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잡지 중에서 외국 언론이 인용할 만한 내용을 가진 유일한 잡지가 月刊朝鮮(월간조선)이다. 그만큼 새로운 정보가 많고,
기사가 정확하며, 객관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웃도는 새로운 정보가 게재되어 있는 잡지는 거의 月刊朝鮮뿐이다. 더욱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時流(시류)에 따라 획일적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月刊朝鮮은 독자적인 정보와 독자적인 분석·판단을 제공해 준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
및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매체이다. 月刊朝鮮은 추적報道 및 調査報道(조사보도)에 있어서 탁월하다.
調査報道라는 테마 자체는 새롭지 않지만, 그 테마를 심도 있게 취재하고 조사함으로써 새로운 결과가 생겨나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은 速報一過性(속보일과성)이라 할 수 있는 기사가 많고, 時流를 좇는 기사를 즐기지만, 月刊朝鮮은 調査報道를 통해서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전달하지 않는 숨은 진실을 대담하게 전달한다. 月刊朝鮮은 그 조사보도를 위해서 기자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기자
자신이 취재하고 쓴 기사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잡지가 재미있고 생동감이 있다. 주관적인 평론이나 논문이 아닌, 사실로 말하게 하는
저널리즘의 기본이 月刊朝鮮에는 넘친다. 한국에서는 저널리즘을 「言論」 또는 「言論界」라고 한다. 기자도 「言論人」이라
한다. 따라서 신문이나 텔레비전도 주관적인 論이 많다. 事實을 전달하기보다 「論」, 즉 주관적인 주장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 결과 주장에 맞는
사실만 전달하고, 주장에 맞지 않는 사실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 「事實보다 論이 먼저」인 것이다. 그 결과로, 예를 들면 신문에는 학자나 교수가
쓴 原稿(원고)가 너무 많다. 대학교수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신문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한국저널리즘이 「論하는 것」 또는 주장을 그만큼
즐긴다는 증거이다. 또 기자가 쓴 「칼럼」이 많다는 것도 그 특징을 말해준다. 신문칼럼이란 원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논설기자가 자신의 주장을 넣어가면서 자기 이름으로 쓰는 것인데, 한국 언론에서는 젊은 기자가 자신의 이름을 넣어 주장을 쓰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한국 저널리즘이 사실 전달보다는 論이나 주장 전달을 얼마나 즐기는가 알 수 있다. 특종으로 신문을
이기기도 한국에선 월간잡지에 있어서도 전에는 학자나 교수가 쓴 논문 같은 기사가 많았다. 그러한 월간잡지의
체질을 바꾼 것이 月刊朝鮮이다. 기자가 취재하고 직접 쓴 조사보도를 중심으로 한 편집에 의해서 月刊朝鮮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잡지 저널리즘을 개척하고 정착시켰다. 그 결과 月刊朝鮮이 신문과 경쟁할 수 있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과의 인터뷰나 黃長燁 망명사건 등, 月刊朝鮮에 의한 많은 특종들은 월간잡지가 신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한국언론사의 귀중한
경험이었다. 일본에서의 잡지 저널리즘의 대표로 「文藝春秋(문예춘추)」를 들 수 있는데, 월간지 「文藝春秋」는 때로 신문을
웃도는 영향력을 가진다. 1970년대에 다나카(田中) 내각을 붕괴시킨 것은 「문예춘추」에 게재된 調査報道였다. 한국에서는 그런 영향력을
月刊朝鮮이 갖게 된 것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대량매체의 대세가 「역사 바로 세우기」나 「對北 햇볕정책」, 「落選운동」과 같은 「時流」에
편승하고 있을 때, 냉철하게 그 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다양성이 보증되어야 하는 민주사회에서 月刊朝鮮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필자가 月刊朝鮮을 인용해 산케이 신문에 소개한 많은 기사 중에서, 인상깊이 남는 기사가 몇 개 있다. 예를 들면 1992년
「3·1절」에 보도되었던 사진을 둘러싼 조사보도가 그렇다. 이것은 「3·1절」을 기해 한국의 신문과 텔레비전이 앞다투어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日帝만행」에 관한 사진의 진위에 대한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었던 사진은 「日帝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작두로 처형하고
