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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專用 이데올로기 비판 - 外勢와 左派에 협공당한 東아시아의 漢字

이강기 2015. 10. 13. 22:50
[時論] 한글 專用 이데올로기 비판
 
外勢와 左派에 협공당한 東아시아의 漢字
 
中國은 簡子化, 남북한은 한글 專用, 日本은 漢字 수호. 역사·전통·주체성을 말살하려 했던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의 희한한 共助로 漢字는 위기를 맞았으나 漢字 없이는 진정한 근대화·선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漢字語가 70%나 되는 우리말에서 漢字를 추방하자는 것은 언어를 소리化·암호化하자는 집단기만이다


金 正 剛
1940년생. 진주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정치학과 재학中, 6·3사태 배후조종과 「불꽃회」 사건으로 제적. 건국大 야간부 정치학과 졸업. 1962년, 1965, 1980, 국가보안법 위반복역. 통일민주당 金泳三 총재특별보좌역, 金大中 총재 신민당당무위원 역임.
金正剛 사회批評家

外勢와 左派가 추진한 漢字廢棄

 西歐外勢(서구외세)가 東아시아로 밀고 들어왔을 때, 근대적 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을 통과하지 못한 東아시아가 西歐에 비해 낙후되어 있기는 했지만, 東아시아는 이미 傳統(전통)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수준 높은 상부구조들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西歐의 식민지로 영구히 예속될 수는 없는 조건에 있었다. 그런데 西歐세력의 영구 지배를 방해, 위협하는 東아시아의 傳統이데올로기는 漢字(한자)를 그릇으로 하여 창출, 전파, 축적되고 있었다. 그래서 西歐外勢는 漢字를 제거함으로써 東아시아 傳統이데올로기의 源泉(원천)을 고갈시키려 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左派(좌파)가 수입된 西歐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상에 심취하여 東아시아의 傳統사회를 완전히 뒤집어엎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東아시아 左派도 傳統사상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가로막는 커다란 방해물로 간주했는데, 그 東아시아 傳統사상의 근본을 漢字로 보았다. 그래서 西歐外勢와 東아시아 左派는 각각 다른 목적에서 漢字의 廢棄(폐기)를 책동하게 되었다.
 
  중국의 문학가 魯迅(노신·루쉰)이 『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불망 중국필망: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할 것)』이라고까지 극언한 것은 그의 左派的 전통단절 사상에 기인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을 추구하였던 毛澤東(모택동·마오쩌둥)이 漢字 사용을 폐기하고 알파벳을 응용한 표음문자로 대치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결국 簡字化(간자화)로 낙착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漢字 폐기와 알파벳化 책동이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의 베트남인은 베트남 최다수 종교인 불교의 사원에 가도 거기에 쓰인 漢字 현판도 읽지 못하며, 선조들이 지은 아름다운 詩歌(시가)나 불경, 유학의 고전도 읽지 못한다. 심지어는 호치민=胡志明, 시에트리쾅=釋智光, 리인탕=連勝과 같은 동포, 지도자 이름의 뜻도 모른다.
 
 
  베트남의 漢字廢棄와 알파벳化
 
  봉건 중국의 위성국 중 중국의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小中華(소중화)」를 자처하였던 나라가 越南(베트남)과 朝鮮(조선) 두 나라이다. 1882년 프랑스 식민주의 군대가 하노이를 점령하고 베트남의 식민화에 착수하고 나자, 프랑스는 베트남 지식인의 傳統사상을 뿌리뽑고 베트남을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당시 베트남 지배계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베트남인이 문맹이었음을 기화로, 漢字는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특권계급이 백성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유물이라고 매도하면서, 누구나 쉽게 깨칠 수 있는 백성의 문자를 써야 한다고 이간·선동하여 漢字 폐기·알파벳 전용에 나서서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漢字 폐기·알파벳 전용 운동에 베트남 左派는 동조했는데, 베트남 左派의 동조가 프랑스 식민주의의 베트남 문자 알파벳化 성공에 커다란 助力(조력)이 되었다.
 
  베트남은 기원전 112년 漢武帝(한무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漢武帝는 그 즈음 한반도의 서북지방도 정복하였는데, 한반도에는 4군을 두었고 베트남에는 9군을 설치했다. 그 후 서기 939년 吳權(오권·고겐)이 베트남 독립왕조를 수립할 때까지 약 1000년간 베트남은 중국의 예속下에 있었다. 939년 독립 후에도 중국의 문화적 영향下에 놓여 있다가, 11세기 초 베트남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李朝(이조·리조)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베트남의 李朝는 과거제도뿐만 아니라 각종 중국 법제도를 도입하여 중국型 국가형태를 구성하고, 중국의 위성국인 상태로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베트남은 유사 이래 漢字를 文語(문어)로 사용해 왔고, 베트남어 낱말의 60%가 베트남 한자음으로 발음되는 漢字語(한자어)이다.
 
