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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교수 명랑 笑說] 세계사적으로 봐야 '겨우' 윤곽이 보이는
리더, 이승만
6·25전쟁의 좌익 치하에서 당시 열 살짜리 초등학생이었던 인보길 소년이 어른들의 꼬임에 빠져 목 놓아 외쳤던 웅변의 마지막 대목이다. 십년 후 서울대 문리대생이 된 인보길 청년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독재 타도를 외치며 경무대로 돌격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지금 인보길 선생은 이승만 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승만의 업적과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원래 죄가 커야 은혜도 깊은 법이다. 인보길 선생은 타락한 것일까. 아니다. 인보길 선생은 죄가 없다. 죄는 차라리 이승만에게 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사이즈가 너무 커서 스무 살의 지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의 북한단독정부 지원, 미국의 좌우합작 종용, 국내의 덜 떨어진 정치 세력을 격파하며 이뤄낸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한 개인의 승리였다. KBS 이인호 이사장은 "이승만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라는 말로 사정을 요약한다. 과하다고? 1904년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을 읽어 보면 이 평가에 군말 없이 동의하게 된다(솔직히 나는 '독립정신'이 백 년 전에 쓰인 글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독립 정신'보다 소생이 더욱 경이롭게 생각하는 이승만의 발언은 따로 있다. 6·25 전쟁이 끝날 무렵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사를 파견해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합의를 약속했다. 이승만은 아예 대못을 박기 위해 휴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았고 휴전 당사자로 서명도 하지 않았다. 이후의 한국 문제를 미국이 책임지도록 엮어두겠다는 노련한 외교적 발상이었다.
조약이 체결된 뒤 이승만은 "이것이 우리 민족을 편하고 잘살게 할 것이다"라는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시 대체 누가 이 발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국제 정세를 손바닥 보듯 읽는 안목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투시력이 있었던 이승만이었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이것은 살짝 초능력의 영역이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고 이는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국방비 지출에 힘입은 바 크다.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승만의 이 발언에 필적할 만한 것은 딱 하나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였던 미제스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잠시 머릿속에서 전개 과정을 그려본 후 이렇게 말했다. "저건 망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기도 전에 내린 진단이었다. 신기(神氣)는 통(通)한다.
얼마 전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에서 있었던 추모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기념관이 있고 김대중 대통령도 기념관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만 없다는 한탄이 나왔다. 다들 맞아 맞아 하며 끄덕이는데 한 분이 딴죽을 거셨다. 대한민국 전체가 이승만 기념관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이승만의 건국 기념 연설을 들어보면 그가 꿈꾸고 설계했던 나라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야 '겨우' 윤곽이 보이는 두 명의 리더를 가졌던 우리는 참 운이 좋은 민족이다. 뭐 그 운도 이제 다한 것 같기는 하지만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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