인들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전일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도 한국에서 누가 전국적 범위에서 권력을 장악하느냐를 놓고 다툰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외국지원군이 참여하였고 그것이
군사력에서 주력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정치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원군의 지위에 머물렀을 뿐이며, 따라서 외국군의 참여 때문에
내전의 성격이 부정될 수는 없다.
김일성이 전쟁계획을 세우면서
스탈린와 협의했고 스탈린이 초기에는 이를 승인하지 않다가 나중에 이를 승인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증거자료로서 확실시되고 있다. 모택동은 전쟁
발발 이전에 이를 알고 있었고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보이지만, 전쟁 결정과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이
전쟁 결정과정에 스탈린이 개입했던 사실을 놓고 한국전쟁이 내전으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다. 또 미국과 소련 사이에 그어진
38선의 국제적 의미를 말하면서 38선은 국제적 합의이자 국제적 저지선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38선을 넘은 것 자체가 국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고 있다. 김영호씨는 위의 그의 책에서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할 때까지 38선을 미소 합의에 의해 그어진 양국의 세력권의
경계선으로 보았고, 북한이 이 미국의 봉쇄선을 넘을 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결정하면서 김일성의
무력통일 요구를 단순히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없고, 미소 냉전 대결에서 소련의 세계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을 추구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p132) 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스탈린의 지위와 소련이라는 국가의 최고권력자로서의 스탈린의 지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8선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 그어진 선이지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미국 사이에 합의된 분계선이 아니다. 38선을 넘었던 바로 그 세력은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세력, 더 확대해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국제 공산주의운동세력이었지 소련이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 마무리의 편의상 38선을 그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일이다. 우리 나라 정부가 수립되고 난 다음에 우리 나라 내부 문제는 우리 나라의
이승만 정부와 노동당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괴뢰가 아니며, 따라서 미국이 38선 이남 지역을 자기들의 세력권 운운할
수 있는 아무런 자격도 없으며 그것은 일종의 억지이다.
그 뿐 아니라 38선이나 베트남
17도선은 일종의 잠정선이다. 통일된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설정된 선에 불과하다. 그 양쪽 중 어느 일방 혹은 쌍방이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거부하면 그 순간부터 그 선은 전선으로 되는 것이다. 어느 한 국가 내에서 정부를 자칭하는 양 세력이 통일정부 구성을 거부하거나
실패하면 그 때부터 자동적으로 내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내전이기 때문에 선전포고도 필요 없다. 베트남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합의가 무산된
그 순간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내전이 시작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한국 통일정부 구성이 좌절된 48년부터 이미 실질적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다만 대대적인 공격은 베트남에서는 60년대 중반 미군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는 50년 인민군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미국이나 소련은 모두 38선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소련 혹은 스탈린은 38선을 인정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위배되고, 북한의 건국정신이나 김일성이
추구하는 혁명목표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38선을 무시함으로써 얄타회담으로 유럽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자기들이 보장받은 이권이 위협받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미소냉전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 확실시된 50년 초에 이르러서야 겨우 전쟁을 승인했다.
미국도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극히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38선을 저지선이라고 하면서도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통치지역으로 하는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의 헌법을 승인했다.
이는 38선 이북 지역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배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맥아더가 아주 자연스럽게 38선을 돌파한
데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38선 이북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북한을 한국 내의 한 반란단체로 보는 입장과 하나의
외부 국가로 보는 입장을 자기 편할 때마다 오락가락했다.
38선이 국제적인 성격을 전혀
지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것이 핵심은 아니었다. 38선이 설사 국제적인 합의(실제로는 미소 두 나라만의 합의였을 뿐이지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령 북쪽에 천도교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남쪽에 원불교 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서 내전을 벌였다면 이것이 국제적으로 확대되었을까? 얼핏
생각해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38선이 국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데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운동이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또한 반공운동도 역시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미소간의 냉전이 전세계적인 범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세력과 반공세력이 정면으로 맞붙은 한국 내전이 쉽게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 나라가 아니라
태국이나 필리핀이나 브라질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공산세력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전세가 전개되었다면 나는 미군의 개입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본다.
심지어 중국 내전이 50년에
일어났다면, 그래서 장개석의 국부군이 밀렸다면 이 역시 미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꽤 높았다고 본다. 그러나 중국 내전은 46년에 시작했고,
국부군이 밀리기 시작한 것도 48년이었고,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서냉전의 조짐은 확실히 보였으되 냉전이 확실한 지경까지 심화된 것은 아니었고,
전세가 한 번 역전된 이후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밀고가 49년 중반에는 이미 전세를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가 있었다. 중국 내전은 시기가
특수했고 인민해방군의 우세가 외부에 알려지고 나서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전세가 진전되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개입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서방에서는 중국이 워낙 넓은 데다 우수한 장비를 갖춘 장개석의 5백만 대군이 그렇게 빨리 밀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대륙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사실
대만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했었다. 일부 논자들은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부만이 사실이다. 한국에
파견한 군대를 제외하고도 중국공산당은 엄청나게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기간 중에 대만을 공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많이 양보해서 한국전쟁 때문에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만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치지
못했나? 장개석이 무서워서? 아니면 중국공산당이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쟁이 싫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치지 못한
것은, 대만을 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국제 정세도 많이 바뀌고 미국의 국내 정세도 많이 바뀌어서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져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미군이 중국 내전에 개입할 것을 우려해서 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군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겠노라고 공공연하게 밝히곤 했다. 미국의 트루만대통령은 당면한 중소회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50년 1월 5일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을 미국의 진심이라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설사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몇 달 후에 뒤집히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에 대만해협에 미군함대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을 감시하고
저지하였으며, 도발이 있을 때는 중국 내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아주 강력한 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미국은 50년 정세에서는
공산군과 연관되어 있는 어느 나라 내전에나 개입했을 것이다. 미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38선이 특별한 국제적 의미를 지녀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내전을 일으킨 당사자가 바로 공산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공산군은 모두 스탈린의 졸개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특히 북한 지역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불과 몇 년 전까지 소련군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미국
입장에서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미국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시
미국 국내 분위기가 대단히 험악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다른 서방 국가들이 한국전쟁에 군대까지 보내어 여기에 적극 동조한 것은
김일성 정권의 입장에서는 사실 억울한 측면이 많이 있다. 만주가 별도의 괴뢰국이었던 것과는 달리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영토였다.
