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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특파원이 본 月刊朝鮮-구로다 가쓰히로, 락스미 나까르미

이강기 2015. 10. 13. 22:36
외국 특파원이 본 月刊朝鮮-구로다 가쓰히로
 
論을 버리고 事實을 추구하여 韓國 언론의 체질을 바꾼 잡지
 
●時流와 감정에 영합하지 않는 事實主義가 金正日 정권을 떨게 하고 있다
黑田勝弘 일본 산케이(産經) 신문 서울 지국장
외국 언론이 안심하고 인용
 한국의 잡지 중에서 외국 언론이 인용할 만한 내용을 가진 유일한 잡지가 月刊朝鮮(월간조선)이다. 그만큼 새로운 정보가 많고, 기사가 정확하며, 객관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웃도는 새로운 정보가 게재되어 있는 잡지는 거의 月刊朝鮮뿐이다. 더욱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時流(시류)에 따라 획일적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月刊朝鮮은 독자적인 정보와 독자적인 분석·판단을 제공해 준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 및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매체이다.
 
  月刊朝鮮은 추적報道 및 調査報道(조사보도)에 있어서 탁월하다. 調査報道라는 테마 자체는 새롭지 않지만, 그 테마를 심도 있게 취재하고 조사함으로써 새로운 결과가 생겨나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은 速報一過性(속보일과성)이라 할 수 있는 기사가 많고, 時流를 좇는 기사를 즐기지만, 月刊朝鮮은 調査報道를 통해서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전달하지 않는 숨은 진실을 대담하게 전달한다.
 
  月刊朝鮮은 그 조사보도를 위해서 기자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기자 자신이 취재하고 쓴 기사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잡지가 재미있고 생동감이 있다. 주관적인 평론이나 논문이 아닌, 사실로 말하게 하는 저널리즘의 기본이 月刊朝鮮에는 넘친다.
 
  한국에서는 저널리즘을 「言論」 또는 「言論界」라고 한다. 기자도 「言論人」이라 한다. 따라서 신문이나 텔레비전도 주관적인 論이 많다. 事實을 전달하기보다 「論」, 즉 주관적인 주장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 결과 주장에 맞는 사실만 전달하고, 주장에 맞지 않는 사실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 「事實보다 論이 먼저」인 것이다. 그 결과로, 예를 들면 신문에는 학자나 교수가 쓴 原稿(원고)가 너무 많다. 대학교수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신문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한국저널리즘이 「論하는 것」 또는 주장을 그만큼 즐긴다는 증거이다. 또 기자가 쓴 「칼럼」이 많다는 것도 그 특징을 말해준다.
 
  신문칼럼이란 원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논설기자가 자신의 주장을 넣어가면서 자기 이름으로 쓰는 것인데, 한국 언론에서는 젊은 기자가 자신의 이름을 넣어 주장을 쓰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한국 저널리즘이 사실 전달보다는 論이나 주장 전달을 얼마나 즐기는가 알 수 있다.
 
 
  특종으로 신문을 이기기도
 
 
  한국에선 월간잡지에 있어서도 전에는 학자나 교수가 쓴 논문 같은 기사가 많았다. 그러한 월간잡지의 체질을 바꾼 것이 月刊朝鮮이다.
 
  기자가 취재하고 직접 쓴 조사보도를 중심으로 한 편집에 의해서 月刊朝鮮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잡지 저널리즘을 개척하고 정착시켰다. 그 결과 月刊朝鮮이 신문과 경쟁할 수 있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과의 인터뷰나 黃長燁 망명사건 등, 月刊朝鮮에 의한 많은 특종들은 월간잡지가 신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한국언론사의 귀중한 경험이었다.
 
  일본에서의 잡지 저널리즘의 대표로 「文藝春秋(문예춘추)」를 들 수 있는데, 월간지 「文藝春秋」는 때로 신문을 웃도는 영향력을 가진다. 1970년대에 다나카(田中) 내각을 붕괴시킨 것은 「문예춘추」에 게재된 調査報道였다. 한국에서는 그런 영향력을 月刊朝鮮이 갖게 된 것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대량매체의 대세가 「역사 바로 세우기」나 「對北 햇볕정책」, 「落選운동」과 같은 「時流」에 편승하고 있을 때, 냉철하게 그 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다양성이 보증되어야 하는 민주사회에서 月刊朝鮮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필자가 月刊朝鮮을 인용해 산케이 신문에 소개한 많은 기사 중에서, 인상깊이 남는 기사가 몇 개 있다. 예를 들면 1992년 「3·1절」에 보도되었던 사진을 둘러싼 조사보도가 그렇다. 이것은 「3·1절」을 기해 한국의 신문과 텔레비전이 앞다투어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日帝만행」에 관한 사진의 진위에 대한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었던 사진은 「日帝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작두로 처형하고 있는 사진」으로, 필자가 이 사진을 분석한 결과, 한국이나 일본하고는 상관없이 中國대륙에서 있었던 처형사진이며, 한국 언론의 보도는 誤報(오보)라고 판단, 그 사실을 산케이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日帝만행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필자와 산케이 신문을 비판했다. 이것에 대해 月刊朝鮮 1992년 6월호는 자세한 조사보도에 의해서 日帝만행과는 상관없는 사진이라고 판단 「3·1절」 한국 언론의 보도는 誤報였다고 결론 내렸다.
 