  베트남 한자음은 마스페로(Henri Maspero·중국학자·프랑스人)에 의하면 10세기 唐代(당대) 長安(장안) 방언에 기초한 북방 독서음이라고 한다. 현재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는, 17세기 프랑스 선교사 알렉산드 드 로드가 편찬한 「베트남·포르투갈·라틴어 사전」의 표기법을 기초로, 베트남이 프랑스 지배下에 있던 1885년 「正書法(정서법)」이란 다소 위선적, 戱畵的(희화적)인 명칭下에 강요되어 채택된 것이다.
 
  베트남과는 달리 일본은 일본어의 정확한 사용과 전통의 계승을 위해서는 漢字의 사용이 불가결함을 자각하고, 漢字와 假名(가나)를 혼용하는 문자 개혁정책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가나가 문자로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일본이 가나와 漢字를 혼용한다는 견해는 완전한 무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가나는 五十音圖(고주온도)만 알면 모든 일본어의 音韻(음운)을 표기할 수 있고, 인쇄체(가다가나)와 활자체(히라가나)까지 구비하고 있으므로, 문자와 발음이 일치하지 못하여 별도의 발음기호를 필요로 하는 알파벳에 비해도 오히려 우수한 문자일 수도 있다.
 
 
  日本 左派의 漢字 廢棄運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도 明治(명치·메이지), 昭和(소화·쇼와) 초기의 폭풍적 근대화 변혁 시기에는, 뒤떨어진 일본이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漢字를 폐기하고 표음문자인 가나만을 사용하든가, 아예 漢字와 가나를 모두 폐기하고 알파벳을 사용하든가, 漢字와 가나뿐만 아니라 일본어 자체를 폐기하고 영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하자는 과격한 주장까지 대두된 일이 있었다. 심지어는 일본인은 서양인에 비해 인종 자체가 열등하므로 서양인과의 혼인을 통하여 생물학적인 민족개량을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전한 후에도 漢字 폐기, 가나 전용, 영어 상용 등의 논의가 맹렬한 기세로 다시 제기되었다. 이때 일본에서도 漢字폐기운동의 선봉에 섰던 세력은 左派였다. 예컨대 讀賣新聞(요미우리 신문)은 지금은 일본의 右派를 대변하는 신문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신문의 제호도 讀賣報知(요미우리 호우치)였으며, 左派노선에 입각하여 漢字 폐기의 필봉을 강력히 휘두르고 있었다. 1945년 11월12일자 사설은 「漢字를 폐지하라」는 제목이었는데, 『漢字를 폐지할 때, 우리들의 腦髓(뇌수) 안에 있는 봉건의식이 소탕되며, 미국식 능률도 비로소 따라잡을 수 있다. 문화국가의 건설도 민주정치의 확립도 漢字의 폐지와 간단한 표음문자(알파벳)의 채용에 기초한 국민의 지적 수준 昻揚(앙양)에 의하여 촉진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패전 후의 일본에 있어서 절대권력이었던 미국도 「漢字 폐기·가나 專用」을 문자정책으로 시행하려 했다. 1946년 3월 미국으로부터 일본에 교육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이 漢字와 가나를 폐기하고 알파벳을 상용할 것을 일본 정부에 권고했다. 이 권고는 일종의 압력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과 보조를 맞추어 일본의 漢字폐기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カナモジカイ(가나 모지카이·가나 문자회)」의 松坂忠則(마츠사카 다다노리) 이사장이었는데, 그는 궁극적으로 漢字를 완전히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당시 42세로 漢字폐기운동의 행동대장격이었다. 그는 高等小學校(고등소학교) 중퇴생으로 젊었을 때에 漢字를 몰라 크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恨이 되어 漢字폐기운동에 저돌적으로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高等小學校란 당시 중학교를 가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2년간 더 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漢字를 폐기함으로써 민족의 傳統이데올로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의 최고 지도층은, 당시 절대권력이었던 미군 점령군 사령부 GHQ 당국과 맞서 漢字를 지키기 위하여 「가나 불완전론」을 전술적으로 전개하기까지 하여 漢字를 지켰다. 현재에도 당시의 일본 漢字 폐기의 주도세력이었던 「カナモジカイ(가나 문자회)」라든지, 「ロ―マ字會(로마자회)」와 같은 漢字폐기운동 단체가 있으나 그 세력은 지극히 약화되어 사회적인 영향력이 전혀 없다. 더욱이 이들의 주도下에 진행된 「漢字지명 바꾸기 운동」으로 인하여 일본內 수천 개의 漢字 지명이 가나식으로 바뀌었는데, 당지의 주민들로부터 『유서 깊은 우리 지명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는 심한 원망만을 듣고 있다. 이 지명 변경도, 진행되는 도중에 「暴擧(폭거)」라는 반대여론이 일본 전국에 비등한 결과 단호히 일체 중지되어 버렸다. 그 결과, 합리성과 간결성을 내세우면서 漢字지명 폐기를 주장했던 가나 專用 세력은 국민적 지탄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주체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일본은 지금도 가나를 「眞名(신나·진명·문자다운 문자·漢字)」에 대한 「假名(가나·가명·가짜 문자·혹은 임시로 쓰는 문자)」라고, 고대에서와 같이 그대로 부르고 있다. 漢字를 「眞名(신나)」로 보는 이유는 일본의 유구한 傳統이데올로기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漢字 폐기를 반대하는 견해의 선두에 서서, 漢字상용을 관철시켰던 新村手(신무라데·언어학자)는 漢字 우상 숭배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眞名에 대한 假名(가나)라는 명칭의 의미가 좋지 않으므로, 가나라는 명칭을 「國字」로 고쳐, 가나가 일본의 國字임을 분명히 하자고 일본 학계에 제의했으나, 일본 학계에서는 漢字도 이미 일본 國字라는 주장이 우세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西歐의 이론가들은 흔히 알파벳이 세계의 모든 문자 중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해 왔다. 가령 루소는 멕시코의 마야 문자는 원시, 중국의 漢字는 미개, 西歐의 알파벳만이 문명이라고 했다. 헤겔은 알파벳 속에서만 世界精神(세계정신)은 약동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 알파벳은 西歐語를 표기하기에 가장 우수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張庚(장강·장껑)은 1934년, 『漢字는 죽은 글자, 文言文(문언문)의 글자, 봉건의 글자』라고 했고, 魯迅도 『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불망 중국필망)』이라면서, 『漢字와 대중은 세불양립이다. …대중어의 보급은 라틴(알파벳)化뿐이다』라고 했다. 1964년 郭沫(곽말약·궈모)는 인민일보와의 회견에서 『앞으로 漢字는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영원히 박물관에 보존된다』고 말했다. 셋 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左派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漢字를 익히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로 보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漢字를 중국 봉건(=傳統) 사상을 축적·전달하는 도구로 보았던 것이고, 중국의 뿌리 깊은 傳統사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漢字를 폐기하고 중국 문자를 라틴(=알파벳)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中國 左派의 라틴化 抛棄
 