그래서 서방국가들은 독일의 일부를 소련이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을 서방국가들이 점령한 것과 한반도 북부를 소련군이 점령하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를 미군이 점령한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로서는 대단히 논쟁적인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서방의 많은 나라들이 군대까지 보낸 것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의 독일과 우리
나라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서독이나 동독이나 모두 미군과 소련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독군이나 동독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통일되기 직전까지도 동독의 국방은 거의 소련이 담당했으며, 서독의 경우도 미국이 국방의 상당히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50년 당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또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독일 국민의 다수가 나찌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협조한 사람들로서
패전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조건에서 동독지역의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의 외곽세력은 특별한 저항 없이 쉽게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나찌와의 정치투쟁에서 승자의 입장에 있었고 다수의 독일국민들은 패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회가 역동적이지는 못하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소수만을
대표하든 그렇지 않든 별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어쨌든 오히려 이 때문에 서방에서는 더 적대적인 관점에서 동독의 문제를 바라보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가 패전국이냐 승전국이냐는 대단히 논쟁적인 문제를 제쳐놓고 보더라도 실제로 나라 전체가 해방된 분위기였고, 대단히 역동적인
에너지에 휩싸여 있었다. 독일과는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달랐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역동적인 분위기에서 피비린내나는 정치투쟁을 거치면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점차 우위를 점해가고 있었고, 북한에서는 커다란 정치투쟁이 없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직후의 역동적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빨아들이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것과 독일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아예 내전 자체가 일어날 수 없었다. 독일에서의 전쟁은 바로 미소전쟁 그 자체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내전이
미소의 대리전도 아니었다. 이승만정권이 미국의 괴뢰이고 김일성정권이 소련의 괴뢰라는 끊임없는 정치선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승만정권이나 김일성정권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상당히 독립성이 강했던 것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당시 특수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전쟁 문제를 미국이나 소련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적극적인 협조를 구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정치활동을 전개한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대단히 자주성이 강하다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그 전형적인 예 중의 하나이고 김일성의 경우에도 그러한 측면은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 사람은 반공주의의 길로, 한 사람은 공산주의의 길로 갔지만 두 사람 다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변함없이 지니고 있었고 독립심과 자주성이 대단히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베트남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을
주도하고 베트남전쟁과정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당시 국방장관 맥나라마는 몇 년 전에 있었던 베트남인과의 토론회에서
'미국은 북베트남정부를 소련의 괴뢰로 보았고 이것은 오류'였다고 시인하고, 그러나 '베트남인들이 미국이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도
역시 오해'라고 말했고, 베트남대표들은 계속해서 '미국이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는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합의점을 얻는 데는 실패한
일이 있었다. 나는 맥나라마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고 그의 솔직한 태도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전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도 역시 이러한 오해나 오류에 기초한 것일 가능성이 대단히 많다. 베트남에는 소련군 부대가 간 적조차 없다. 그런데도
미국이나 서구에서 북베트남정부를 소련의 괴뢰라고 보는 것을 보면 소련군이 상당 기간 주둔하면서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돌아간 북한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뭐가 있을까? 서구인들은 북한정부를 소련의 괴뢰라고 보았고 그랬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대단히 많은 한국의 내전에 군대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정부가 소련의 괴뢰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는 모두 한 통속이다', '소련은 사회주의 종주국이니 모든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한다',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은 모두 괴뢰라고 할 수 있다' 등등의 억지스런 논리로 보자면 굳이 괴뢰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베트남정부를 소련의 괴뢰로 본 것은 오류였다는 맥나라마의 진솔하고 진지한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의 북한 정부는 소련의 괴뢰가
아니었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실제로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보다 훨씬 더 소련으로부터 멀었던 것이다.
* 스탈린은
외세인가
스탈린이 한국전쟁의 개전 결정
과정이나 준비 과정에서 개입했다는 것은 뚜렷한 증거들이 충분히 나온 명백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 스탈린이 이렇게 개입한 것을 놓고
한국 전쟁에서의 외세 개입은 스탈린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자체의 성격이 '국제 공산주의운동세력과 국제 반공세력 혹은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외세가 개입했는가 안 했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이 문제에 대해 일단은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외세로 볼 수
있는 측면과 외세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동시에 있는데 나는 주된 측면이 외세로 볼 수 없는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스탈린을 외세로 볼 수 있는
측면이라는 것은 스탈린이 소련이라는 실재하는 국가의 최고권력자라는 점 때문이고, 스탈린을 외세로 볼 수 없는 측면이라는 것은 스탈린은 당시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지도자였고, 동시에 조선공산당(혹은 조선노동당)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당시 단순히 상징적 지도자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운동에서 실질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했다. 조선노동당의 크고 작은 대회와 회의에서
늘 '스탈린 만세'가 외쳐졌고 중요한 전략, 전술, 노선, 정책은 스탈린의 직간접적인 지도하에서 결정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스탈린의
국적이 소련이라고 해서 그냥 외세로 봐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나 레닌의 국적이 어느 나라냐에 따라 그 사람들이 외세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았던
것과 같은 논리가 스탈린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는 물론 스탈린에게까지만 적용된 것이었고, 또 나중에 스탈린이 국제 공산주의운동 전략에서 지나치게
소련 중심적 정책을 취했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중국공산당이나 조선노동당을 비롯한 일부 공산당들에서 자기들이
마치 처음부터 스탈린을 외세로 보고 있었던 것처럼 분위기를 잡지만 이것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당시의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을
보던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스탈린을 보았고 따라서 스탈린의 국적을 기준으로 해서 외세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당시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성격과
논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부터 나오는 잘못된 주장이다.
2)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남한을
공산화시키기 위한 전쟁을 결심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무수히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다. 북한측에서는 예전부터 남침론이니 북침론이니 하는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한의 일각에는 북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전쟁의 원인을 찾는데 과거의 봉건체제나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미소냉전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고, 미국의 전쟁유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쐐기전략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서울지역점령 제한전론도 있고, 그
외에도 압력분산설(소련이 미국의 유럽에서의 군사적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미국의 결의 및 저항력
실험설(스탈린이 세계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이전에 미국과 서방의 저항 결의 수준과 저항력을 실험해보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미일조약
견제설(미국이 소련을 배제한 채 일본과 단독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그리고 이
글에서 뒤에 자세히 소개할 스탈린의 롤백이론 등 무수히 많은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많은 주장들에 대해 일일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비판하려면 너무나 글이 길어질 것이므로 모두 생략하려고 한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위에 소개한 김영호씨와 박명림씨의 책에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위의 각종 주장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봉건시대나 일제시대의 사회체제와도 연관이 있고 소련의 각종 전략이나 미국의 각종 전략과도
연관이 있다. 그러나 연관이 있다는 것과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김일성이 전쟁을
결심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직접적 원인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서구의 학자들이 이것을 무시하고
소련의 전략이나 미국의 전략이나 국제정세 만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석한 주된 이유는 북한이라는 조그만 나라와 김일성을 무시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김일성과 스탈린 사이의 관계를 오해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슨 일에도 항상 거창한 배경과 사회구조적 근원을 따지기 좋아하는
습성 때문이기도 하고, 주체의 의지나 결심 따위를 소홀히 하는 서구 사회과학의 결함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무슨 일에나 사회구조적 환경이 있고
그 배경이 되는 국제정세나 국내정세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사회구조적 환경이 가장 주요하고 직접적인 원인인지, 국제정세가 가장 주요하고 직접적인 원인인지 미국의 전략 혹은 소련의 전략이 가장
주요하고 직접적인 원인인지, 아니면 김일성의 의지와 전략이 가장 주요하고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엄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 사회구조적 환경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가장 주요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일일이 따져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 보자.
