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나도향의 후손들

이강기 2015. 10. 13. 21:35

[발굴 인터뷰]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⑧ 나도향의 후손들

 

“1926년 초여름, 게다짝에 거지꼴로 문 두드려”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월간조선 2015년 7월호

 

 

⊙ 조부 羅炳奎는 독립운동하다 체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조부·부친 모두 의사… 나도향도 京城醫專 1년 재학
⊙ 나도향은 7남매 중 둘째… 형제는 모두 사망한 상태
⊙ 한국 연극의 산증인 白星姬 여사가 도향의 弟嫂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고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나도향의 장조카 나결웅(羅潔雄)씨.
  소설 〈벙어리 삼룡이〉 〈뽕〉 〈물레방아〉를 쓴 나도향(羅稻香)은 1920년대 문단을 불태운 섬광이었으나 찰나의 유성(流星)이 되어 사라진 인물이다. 1902년생인 그는 폐병(폐결핵)으로 1926년 8월 26일 스물다섯 나이로 요절했다. 짧은 생애에 많은 글을 남겼으나, 대표작은 죽기 한두 해 전에 발표했다. 어쩌면, 단 한 번의 불꽃이 지금껏 타오르고 있는지 모른다. 내년은 도향의 서거 90주기가 되는 해다.
 
  나도향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다. 죽기 전 “장가는 저세상에 가서나 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도향의 집안 내력을 알기 위해서는 조부 나병규(羅炳奎)와 부친 나성연(羅聖淵)의 생애를 살필 필요가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도향과 달리, 조부 나병규는 평남 성천(成川) 태생이다. 청년기에 고향을 떠나 방황하다 한의술을 익혀 서울에서 한의원을 차렸다고 한다.(1914년 총독부로부터 한의사 자격증에 해당하는 ‘醫生면허 제45호’를 부여받았다.) 도향의 원래 이름은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경손(慶孫)이다. ‘도향(쌀 향기)’은 문우(文友)였던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가 지어준 아호다.
 
  ‘경손’이란 이름은 조부와 의형제를 맺은 조종대(趙鍾大)가 지었다고 한다. 나씨 집안에 따르면 “조종대의 모친을 나병규가 한의술로 고치면서 의제(義弟)를 맺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조종대의 집안이 몰락하면서 딸 조숙경·조현경을 나병규가 떠맡았다. 두 딸은 도향의 동생들과 한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조종대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단원이었는데 이 단체는 임시정부의 비밀 지원단체였다. 나병규의 한의원이 독립애국단 거점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1920년 1월 일제(日帝)에 발각되면서 여러 단원과 함께 조종대·나병규도 검거되고 만다. 조종대는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2년 옥사했다. 나병규는 일흔 가까운 나이 때문에 벌금형(100원 刑)을 받았으나 그 역시 1924년 사망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963년 조종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나병규에게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韓醫였던 조부, 洋醫였던 부친
 
나도향의 조부 나병규(羅炳奎).
  나병규가 한의사인 반면, 아들 나성연은 양의술(洋醫術)을 배웠다. 나성연은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졸업하고 동경제대(東京帝大) 의학부 외과(外科)를 나왔다고 한다.
 
  한국 근대 의료인을 연구한 서울대 의대 황상익(黃尙翼) 교수에 따르면 “나성연은 의학보다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경성의전 졸업 때 성적이 최하위였다. 그래도 졸업 뒤에 개업을 하여 주로 외과 환자를 돌보았다. 아버지 나병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운 1924년 이후 더욱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나도향도 1918년 배재학교를 나와 그해 경성의전에 입학, 1년간 의술을 배웠다. 그러나 나성연이 의학보다 문학에 기울었듯 그 역시 문학으로 나아갔다. 1919년 조부의 장롱에서 돈을 훔쳐 현해탄을 건넜다고 한다. 와세다(早稻田)대에 입학해 문학수업을 받을 생각이었다.
 
  나씨 집안에 따르면 “도향의 부친 나성연 역시 의사업을 멀리하고 은둔한 채 책을 읽으며 지내 소득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도향의 학비를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조부 나병규 역시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의술을 멀리한 것이 마뜩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실은 독립애국단 사건 영향으로 가세가 기울어 손자 학비를 낼 형편이 못 됐다고 한다. 결국 나도향은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병규는 상처한 뒤 후실(金孝實)을 통해 나준영(羅俊英)과 나효순(羅孝順)을 낳았다. 나성연의 동생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도향보다 7년 늦게 태어난 나준영은 일제강점기, 영화배우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나웅(羅雄)이란 가명을 썼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개최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화전민을 소재로 한 송영의 〈산풍〉을 연출해 출품, 연출상을 수상했다’는 사료도 있다. 그러나 광복 직후 좌익 계열로 흘러 1946년 월북, 북한에서 배우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향의 집안 내력에 문학과 예술에 대한 씨앗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기자는 나씨 집안에다 나성연이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물어보았으나 세월이 흘러서인지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나도향 일가의 20세기
 
나도향의 부모. 아버지 나성연(羅聖淵)의 젊은 시절 모습과 어머니 김성녀(金姓女)의 노년 모습.
  나성연은 7남매를 낳았는데 나도향은 그중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현재 7남매 모두 사망한 상태다. 후손들은 1년에 한두 차례, 셋째 나조화(羅朝和)의 아들 결웅(潔雄·70·서울 송파구 방이동)씨 집에 모여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나도향의 장조카인 결웅씨는 이 집안의 장손이다.
 