  이에 앞서 이미 1928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중국문제연구소를 설치하고, 토라그라프(언어학자·러시아人)에게 漢字의 라틴화를 연구케 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국제공산주의자였으며 소련 유학생이었던 瞿秋白(귀추바이), 吳玉章(우위강) 등에게 지령하여 「中國文字拉丁化方案(중국문자 라틴화 방안)」을 연구케 하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그의 저서 「마르크스主義와 언어학의 諸문제」에서, 『언어는 인간의 사회적 교류의 도구이며, 사회적 투쟁과 사회 발전의 도구이다』라고 규정한, 언어와 문자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 노선에 의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이 노선에 따라 1931년 9월에는 漢字의 라틴화 방안이 마련됐다. 방안의 내용은 로마 字母(자모) 26字(자) 중 「Q」, 「V」 2字를 없애고, 합성 字母 「ch」, 「sh」, 「zh」, 「rh」, 「vg」 5字를 첨가하여 29字를 만들어, 「北方話拉丁化新文字(북방화 라틴화 신문자)」라고 이름 짓고, 우선 소련 영토에 거주하고 있던 약 10만 명의 화교에게 실시했다. 나아가 마침내 1934년에는 중국의 上海(상해·상하이)에서 「大衆語運動(대중어 운동)」을 일으켜 漢字의 라틴화를 대중적 이데올로기 투쟁 차원에서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 左派의 급진적인 漢字폐기 노선도, 그 淵源(연원)에 있어서는 스탈린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던 세계 공산주의 문화투쟁의 一環(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스탈린은 거대한 중국 대륙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혁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에 바탕한 深奧(심오)한 문화와 그에 기초한 중국인의 傳統사상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공산주의 혁명 후에도 이 傳統사상이 중국을 소련에 종속시키는 데 커다란 장애물로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문화와 傳統의 핵심은 漢字라고 하는 「그릇」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漢字를 없애 버리려고 한 것이다. 1951년 毛澤東도 『文字必須改革, 要走世界文字共同的 音方向(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문자 공동의 표음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 左派의 漢字 폐기와 라틴화 운동은 중국 민중의 저항과, 중국 국가 지도부의 이성적 반성에 의하여 制動(제동)된 결과 簡字化(간자화)로 낙착되었다. 만일 라틴화 노선이 관철되어 중국이 漢字를 완전히 폐기하고 베트남처럼 알파벳 사용 국가로 되어 버렸다면 東아시아 문화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이 초래될 뻔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東아시아 문화의 뿌리인 중국 고전문화의 초토화이다.
 