먼저 한국전쟁이 미소냉전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주장이다. 물론 냉전이 한국전쟁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되는 분단상황에 일정 정도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라든지 남북동시총선거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든지 남북한에 각각 별도의 정부가 수립된 것 등은 냉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냉전이 48년
상황, 다시 말해 분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은 한국전쟁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은 한국전쟁의 중요한 원인이기는 했지만 직접적 원인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전쟁의 필요조건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에는 수많은 필요조건이 있었다. 김일성의 전쟁의지도 그 필요조건의 하나였으며 그 필요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했는지를 따지기는 사실
불가능하다(한국전쟁의 원인 중에서 분단이 더 중요한지 김일성의 의지가 더 중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서로 범주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의지와 결심과 추진이 없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필요조건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충분조건이기도 했다.
90년대 초 한 때 진보학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전쟁유도론에 관해 한 번 살펴보자.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미국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반공주의가 급격히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미국 국민과 정부 내에 공산화의 확산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냉전은 이미 상당히 고조되었고 미국은 강력히 반격할 곳을 찾고 있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그 첫째 타격상대로 선정된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미국이
전쟁을 유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이 북한의 남침기도를 알고 있었으면서 그냥 방치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남침기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하기는 힘들다. 미군을 다시 진주시킬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민족감정이 강한 한국인인데 영락없는 민족해방전쟁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 밖으로 제외한 애치슨라인과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가장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미군이 적시에 개입하도록
하는 데 공이 컸던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상반된 듯한 두 모습을 비교하면서 이것이 전쟁유도론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애치슨라인은
미국의 강경한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애치슨의 '도서방위선' 개념은 49년 3월 1일 맥아더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미대륙의
서부해안이 미국의 방위선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의 결과 태평양이 적에 의한 미국 공격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미국의
방위선은 아시아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일련의 도서들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강경한 전략개념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애치슨이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미국의
도서방위선에 한반도를 제외해놓은 것은 이승만이 김일성을 상대로 버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 건지, 아니면 소련 및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반도를 방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본 것인지, 아니면 일부에서 말하듯이 즉흥연설을 했기 때문에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한반도가 도서가 아니기 때문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애치슨 연설에서 한반도 문제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었으며, 또
온건한 노선을 표명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애치슨이 연설을 한 50년 1월과 한국전쟁이 터졌던 6월은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50년 6월쯤
되면 초강경 분위기가 미 정부와 의회 전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애치슨의 입장변화도 역시 미국 내부의 그러한 분위기 변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지만 설사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에서는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 주되고 핵심적인 측면이며, 미국이 전쟁을
유도한 것은 부차적인 측면이다. 노동당이나 김일성과 미국과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였고, 이러한 관계에서는 김일성이 남침했다고 하는
사실과 미국이 한국의 내전에 개입하여 인민군을 상대로 싸웠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전쟁을 유도했고 안했고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느니 조작하지 않았다느니하는 논쟁이 많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이 남의 나라 내전에 공연히 개입했다는 것이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이며, 설사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통킹만 사건이 완전 조작이든 공격을 유도한 것이든 아니면 유도조차 없었든 그 어떤 경우라도 베트남전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영향을 받지 않듯이 한국전쟁의 경우에도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든 안 했든 한국전쟁의 본질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김일성 혹은 조선노동당이
'조선혁명완수'를 위해 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소위 '김일성의 적화 야욕'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에서는 이러한 평범한 이유 이외에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미국이 어떤 치밀하고 거대한 음모를 꾸몄거나 아니면 스탈린의 치밀한 음모와 계획이 있었거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참으로 재미있고
역사적 진실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지만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증거들은 이러한 가설들을 입증시켜
주기보다는 오히려 전쟁이 김일성에 의해 일관되고 강력하게 주장되고 추구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한 것을
놓고 궁극적인 결정권은 스탈린이 갖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당시 스탈린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스탈린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승인한 것을 놓고 전쟁을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전쟁에 관한 주된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다는 식으로 비약해서는 안 된다. 베트남에서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호치민이 스탈린과 주요
전략전술을 협의했다고 해서 이를 주도한 사람이 스탈린이고, 따라서 그 전쟁의 책임이나 공로가 1차적으로 스탈린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토론은 아래 '스탈린의 롤백이론'에서 하자.
"북한이 한반도의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남침이 없었을 것"이라는 매트레이(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85)교수의 주장이나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은 북한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북한에 의해 주도되었고 스탈린에 의해
동의되었다"는 번스타인(Barton Bernstein, The Week We Went to War : American Intervention
in the Korean Civil War, 1977)교수의 주장은 오래 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해 매우 주목할
만하다.
* '스탈린의
롤백이론'
김영호씨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에서 책 내용의 대부분을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입증하는 데 할애했다. 나는 김영호씨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제시한 모든 자료들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그의 주장을 신뢰하며 한국전쟁을 보는 많은 주요 관점에서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책의 주요 타이틀로 제시한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롤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명제에 동의할 수 없다.
먼저 그의 주장에 대해 간략하게 한
번 살펴보자. 그는 "스탈린이 중국공산혁명 이후 새롭게 재편되는 아시아의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미국과의 냉전
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하여 한국을 미국의 세력권으로부터 제거하려는 롤백전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은 발발했고, 이러한 스탈린의
롤백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38선을 넘어 북한을 소련의
세력권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해 롤백전략을 추구했다. 결국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각각 한 번씩의 롤백을 교환했고 이 과정에서 두 초강대국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한국전쟁의 강도가 그만큼 격렬했던 것이다."(위의 책 p15)라고 하고 있다.