  趙成寬 기자가 쓴 기사로 기억하는데, 일본이나 일제에 대해서는 眞僞와는 상관없이 감정적으로 뭐든 쓰면 된다는 무책임한 「反日보도」 속에서 이 月刊朝鮮의 객관적인 사실보도는 탁월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反日」 또는 「日帝비판」이라는 「論」보다 事實이 보다 중요하다는 관점이 관철되었다. 사실추궁이라는 저널리즘의 원점에 선 추적 조사보도의 眞髓(진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감정에 따르지 않은 사실을 추구하고, 한국 언론의 誤報를 지적한 용기 있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접한 필자는 한국 저널리즘의 양심을 알았다.
 
 
  日帝 쇠말뚝 전설의 부정
 
 
  그러나 그 문제의 사진은 아직도 「日帝만행」의 사진으로서 여러 곳에서 反日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부 反日서적에 게재되어 있고, 서대문 형무소 기념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의용병에 대한 日帝 만행」으로 박물관이나 자료집에 나와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은 흔한 일이다.
 
  북한도 金日成 혁명신화를 미화하기 위해, 과거사 사진을 조작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의해 金日成 혁명경력 자체도 의문시되어 버린다.
 
  月刊朝鮮 1995년 10월호의 조사보도 「金泳三 정부는 풍수정권인가」 또한, 저널리즘으로서의 眞髓를 발휘한 뛰어난 기사였다. 金容三 기자가 담당한 것으로, 소위 「日帝 쇠말뚝」 전설의 진위를 현지취재로 자세하게 확인한 걸작 기사였다. 결론은 「日帝가 한민족의 정기를 단절시키기 위해 각지의 名山에 의도적으로 박았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취재 결과, 많은 쇠말뚝은 그런 風水說(풍수설)과는 관계없으며, 日帝時代에 지리적인 방위확정이나 측량 등을 위해 박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바로 세우기」를 주장하는 金泳三 정부는 정부사업의 일환으로 내무부나 군부대까지 동원하여 문제의 쇠말뚝을 찾아 그것을 뽑아내는 작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月刊朝鮮만은 그런 「時流」나 「時代의 분위기」에 흘러가지 않고 진실 추구에 나섰다. 이 또한 용기 있는, 시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때 기사는 결과적으로 「한국은 풍수국가가 아니다」는, 풍수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21세기를 향한 한국 및 한국인의 명예를 구했던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 「日帝 풍수모략설」을 꽤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신문에도 日帝 비판의 소재로서 「쇠말뚝 전설」이 여전히 등장한다.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냉정한 사실보다 정서가 영향이 크다는 것인가.
 
  우리 외국 기자는 지금, 月刊朝鮮의 北韓보도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北韓에 관련된 많은 특종이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왔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정부 및 언론계가 對北유화책에 따라 金正日 정권의 진실을 애매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北韓의 실태를 종잡을 수 없다. 그 결과 月刊朝鮮의 북한 보도에 대한 기대가 크다.
 
  月刊朝鮮은 지금까지 北韓 당국으로부터 몇 번이나 비난과 협박을 받아왔다. 우리 「산케이 신문」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月刊朝鮮이나 「산케이 신문」이 북한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해 협박하고 있다. 月刊朝鮮이라는 존재 덕분에 우리들은 한국 저널리즘에 안심할 수 있다. 「時流」에 아부하지 않는 「正論저널리즘」으로서 진실을 추구하는 月刊朝鮮의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지기를 기대한다.●
 

 

외국 특파원이 본 月刊朝鮮-락스미 나까르미
 
事實의 힘 믿고 당당하게 時勢에 逆流하는 매체
 
●漢字를 잊어버리지 않게 만든 잡지
락스미 나까르미 아시아위크 서울 지국장
 1980년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月刊朝鮮도 탄생했다. 그 후 2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필자는 韓國通(한국통) 기자가 되었고, 月刊朝鮮은 한국 최고 잡지로 성장했다. 함께 성장한 것 때문일까. 한국의 과거·현재·미래를 배우려 노력한 필자에게 月刊朝鮮은 최고의 길잡이였다. 지금도 필자의 서재에 꽂혀 있는 月刊朝鮮을 보노라면 한국 現代史 압축 파일을 보는 듯하다.
 