  1945년 광복 후 한반도에서도 漢字 폐기를 주장한 主力(주력)은 계급투쟁 이론을 문자 개혁에 도입했던 左派 한글학자들이었고, 이에 따라 북한은 超급진적으로 무조건적 한글 전용을 실행했었거니와, 남한의 한글 전용 정책을 주도해 나갔던 崔鉉培(최현배) 교수에게도 계급투쟁적 관점의 영향이 왜곡된 형태로나마 침투되어 있었다. 그는 『우리가 漢字를 안 쓰고 한글만 쓰자고 부르짖는 첫째의 목적은 사회 대중의 지식을 넓히며 그 생활을 꾀함이다. 낡은 시대의 문화는 일반 근로대중을 희생으로 하여 소수 계급의 문화와 행복을 꾀함에 있었지만, 새 시대의 문화는 반드시 대중을 본위로 하는 문화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하자면 최선의 수단은 문자와 지식을 소수 특권계급의 낭중에서 빼앗아 일반 대중에게 나누는 일이다. 漢字를 안 쓰고, 한글만 쓰자는 것이 곧 이 목적으로 나가는 큰 길이요, 바른 길이다(글자의 혁명)』고 했고, 『漢字는 제 본연의 사명을 이미 다한 지가 오래다. 漢字는 한국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중국인 또는 그밖의 동양인에 대해서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한글만 쓰기의 주장)』라고 했다.
 
 
  金日成의 漢字 부활
 
  북한은 정권 성립 직후인 1949년, 당시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語文路線(어문 노선)과 국내 좌파 語文이데올로기의 牽引(견인)에 의해 漢字의 사용과 교육을 즉시 전면 폐지했는데, 1964년 金日成이 『漢字 문제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와 관련시켜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금 남조선 사람들이 우리 글자와 함께 漢字를 계속 쓰고 있는 이상 …그러니 일정한 기간 우리는 漢字를 배워야 하며 그것을 써야 합니다』라고 敎示(교시)함으로써 漢字교육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金日成은 1966년 다시 『남조선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漢字교육이 필요하다』고 동일한 취지로 敎示했다. 이러한 金日成의 敎示에 따라 1968년부터 북한에 漢字교육이 재개됐고, 중학 1학년(=초등 5학년)부터 고등중학(=고등학교)까지 1500字를 가르치고, 대학까지 3000字를 가르치게 되었다. 대학까지 3000字를 가르치게 된 것은 1970년 金日成의 세 번째 敎示에 의한 것이다. 1970년 敎示에서 金日成은 『지금 漢字 기초가 약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3000字 정도면 충분합니다. 초중등학교에서 기술학교까지 2000字 정도, 대학에서 1000字 정도 배우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金日成은 스스로 漢詩(한시)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金日成은 왜, 「전통 분쇄」, 「식민지 해방투쟁에 있어서의 민족어문 주체성」, 「無産대중 문화의 신정립」이라는, 左派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스스로 폐기했던 漢字를 부활시켰을까? 漢字교육 부활을 위해서 金日成은 「남조선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었다. 즉, 남조선에서 漢字를 쓰고 있으므로 남조선 혁명을 주도해야 할 북한의 「선진 지식분자」는 漢字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그러나 金日成이 세 번째 漢字교육 교시를 내린 1970년에, 한국은 朴正熙 대통령이 한글 전용을 선언함으로써 漢字를 포기했다. 즉 「남조선 혁명을 위해서」 漢字 습득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金日成은 漢字교육 부활의 명분을 「남조선 혁명」에서 구했지만, 본심은 漢字 폐기로는 조선어 어문생활이 완전하게 되지 않음을 깨달았음과 동시에, 漢字를 습득해야 일본, 중국, 동남아와 국제교류가 가능하며, 金日成이 중요시하던 조총련으로 대표되는 在일본 左派세력과도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金正日이 漢字교육 강화를 지시하기도 했다. 1997년 4월 평양에서 발행된 「문화어 학습」은 『학생들이 한자어의 뜻을 모르고 방탕하게(되는 대로 마구) 쓰는 현상이 있다. …한자 교원들은 말을 바르게 쓰는 기풍을 세우기 위해 漢字를 깊이 있게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여, 漢字를 폐기하면 조선어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민족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문 전용 정책이 관철되어야 한다』(2000. 8. 11. 北京, 「조선어 학술 토론회」에서 북측)며, 오직 편협한 政治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국문 전용」을 고집하고 있다.
 
 
  중국 대륙의 方言을 統合해 온 漢字
 
  중국의 古史書(고사서)는 항상 夏·殷·周(하·은·주)를 三代라고 병칭하여 공통시대로 간주하고 있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시대의 개시 시기로, 중국의 국가발생 시기임과 동시에 사회발전 단계로는 고대 노예제 사회에 속한다. 漢민족은 스스로를 夏華族(하화족)이라고도 칭하는데, 이 하화족은 夏·殷(=商)·周 세 종족의 통합에 淵源(연원)을 두고 있다. 夏족은 황하 유역, 즉 하남성 서부, 산서성 남부, 하북·산동·호북성의 일부를 근거로 하고 있었다. 殷(=商)족은 산동과 하북 남부에 있다가 하남 지역으로 내려와 夏족을 덮쳐 殷왕조를 세웠다.
 