있는 사진」으로, 필자가 이 사진을 분석한 결과, 한국이나 일본하고는 상관없이 中國대륙에서 있었던 처형사진이며, 한국 언론의 보도는
誤報(오보)라고 판단, 그 사실을 산케이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日帝만행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필자와 산케이 신문을 비판했다. 이것에 대해 月刊朝鮮 1992년 6월호는 자세한 조사보도에 의해서 日帝만행과는
상관없는 사진이라고 판단 「3·1절」 한국 언론의 보도는 誤報였다고 결론 내렸다. 趙成寬 기자가 쓴 기사로 기억하는데,
일본이나 일제에 대해서는 眞僞와는 상관없이 감정적으로 뭐든 쓰면 된다는 무책임한 「反日보도」 속에서 이 月刊朝鮮의 객관적인 사실보도는 탁월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反日」 또는 「日帝비판」이라는 「論」보다 事實이 보다 중요하다는 관점이 관철되었다. 사실추궁이라는 저널리즘의 원점에 선
추적 조사보도의 眞髓(진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감정에 따르지 않은 사실을 추구하고, 한국 언론의 誤報를 지적한 용기
있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접한 필자는 한국 저널리즘의 양심을 알았다. 日帝 쇠말뚝 전설의 부정
그러나 그 문제의 사진은 아직도 「日帝만행」의 사진으로서 여러 곳에서 反日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부 反日서적에
게재되어 있고, 서대문 형무소 기념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의용병에 대한 日帝 만행」으로 박물관이나 자료집에 나와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은 흔한 일이다. 북한도 金日成 혁명신화를 미화하기 위해, 과거사 사진을 조작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의해 金日成 혁명경력 자체도 의문시되어 버린다. 月刊朝鮮 1995년 10월호의
조사보도 「金泳三 정부는 풍수정권인가」 또한, 저널리즘으로서의 眞髓를 발휘한 뛰어난 기사였다. 金容三 기자가 담당한 것으로, 소위 「日帝
쇠말뚝」 전설의 진위를 현지취재로 자세하게 확인한 걸작 기사였다. 결론은 「日帝가 한민족의 정기를 단절시키기 위해 각지의 名山에 의도적으로
박았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취재 결과, 많은 쇠말뚝은 그런 風水說(풍수설)과는
관계없으며, 日帝時代에 지리적인 방위확정이나 측량 등을 위해 박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바로 세우기」를 주장하는 金泳三 정부는
정부사업의 일환으로 내무부나 군부대까지 동원하여 문제의 쇠말뚝을 찾아 그것을 뽑아내는 작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月刊朝鮮만은 그런 「時流」나 「時代의 분위기」에 흘러가지 않고 진실 추구에 나섰다. 이 또한 용기 있는, 시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때 기사는
결과적으로 「한국은 풍수국가가 아니다」는, 풍수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21세기를 향한 한국 및 한국인의 명예를 구했던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 「日帝 풍수모략설」을 꽤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신문에도 日帝 비판의 소재로서
「쇠말뚝 전설」이 여전히 등장한다.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냉정한 사실보다 정서가 영향이 크다는 것인가. 우리 외국 기자는
지금, 月刊朝鮮의 北韓보도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北韓에 관련된 많은 특종이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왔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정부 및
언론계가 對北유화책에 따라 金正日 정권의 진실을 애매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北韓의 실태를 종잡을 수 없다. 그 결과 月刊朝鮮의 북한 보도에
대한 기대가 크다. 月刊朝鮮은 지금까지 北韓 당국으로부터 몇 번이나 비난과 협박을 받아왔다. 우리 「산케이 신문」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月刊朝鮮이나 「산케이 신문」이 북한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해 협박하고 있다.
月刊朝鮮이라는 존재 덕분에 우리들은 한국 저널리즘에 안심할 수 있다. 「時流」에 아부하지 않는 「正論저널리즘」으로서 진실을 추구하는 月刊朝鮮의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지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