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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開闢" 창간인 李敦化가 본 洪景來와 全琫準

이강기 2015. 10. 13. 10:30
잡지명 개벽 제5호  
발행일 1920년 11월01일  
기사제목 洪景來와 全琫準  
필자 白頭山人  
기사형태

문예기타  

 

 

 

洪景來와 全琫準
 
白頭山人
 
李朝 500년의 정치는 專制의 정치니라. 消極의 정치니라. 閥族의 정치니라. 文弱의 정치니라. 국가는 專制의 사유물이며 벌족의 오락품이며 계급의 쟁투장이며 文弱의 退屈所니라. 職에 貴賤이 잇스며 官에 班常이 잇스며 地에 남북이 잇스며 民에 親疎가 잇스며 位에 우열이 잇스며 종교에 차별이 잇스며 用人에 구별이 잇스며 그리하야 人에 자유가 업고 해방이 업서왓다. 지방에 인하야 인격의 尊卑를 정하고 天職의 인재를 구속함에 至하야는 李朝 500년의 벌족이 스스로 그 죄악을 自負치 아니치 못할지니라. 民―2천만에 불과하고 地―13천리에 不越한 반도의 천지로 地의 귀천을 除하고 민의 親疎를 除하고 이것 除하고 저것 除하고 다시 무엇으로써 國을 治하고 政을 布하리오. 李朝 專制의 蠹毒하에 其中에 가장 억울한 압제와 不人道한 인격의 구속을 受한 자는 북에 關西關北이 잇섯고 南에 호남일대가 잇섯나니 此等지방의 人은 爲先 지방의 구별로써 인재의 등용을 금하엿다. 설사 관에 등용되는 자―잇다 할지라도 文에 持平掌令에 불과하엿고 武에 萬戶僉使에 불과하엿다. 그들은 선조이래―幾 100년-국민으로써 정치적 노예생활을 함에 불과하엿다. 그들은 억울을 참고 원한을 간즉하고 但히 국가를 위하야 침묵을 守할 뿐이엇섯다. 아니 침묵을 守한 것이 아니라 其實 대다수의 남녀는 평생 자신의 경우 四圍의 抵觸에 인하야 그에 대한 아모 비평 사고가 업시 唯唯然히 인생일대를 지냇슬 뿐이엇다. 彼等은 사회 一隅에 在하야 직접 자신의 필요한 생활이외에 하등의 사색이 업시 자연한 생노병사의 중에 지냇슬뿐이엇다. 설혹 有志의 士―스스로 분개한 바 잇섯스나 또한 氣―此에 불급하고 景이 차에 불원하야 오즉 시세의 遷延과 共히 초목으로 同腐하엿슬뿐이엇다. 如斯히 李朝 500년의 史―文弱으로 人心을 마비케하야 上下<39> 일반이 退屈惰眠을 탐하는 間―청천벽력이 白日을 울리고 怒濤激浪이 安波를 震蕩하야 近代朝鮮史로 일종의 활기를 보게한 자는 북에 壬申西亂이 잇고 남에 甲午史變이 잇설슬 뿐이엇다. 그리하야 임신란의 주인공은 洪景來 其人이며 갑오사변의 중추인물은 全琫準 其人이엇나니. 鳴呼라 何國何代에 不平의 怪傑이 업스리오마는 李朝 500년史에 朝鮮에도 可히 산國民이 잇슴을 알게한 자―실로 此 兩傑이 有하야 거의 그 적막을 破하엿섯다.
 
