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오만한 天才였던 아버지 金東仁의 최후

이강기 2015. 10. 13. 21:36

[발굴 인터뷰]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⑦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

 

오만한 天才였던 아버지 金東仁의 최후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어머니 말씀이, 화장터에 도착해 보니 전방에서 온 군인 사체가 하도 많아 민간인을 화장해 줄 수 없다며 그냥 가라고 윽박질렀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군인 사체 20여 구와 아버지 유해를 같이 화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누구의 뼈인지도 모를 유골 일부를 받아 어머니는 한강에 아버지를 뿌렸습니다.”

⊙ 아버지 김동인은 왼쪽 뇌에 뇌경색이 발병, 점차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빠져
⊙ 1949년 말이 되자 말이 어눌해지고 오른쪽 팔·다리를 잘 쓰지 못해
⊙ 1951년 1월 3일 이웃들도 피란을 떠나 동네가 텅 비게 되자 아버지를 왕십리 집에 두고 피란
⊙ 1951년 8월 왕십리 집에서 약 20m 떨어진 밭고랑에 잠옷 입고 쓰러진 아버지 시신 발견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고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한국 근대문학 개척기에 소설가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족적은 화려하다. 〈감자〉 〈배따라기〉 〈운현궁의 봄〉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그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한국 소설의 요람기를 이루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아호 내지 필명은 금동인(琴童人), 금동(琴童), ‘시어딤(시어짐)’, 춘사(春士), 만덕(萬德) 등 여럿이다. 그가 신문·잡지 등에 발표한 글이 지금까지 꾸준히 발굴될 정도로 필력이 대단했다.
 
  얼마나 빨리 썼는지, “신문에 2회분씩 쓰는 것도 30분 이내로 쓴다. 글을 쓸 적에 원고지 다음 장을 넘기는 소리가 마치 글을 읽을 때 책장 넘기듯 했다”(부인 金瓊愛 회고)고 한다. 또 “파지 한 장 없었다. 쓸 분량만큼 원고지를 미리 책으로 만들어 쪽수까지 매긴 후에는 수정을 하지 않고 단번에 써 내려갔다”(차남 金光明 회고)는 증언도 나온다.
 
  그러나 광복 이후 동인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1949년 5월 이후부터는 글을 전혀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에게 문학이란, 생명의 진을 하나둘 뽑아 먹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김동인은 1918년 평양의 수산물 도매상의 딸인 김혜인과 결혼해 1남1녀(日煥·玉煥)를 낳았다.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관개(灌漑)사업을 벌였다가 재산을 절반 까먹고 동생(金東平)과 영화사업에 나섰으나 파산했다. 향락과 사치도 심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아내마저 떠나고 말았다.
 
  1931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에 가담했던 문우(文友) 전영택(田榮澤)의 소개로 11살 아래인 김경애와 재혼, 딸 셋(유환·姸煥·銀煥)과 아들 둘(光明·天明)을 낳았다.(김경애는 전영택이 재직하던 숭의고녀의 제자였다고 한다.)
 
  현재 7남매 중 3남매가 생존해 있다. 1935년생인 연환씨는 경기여고와 서울대를 나와 고교 교사로 정년퇴임했다. 1943년생인 광명씨는 경복고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 33년간 한양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했다. 1948년생인 천명씨는 경복고와 서울 공대를 졸업하고 IMF 시절 ㈜대우 전무이사에서 물러났다.
 
  김동인의 차남 광명씨는 아버지가 마지막을 지냈던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110-65번지(現 홍익동 35-3)에 살고 있다. 이 집은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었으나 광명씨가 1983년 3층 양옥집으로 개축했다. 현재 1, 2층은 세를 주고 3층은 광명씨 가족이 살고 있다.
 
 
  아들이자 신경외과 의사가 본 아버지의 질병
 
김동인과 아내 김경애 여사. 《동아일보》 1931년 4월 19일자에 동인의 재혼 소식을 전할 정도로 그의 사생활은 전국적인 관심사였다.
  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인 김광명(73)씨는 평생을 신경외과 의사로 일했다. 신경외과는 말년의 아버지가 앓던 중풍과 관련이 깊은 분야다. 어린 시절, 몸져 누워 꼼짝도 못했던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봤던 그는 신경외과를 전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발병부터 그 후의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병명과 사인을 추정할 수 있어요. 왼쪽 뇌에 뇌경색이 발병, 점차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빠졌고 (아버지는) 삼키는 기능도 마비되어 식사를 못하게 되셨어요.
 