먼저 약간은 생소해 보이는
'롤백(rollback)'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그는 "롤백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여러 가지 수단들을 동원하여 몰아내거나 격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특정 지역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해 가장
흔히 선택하는 수단들은 직접 군사력을 동원하거나 제 3의 국가에게 무기를 지원하여 대리전쟁을 수행하게 하거나 이 두 가지가 복합된 형태가 있을
수 있다."라고 하고 있는데 롤백전략을 봉쇄전략과 대비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봉쇄전략은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소련과 미국의 세력권이 만나는 경계선 내에 소련을 묶어두고 인내심을 갖고 봉쇄정책을 추구하면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붕괴하리라는 것이었고, 롤백전략은 이러한 경계선 너머까지 가서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국가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대비되는 두 개의 대표적인 대외정책이며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소련에 적용시켜 소련이 롤백전략을 사용했다고 김영호씨는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며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전략적 목적들을 추구하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은 일차적으로 북한에 의해 남한을 완전히
적화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만약 이것만이 롤백전략의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스탈린은 김일성의 목적인 한반도 무력통일을 달성시켜 주기 위해
한국전쟁을 승인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한반도 적화의 결과가 미소 냉전 대결이라는 세계적 차원에서 미칠 영향력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반도 전체의 적화는 소련이 제정 러시아 당시부터 이 지역에서 얻고자 했던 부동항의 확보를 가능케 할 것이고, 태평양은 더
이상 미국이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조용한 호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스탈린이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전략적 목적을 관철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최근에 공개된 소련 문서들은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어떠한
정치적 목적들을 달성하고자 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을 통하여 일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당시 일본의
대미일변도 정책을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한 대규모의 침투와 교란 행위를 감행할 수 있는 교두보를 한반도에 마련하고자 했다.... 나아가 스탈린은
롤백전략을 통하여 남한을 적화시킴으로써 유엔과 함께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위신에 일대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롤백전략을 추구하면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을 중국을 동원하여 저지하고자 했고,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중공군을 패배시키고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스탈린은 중소방위조약을 발동하여 미국을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여들여 미국을
약화시키고 냉전 대결에서 소련의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시도했다."(위의 책 p19-20)라고 하고 있다.
김영호씨는 위의 책 전체에 걸쳐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증명하려고 했는데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 '스탈린의 롤백이론'
비판
①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치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
혹은 세계적 범위에서 볼 때 사회주의권을 확대하는 것, 혹은 그들이 소위 '국제반동세력의 우두머리'라고 보았던 미국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이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고, 그들은 다만 스탈린의 계략에 속아넘어가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들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이나 입장이나 이익에 완전히 부합하며 스탈린과 김일성은 다만 그것을 대변하고 지도한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것이 일관되게 무시되었다.
②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성향과 행동양식에 대해 엄밀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오랫동안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이들의 중국공산당 당적은 소련 관할지역에 있을 때도, 소련군 편재 하에 들어갔을 때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이들은
중국공산당원 신분으로 해방을 맞았다), 일관되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대단히 강했다. 이들의 중국공산당에서의 경험을 보면 코민테른에 추종하는 성향을
지닌 왕명 일파 및 그들의 노선에 대해 좋지 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과 왕명 일파와 대립해온 모택동의 노선에 대체로 지지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왕명 등이 중국공산당을 주도하던 20년대 말, 30년대 초반의 극좌적인 노선에 대해 이들은 좋지 않게 생각하고
거리를 두었으며, 이 시기에 쓰여진 김일성의 글들을 보거나 중국공산당 당회의에서의 이들의 발언, 이 시기의 이들의 경험이나 행태 등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이들의 성향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이 대부분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나는 86년에 평양방송에서 하는
'김일성 방송대학'의 '김일성 혁명역사 강좌'를 처음부터 끝까지 10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었는데 그 강의를 담당한 교수는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원으로 있었다는 것, 당의 말단간부로 있었다는 것, 40년대에는 소련 영내로 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부인하지도
않았고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이를 알 수 있도록 강의했다. 예를 들어 30년대 중반 민생단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당회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당의 상급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중국인으로...... 당회의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유창한 중국어로
이들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논박하였으며....."라고 했는데 당의 상급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두 중국인이라는 것에서 김일성이 당시 소속되어 있던
당이 중국공산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김일성이 당의 말단간부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20년대와 30년대의 김일성의 활동에
관해서는 매년 어느 지역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가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지만, 40년대에 들어가면 무려 5년 동안이나 어느 지역에 있었는가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여기서 청취자들은 최소 수준의 추리력만 가지고서도 김일성이 이 시기에 소련 영토에 있었다는 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북한의 영화나 소설이나 정치선전
등에서는 왜곡이 대단히 심하지만 학술이론이나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있어서는 생각보다 왜곡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김일성의 글이나 연설문에서도
'스딸린 대원수 만세'와 같은 성격의 말을 삭제한다든지 새로운 노선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을 삭제한다든지 하는 어느 공산당에나 있는 정도의 첨삭을
거쳤을 뿐 없는 문건을 있는 것처럼 조작한다든지 내용 전체를 완전히 바꾸는 일과 같은 것은 초기의 조선노동당 분위기 속에서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고, 또 김일성의 자존심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50년대 말 60년대 초,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이념투쟁이 심해졌을 때 대부분의 나라 공산당은 소련 편을 들었지만 조선노동당은 중국 편을 들었다는 것도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소련이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성향으로 놓고 볼 때
설사 스탈린이 전쟁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스탈린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불과 몇 년 후에 있을 스탈린의 사망 후에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라도 스탈린이 묵인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③ 스탈린이 전쟁을 반대하다가
승인한 것을 중시하면서, 그리고 전쟁을 반대한 시기와 승인한 시기를 대비하면서 여기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고 보는 것은 하나의 가설로
성립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한 시기는 미소가 냉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직후, 다시 말해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고려해서 전쟁을 막을 명분도 필요도 없어진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이러한 조건에서 전쟁을 승인한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면 스탈린이 전쟁을 반대한 시기에는 미소냉전이 시작되지 않았나? 물론 그것은 아니다.
사실상 미소냉전은 벌써 시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도가 많이 다른 것이었으며, 그 뿐 아니라 그것이 냉전으로 전개될지 열전으로 전개될지
스탈린도 쉽게 예측하기 힘든 것이었다. 더군다나 미국의 구체적인 전략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이 동유럽에서 적대적인
군사행동을 할지 아닐지 중국내전에 개입할지 아닐지 등등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도 4년간의 중국 내전이 거의 끝나 가는, 한국전쟁 승인이 나기 직전인 50년 1월에 가서였다. 물론 이 중국내전 불개입정책도 얼마 못 가 또
뒤집힌다. 이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조건에서 스탈린은 한국에서의 전쟁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비약적인 성과, 혹은 소련의
이익을 훼손할까봐, 특히 유럽에서의 국제공산주의운동 혹은 소련의 성과를 손상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했을 때에는
유럽의 정세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중국의 상황도 비교적 분명해졌으며,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미국이 소련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한층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전쟁을 승인한 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것이지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증거로 될 수는
없다.