  周족은 섬서, 감숙 일대에 있다가 殷왕조를 무력 전복하고 周왕조를 세웠다. 이와 같이 漢민족은 그 발생 초기부터 언어가 다른 여러 종족이 통합되어 형성된데다가, 중국 대륙의 면적 또한 광대하다. 더하여 이 혼혈성 夏華族이 광대한 대륙의 수많은 종족을 또다시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동화되어 왔으므로 잡다한 이질적 요소가 漢語에 흘러 들어왔다. 그리하여 수많은 方言(방언)이 생겨났다.
 
  고대에도 「左傳(좌전)」에 의하면 春秋時代(춘추시대) 황하 동쪽의 晋나라와 서쪽의 秦나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孟子(맹자)」에 의하면 북방의 齊나라와 남방의 楚나라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중국어의 방언은 대략 7가지 종류로 크게 나누는데, 이것이 「現代漢語七大方言區(현대한어7대방언구)」설이다. 크게 나누어 7대 방언이라 하지만 이것이 세분되면 수백 종이 된다. 중국의 方言은 한국의 사투리와는 다르다. 외국어처럼 의사 표현이 완전히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方言 간에 의사소통을 하려면 통역을 세워야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방대한 수의 중국 대륙의 거주자들을 하나로 묶어 오늘의 중화민족으로 결속시켜 낸 것은 漢字이다. 광활한 대륙에 분산해 살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은, 口語(구어)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지만 漢字에 의한 筆談(필담)으로는 대륙 어디에 가도 의사소통이 된다. 민족통합의 이데올로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서적인데, 서적은 어디를 가나 같은 漢字로 쓰고 읽는다.
 
  그래서 지식인의 이데올로기가 통합되고 지식인을 매개로 하여 민중의 공동체 의식이 통일되는 것이다. 또한 漢字는 언어를 바로잡아 언어의 分化를 막고 언어의 공통성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漢字가 없었다면 광활한 중국 대륙은 유럽처럼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漢민족도 언어와 문자가 완전히 다른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민족으로 분화되었을 것이다.
 
 
  漢字는 東아시아의 공통 國字
 
  중국에서는 이미 3000여 년 전에 漢字가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의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는 1000여 년 전까지도 문자가 없었다. 문자가 없었던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의 각 민족은, 선진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고 자기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漢字를 수입하여 자기 민족의 언어에 맞게 변형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에서 漢민족이 발명한 漢字는, 고대 중국의 선진 문화와 더불어 東아시아 각국으로 전래되어 그 나라들의 國字로 되었고, 東아시아 각국이 모두 漢字를 자기 나라들의 文語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漢字는 東아시아의 공통 國字(국자)로 되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대 箕子朝鮮(기자조선)시대 8조 法禁(법금) 중 3개조가 漢書地理志燕條(한서지리지 연조)에 전하는데,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錢五十萬(살인자는 즉시 죽이고, 상해자는 곡식으로 변상하며, 도적질한 자는 남자는 종으로 삼고 여자는 여종으로 삼으나 용서받으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贖錢(속전) 50만이라는 화폐 단위에서 漢문화, 漢字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錢이라는 화폐 단위는, 뒤에 東아시아 전체에서 보편적인 화폐단위로 채용되었지만, 箕子朝鮮 당시에는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하고 선진 漢 경제권에서만 漢字 표시로 사용되고 있었다.
 
  箕子朝鮮을 멸망시키고 衛滿朝鮮(위만조선)을 건국한 衛滿은 그 자신이 燕人(연인)이었다. 衛滿의 교양과 언어는 漢式이었을 수밖에 없다. 漢武帝(한무제)는 기원전 108년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箕子朝鮮, 衛滿朝鮮, 漢四郡 시대에 漢字는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이때 반도 남부의 三韓에도 漢字가 유입되었다. 漢字는 三韓에 들어오기 전 이미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三韓에 유입될 당시의 漢字는 이미 형태가 완성된 것이었다.
 
  고대 일본은 처음에 중국 남방의 六朝文化(육조문화)와 접촉하였으므로 이로부터 漢字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유입된 漢字의 발음은 六朝音이었다. 육조가 중국의 남방에 있었고 중국 남방의 대표적인 지역 제후국이 吳(오)였으므로, 일본에서는 六朝音으로 발음되어 유입된 漢字의 발음을 吳音(오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吳音은 대부분이 六朝로부터 일본으로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六朝로부터 한반도와 대마도를 거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 후 7~8세기에 일본의 遣唐使(견당사)나 유학승이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漢字와 漢語를 다시 배워 왔는데, 이때 배운 漢字와 漢語는 남방 육조의 것이 아니고 북방 隋唐(수당)의 것이었으므로 吳音과는 크게 달랐다.
 
  이때 유입된 漢字의 발음은 唐朝(당조)의 長安音(장안음)이었다. 일본인들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패권을 쥐고 있던 隋唐의 音을 정통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이 長安音으로 발음하는 일본 한자음을 漢音 또는 正音이라고 불렀다.
 