  아버지의 발병은 1949년 6월경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전차 운전사가 아버지를 업고 왔어요. 당시 우리집에 오려면 종점인 왕십리역에서 한 정거장 전인 하왕십리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운전사 얘기가 ‘종점인데도 안 내리고 자꾸 못 알아듣는 다른 말만 하더라’는 겁니다. 운전사가 주머니를 뒤져 주소를 확인한 후 집으로 모셔 왔어요. 이때부터 아버지의 회복 불가능한 병이 시작된 것 같아요.”
 
  김 교수는 “처음 몇 달 동안은 멀쩡하셨으나 외출하는 빈도가 완연히 줄면서 가끔 뜻 모를 말씀과 행동을 하셨다”고 기억했다.
 
  “그해(1949년) 말이 되자 말씀도 어눌해지고 오른쪽 팔·다리를 잘 쓰지 못하게 되어 완전히 방에 눕게 되셨고, 식사를 비롯해 대소변까지 모든 생활을 가족들이 도와야 했어요. 일제 말엽, 누나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기뻐하셨다던 분이 제가 초등학교 1학년 전반기에 우등상장을 받아 보여 드려도 못 알아보셨어요.”
 
  —발병하기 전 아버지의 어떤 모습이 기억 납니까.
 
  “해방 이후 아버지는 글을 많이 쓰셨는데 좌익을 비난하는 글을 많이 쓰셨어요. 그리고 한편으론 야심적인 시도를 하셨어요. 위촉오의 중국 《삼국지》보다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우리 민족의 삼국지’를 쓰시겠다고 사료를 모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을지문덕(乙支文德)》인데, 책 분량으로 30쪽 정도 쓰시다가 결국 정신이 저거(혼미)하시니까 마무리를 못 지었어요.”
 
  《을지문덕》은 동인의 사실상 미완(未完)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은 중국 만주와 북방을 개척하던 고구려의 웅장한 스케일을 담고 있다.
 
  가족 앞에서 동인은 자상하고 곧잘 농담도 하고 장난도 쳤다고 한다. 김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아버지는 누나들에게 주워 온 아이라고 약을 올리고, 건포도를 염소 똥이라고 농(弄)을 치시기도 했어요. 집에 있을 때는 목말을 태워 주셨어요. 한번은 아버지가 외출하셨다가 오시는 소리를 듣고 나가면 ‘나, 요술 부린다’시며 군밤이나 다른 먹을 것을 옷 속에 감추었다가 양복 소매 사이나 바짓가랑이로 흘려 떨어뜨리시던 생각도 납니다. 또 집에 조그마한 축대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 축대로 뱀이 기어 들어왔어요. 단장으로 잡겠다고 하셨는데 뱀이 도망을 간 기억이 나요.
 
  제 기억에는 없지만 어머니와 누나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눈에 낀 저의 눈곱을 혀로 핥아 떼어 주곤 하셨답니다.”
 
 
  “눈에 낀 제 눈곱을 혀로 핥아 떼어 주셨다”
 
  중풍이 점점 심해지던 1950년 6·25가 터지고 말았다. 6월 27일, 비가 추적추적 종일 내렸다. 그리고 대포소리도 덩달아 크게 울렸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피란을 떠나기 시작했다. 동인의 가족도 서둘렀다.
 
  “6월 27일 오후 아버지 모시고 집을 나섰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15살과 11살 된 누나, 7살의 나, 2살짜리 겨우 걷는 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가 피란을 떠난 겁니다. 당시 아버지는 부축을 하면 걸으실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하시며 걸었어요. 그날 왕십리에서 응봉동 고개를 넘어 한강까지 가서 밤을 꼬박 새워 줄을 섰습니다. 이튿날 아침 나룻배를 타려고요.
 
  다행히 나룻배에 가족 모두가 올랐는데 아버지가 몸을 못 가누어 배가 흔들렸어요. 뱃사공이 배가 뒤집힌다며 내리라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다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아버지를 모시고 왕십리 집으로 돌아왔는데 며칠 안 돼 붉은 완장 찬 사람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찾아왔어요. 아버지가 빨갱이를 욕한 신문 기고문을 스크랩까지 했더군요. 아버지가 몸조차 못 가누시는 것을 보고, 데려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지 9·28 서울수복 전까지 4번이나 찾아왔지만 안 잡아갔어요. 이름난 작가들은 다 잡아갔는데 잡아갈 가치가 없었던 것이죠. 말씀도 헛소리를 가끔 하실 때니까 안 잡아간 것이죠. 그래서 6·25를 서울서 났습니다.
 