  먼저 도향의 누나이자 첫째인 나정옥(羅貞玉·1899년생)은 도향보다 세 살이 많았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5일자 기사를 보면 ‘조선여자교육회가 주최한 전국 순회강연 첫 막이 서울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리는데 나정옥이 피아노 독주를 한다’고 적혀 있다. 나씨 집안이 상당히 개화(開化)됐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당시 법관 최진(崔鎭)과 결혼해 5남 2녀를 낳았다. 경성제2변호사회(京城第二辯護士會)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최진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연(緣)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진은 일제의 회유에도 3·1운동의 민족대표 48인 변호를 맡았다. 민족적 성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6·25사변 때 서울에 남았다가 납치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으나 현재 딸만 생존한 상태다. 나씨 집안은 “나병규가 손녀(나정옥)를 시집보낼 때 경기도 파주에 땅을 사줬다. 사위(최진)가 돈 벌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가세가 기울어 땅을 팔아 살림에 보탠 것으로 안다”고 했다.
 
  도향의 동생인 셋째 나조화는 평생 영화 제작과 연극에 종사한 인물이다. 형 도향의 대표작 3편(〈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을 당대 최고 감독인 신상옥(申相玉)이 메가폰을 잡은 것도 나조화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배우 김진태, 최은희가 주연한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 포스터.
  나조화는 한국 연극계의 산증인 백성희(白星姬·90)와 1944년 결혼, 외아들 결웅을 낳았다. 백성희 여사는 온몸으로 연기하는 ‘천(千)의 얼굴’을 지닌 연극배우로 불린다. 전화통화에서 그녀는 기자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나조화)은 1968년 사망했습니다. 나는 그이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그와 헤어져 살았어요. 단역짜리 인생인 내게 남편은 너무나 넘치는 대접을 했고, 어리고 철딱서니 없는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돌봐주던 그이의 부음(訃音)을 듣고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며칠을 울고 또 울었어요.
 
  나는 남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안’ 갔지, ‘못’ 간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주검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기진해 다시 깨어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아서 연극을 더 하고 싶었어요.”
 
  나조화는 백성희와 결혼하기 앞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다. 1940년생인 첫째 나순(羅純)은 평생을 뚜렷한 직업 없이 살았다고 한다. “한때 일본으로 밀항했으나 여의치 않아 다시 귀국한 뒤 생활이 안정되지 못했다. 1974년 사망했다”고 한다.
 
  1946년생인 둘째 나미자(羅美子)는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딸은 캐나다와 서울에 각각 살고 있다. 그리고 셋째 막내는 광복 직후 일본으로 떠나 여태 생사를 모른다고 한다.
 
  나씨 문중은 “나조화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3남매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백성희는 몰랐다. 6·25 당시 연극하는 사람들이 함께 기차를 타고 대구로 피란 갔는데 그 자리에서 알게 됐다더라”고 했다.
 
 
  몇몇 후손, 문화예술 계통에 종사
 
1960년대 서울 정릉에서 만난 나도향의 동생들. 왼쪽부터 나명식, 나조화, 나양신, 나영식.
  나도향의 장조카이자 나조화·백성희의 아들 결웅씨는 기아차 직원으로 경기 광명점을 직영하다 2003년 정년퇴임했다. 한양대 신문학과를 졸업했지만 낯선 분야인 자동차 영업 쪽 일을 했다.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뒀는데 첫째 딸은 음악치료, 둘째 딸은 성우, 막내아들은 예술경영 분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결웅씨의 말이다.
 
  “자식들에게 진로를 정해주거나 강요한 일이 없는데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더군요. 그런데 하는 일이 모두 예술 계통과 관련 있어요. 큰아버지(나도향)도 평소 음악을 즐겨 했다고 합니다. 배재학교 시절엔 단소를 잘 불었고 성악에 소질이 있어 춘원(春園) 작사의 ‘낙화암’, 윤극영(尹克榮) 작곡의 ‘반달’을 잘 불렀다고 합니다. 도향은 한때 문학가보다 음악가가 되려는 꿈도 꾸었다고 해요. 주위 사람들이 문화예술 계통에 있는 자식들을 보고 ‘격세유전’이라 표현합니다.”
 
  또 이런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 나조화는 연극보다는 영화 쪽 일을 많이 하셨는데 ‘한양영화사’를 설립하셨다. 당시 충무로에 영화 스태프나 연기자들이 모이는 ‘스타다방’이 유명했는데 그곳에 가면 아버지뿐 아니라 유명 영화인들을 다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큰아버지 나도향에 대해 어떤 기억이 있나요.
 