④ 스탈린은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전쟁의 의도가 달랐고,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이용당한 꼴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예견은 달라도 전쟁의 목적과 방향, 기본 전략은 같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중국
내전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고 방침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첫째 장개석이 열세로 돌아선 48년은 아직 국제정세의 여러 가지 변화 여지가 남아 있어
중국내전 개입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쉽게 결심할 수 없었고, 둘째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문제가 미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으며, 셋째 우수한 장비를 갖춘 장개석 국부군의 500만 대군이 그렇게 빨리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시기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김일성도 교훈을 얻었고
미국도 교훈을 얻었다. 김일성은 빠른 속도로 적을 치면 외부세력이 개입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군은
대단히 강력하기 때문에 머뭇머뭇하다가는 반격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배웠다. 김일성이 '내전'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고려와 연구가 없었다. 그것은 첫째, 미국은 자신의 영향력 범위 내 혹은 패권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되는 국가라면 설사
내전이라 하더라도 공산세력이 개입되어 있으면 무조건 군대를 보낸다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 원칙에 대한 충분한 예견과 연구가 없었다. 둘째,
50년은 그 이전과는 달리 전세계적 범위에서 냉전이 이미 심각한 상황에 와 있었고, 따라서 중국 내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 48년은 47년과 많이 달랐고, 49년은 48년과 또 많이 달랐으며, 50년은 49년과도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는데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바뀌는 국제정세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 기초되지 않았다. 셋째, 미국이 중국 내전에서 아시아에서 공산세력과의 내전이 있을 때
매우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해야 효과가 있다는 완전히 새로운 교훈을 얻었고 이를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했다. 넷째, 한국전쟁
직전 1∼2년 동안, 특히 중국혁명 성공 이후 미국의 국내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 있었고, 특히 중국 내전에 미군을 보내지 말자고 주장한 사람들의
발언권이 급격하게 약화되어서(이 시기는 '중국에서의 공산세력의 승리는 미국 내부의 빨갱이 때문이다'라는 등의 매카시즘 초기의 주장들이 급격하게
확산되던 때였다) 한국의 내전에 군대를 파견하는 데 별다른 내부 논란이 필요 없었는데, 김일성은 미국의 특성상 한국 내전에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논란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일부 논자들은 스탈린이 이러한
것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스탈린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는 것이라고 본다. 스탈린은 물론 세계 도처의 문제들에
대해 늘 보고를 받고 분석을 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해서는 김일성보다는 더 잘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첫째
문제와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사전에 잘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든 미군이 개입하려고 할 가능성이 많이 있다는
것은 예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셋째 문제와 넷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스탈린도 미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개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사회의 특성상 미군 투입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봤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스탈린도 우세한
인민군이 미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 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 미군이 개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을 것이다. 김일성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고, 스탈린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은 많이 있지만 속전속결로 끝내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들을 종합하면 그것이 가장 실상에 가까운 것 같다. 이처럼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군개입 가능성을 예상하는 데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라고는 볼 수 없다. 스탈린도 역시 김일성처럼 전쟁의 성공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보았을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승만과 관련된
서적들을 보면서 '이렇게 국제정세를 읽는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있나' 하고 탄복한 적이 있다. 이승만은 이 점에 있어서는 정말 탁월하다.
김일성은 조직력, 친화력, 용인술, 무력, 대중장악력 등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이승만보다 훨씬 뛰어났고 46년 말쯤이면 이미 이승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힘을 축적하지만 그 이후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한반도에서의 권력을 누가 잡느냐를 놓고
벌인 이승만과의 한 판 승부에서 무승부 혹은 판정패를 기록했다. 이를 보면 그 시기에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⑤ 김영호씨는 이 책에서 "한반도
전체의 적화는 소련이 제정 러시아 당시부터 이 지역에서 얻고자 했던 부동항의 확보를 가능케 할 것"(위의 책 p20)이라는 고루한 반공주의자들이
해오던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글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한반도 전체의 적화'와 '소련의 부동항'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한반도 전체가 적화'되지 않아도 이북 지역에는 얼마든지 부동항이 있다. 이북 지역에 있는 모든 항구는 부동항이다. 북한이 소련에 항구를 주지
않은 것은 김일성의 성향이나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성향 때문이지 이것이 대체 '한반도 전체의 적화'와 무슨 관계가 있나?
김영호씨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대단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논지를 전개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엉뚱한 주장을 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김영호씨가 혹시 반공주의의 입장에서 혹은
반공주의의 영향하에서 객관성을 잃고 연구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개전과 관련한 스탈린의
역할로서 확실한 것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일관되고 강력한 남침 주장을 수용했다는 것과 중국이 이를 뒷받침하도록 했다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특이할 것도 없고 특별히 대단한 것도 없다. 김일성이 주장하는 '조선혁명의 완성'은 전세계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지지한
것이고, 당시 조선노동당의 조직력이나 무력으로 볼 때 충분히 성공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이 비범하고 대단히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범한 생각 때문에 전쟁을 승인할 리는 없다? 글쎄... 역사는 사실로만 말한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을 때는 추측도 필요하지만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으로 끝나야지 그 추측으로 전쟁의 핵심성격을 규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스탈린이 김일성의 무력남침론을 이용하여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려 했다든지 일본을 침략하려고 했다든지 미국을 중국 안으로 끌어들여 진퇴양난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도록 하려 했다든지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냥 계획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전쟁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미국이 덫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중국을 침략하는 기회로 삼는다든지 소련과 전면전을 벌이는 기회로 삼는다든지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전쟁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고 그들이 무슨 계획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든 것이 확실한 증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명확한 것은 김일성이 조선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개입했고, 중국이
조선인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명확한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논의를 전개해가야 하며 여러 가지 가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러한 가설들의 증명력이 출발점보다 강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3)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베트남전쟁과도 약간의 차이는 있다. 베트남전쟁도 물론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나
미국에 맞섰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범한 대중의 반외세의식이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은 그 본질로 보면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이 약했지만 그 전개과정을 놓고 보면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 본질로 보나 전개과정으로 보나 '민족해방전쟁'의 요소는 아주 약하다.