  —만약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면 어땠을까요.
 
  “건넜어도 막막했을 겁니다. 2km 남짓한 왕십리~응봉동까지 걷는데도 오후 내내 걸렸으니까요. 피란을 제대로 못 갔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우리집에 왔던 인민군들은 점잖고 착했어요. 험한 얘기도 안 하고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갔어요.”
 
  서울수복 이후 10월 말부터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 수가 늘더니 11월이 되면서 더욱 증가했다고 한다. 그즈음 후퇴했던 북한 인민군이 다시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동인의 아내 김경애도 이번에는 일찌감치 피란 준비를 했다. 남편을 태울 리어카를 구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나갔다가 저녁 때가 되어 힘없이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어요. 그러나 결국 리어카를 못 구하셨어요. 12월 초가 되면서 아버지 병세는 더욱 악화됐어요. 음식을 입에 넣어 드리면 씹어 삼키거나 마셨는데 그즈음에는 반 이상 흘리시면서 몸이 바짝 말라 가고 가래 양도 증가하기 시작했어요.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있는 것도 불가능해졌어요.”
 
  —병원에는 가 보았나요.
 
  “나중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세브란스 병원에 모시고 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의사가 ‘뇌에 무슨 문제가 있기는 한데 무엇인지 모르겠고 치료방법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 후 침을 여러 번 맞아 보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이 악화됐다는 겁니다. 그 당시 의료 수준으론 어쩔 수 없었다고 봅니다.”
 
  12월 말 왕십리집 뜰의 언 땅을 파고 동인의 원고뭉치와 고급 소장품, 그릇 따위를 파묻었다. 김 교수는 “누님이 언 땅을 깊이 팔 수도 없었다. 흙더미로 덮어 놓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의료수준으론 어쩔 수 없어”
 
김경애 여사. 그녀는 남편의 임종을 못 지킨 멍에를 평생 지고 살았다.
  동인의 몸은 더욱 나빠졌다. 움직임이 거의 없어지고 가래 섞인 숨소리는 점점 약해져 갔으며 고열 상태였다고 한다.
 
  “어머니 생각에, 6·25 때는 어찌어찌해서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느끼셨나 봐요. 어머니는 결단을 내리셨어요. 온 가족이 남아 인민군 손에 모두 죽을 바에야 아버지를 집에 두고 피란을 떠나자고….”
 
  1951년 1월 3일의 일이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어머니(2008년 5월 15일 사망)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능하면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셨어요. 그것은 결코 어머니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놓고 몇 시간 후에 돌아와 남편의 임종을 지키려고 잠시 떠난 것이 계획대로 안 됐을 뿐입니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었지만 그때 상황이 어머니에게는 끝까지 멍에로 남아 있었어요.”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강 건너 흑석동에 누님(玉煥)이 출가해 사셨어요. 어머니 생각에 누님도 피란을 떠나 빈집일 것이고 우리가 그 집에 가 있으면 누구인지 모를 터이니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판단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두고 어머니는 다시 왕십리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임종을 지킬 생각이었던 것이죠.
 
  어머니 생각에 하루이틀만 더 버티면 아버지가 임종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임종하시는 걸 보고 피란 가려고 왕십리집에서 버티셨거든요. 제가 의사가 되고 보니, 아버지가 그런 몸 상태로 며칠을 못 사셨을 겁니다. 저는 어머니 판단이 옳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고 이웃들도 피란을 떠나 동네가 텅 비게 되자 1월 3일 피란을 결행한 겁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당시 피란 상황이 흑석동에 갈 수도 없었고, 어머니 혼자 왕십리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신당동, 약수동을 거쳐 한남동 쪽을 향하다 보니 피란민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길 양쪽으로 국군이 새끼줄을 쳐 놓아 새끼줄을 넘어 흑석동으로 갈 수도 없었고 밀려드는 인파 탓에 뒤돌아 서울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안 됐어요. 그렇게 새끼줄 안으로 걸어 첫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이었습니다. 우리는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서 떠밀려간 것이었어요.
 