  “고교(경기상고) 때인가, 민중서관에서 나도향 소설집을 발간한다고 해서 아버지랑 둘이서 밤새워 인지(印紙)에 도장을 찍던 기억이 나요. 그때 큰아버지 작품을 모두 읽었어요. 빈궁한 식민지 상황 한 개인의 운명을 주로 다뤘는데 그분의 명성에 비해 작품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요. 작품 속 현실인식이 카프(KAPF) 계열로 볼 수 있어서일까요? 안타까워요.”
 
  —집안에 나도향과 관련한 자료는 없나요?
 
  “작은아버지(羅明植)가 관심이 많았지만 개봉동에 사실 때 물난리가 나서 자료가 죄다 떠내려가 버렸어요. 유실물 중에는 월탄 박종화 선생의 편지도 있었어요. 월탄 선생은 큰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다고 할까요? 가끔 집에도 오시고, 때마다 안부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 편지도 물난리통에 다 휩쓸려서….”
 
나도향의 첫째 동생의 아내인 연극인 백성희(白星姬).
  도향의 둘째 동생 나양신(羅良臣)은 미군 통역 일을 했다고 한다. 부산에 거주하며 의사인 부인 사이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나양신이 일찍 사망하면서 자연스레 나씨 집안과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한다.
 
  도향의 셋째 동생 나명식(羅明植)은 1990년대 초 사망했다. 건축 관련 감리 일을 했다고 한다.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건립 당시 감리 일을 맡았다. 첫째 부인 사이 1남, 의사인 둘째 부인 사이 1남 1녀를 두었다.
 
  나씨 집안에서는 도향보다 18세 어린 나명식(1920년생)의 기억이 회자한다. 그러니까 나명식이 대여섯 살 되던, 1926년 비 오는 초여름의 일이다. 어머니(金姓女)가 밀국수인지 팥죽인지를 끓이고 있는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랫사람에게 나가보라고 일렀더니 “웬 거지가 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뛰어가니 웬 거지가 소리없이 들어오더란 것이다. 나명식이 보기에, 딱딱한 밀짚모자에 검은색 일본 옷을 입었으며 게다짝을 끌고 비를 흠뻑 맞은 꼴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거지가, 바로 죽기 직전 ‘글 쓰는 형’ 나도향이었다.
 
  도향의 여동생인 넷째 나정명(羅貞明)은 영화배우 송억(宋億)과 결혼해 3남 2녀를 뒀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의뢰하니 송억은 1946년 〈자유만세〉로 데뷔, 영화 〈수녀(水女)〉(1979), 〈세종대왕〉(1978), 〈카인의 후예〉(1968) 등에 출연한 것으로 나와 있다. 영화 〈자유만세〉는 광복 후 첫 영화이면서 광복 영화의 효시라는 영화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뒀는데, 두 아들은 중고차 매매, 직물 관련 기술자로 일했다. 문학이나 예술 방면에 종사한 이는 없다고 한다.
 
  도향의 막내동생인 나영식씨는 아들만 셋을 낳았다. 그는 호텔 매니저로 워커힐 등에서 일했다. 첫째와 셋째는 사망하고 둘째가 신촌에서 주류업을 하고 있다.
 
 
  사라진 나도향의 흔적
 
1926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나도향의 부고기사.
  《동아일보》 1927년 9월 8일자에 ‘고(故) 나도향군 묘지 전(前) 입비(立碑)’라는 짧은 기사가 나온다.
 
  〈오는 8일 오후 세시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는 고(故) 나도향씨 묘지 앞에 비석을 세우는데 일반 우인(友人)들은 3시 전에 나오기를 바란다.〉
 
  나도향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는데 이듬해 문인들이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은 ‘도향 나빈지묘(稻香 羅彬之墓)’. 도향의 필명이 나빈인데 논어의 ‘문질빈빈(文質彬彬·글의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린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후 도향의 묘지는 어떻게 됐을까. 후손들은 “이태원의 개발로 묘지가 이장되면서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태원 공동묘지 자리에 한남동 유엔빌리지가 들어오면서 이장이 됐어요. 6・25때 왔던 폴란드 사람들이 도향의 묘를 보며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장한 후 어디로 모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아마 화장을 했을 겁니다.”
 
  또 다른 후손들은 “화장한 후 어느 절간으로 옮겨졌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씨 집안조차 그 흔적을 모르고 있었다.
 
  나도향의 생가는 ‘경성부(京城府) 청엽정(靑葉町) 1정목(丁目) 56번지’로 호적상 기재돼 있다. 현재 바뀐 동명(洞名)은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56번지’다. 이 주소를 인터넷에 검색하니 ‘대진비닐사업사’로 나와 있다.
 
  도향이 사망할 당시 기거한 집은 어딜까. 《매일신보(每日申報)》 1926년 8월 27일자 기사에 ‘(도향이) 시내 남대문통(南大門通) 오정목(五丁目) 삼십이 번지 자택에서 정양하였으나 요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결웅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곳은 현재 제분회관(서울 중구 남대문로 118번지) 옆 자리인데, 옛날엔 일인(日人)이 경영하던 소복호텔이 있었다고 해요. 오래전 작은아버지(羅明植)께서 작은 표석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문화부에 청했는데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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