  그 후 南宋(남송)으로부터 元(원), 明(명)에 걸쳐서 일본의 승려들이 중국에 왕래하였는데, 이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에 전래된 漢字의 宋, 元, 明 시기의 발음을 唐宋音(당송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漢字는 중국의 漢민족이 발명하였으나 유사 이래 2000년 이상에 걸쳐서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주변으로 전파하여 토착화하였으며, 결국에는 東아시아의 공통 國字로 되었다.
 
 
  森羅萬象·一切唯心을 표현할 수 있는 심오한 문자
 
  漢字는 單字(단자) 한 글자 한 글자가 그 자체만으로 뜻을 완성하는 사실상의 單語이다. 漢字의 한 글자, 한 글자가 單字인 채로 單語를 구성하게 된 원인은, 원래 漢字로서 표기하려고 했던 漢語 그 자체의 특징에서 기인됐다. 漢語의 單語 자체가 원칙적으로 모두 한 음절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한 음절로 구성되어 있었던 漢語의 單語 하나하나에, 漢字 하나씩이 발명되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單字 한 자, 한 자가 단어인 漢字는 1자, 2자 또는 3~4자가 합성되어서도 單語를 형성한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뜻을 완성하고 있는 漢字의 單字를 1자, 2자 또는 3~4자씩 합성시켜 뜻이 다른 單語를 만들어 간다고 하면, 그 상호조합에 의하여 창출되는 단어의 수학적인 集合數(집합수)는 무한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고유의 의미를 가진 임의의 單字를 조합하여 무한수의 單語를 만들어 내면, 이 무한수의 造語(조어)에는 모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므로, 森羅萬象(삼라만상)과 一切唯心(일체유심)을 遺漏(유루)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표음문자만을 사용하는 언어에서는 새로운 현상이나 새로운 思惟(사유)를 발견하거나 창출할 때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일정한 소리 단어로서 그 현상이나 사유를 이름 지은 후, 그에 관한 공감대를 얻고,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表意文字(표의문자)인 漢字의 경우에는 각각의 單字가 이미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필요한 單字들을 결합하기만 하면, 쉽게 새로운 현상이나 사유의 개념을 표현할 수 있는 單語를 발명할 수 있고, 그 발명된 單語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漢字의 심원한 表意性, 무한한 造語性(조어성), 시각적 象形性(상형성)에 따른 速讀性(속독성)을 인정하면서도, 흔히 학습의 곤란성을 漢字 폐지의 불가피성으로 내세운다. 漢字는 배우기 어렵고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배우는 사람에게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예건대 西歐에서 東아시아의 漢字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라틴어를 익히기 위하여, 西歐 학생은 東아시아 학생이 漢字를 익히기 위하여 소비하는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西歐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졸업 때까지 라틴어, 그리스어의 학습을 위하여 평균 4660시간의 수업을 받는 데 비하여, 의사가 그 전문지식을 얻기 위하여 3360시간, 법관이 사법시험까지는 3340시간을 소모할 뿐이라는 통계가 있다. 西歐문화의 뿌리로서 우리의 漢文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라틴어에 대한 西歐人들의 학습노력은 이와 같이 철저하다.
 
  西歐人들은 자기네 언어의 뿌리인 그리스어, 라틴어에 대한 학습이 충분해야 비로소 자기들의 현대어를 착오 없이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있어서 論理語와 感性語
 
  유학의 대표적인 고전인 論語(논어)의 총 글자수는 대략 1만字인데, 字種(자종)은 1500字 정도이다. 일본에서 常用漢字로 쓰고 있는 것이 현재 1945字이다. 일본은 언어와 문자 생활에서 漢字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1945字의 常用漢字를 사용함므로써 아무런 불편이 없다. 漢字 자전에 실려 있는 字種이 수만 자이지만, 그중 2000字 정도를 습득케 하면 충분하다.
 
  정밀한 사유작업과 그 전달을 위해서는 論理語(논리어)와 感性語(감성어)가 필수적이다. 감성의 세계는 원초적 공동체에 같이 속한 사람들만이 가장 절실하게 공유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韓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者는 누구나 한국어를 표음문자인 한글로 전달받을 때 가장 절실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논리를 표현하는 論理語(논리어)는 다르다. 정확한 論理語의 生成(생성)은 知的 연마의 장구한 역사적 축적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더욱이나 근대적 論理語는 과학과 학문의 근대적 비약의 결과로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근대적 論理語를 산출한 민족사회가 근대사회·근대국가로 진입한 후에야 창출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가 개시될 때, 한국은 일본과 중국에 비해 후진적인 위치에 있었으므로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학문과 기술을 수입하였다.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학문과 기술을 수입하면서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위한 論理語도 함께 수입되었다.
 