  저는 배낭에다 설탕 한 봉지랑 은수저 20벌을 넣고 걸었는데, 가다가 눈에다 설탕을 뿌려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오산까지 갔는데 저녁밥을 해 먹고 피란민 사이를 돌아다니니까 ‘오늘 밤 오산을 잇는 강다리가 끊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그날 밤 다리를 건너 천안까지 갔어요. 우리는 흑석동에서 숨어 살 생각에 피란살림을 거의 챙기지 못해 수저 외에는 밥을 해 먹을 준비가 전혀 없었어요. 거처할 방이나 식기까지도 주인집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제 기억에 어느 집 행랑에서 며칠 지내는데 집 주인이 다음해 농사지으려고 말려 놓은 건옥수수를 구워 먹었어요. 집 주인이 화를 내자 어머니가 옷감을 주어 무마했어요. 다른 집에 가서는 동치미를 훔쳐 먹기도 했어요.”
 
  어느 날 어머니가 “온양에 피란민 수용소가 생겼으니 그리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온양의 초등학교 근처에 천막이 약 20동(棟) 있었는데 광명씨 가족은 그중 한 칸에 입주해 어렵사리 배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국군들이 피란민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어머니도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형편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전쟁 전 어머니는 ‘대한부인회 서울 성동지부 회장’이셨거든요. 국군이 어머니에게 ‘고아원을 해 보라’고 권해 천막 한 동을 불하받았습니다.”
 
 
  다시 찾은 왕십리 집과 아버지의 모습
 
김동인이 최후를 맞았던 서울 왕십리 집(성동구 하왕십리 110-65번지) 앞에 선 김경애 여사.
  1951년 8월 초순, 어머니가 광명씨에게 서울에 갔다 오자고 했다. 두 사람은 무턱대고 온양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은 대부분 군인들이었고 민간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참을 달리더니 기차가 멈춰 섰고 어머니는 의자 밑에 어린 광명씨를 숨겼다. 어머니는 도강증이 있었지만 그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은 국군에 의해 재탈환됐으나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내려 걸어 왕십리 집으로 갔어요.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 방이 텅 비어 있었어요. 집 안을 다 돌아다녀 봐도 아버지 흔적은 없었고요. 아버지 원고뭉치나 그릇 등을 숨겨 놓은 구덩이엔 물이 고여 있었고 누가 가져갔는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뜰엔 잡초가 어찌나 무성했던지요. 집 문짝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전혀 거동을 못하셨으니 누가 아버지를 피란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집에서 약 20m 떨어진 밭고랑에 잠옷 입은 채로 계셨어요. 몸이 상당히 부패해 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아버지가 잠옷 위에 입으셨던 가운으로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어머니는 어디서 삽을 구해 와서 밭의 흙을 파서 아버지의 시신을 덮었다”고 기억했다. 시대의 천재를 자부했던 아버지, 오만한 문명(文名)을 세상에 떨쳤던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온양으로 다시 돌아온 어머니는 군 당국에다 ‘더 이상 고아원을 하지 않겠다’며 온 식구를 서울로 데려갔어요. 그때가 9월 중순경입니다. 두 번을 갈아 탄 군인 부식 수송차량은 우리 가족을 덕소 근처의 수심이 얕은 한강 남쪽에 내려놓았습니다. 밤에는 숲속에 숨어 있다가 날이 밝자 걸어서 한강을 건너 왕십리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해 11월 하순경. 집 앞에 빨간색, 초록색으로 단장한 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어린 광명씨는 무척 놀랐다고 한다. 차 안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앉아 있는데 그도 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못 타게 해서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그 차에 아버지 유해를 홍제동 화장터로 모셨던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어요. 어머니 말씀이, 화장터에 도착해 보니 전방에서 온 군인 사체가 하도 많아 민간인을 화장해 줄 수 없다며 그냥 가라고 윽박질렀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군인 사체 20여 구와 아버지 유해를 같이 화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누구의 뼈인지도 모를 유골 일부를 받아 어머니는 한강에 아버지를 뿌렸습니다.”
 
 
  호떡·냉면 장사, 軍人 하숙 치며 생계 꾸려
 
젊은 시절, 군 복무 중인 김광명씨와 김경애 여사. 배경이 왕십리 집 앞이다.
  김동인의 후배 문인 정비석(鄭飛石·1911~1991) 이 1962년 12월호 《현대문학》지에 〈동인선생회고기〉를 쓴 일이 있다. (《월간조선》 2012년 4월호 참조) 이 글을 읽다 보면 정비석이 마치 동인의 시신을 직접 목도한 것처럼 표현한 대목이 나온다.
 