鳴呼라. 地의 距함이 수천리, 時의 遠함이 百有數十餘載―반도의 남북에서 此 양걸의 ?出한 所以―어찌 우연이라하며 또 어찌 시세라 云치아니할것이냐. 盖 천지의 기운과 如히 기괴한 자―업나니 시대의 변천은 隔하며 산하천리가 異한 갑을 兩地일지라도 1차 동일한 기운에 激한 배 되면 남북동양의 현상을 나타내이고 내외 一樣의 파동을 일게하나니 是호걸의 公憤이 동일함으로써요. 호걸의 자각이 동일함으로써라. 이제 此 양걸의 高下輕重을 一言으로써 들면 동일한 기운으로 동일한 현상을 나타내엇고 동일한 기개로 동일의 形跡을 끼쳣스나 그러나 更히 吾人으로 此 양걸의 인격에 나타난 결과와 시대관계로 현상에 나타낸 결과를 비교하야 보면 저간에는 스스로 다소의 차―잇슴을 발견하엿다. 四顧寂寞의 중에 潛龍이 一點의 水로써 白日에 풍운을 起케하엿슴은 全이 洪에 불급함이 원하고 시세의 관계로 機를 見하고 기하야 事의 결과―필경―일대지의 파란을 기케하엿슴은 洪의 시대가 전의 시대에 비하야 밋지 못함이 遠하나니 요컨대 인격의 점에서 全은 洪에 급할 배 아니오. 시세의 상에서 洪의 시대인 壬申은 全의 시대인 甲午에 불급함이 遠하니라. 고로 壬申의 결과는 필경 하등의 대영향을 국가에 及케한 배 少하되 甲午의 결과는 事―동양의 대관계에 及하야 필경 삼국의 풍운이 起케됨도 또 우연의 시세라 云치아니치 못할지로다.
 
李史 500년에 혹은 名相良將, 혹은 文人達士의 遺香이 후세에 其芳을 遺한 자―또한 不少하나 然이나 玆에 吾人으로 특히 양걸의 유적을 擧하야 其名字나마 一世에 소개코저하는 所以는 어찌 他故가 有함이리오. 吾人으로써 스스로 그 기개에 감복함이며 그 인격을 동경함이며 그 역사적 활기를 숭배함이니 千羊의 皮―본래―一狐의 腋에 及치 못하는지라. 區區한 將相文士, 수천백인의 順從諛服한 성공사―어찌 此 양걸의 呑吐風雲한 실패담에 及할배리오. 더구나 退屈自弱에 自甘하야 개혁의 美點을 不知하는 吾朝鮮人으로 此 양걸이 有하야<40> 처음으로 민족적 활기를 어덧슴이리오. 然이나 吾人으로 此양걸의 유적을 대개나마 追述코저 함에 際하야 玆에 일대유감인 所以는 大逆不道의 名으로 삼족의 夷滅은 당한 그의 유적―거의 村?野老의 口碑로써 전할 뿐으로 후세에 아모 史證이 업나니 是―吾人으로 이를 씀에 僅히 대략의 一文을 묘사하는 감이 업지 아니함은 독자―자진하야 특히 양해잇기를 바라는 바로다.
 
 
1. 洪景來
 
洪景來―平安南道 龍崗의 人이니 距今 108년전 朝鮮 純祖時 人이엇다. 회고컨대 李氏 朝鮮의 천하―昇平이 有한지 200有餘載―北은 역사적 강대한 支那를 등에 지고 南은 日本의 强邦이 유하야 朝鮮반도는 殆히 腹背受敵의 형세로 혹은 事大에 급급하고 혹은 自保에 悶悶한 李 朝鮮祖의 천하에 東洋空前의 風雲이 잇섯나니 이곳 유명한 壬辰役이라. 是時에 際하야 국난에 임한 名將謀士―그 수를 計키 難하되 그 중에 특히 異彩를 放한 자는 水에 彼有名한 李舜臣이 잇스며 陸에 申砬등 유명한 장군이 多하되 彼等은 皆당시―문벌의 力으로 身이 장관의 위치에 在하야 謀에 그 才를 伸키 易하며 勢에 그 力을 득키 易하나 然이나 그 중에 身을 蒿의 間에서 起하야 一個 斷斷無他의 평민으로 분연히 일권의 赤으로 남모르는 偉動을 秦하고 不世出의 영재를 발휘한 자는 金應瑞 其人이엇나니. 후세에 벌족을 尙하는 庸劣한 史家―彼를 北人이라하야 특히 그 공적을 記치 아니하엿슴으로 彼는 일개 名字뿐 僅히 史上에 遺함에 불과하엿스나 其實은 壬辰役에 陰然한 大功을 泰한 자는 오즉 應瑞장군이엇더니라. 장군은 龍崗의 人이니 將軍去後―100有餘載에 장군의 츨생지되는 龍崗에서 또 다시 洪景來 장군이 출생함은 어찌 우연이며 또 어찌 氣運의 所致가 아니겟나냐.
 