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물론
속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요구가 앞서며, 소련이나 스탈린의 경우에도 역시 '사회주의혁명을
확산'한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요구가 앞섰다. 그리고 중국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 이웃 동지나라를 지원'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한다는 순수한
이데올로기적인 요구가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한국전쟁의
성격이 이데올로기전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지, 한국전쟁의 책임을 공산주의나 반공주의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결단코 반대한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설사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묻더라도 관련 당사자들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지, 공산주의나 반공주의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공산주의 흑서'에서 공산주의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해서 목숨을 잃은 수천만의 사람들의 죽음에서 공산주의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나는 적절한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공산주의'로 표현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적극 반대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연히 공산주의운동과 관련된 참사들에 관련이 있으며 책임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주된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적 진실과도 부합하지 않으며 올바른 태도도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수 백만 명, 간접적으로 목숨을 잃거나 그 와중에 굶어죽거나 자살한 사람들을 포함하면 수 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것을 공산주의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사태에 직접 책임이 있는 모택동, 4인방, 임표 등을 너무 많이 봐주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순간 이들의 죄악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붙어있는 그 순간까지 순진한
청소년들을 선동하여 대학살극을 일으킨 모택동, 4인방, 임표 등의 엄청난 죄악을 결코 용서할 수 없거니와 공산주의에 책임을 전가하여 대충
얼버무리려고 하는 기도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백만에 달하는 무고한 캄보디아 인민을 무참히 학살한 폴포트와 크메르루즈의 죄악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제를 객관적으로 일관성 있게
보아야 한다. 서구인들과 중국 문제에 관해 대화하다 보면 적지 않은 사람이, 천안문사태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공산주의자 등소평의 만행'처럼
이야기하다가 개혁개방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비공산주의자 혹은 반공주의자 등소평의 업적'처럼 들리도록 이야기한다. 이게 뭔가?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때로부터 20∼30년 동안은 거의 이념적인 변화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투철한 전형적 공산주의자이다.
내가 전형적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꼭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로만 쓰인 것이 아니다. 그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전형적 공산주의자였으며
이념적 기복이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의미에서의
공산주의는 이제 과거의 이념이 되었다. 중국에서도 문화대혁명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개인독재가 오래 계속 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하나 둘 사라졌고, 지금은 공산주의자는커녕 공산주의 이념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김정일이 매스컴을 통해서는 이념에 관심이 있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김정일 스스로가 이념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김정일 주위에
몰려드는 무리들이 또 그러했고,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사회가 정체되어 탈이념화되고 있던 북한사회에 탈이념화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내가 북한에 갔을 때에도 직업적으로
이념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어떤 논자는 북한혁명이 일어날 때, 공산주의이념에 투철한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끝까지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라고 말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충성하라고 세뇌교육을 받아서 그 영향으로 저항할 사람은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해서 저항할 사람은 거의 없다. 공산주의자가 몇 백명 혹은 몇 천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공산주의자들이
오히려 대부분 지금의 김정일체제에 실망해서 현 북한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 남북문제나 북한문제나 이제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졌다. 이제 모든 것이 질적으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러나 50년 전 그 시절은 지금과
달랐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 문제였다. 남한 사람이냐 북한 사람이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간주한
인민군 포로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미군 몰래 석방해버리기까지 했다. 이승만에게 이들의 출신지역이 어딘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인민군 출신인지
의용군 출신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오직 이것만이 중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3. 한국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나
한국전쟁은 그 자체가 비극적이었고
또 결과가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질 누군가를 찾고 싶어한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고, 또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스탈린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고, 또 남의 나라 내전에 공연히 개입하여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희생을 확대시킨 미국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고, 또 역시 같은 이유에서 중국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 특히 38선을 제안한 미국과 이를 받아들인 소련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다. 심지어 우리 나라를 식민지배한 일본에게까지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식이라면 한국전쟁의
책임이 중국 내전에서 패배한 장개석에게도 있다고 할 사람까지 나오지 않을까.
사실 한국전쟁에 직접 관련된
당사자들 중에 한국전쟁에 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형식논리적인 책임이 아니라 정말 한국전쟁 때문에
역사적인 비난을 받아야 할 국가, 정당, 사람이 있을까?
한국전쟁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앞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객관적으로 평가받기는 힘들 것이다. 나도 사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 수백만의 사람들, 특히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들과 포로들을 생각하면 끓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냉정하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이것을 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압도적인 조건 속에서, 특히 앞으로 북한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의 그 참혹한 실상이 낱낱이 밝혀져, 김일성에 대한 조금의 우호적인 견해도 큰 용기를 내지 않으면 하기 힘들게 될 조건
속에서도 한국전쟁 개전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기만 하는 분위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한국전쟁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먼저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수많은 증거로서 명확해졌다. 그리고 전쟁 결정 과정에서 김일성이 주도적이고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명확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전쟁에서 생긴 모든 비극의 책임을 김일성에게 떠넘기는 것이 적절한가? 한국전쟁을 일으킨 데는 김일성과 조선노동당
지도부, 스탈린 등은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굳이 그 책임을 묻는다면 그 중에서도 김일성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책임을 그 누구에게 묻는다는 것이 그 전쟁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라면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1945년 이후의 중국 상황에서 내전이
거의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듯이 당시의 우리 나라 상황에서 내전은 필연은 아니었지만 피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평화통일이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분단상황을 계속 지속한다는 것도 당시에는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중국 내전으로 인해 생긴 천수백만
명의 희생과 참화에 대한 책임을 전쟁을 일으킨 장개석에게만 묻는 사람이 별로 없듯이,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생긴 그 엄청난 희생과
참화에 대한 책임을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게만 혹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만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약 한국전쟁이 남한측이나 북한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조기에 끝났을 때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했을까? 중국의 제 2차 국공내전은 한국전쟁에 비해 그 희생자가 몇
배나 되었지만 이것이 잘못된 전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중국공산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한국전쟁도 남한측이나
북한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면 한국전쟁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소수에 머물렀을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면서도 분단상태가 유지된 채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동기나 유발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성이나 조선노동당이 한국전쟁의 그러한 결과를 바라고 일으킨
전쟁도 아니고 그 결과가 예측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남한, 북한, 미국, 소련, 중국의 내부 정책이나 전력 등을 모두 정확하게 사전에 알 수
있는 어떤 신이 있다고 할 때 이 신이 한국전쟁의 그러한 결과를 예측할 가능성은 10% 혹은 그 미만이라고 본다. 한국전쟁은 국지전이나
국경에서만 크게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대규모 진공을 감행하는 전면전이었다. 이러한 전쟁에서 이긴 쪽도 진 쪽도 없이 그냥 끝날 가능성은 낮다.
이러한 전쟁에서 국경이 원상회복된 경우는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어느 한 쪽이 항복한 후에 승자가 그냥 철수하여 국경이 원상회복된 것이다.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은 남한 지역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며 다른 의도나 계획이 있었다고 볼 수 없으며, 이승만이나 트루만이나
맥아더는 북한의 완전 점령을 추구했다. 이러한 전쟁이 미국 국내 분위기 변화, 미국의 정권교체, 전쟁 당사자들의 특히 중국의 전쟁의지 약화,
스탈린의 사망 등으로 정세가 바뀌어 승패를 확정짓지 못하고 중간에 끝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끝난 것에 대한 책임을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아니면 승패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이승만이나 스탈린이 주장했던 것처럼 끝까지 싸움을 해야 했을까?