  漢字는 東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한 일본에 의하여 근대적 論理語로 제련되었다. 예컨대 哲學(철학), 經濟學(경제학) 등과 같은 단어가 그렇고, 電氣(전기), 細胞(세포), 甲殼類(갑각류)와 같은 용어가 그렇고, 심지어는 「演說(연설)」과 같은 보통 말도 영어의 「Speech」를 일본의 福澤諭吉(후쿠자와 유기치)가 漢字로 번역한 것이다. 반면 洗禮(세례), 福音(복음), 默示(묵시)와 같은 기독교와 관계된 용어는,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왔던 서양의 선교사들이 서구의 종교용어를 漢字로 번역했던 것이다. 또한 과학용어 중, 幾何學(기하학), 代數學(대수학) 등은 서구용어를 중국인이 漢字로 번역한 것이었다. 즉 현대 한국어에 있어서 論理語의 대부분이 일본어와 중국어에서 유래함은 불가피했던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韓國語에서 日中의 單語를 척결하자는 주장은 無知의 소산
 
  일정한 언어권에서 언어는 상호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준다. 漢字를 공통 國字로 상용하는 東아시아 언어권에서 이웃한 일본어나 중국어가 한국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특히 일본이 먼저 근대화하여 서양의 학술·기술 용어를 한국보다 먼저 수입·번역함에 따라 한국이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사대주의도 모방주의도 아니며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西歐에서 선진 문명이 전래되어 오므로 일본이 선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과거 오랜 기간 중국에서 선진 문명이 전래되어 왔을 때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선진 문명이 전해졌고, 백제의 王仁(왕인)은 論語와 천자문을 일본에 가지고 가 漢字를 전해 주었다고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일본식 용어」를 언어생활에서 추방하자는 무지한 운동을 태연하게 펼치고 있다. 「일본식 용어」를 언어생활에서 모두 추방하고 그 모든 용어를 새로 만들어 낼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학문과 기술이 국제적 교류 없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학문과 기술은 활발한 국제적 교류가 있어야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韓·中·日 3국 간에 공통 용어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이다.
 
  한국어에는 일본어뿐만 아니라 漢語도 많이 混入(혼입)되어 있는데, 한국은 문자생활에서 漢族의 문자인 漢字를 도입했으므로 중국식 언어의 혼입량은 일본식 용어의 그것에 비길 바 없이 많다. 우리가 흔히 「중국어」라고 하는 언어는 엄밀히 말하면 「漢語」인데, 일본식 용어와 마찬가지로 중국식 용어도 추방할래야 할 수 없다. 漢字 용어가 한국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이르거니와, 외견상 순수 한국어인 것 같은 용어도 실상은 漢字와 함께 유래한 漢語인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한국인 대다수는 「자지」나, 「보지」와 같은 원초적 신체어가 순수한 한국어인 줄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語源(어원)이 순수한 漢語이다. 「자지」는 漢語의 鳥子(쟈오즈)이고, 「보지」는 漢語의 八子(바즈)이다. 어원의 유래를 상고하면 鳥子는 象形的(상형적) 묘사이며, 八子는 다리 사이에 있는 모양을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漢字 용어가 한국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0%에 이른다는 것은, 그 사실이 단순히 漢字가 한국어에 차지하는 양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漢字가 도입되기 전의 한국어는 오늘날의 한국어에 비해 低發展(저발전) 단계의 유치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반도에 漢字가 도입되었을 당시의 한반도의 사회발전 단계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초입에 불과하여 기술의 발전이나 추상적 思惟(사유)의 수준이 현대사회에 비하여 매우 미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韓민족이 漢字를 사용한 이후 학문과 기술 방면의 추상적 용어는 漢字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추상적·학문적 분야에서는 고대 한국어는 발전을 멈추고 東아시아의 공통 國字였던 漢字로 대신해서 발전해 왔음을 의미한다.
 
 
  漢字語를 한글로 표기하면 言語가 아닌 소리로 변질
 
  feedback(피드백)은 전기공학에서 出力(출력)된 정보를 다시 한 번 入力(입력) 방향으로 되돌려 주어서 再출력을 조절함으로써 시스템의 전류 평형을 유지시키는 기술인데, feed(공급)와 back(되돌림)의 합성이므로 軌還(궤환)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기술을 가리키는 묘사능력이 原語(원어) 「feedback」보다 漢字번역 「軌還」이 더 우수하다는 것이다. homeostasis(호메오스타시스)는 체온 등 우리 몸의 몇 가지 필수적인 상태가 외계의 영향과 독립해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인데, 이것이 유지되지 않으면 생명을 지속시킬 수 없다.
 
  homeostasis는 home(가정)과 stasis(안정 상태)의 결합인데, 恒常性(항상성)이라고 번역했다. 최근의 예를 들어 보면 food and mouth desease는 口蹄疫(구제역)이라고 번역하는데, 漢字의 뜻은 「입과 발굽에 생기는 돌림병」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원어는 「입과 발에 생기는 병」이라는 뜻인데, 영어 원어의 묘사력이 漢字 번역어에 비해 오히려 불완전하다. 口蹄疫은 영어의 표현처럼 입과 「발」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입과 「발굽」에 생기는 「돌림병」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여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현상이 아닌 정신 속에 일어나는 무형적·추상적 唯心作用(유심작용)인 종교·철학이나 사회과학적 용어는 한글 전용으로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Materialism은 唯心論(유심론)과 대립되는 철학이론인데,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며 정신은 이차적이고, 물질로서의 세계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영원하고 무한하며 神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객관적 사물이 인간의 주관적 의식 밖에서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철학의 이념체계다.
 