장군은 幼時로부터 그 인상골격이 衆兒에 특출할 뿐아니라 그 度量識見이 大人을 압도하엿나니 특히 大膽無敵하야 嬉戱의 間에도 오히려 大人의 膽魂을 驚케한 자―多하니라. 그 일예를 들건데 장군의 9세時에 近隣書堂에 통학할세 時에 마츰 史略을 讀하다가 陣涉의 「王侯將相寧有種乎」의 句에 至하야는 오즉 종일 반복하야 此를 讀하거늘 그 師―이상히 思하고 그 意를 問한대 答曰 장부―맛당히 如此할 것이라함을 問하고 그 師―그 부당한 意를 責한 事도 잇스며 12세時에 龍崗 ?―威義를 張하고 그 境을 巡한다함을 聞하고 景來―衆兒에게 청하야 曰 吾 一聞하니 ?―관직에 居하야 관력으로써<41> 그 민을 학대함이 심하다하니 吾―맛당히 此를 懲戒하리니 汝等은 助力하라한대 衆兒―懼하야 도주하는지라 景來―石을 懷하고 林中에 陰하엿다가 ?의 乘輿를 저격하니 官隷―大驚하야 犯者를 大索하거늘 景來―遂―遠逅하엿다하니 차등의 일례―또한 능히 호걸의 心理一端을 窺할만하다.
 
景來―수시로 명산대천을 跋涉하며 隱士道人을 遠防하야 병서를 學하며 奇才를 習하며 異術을 득하엿다하니라.
 
景來―17세시에 京師科擧에 赴하야 名宰權門의 家에 총애한 배 되엇더니 時에 朝廷에서 用人에 門地高下를 택하고 又 地의 남북을 구별함을 見하고 景來―獨히 自嘆하야 왈 已矣로다. 國事―運이 쇄하고 政이 폐하엿나니 吾―설사 官에 登하야 榮名을 득한다할지라도 文은 持平掌令에 불과하고 武는 守門副將에 불과할지니 乃巳로다. 丈夫의 事―어찌 구구히 此에 止하리오 하고 遂―歸去來를 唱하니 時年이 21세時러라.
 
時에 景來―정부에 대한 근본적 개혁의 의지를 懷하고 遂―천하를 周遊하야 동지의 好漢을 규합코저 할세 僞善 淸北列邑을 周遊하는 間에 嘉山에 禹君則 李希著, 价川에 李濟初, 黃州에 金士容, 郭山에 洪總角을 得하야 時事를 의논하고 肝膽을 相照하니 *********러라.
 
盖時勢―영웅을 造하고 영웅이 다시 時勢를 造한다함은 고금의 通言이라 洪景來와 如함은 실로 身으로써 먼저 시세를 造한 자라 하리라. 아니 시세를 造코저 노력하엿더니라. 今에 그 일례를 擧하건대 당시의 朝鮮에는 相貌術, 八字說, 占卜術이 유행하야 上은 干公相家로부터 下는 일반민간에까지 유행하야 상하 일반이 그로써 시세 及 一家一身의 운명을 판단하엿나니 洪은 此 미신을 이용하야써 자기경영에 대한 시세를 造코저 노력하엿도다.
 