김일성에게는 전쟁을 일으킨 책임 뿐
아니라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책임이 있다. 사실 전쟁을 일으킨 책임보다 이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전쟁의 희생이
어마어마하게 확대된 것은 미군이 개입했고 그 후에 중국군이 여기에 가세했기 때문이므로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김일성의 책임이
크다. 사실 김일성은 운이 나빴다. 사실 억울한 측면도 있다. 49년 초쯤에 전쟁 결정이 나고 49년 중후반쯤에 전쟁을 개시했다면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도 많이 있었다. 그 때도 이미 미국의 국내 분위기가 상당히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기는 했지만 아주 급격하게 우경화된 것은
아무래도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건국을 선포한 이후이다. 그 이전 혹은 그 때쯤이라도 전쟁을 했다면 미군이 개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많았다. 사실 그 이전부터 김일성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는 아직 동유럽의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한국전쟁 때문에
유럽에서의 소련의 이권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이 여러 차례 김일성을 말린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한국전쟁 개시 당시,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과소평가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은 김일성이기 때문에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면 75년 북베트남 지도부에서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아주 치밀하게 분석하고 나서 전면적인 진공을 시작한 것처럼 미군의 개입 가능성이 가장 적은 시기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을까? 물론 김일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책임을
추궁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고 이 논쟁을 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참으로 답변이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한국전쟁의 책임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이처럼 매우 복잡하여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김일성 자신은 한국전쟁이
부당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박명림씨는 그의 글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서 "김일성은 이 전쟁이 침략전쟁임을 알았기 때문에 북침임을
위장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그것이 부당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을 여전히 북침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 p216)라고 말했는데 내가 볼 때 이것은 사실과는 좀 다르다. '침략전쟁'이라는 어떻게 보면 좀 추상적일 수
있는 표현은 일단 논외로 하자.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북한은 한국전쟁이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데 아무런 관심과 열의가 없다. 그리고 전쟁 초기에
북침임을 위장했던 것은 '이 전쟁이 침략전쟁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점에 있어서 김일성은 국제정세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너무 소홀했고 또 너무 순진했다. 당시 미군이 참전한 것은 북침이냐
남침이냐 하는 것과 거의 상관이 없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에서는 북침이고 남침이고 간에 이승만이 밀린다면 언제든지 전쟁에 참여했을
것이다.
미군이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여
'북침'임을 주장하는 실익이 별로 없어진 이후에 북측에서는 '북침'을 주장하는 데 별로 관심과 열의가 없었다. 가령 한국전쟁이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미국이나 남한과 같은 정치체제에서는 '북침'이 그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주장한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실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 같은 정치체제에서는 이런 것이 정치적 실익이 있다는 것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을 공식적으로 뒤집음으로써 김일성의 위신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86년 당시
남침론이냐 북침론이냐 하는 문제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86년에 매일 라디오로 듣고 있었던 평양방송의 방송대학 '김일성혁명역사강좌'에서
한국전쟁에 관해 강의할 시간이 되어 나는 남침론, 북침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줄 것을 잔뜩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남조선
괴뢰의 도발로 전쟁이 일어났다."라는 한 마디 밖에 없었다. 대전전투와 같은 개별전투에 대한 설명을 위해 1교시 전체를 할당하고 전쟁 초기의
김일성의 전략에 관해서도 1교시 전체를 할당하여 설명할 정도였는데 남침론, 북침론과 같은 대단히 중요하고 논쟁적인 문제에 관해 설명이 없다니?
그리고 전쟁이 개시된 직후에 김일성이 어떤 치밀하고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갖고 있었는가에 대해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다니? 나는 이 때
북한측이 한국전쟁이 북침전쟁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침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강한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88년 친북적이거나 중립적인 일본 역사학자들이 한국전쟁 개전 초기 상황에 관해 자세하게 서술해 놓은 글들을
읽으면서 한국전쟁이 남침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북한의 지난 50여년 동안의 실제 분위기는, 한국전쟁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보다
오히려 '김일성이 남조선을 해방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고 남조선을 해방하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하는' 분위기였다.
박명림씨의 말처럼 '남조선을 해방하는 전쟁이 부당한 전쟁'이라는 것은 북한의 실제 분위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지난 91년,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우리가 묵고 있었던 초대소 식당에는 대단히 큰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 그림에는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크게 그려져
남한을 향해 손을 가리키고 있고, 그 앞에는 어떻게 보면 용맹한 또 어떻게 보면 험악한 표정의 군인들이 한 손은 총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높이
치켜들고 남한을 향해 돌진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 옆에는 탱크 몇 대가 커다란 포신을 남한을 향해 내밀고 있었다. 내가 그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까 담당 부장(장관급)이 "남조선에서 온 동지들이 이 그림을 보고 자꾸 남침하려는 의도를 표현한 것 아니냐고 말한단 말이오.
나 원 참. 허허허."라고 말했다. 마지막에 붙인 '나 원 참. 허허허.'는 남한 사람들과 정서가 달라 같이 일 못해먹겠다는 식의 분위기가 들어
있는 표현이었다. 전쟁과 관련한 북한의 분위기를 이미 알고 있는 나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감춰야 하는 일부 외부
손님들을 제외하고는 '남조선을 해방하는 전쟁은 언제나 정당하고 남조선을 해방하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해야' 하는 분위기를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탈북자들의 일관된 증언과도 일치한다. 다시 말해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부당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여전히 북침이라고 주장했다."는 박명림씨의 주장은 북한의 실제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박명림씨는 또 이 글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민족을 결합시키려는 의지가 강력하였는데, 그러나 의지 대신에 강조되어야 할 것은 사회 전체의 필요이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인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전쟁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으며 필요하거나 적합하지는 더욱 않았다.