  漢字로 唯物論(유물론)이라 번역한다. Spiritualism은 세계는 본원적인 정신의 現象化(현상화)이거나 단순한 환영에 불과하며, 따라서 눈앞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설이다. 唯心論(유심론)이라고 번역한다. 한글 전용으로 이런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거의 번역불능이다.
 
  또한 최근 한국에서는 漢字를 쓰지 않고 한글만을 전용하면서 漢字의 단어를 단순히 한글 소리로 표기하는 문자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이것은 집단적 自己欺瞞(자기기만)의 일종으로서 단어와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模糊(모호)에 떨어지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표음문자를 전용하는 西歐語의 경우, 소리로 된 單語(단어)가 먼저 생겼고, 다음에 표음문자가 나와 單語의 음을 복사했던 데 반하여, 한국어의 漢字 단어는 소리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 漢字에 의한 表意(표의) 단어가 먼저 생겼고, 그 漢字 단어의 字音(자음)에 따라 한국어의 발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漢字를 폐기해 버리면, 발음하는 단어의 근본 뿌리가 없어져 버린다. 사실상 단어 자체가 없어져 버리고, 발음은 의미 없는 발성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漢字로 된 단어를 발음할 때, 그 단어를 발음하는 측이나 듣는 측이 모두 발음의 배후에 있는 실체인 漢字를 상상함으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인데, 漢字를 없애 버리면 발음의 배후에 있는 실체를 지워 버리게 됨으로써 의미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國漢 混用해야 민족주체성 지킬 수 있다
 
  韓민족의 원류인 三韓을 건설한 여러 부족은 언어와 민족의 형성기였던 석기시대에 이미 한반도에 유입되어 있었다. 석기시대에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서 정착한 부족으로 구성된 三韓을 뿌리로 하여, 토착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이 신라였고, 그 후에 만주로부터 流移(유이)해 온 부족이 한반도의 先住(선주) 마한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건국한 정복국가가 백제였다.
 
  고구려·백제의 지배계급은 역사시대 이후에 만주의 扶餘(부여)로부터 내려온 뿌리가 같은 정복집단이었다. 고대 민족을 구분하는 결정적 표징인 무덤 형식이 고구려와 초기 백제는 「積石塚(적석총)」이고, 신라는 이와는 판이한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다.
 
  고구려·백제의 고분에서는 신라와는 달리 금관도 출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라와 고구려·백제 사이에는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金庾信(김유신)이 「三韓一統(삼한일통, 三國史記)」을 맹세했을 때의 「三韓」은, 김유신이 당시 고구려, 백제가 「强占(강점)」하고 있다고 간주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옛 강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라에 의해 삼국통일이 완성됨으로써 오늘의 韓민족이 창출되었지만, 신라의 원뿌리, 韓민족의 원뿌리는 三韓이다.
 
  신라가 三韓의 하나였던 진한 여러 소국 중에서 斯盧(사로)로부터 출발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史實(사실)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국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시가인 鄕歌(향가)나 韓민족의 뿌리를 밝혀 주는 最古의 통사인 三國史記(삼국사기), 三國遺事(삼국유사)도 모두 漢字로 쓰여져 있다.
 
  나아가 고구려의 유물인 廣開土大王碑文(광개토대왕비문)도 1800여 자의 漢字로 기록되어 있다. 史記(사기)에는 백제도 이미 4세기 중반에 漢字를 사용하여 백제사인 「書記(서기)」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자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과거·현재·미래의 연결 기능, 즉 말의 한계성인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기능이다. 漢字를 폐기하면 韓민족은 현재와 과거의 연결을 단절해 버리게 된다. 詩歌(시가)는 민족의 정서를 표현하며 通史(통사)는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것이므로, 鄕歌(향가), 三國史記(삼국사기), 三國遺事(삼국유사)는 民族이데올로기의 원점이다.
 
  이것들은 漢字로 쓰여 있으므로, 漢字를 잊어버리면 우리 韓민족은 民族이데올로기의 원점을 잊어버리게 된다. 민족의 傳統과 단절되면, 민족 주체성도 상실한다. 4세기 말, 면적 3만km2 인구 30만에 불과했던 소국 신라가, 면적 300만km2 인구 200만의 고구려와 면적 8만km2 인구 100만 이상의 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한 것도 三韓의 傳統에 기초한 신라 공동체의 전통성, 단일성, 주체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월간조선 2003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