당시―평양에 李某라 칭하는 一富豪가 잇섯다. 一日은 1인의 相術客이 표연히 李某의 家에 來하엿다. 李某는 자기 장래에 대한 운명의 好否를 그 상술객에게 問한대 相者는 경이의 색으로 재삼 주저하면서 그 言을 發치 아니하니 李某는 心에 暗히 大驚하야 相家를 從容한 處에 청하야 그 진의를 問한즉 그는 정색하고 왈 公은 3개월 이내에 창업의 재상이 되리라. 삼가 煩設치 勿하라하고 즉히 귀거하엿는데 李某는 반신반의의 중에 在하더니 幾日을 經한 뒤에 相貌魁偉한 一丈夫―李를 訪하고 천하의<42> 대사를 談함에 及하야 李는 처음으로 前日 상술객의 예언을 확신하고 드듸어 其事에 참여함에 至하니 그 장부는 즉 洪景來 其人 이러라. 洪은 如斯한 방법으로 평안일대의 부호와 밋 그 將士謨客을 다수히 규합하엿스며 또 그 聚衆의 他一策으로는 洪은 先히 名妓 수십명으로 演劇隊를 조직하야 각지 항구를 순회하면서 壯客力士를 모집하엿다. 景來는 此等 種種의 수단으로 衆을 聚한 자 수천인이 皆팔도에 散在하야 暗히 氣脈을 상통케 하엿는 고로 景來―한번 병를 거함에 及하야 천하의 장사―1인도 此에 반항치 못하엿스며 민간에는 당시―景來를 칭하야 呼風喚雨의 조화술이 有하다 전보되엇슴으로 한번 景來의 名을 聞한자이면 何人이던지 이에 항거치 못하엿더라.
 
景來의 擧事處는 嘉山 多福洞이니 前으로 博川大寧江을 臨하고 背로 嘉山을 負하야 비록 一夫當關에 萬夫莫開의 地는 아니나 당시의 상태로는 가히 天儉의 地라 하리라. 景來―此에 據하야 군기를 제조하며 陳法을 연습하니라.
時方辛末에 淸化일대가 大凶한지라.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이 四散하니 景來―동지에게 청하야 왈 此時를 가히 이용할것이라. 삼가 勿失하리라하고 이에 禹君則 李希著 등과 謀하야 銀店을 사방에 설하야 雇人을 모집하니 衆이 운집하는 지라 景來―이에 衆을 誘하야 군대에 편입케하니 기세―大振하니라.
 
때는 辛末 冬12월이라. 景來―事를 擧코저할세 스스로 大元師가 되어 전군을 통솔하고 禹君則 金昌始로써 謀事를 삼고 洪總角으로 선봉을 정하고 李濟初로 후군을 삼고 군복은 皆 청국식을 擬倣하엿더라.
12월 19일 夜에 洪軍이 嘉山을 襲하니 嘉山郡守 鄭著의 부자―義에 死하엿더라.
 
又 洪軍의 一枝兵은 북으로 郭山을 벌하고 泰川을 정하니 所向에 적이 無한지라. 於是에 洪軍이 勢를 乘하야 宣川, 鐵山, 龍川, 龍城등 諸軍을 定하고 본군은 進하야 博川를 定하니라.
 
洪軍이 博川에 거한지 屢日에 안주성을 拔치못하더니 27일 平明에 관군이 奇計를 出하야 洪軍의 불의를 襲하니 洪軍이 적이 불리한지라. 景來―於是에 지구전을 주장하야 퇴하야 定州의 險을 거하고 북군의 來援을 待하야 일거에 관군을 격파코저 계획중이더라.
 
時에 조정이 邊報를 聞하고 大驚하야 팔도의 군병을 動케하고 又 양서각군이 兵을 발하야 急히 정주성을<43> 圍하니 洪軍은 오즉 保守의 策을 執하야써 북군의 來援을 待하더라.
 
洪軍이 定州를 據한지 약 4개월여에 관군으로 더불어 互相 1승1패의 勢를 持하더니 壬申 4월18일 夜에 至하야 관군이 화약을 지하에 埋하야 일시에 폭발케하고 又 勢를 乘하야 進攻하니 洪軍이 衆寡不敵으로 드듸어 대패한지라 洪景來와 禹君則은 성을 越하야 도주하니 後에 그 終을 不知하니라. 嗚呼라 영웅의 末路―皆如是하나니 吾人은 구구히 그 成敗利鈍을 논할 배 아닌저.
 