  〈(1952년 1월초 정비석이 김동인의) 안방에 들어갔더니, 노인 한 분이 누워 있었다. 안경 쓰고 수염은 덥수룩하고 홑이불 덮고 있어서 김동인인지 몰랐다. 앉아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그였다. 놀라서 코밑에 손을 대니 온기가 없었고 손으로 일으켜 세우려 하니 장작개비처럼 뻣뻣했다. 죽은 지가 족히 1년은 됐을 텐데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졌다. (후략)〉
 
  김 교수는 “정비석씨가 왜 그런 ‘소설’을 썼을까 화가 나고 섭섭하다”고 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이후 1~2년인가 후에 처음 우리집에 오셨어요. 왜 그런 ‘소설’을 썼을까 화가 나고 섭섭했습니다. 다만 어머니는 1952년 봄인가, 외삼촌이 계신 부산에 가셔서 당시 피란 와 있던 백철, 주요한씨 등과 함께 정비석씨를 만난 적은 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의 임종을 그분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정비석씨가) 그 얘기를 마치 자기가 본 것마냥 엉뚱한 소리를 하셨어요. 기자께서 바로잡아 주세요.”
 
  —어머니께서 특히 마음이 편치 않았겠네요.
 
  “생전 어머니는 여러 번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대부분 거절하셨고 그때 상황에 대해 절대로 함구하셨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라 권해 보았지만 ‘그런 상황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못한다. 아마 너희들도 내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끝내 멍에를 안고 가셨어요. 그 결과 추측성 문헌이 많이 생겼어요.”
 
  —6·25 이후 어머니는 생계를 어떻게 꾸렸나요.
 
  “시장에서 호떡장사도 하시고 나중에는 외삼촌이랑 동대문에서 냉면장사도 하셨어요. 그 다음에는 군인 하숙을 쳤어요. 왕십리 집은 개축하기 전 방이 4개였는데 우리 식구는 한 방에 모여 살고 나머지 방 3개와 광을 방으로 고쳐서 세(貰)를 놨어요. 그리고 1982년까지 아버지 작품에 대한 인세(印稅)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어요.”
 
김동인 문학비 앞에 선 김경애 여사와 아들 광명(右)씨과 천명(左)씨.
  —의대에 진학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못 싼 기억이 많아요. 당시 경복고에는 문과 4개반, 이과 5개반이 있었는데 처음엔 문과반을 택했어요. 어느 날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묻는 겁니다. ‘너, 선생님 존경하느냐’고요. 솔직히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왜 문과에 가니. 가봐야 선생밖에 더 하겠느냐. 너희 아버지는 그래도 돈이 모자라지 않았는데 너는 겨우 학비를 내는 형편이지 않으냐’고 해요.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래서 이과에 진학했죠.
 
  아버지도 처음 일본 동경에 유학가실 때 변호사와 의사가 될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룬 것이라 생각해요. 문학의 꿈은 누구나 조금씩 꾸면서 살잖아요. 그러나 문학 근처에 괜히 얼쩡거렸다가는 아버지를 망신시킨다고 생각했어요.”
 
  —몇 년 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김동인을 친일 작가로 규정한 일이 있지요.
 
  “아버지가 황군위문단에 들어 만주에 가고 일제의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징용을 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봅니다. 또 황국위문단에 다녀온 보고서를 쓰라는 독촉을 받고도 ‘문자 상실증’에 걸렸다거나 ‘기억나는 것도 없고, 혼절했다’는 식으로 피했다고 봅니다. 일제 말엽 아버지가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는 설도 결국 친일을 피하려는 칭병(稱病)이었다고 봐요.”
 
  —그래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지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라는 국가위원회에서 재심을 한다고 해서 엄상익 변호사를 통해 이의신청을 하고 소(訴)도 넣었어요. 주위에서 엄 변호사 대신 저쪽(민변 쪽을 지칭?)에 (사건을) 주라고 권해요. 그러면 ‘저희들끼리 우물주물해서 (친일명단에서) 빼 준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돈 주고 사는 것 같아서….
 
  저는 지금도 아버지의 글을 보면서 친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제 제기를 한 것은 친일로 볼 수 있는 글 몇 개보다도, 해방 후에 쓴 좌파에 대한 맹렬한 비난 글들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다고 봅니다. 아버지를 단순히 글 몇 개로 평가하기보다 인생 전체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광명씨는 “앞으로 아버지가 남기신 작품들을 모두 모아 제대로 된 전집을 펴내고 싶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한국문단의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항상 우리말과 민족을 사랑하셨고 우리말로 소설을 쓰는 소설가라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 분이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이란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흔적이 남은 왕십리 집터를 아직도 못 떠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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