당시에 전쟁은 사회적 필요는 결코 아니었다. 이 전쟁을 하려한 결정은 북한 공산지도부의 전형적인 유토피아니즘과 낭만주의의 산물이었다. 한국전쟁은
그러한 단절적 사회공학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위의 책 p220-221)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를
추구한 것을 놓고 유토피아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발전과 관련하여 일관되게 급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당시의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은 문제가 다르다. 전쟁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가장 효율적이고 적절한 전술을 채택할
뿐이다. 다시 말해 10년이고 20년이고 무한정 기다리는 전술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할 수도 있고, 며칠 안에 전술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6일전쟁'을 일으킨 것을 보고 급진주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일으킨 '6일전쟁'은 그
결과로 인해 탁월한 결단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만약 결과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면? 나는 역시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탁월한 선택이자 탁월한 결단이라고 본다. 만약 당시의 조건에서 이집트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면, 그리하여 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면
아주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사방에 적들로 둘러싸인 이스라엘로서는 그 생존조차 위협받는 상황으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긴장이 고조되어
나세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조건에서 이스라엘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대단히 적절하고 정확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이러한 긴장고조 상태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사다트나 카터 등이 취한 노력과 그 결과로 맺어진 평화협정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가 내린 최악의, 참으로 형편없는 잘못된 결정이었지만(영국 등의 나라들은 군대를 보내 유태인들의 건국을 막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건국을 도와주었으니 몇몇 정치인들의 잘못된 판단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미 생겨난 국가가 주변 아랍국가들과 대립하고 있는 조건에서 그들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조치들을 취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나도 과거 한 때 흑백논리에 빠져
이스라엘은 그 건국이 잘못되었으니 무조건 건국을 철회해야 된다고 보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국가를 없애자는 것은 이스라엘을
건국한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보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활동들을 비교적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공산주의가 나쁘다느니 아니면
반공주의가 나쁘다느니 하는 문제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정부를 자칭하는 양 세력이 현실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이들 간에 어떤 형식, 어떤
방식으로라도 대규모 충돌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문제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중국 고대 삼국시대에 제갈량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수없이 많은(최소 몇 백만)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 때문에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물론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제갈량이 전쟁을 일으켰든 조조, 조비, 사마의가 전쟁을 일으켰든 그것은 그 당시의 중국
정세에서는 불가피한 행동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일으킨 그 많은 전쟁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적절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한국전쟁이 필연이었다고 보지
않는다.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역사에서의 필연이라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특히 나는 '사람과 사람의 집단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갈 수 있는 창조적 능력'과 사람의 사고, 이성, 판단, 결심 등을 중시하는 주체사상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한국전쟁 발발이
필연적이었다고 해서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국전쟁 역시 그것을 일으킨 사람들, 특히 김일성과 스탈린의 생각, 판단, 결심 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문제는 그러한 판단과 결심을 비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과연
전쟁을 피하며 최소한의 희생으로 통일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김일성처럼 오판하지 않고 미군의 개입 가능성이 가장 적은 시기를 정확히 가려내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남조선 해방이 무슨 필요가 있어', '통일은 무슨 통일이야' 하며 그냥 그대로 지내려고 했을까? 나의
상상력으로는 내가 김일성과 너무나 똑같은 판단,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 같아 잠시 몸서리를 친다.
우리는 흔히 한국전쟁을 공산주의
이념과 연계시켜 비판하는 경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공산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지난 95년부터
97년까지 쓴 글의 70% 정도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를 들어 현실세계에 실체로 존재하는 중국공산당이 장개석정부를
타도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쉽게 그 잘잘못을 이야기할 수 없다. 공산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활동이나 조직이나 권력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지금 중국사람이면 누구나 대만의 경제 사정에 관해
부러워하지만 내전 당시 장개석이 승리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탄압이 두려워서 그러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는 그 시절의 장개석정권과 그 군대의 인민에 대한 잔인한 살육과 억압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50년대엔 모택동은 중국 내의 어딜
가나 대 스타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모주석 만세'가 터져 나오고 경호원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모택동은 수천의 인파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하는 사태가 자주 벌어지곤 했다. 한 번은 끊임없이 '모주석 만세'를 외치며 둘러싸서 돌아가지 않는 인파에 5시간을 갇혀 있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잘 알아서 그랬다기 보다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나 국부군에 비하면 공산당 정부나 인민해방군이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별도로 현실 정치에서의 정치투쟁이나 전쟁은 공산주의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만 평가하기 힘든 아주 복잡한 측면이 있다.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는 정치투쟁이나 전쟁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19세기나
20세기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감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진 이후에나 비로소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한이나
북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 이후에도 자신이 없다. 한국전쟁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정말 자신이 없다. 내가 한국전쟁이나 한국
공산주의운동과 관련하여 아직도 감정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후에도 여전히 김일성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자신이 없기 때문일까?
4. 맺는 말
한국전쟁에서 남측과 대립하던 것들,
김일성, 공산주의,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군 중 김일성은 죽고 공산주의 이념은 이미 북한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며, 조선노동당은 이제 껍데기 밖에
없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인민군은 한국전쟁 당시 조선노동당과 공산주의를 위해 복무하던 것이 지금은 김정일독재체제를 위해 복무하는 군대로 그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남아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또 한국전쟁에 미군을 불러온 동서냉전도 이미 완전히 끝났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남아
있는 것을 억지로 따지자면 5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자신의 개인독재에 한국전쟁의 잔재들을 여전히 활용하고 있는 김정일독재체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다 신문을 보니
오늘(5월 12일) 한겨레신문 '논단'에 아태평화재단 연구위원인 김근식씨가 쓴 '기회 엿보는 냉전세력'이란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다. 그는
"지금은 정상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적 지지 때문에 냉전세력들이 정상회담 합의에 노골적인 반대를 하지 못하고 있지만 기회가 온다면 언제라도
냉전세력은 정상회담 무산을 위해 다양한 논리를 부려 쓸 것이다." 라고 하며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서는 .... 냉전세력의 방해를 막고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가 말하는 냉전세력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북한을 강력히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해서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50, 60, 70년대 한국 정부의 남북정책과 논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다.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북한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의 글 전반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는 일단 덮어두도록 하자. 그리고 '냉전세력'이란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고 보이지만 이 문제도 일단 덮어두도록 하자. 나도 김근식씨처럼
냉전시대의 논리로 남북이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반공주의'라면 지긋지긋하고 짜증까지 난다. 그런데
냉전시대의 모든 논리를 극복하자면 김근식씨 스스로부터 먼저 냉전시대의 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김근식씨의 논리대로라면 북한을 자극하고 남북대립을
격화시킬 우려가 있는 행동이나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북한인민이 처한 저 참혹한(북한의 그 끔찍한 실상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가 이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 오히려 불만이다)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 그리고 이를 지원하고자 하는 운동들을 단지 냉전극복이라는
명분 때문에 하지 말자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 어떤 것도 북한인민을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남북문제가 아니라
북한문제이다. 냉전시대의 논리를 근거로 북한을 비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지만 동시에 냉전극복을 핑계로 북한인민이 처한 실상에 눈감아 버리는 일도
역시 냉전논리의 아류인 것이다. 이제 북한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봐야 할 때가 되었다. 과거의 냉전논리나 '반공주의'로 북한을 바라보는
것도 극복해야 하며 동시에 '탈냉전'을 핑계로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자세도 극복해야 한다.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보고 북한
인민의 비참한 현실이나 김정일정권의 악랄한 독재도 그냥 동족이 사는 이웃나라(만약 이것이 싫다면 그냥 이웃나라라고 해도 좋다) 인민이 처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래서 김정일독재체제가 타도되어야 북한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일이 진정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잡다한 생각은 걷어치우고 과감히 여기에 참여하자. 이것이 바로 냉전과 냉전유산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이다. 나의 한국전쟁에
관한 이 글도 냉전시대의 논리와 유산을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가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시대정신
제1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