金世初라 운하는 자―본래―景來와 동향의 人이라. 幼詩로부터 相善하더니 長함에 미처 世初―景來의 異志―有함을 聞하고 其後―交를 絶하야 相見치 아니하더니 世初―노년에 금강산에 遊하다가 비로봉상에서 非僧非仙의 一處士를 逢하고 양인은 相看無語의 裡에 一笑而過한 후―후년에 至하야 景來―금강산에 在한 說이 世에 전하니 此 非僧非仙의 一處士는 곳 당시 洪景來 장군이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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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全琫準

 
유명한 甲午事變이라하면 즉 日淸戰爭을 연상케 될것이오. 日淸戰爭의 원인이라하면 세속의 이른바 東亂을 연상케 될 것이오. 東亂의 원인은 즉 탐관오리의 폭정의 반항으로 起한 민중의 對정치적 개혁운동임을 알것이엇다.
 
距今 26년전 甲午의 頃―李末의 政弊―실로 그 극단에 달하엿다할지라. 上은 金玉均 일파의 개화당이 실패한 이후로 조정에는 事大黨의 庸材劣漢이 사리사욕으로써 국정을 誤케하고 下는 목불식정(政)의 소위 양반적 浪人의 말류―인민의 재산을 탈함으로써 유일의 행정을 삼아왓다. 廢址?粥의 古談과 如한 일이지마는 試하야 당시 지방관의 탐폭한 일례를 擧컨대 「關西에 一守宰―무고한 富民 1인을 拿致하야 曲直을 불문하고 爲先 笞刑을 가하엿다. 억울히 刑을 受하는 彼는 간신히 頭를 거하야 죄의 원인을 問하니 ?는 張目大叱하야 왈 汝는 윤리상 대죄에 범한자니라. 즉 직계친속의 간음한 혐의가 有한 故이라 선언함에 及하야 彼는 넘우도 어이가 업서 겨우 하는 말이 소인은 원래―누대독신으로 형제도 업고 친척도 업는 孤單獨身인 事를 사실로써 고백하니 ?는 득의의 色으로 아무 忌憚업시 다못 양반이 常漢의 金錢을 奪함을 양반의 양반된 常事라. 常漢의 口에 하등 口述이 有하리오. 云한 一語의 下에 毒棒을 가하엿다하니<44> 이 실로 李末 지방관의 폭정한 好個例證이라하리라. 이러한 비인도 무법률한 정치에 被迫한 반도의 민심은 일로 亂을 思하고 時日葛喪의 ?號가 入城民間의 사상에 緊張되엇더니라. 더구나 당시 남방일대의 관리는 東學이라 하는 이단의 죄목하에서 그를 好個의 貪財材料를 삼아 生民의 塗炭이 其 극에 달하엿더라.
 
時에 彼 유명한 天道敎 제2世 敎祖 海月堂은 旣히 貴賤平等의 說을 주장하야 그 門弟된 자는 皆事人如天의 誡命을 守하고 일면 평등자유의 心이 종교적으로 발달하는 此際라. 고로 당시―관리의 폭정을 비상히 격앙하고 차에 개혁의 필요를 感한 자는 먼저 東黨(天道敎의 당시 民間別名)의 人이 그 다수이엇스며 딸아서 東黨의 중에는 聰明識者의 士―해월당의 위대한 교훈에 감화되어 一邊 道德風化說을 주장하는 동시에 일변 관리의 폭정을 탄핵코저 하엿나니. 당시― 東黨의 志士―報恩帳內에 集하야 누차 정부에 上書한 운동으로 見할지라도 可히 써 該堂의 선각의 明이 有함을 알지라. 그러나 정부는 一向民志를 압박하고 관리의 폭정은 一向 如前함에 及하야 東黨중 일부지사의 叫號로써 정부개혁론이 高唱케 되엇나니 是―동란의 起한 원인이며 그의 원동자되는 전봉준은 민간개혁당중 두령의 1인으로 해월당의 高第중―南派 一人이엇나니 試하야 吾人으로 그의 인격 及 사업의 일면을 書케하여라. 개략외 일절이지만
 
全琫準은 전라도 古阜人이라. 距今 66년전 甲寅에 生하니 氣宇가 英邁, 膽略이 過人, 才藝가 탁월, 문장이 절세, 용모가 妙端 어느 점으로 보던지 百體俱全의 好個丈夫라 할 수 잇나니 고로 幼時에 里人이 별명을 작하야 녹두장군이라 號하니라.
 