  月刊朝鮮이 처음 탄생했던 1980년 당시 한국은 1인당 GNP가 1400달러였고, 고급 와인은 「마주앙」뿐이었으며, 커피는 맥스웰, 그리고 일류 호텔을 제외하곤 거의 유일한 洋食(양식) 메뉴가 돈가스뿐이었던 시절이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넘어섰고 사회도 다양화되었다.
 
  지구촌 어딜 가나 20년 만에 이런 변화를 이뤄내는 나라가 없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急變(급변)의 激流(격류)를 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격랑 속에 제 역할을 해 내는 언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필자에게 경이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필자가 月刊朝鮮으로부터 배운 것은 한국 歷史, 한국 現代史, 그리고 漢字이다. 시대가 혼탁하면 史觀도 혼탁해진다. 그런데 한국에 처음 발을 내딛는 외신기자들은 史觀(사관)의 혼탁 속에 방황하기도 한다. 시민단체와 이른바 진보 성향의 학자들이 정열적으로 활동하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갖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1980년대는 理念(이념) 과잉의 時代였다. 月刊朝鮮은 이 탁류를 관통하면서 이념보다 사실을 추구해 온 잡지로 필자에게 많은 안목을 갖게 해 주었다.
 
  두 번째는 언론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았던 당시 한국 現代史를 보도해야 하는 필자에게 月刊朝鮮은 하나의 典範(전범)이었다. 많은 매체가 권력과 時流(시류)에 편승하여 보도할 때에도 月刊朝鮮은 당당하게 逆流(역류)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필자는 많은 사건들의 實像을 잘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가끔 한국을 떠나 있을 때에도 月刊朝鮮을 구해다 보지 않을 수 없어 「中毒(중독)」이 되어 버렸다.
 
  세 번째는 漢字였다. 필자가 근무하는 아시아위크(Asiaweek)誌의 主 취재지역은 漢字 문화권인 아시아 지역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만은 漢字를 자주 접하기 어려워 졌다. 많은 매체가 한글 專用(전용)이란 유행을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은 이 유행에 당당히 맞서 왔다. 덕분에 필자는 漢字를 잊어버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우기까지 한다. 필자의 漢字 실력을 보강해 준 첫 글자는 「갑옷 甲(갑)자」였다. 趙甲濟 기자의 기사를 읽다가 이름을 보니 甲이 생소했고 옥편을 찾아 내 비로소 「아하! 이거였구나」하고 머리 속에 넣어 둔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新世代를 놓치지 마라』
 
 
  그런데 필자는 요즘 들어 月刊朝鮮을 보면 답답한 느낌을 갖곤 한다. 愛情이 과해서 생기는 병일지 모르나 이 자리를 빌어 愛情 표현을 조금 해야겠다. 우선, 月刊朝鮮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調査報道(조사보도)의 선구자이지만, 이 칭찬은 20년이 채 안된 新人에게 어울리는 勳章이란 점이다. 20년이 넘기 시작하는 月刊朝鮮에게는 보다 중후한 조사보도가 어울리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金大中 정부가 등장한 이후 특정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人脈기사가 있었다. 學脈이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이 기사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어느 학교를 나왔다」에서 끝나면 이것은 단순한 통계자료의 게재에 불과한 기사가 된다. 기왕이면 「누가 어디를 나왔는데, 이 사람과 같은 학교의 아무개와는 어떤 식으로 연결된다」고 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은 인원으로 세계 최대 용량(필자가 아는 한 그렇다. 지구촌 어느 나라에 열한 명의 기자들이 모여 벽돌만한 잡지를 매월 만들 수 있겠는가. 냉전시대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예는 없었다)을 생산하는 시스템에 아쉬움이 남는다. 작은 필진은 어쩔 수 없이 취재 영역에 한계를 가져온다. GNP 1400달러 시대를 넘어서 1만 달러 시대에 걸맞은 月刊朝鮮이 되어달라는 주문이다. 기자 한 사람이 두 달, 심지어 육 개월 이상 뛰어 한 편의 名기사를 쓸 수 있어야 하는 분위기를 月刊朝鮮은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끝으로, 가장 큰 아쉬움은 月刊朝鮮이 스스로 「世代」에 집착하여 1980년대, 1990년대의 애독자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애독자들은 나이를 점점 먹을 테고,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月刊朝鮮 부수는 그들이 사망한 만큼 줄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기성세대가 보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기사가 될 수 있다면, 동시에 신세대가 보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도 기사가 될 수 있다. 인원을 확보한 뒤 두 마리 토끼를 쫓으라고 조언하고 싶은 것은, 세월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는 月刊朝鮮이 한국의 저널리즘을 이끌어 온 리더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창간 30주년 기념호가 나올 때면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언론 연구가들이 와서 배우고 가는 月刊朝鮮이 되길 기대해 본다.
 

월간조선 200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