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이 쓴 편지와 함께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사진.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가 편지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왼쪽부터 나혜석,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 1927년 6월 편지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나혜석학회]
나혜석의 유화 ‘정원’.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31년 11월 29일, 서른다섯의 나혜석은 일본인 지인에게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일본 제국미술대전에 입선한 ‘정원(庭園)’을 팔기 위해서였다. 공무원 월급이 50원이 채 안 되던 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친필 편지·엽서 6통과 관련 사진이 발굴됐다. 그림이나 책에 서명한 외에 그의 육필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1927∼34년 일본의 실업가로 조선 여학생들을 후원 했던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에게 보낸 일본어 서한이다. 일본 구마모토대 강사 우라카와 도쿠에(여성학)가 오사카 모모야마학원에서 발견한 것을 초당대 서정자(국문학) 명예교수가 입수했다. 서 교수는 이 자료를 9월 1일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발족하는 나혜석학회 창립 총회에서 발표한다.
초당대 서정자 명예교수가 공개한 나혜석의 육필 편지. [사진 우라카와 도쿠에]
전통적 여성관에 정면 도전했던 그는 1931년 이혼한 뒤 점차 사회에서 외면받았다. 52세 때 서울의 한 무연고자 병실에서 신분을 함구한 채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그림을 팔려는 편지를 쓴 건 이혼한 해 말이었다. “ 과도기에 태어나서 예술을 위해서 살려고 했으나 시어머니, 남편의 몰이해 때문에 당분간 별거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다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사정 설명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나혜석의 영락이 시작된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인생의 절정이기도 했다. 제국미술대전 입선작이 도쿄를 거쳐 교토로 순회전을 다니던 때였다. 나혜석은 야나기하라 부부에게 바로 이 그림을 팔려고 시도한다.
“‘정원’은 파리 체재 중에 그린 것이어서 자신 있는 회심작입니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 만약 어르신 댁이 안 되면 따로 사들여 주실 분을 소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청한다. 현재 ‘정원’의 소재는 알 수 없다. 전람회 도록의 흑백사진으로만 그림의 완성도를 짐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