盖 甲午의 變은 朝鮮有史 이래―대참변이며 대개혁이라. 천지의 기운―此에 대하야 필경―兆朕이 업지 못할지로다. 先時로부터 南中에 동요가 유행하엿는데 曰
 
새야새야 녹두새야 全州古阜녹두새야 함박족박 열나무 딱딱후여―
 
又曰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무엇하러나왓나냐. 솔입대입히 푸릇푸릇 秋節인가하엿더니 백설이 펄펄헛날리니 저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인다.
 
당시 世人이 전하되 此等 가요는 전녹두선생의 갑오사변을 예언한 조짐이라 하더라.
 
全의 부친은 또한 有志의 士라. 실즉 吏弊民瘼을 구하기 위하야 古阜에서 民義를 거하엿더니 마츰내 관헌에게<45> 체포되어 郡獄에서 杖斃한배되니 全은 自是로부터 더욱 개혁의 지가 심절히 각골하엿더라.
 
全은 距今 30년전 庚寅세에 東學에 입도하야 海月堂의 귀천평등설과 廣濟蒼生의 법훈을 듯고 大히 感한 배 有하나 然이나 全은 원래 열혈의 남자라 종교로써 人을 化하는 외―兵으로써 당시 政弊를 개혁코저하야 冥冥의 中―그계획과 그 사상을 양성하엿더라.
 
全이 일즉 京師에 來하야 雲峴대원군궁에 여류한지 수년에 대원군에 대하야 일언도 요구의 색이 無한지라 대원군이 그 인재됨을 知하고 자진하야 曰 군은 鄕人이라. 응당 宮地의 욕이 不無하겟거늘 군이 吾家에 留한지 수년에 至하되 일언도 仕宦의 요청이 無하니 其意―何에 在하뇨한대 全은 천연히 對曰 사람이요 어찌 그 志願이 업스리오마는 다못 我의 志願은 인과 異한지라 요구로써 능할배 아니라한대. 대원군이 曰 원컨대 其志를 聞코저하노라. 全이 왈 余의 志는 위민위국에 在하나니 별로 他念이 無하다하니라. 此 간단한 일례로써도 능히 그 인격의 고상함을 可知할지로다.
 
歲癸巳에 全琫準이 京師로부터 湖南에 下來하니 時에 조정에는 매관매직이 公行하고 지방에는 탐관오리가 民財를 강탈하야 생민의 塗炭이 其極에 달한지라 특히 호남일대는 반도천부의 膏?地라. 민생이 풍부하니 소위 守宰된 자―일차 호남의 地에 來하면 백방의 수단을 弄하야 民財를 奪함에 유일의 행정이 되엇섯다. 加結錢 加戶錢 무명잡세 左道亂政의 지목 蔑倫犯上의 조목등―守宰의 심리가 오즉 民의 죄목도 되며 법률도 되는지라. 民怨이 漲天하고 天人이 公憤이라. 有志의 七―어찌 此에 公憤이 起치 아니하리오.
 
더구나 동학의 지목이 日甚하야 守宰―그로써 유일탐재의 호재료를 삼앗나니 차를 일로 目睹하는 全은 분연히 기하야 議를 可忍이면 何를 가인치 못하랴하고 全은 於時에 광제창생의 법은 오즉 급진개혁에 잇다. 주장하야 泰仁에 至하야 舟山接主(接主는 동학시 직명) 崔景善을 訪하고 전두의 사를 議하니 古阜人鄭一金道三等有志의 士―개 응종하는지라 전은 드디어 의를 결하니라.
 
時는 갑오2월이라. 전봉준의 一派―병을 고부에서 거하니 민중의 聚集문득 45천에 달한지라. 全은 *히 병을 솔하고 고부를 습하야 그를 탈하니 官隷와 백성이 일제―和應하야 기세―대장한지라. 全은 어시에 회소를 동군백산에 설하고 전사를 議할세 무장접주―孫和中이 또한 수천의 민병을 솔하야 래응하고 우 고적, 장성, 흥덕, 부안, 태인, 금구, 제군이 一時蜂起하니 민병의 취자―不月에 수십만에 달할지라. 어시에 聲聞이 浪籍하고 조야가 진동이라. 호남 全帶의 민이 다년의 폭정의 餘에 수무족답하야 일일 민병의 증가―水의 취하와 여하더라.<46>
 
全은 선천적 군략에 능하고 又 機察이 敏銳한지라. 특히 그 일례를 거하건대 전은 일일전군을 검열하다가 수삼의 정탐자를 적출하야 일일히 문하니 皆符合하는지라. 어시에 민군은 다 全의 인격에 감복할 뿐만아니라 전을 청하야 천신이라 호함에 지하니라.
 
시에 완영(전주에서 변을 문하고 수천의 병사를 발하야 백산에 至하니 全은 민병수대를 출하야 일합에 타파 乃已하고 進하야 완영을 圍코저하니라. 시에 완영에는 京師로부터 급파한 兵使洪啓薰이 일대 병을 솔하고 고부를 향하야 진군하는 중에 민군과 상봉하야 완산 칠봉정상에서 격전수일에 관군이 대패한지라. 민병이 이에 완영을 탈하니 시는 갑오 4월 望間이러라.
 
자시로 민군은 각군에 집강소를 설하고 방백과 수령으로 더불어 협약을 결한 후 凡於行政에 관민협의체로 행정을 始하니라.
 
시세9월에 全은 更히 민군을 솔하고 북진코저할세 시에 남원에 주둔하엿던 金開南이 또한 민병수만을 솔하고 래하야 전주에서 전군과 상합하니 어시에 민병은 虎에 翼을 첨함과 여하더라.
 
민군이 참례역에 유한지 수일에 金開南은 청주6면으로 向케하고 全을 스스로 都元帥가 되어 공주부로 향하니라.
 
시에 礪山營將金甲東이 자기의 장력을 恃하고 全을 해코저하야 논산진중에 입하야 全을 요견코저 한 대 全은 기의를 不知하고 내허입견할새 갑동이 문득 검을 발하고 全을 향하야 曰 汝―一小民이라. 감히 국가를 요란함이 심하니 吾―맛당히 참하리라하니 全이 破顔大笑曰 장부의 擧―어찌 그리 태망하냐. 오즉 진정히 국을 위하는 자는 여일인이니라하고 안색을 정연하니 甲東이 全의 威儀함에 복하야 드디어 過를 謝하고 저의 부하가 되니라. 又 公州乾坪里 儒會領者李有尙이 민군을 격코저 하야 병을 기하엿다가 또한 전의 위풍에 복하야 기병을 거하야 來投하니 기세―益漲하더라.
 
시에 조정에서 동학토벌책을 강할새 관군의 力으로 도저 토벌키 불능함을 각하고 드디어 청국에 구원을 청하니 日本이 또한 천진조약에 의하야 병을 出한지라. 그가 즉 일청의 전인을 야기케 된 원인이러라. 시에 일병이 남하하야 공주를 거하야 스스로 민군과 교전하니 累日連戰에 강약의 부동으로 민군의 불리―심한지라. 민군이 부득이 퇴병하야 호남으로 향할세 且戰且走하다가 순창군에서 全이 마츰내 관군의 捕捉한바되니라.
 
全이 경성에 至하야 재판을 수할세 당당한 정치론이 재판관으로 하야곰 皆一驚을 喫케하니라. 시에 人이 유하야 全에게 고하되 군이 만일 정부에 순종의 의를 표하면 맛당히 同生의 道―有하다한대 全이 천연히 답왈 余―國을 위하야 정부를 개혁코자함이어늘 이저 정부에 順服하야 其初志를 변함이 어찌 장부의 행할배리오. 드디어 경성감옥에서 사형을 受하니 호걸의 末路―대개 如是한저.(洪全兩豪의 상세한 역사는 본사에서 아즉 재료 蒐集중에 재함으로 爲先 其桀略을 世에 전할 뿐.)<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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