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서울대 비교문학 박사 졸업]
[技巧와 技術의 文學]
유순호의 ‘겨울 妖精’과 ‘살구꽃이 필 때’를 중심으로 김성희 서울대 비교문학
박사과정
들어가며 수필이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론을 들어 작품의 형식을 설명한 이래로, 현대의 문학은 형식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줄곧 형식창조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런데 문학의 한 장르로써 수필의 낱말을 풀이해보면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로
되어있다. (에센스 국어사전)’ 여기서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한 편의 문학작품에 있어서 발단, 전개 및 종결에 이르기까지의 통일성과
유의미성을 가진 행동의 인과적 연결이 전혀 필요 없다는 설명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 작품의 주된 재료를 결합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 없으며,
인간의 운명적 특성과 사건, 그리고 상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도 작가의 신념이나 의지를 표출하는 기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기능이 필요하지 않고 기술(記述)만 필요한 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 한 세기 남짓한 동안 한국의 수필이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비좁았던 원인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분명한바 ‘형식이 없는 글’은 의미가 없으며,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은 재미가 없는 법이다. 나아가 한편의 글이 서두가 없고, 중간이 없고, 종결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아무데서나 시작 할 수 있고, 또
아무데서나 마음대로 끝낼 수도 있다면, 그런 글은 결코 문학작품으로 보아줄 수가 없는 법이다. 이런 글을 보통 잡(雜)글, 또는
잡문(雜文)이라고 부르는데 사전에서는 수필보다도 더 賤하게 ‘되는 대로 쓰는 글’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일정한 길이의 독립적이고 완성된 하나의
세계로서의 형식이 없는 ‘생각나는 대로’, ‘되는 대로’ 쓰는 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수필을 본격문학으로 끌어올리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던 선구자가운데 한 사람으로 피천득은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곧이어 ‘수필은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바, 이 차가 방향을 갖지 아니한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고
경고를 주었고, 김시헌은 ‘수필은 길이가 짧지만 소설이 담겼고, 리듬은 없지만 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필은
무형식의 글이 아닌 유형식의 글’이며,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닌, ‘소설 같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기교의 글’임을 간접적으로 시인 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편의 수필작품이 잡글, 또는 잡문수준을 넘어
문학작품으로 변화하자면 오로지 문학작품이 갖는 예술성 즉 문학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문학성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문학의 개념에서 보면 물론 치밀한 묘사, 예리한 구성력 등 문학작품으로서의 조건을 잘 갖췄는가도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주요하게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판가름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문적인 시인, 소설가, 수필가 등 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자, 연예인,
정치인, 사업가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까지도 누구나 손쉽게 그리고 폭넓게 접근하고 참여할 수 있는 수필에 대하여 문학성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저변화 확대를 규제하고 억압하여도 되는 것일까 는 의문이 인다.
이는 한국의 수필문학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의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은 조선족문학에서의 수필장르가 빠져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만약 한편의 수필작품이 작품자체로써 이미 자족적이고 완결된 구조가 되었다면
비평가가 그것을 평론해야 할 하등의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오늘의 수필작가들이 봇물마냥 독자들에게 쏟아내고 있는 수백 수천편의 수필들이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의 수필’일까, 아니면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글’일까를 살피는 하나의 기준과 표본을 만들어보는 것은 얼마든지 필요하다고 본다.
수필을 그냥 단순 수필로 부르지 말고 ‘수필문학’, 또는 ‘문학수필’로 강조하여 부를 때 더욱 그러하다.
필경 문학이란 문학적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에 의해서 생산되어지는 전문적인 생산물이일 수 밖에 없다. 오로지 그런 생산물만이 전문적인 품질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품질은 바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그 문학성을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지극히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내용을 특별히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글’인가를 외면하고, 보다는 무엇 때문에 ‘문학이라는 이름의 수필’인가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논의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까닭에서다. 뿐만 아니라 엄연히 문학의 한 장르로서 수필은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글’쪽으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사실 누구나 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학이라는 이름의 수필’보다는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글’이 독자들 앞에 요지부동의 형태로
버티고 있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똑같은 연꽃 모양의 연적(硯滴)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진
균형(均衡)속의 파격(破格)’ (피천득의 ‘청자연적’)을 희구하는 시선으로 유순호의 최근 ‘문학수필’ 작품들을 검토하여 그 보늬를 한번 열어
보고자 한다.
살펴보기
➊ 소재의 형상적 발견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글’이라는
말은 문학화가 덜 되었거나 아니면 아주 안 된 잡글 수준의 문장이라는 뜻이다. 수필은 ‘문학이라는 이름의 수필’이 되어야지 ‘수필이라는 이름의
잡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문학이란 본질상 창작이며, 창작은 상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시를 가리켜 서정적 상상의 미학이라
하고, 소설을 가리켜 허구적 상상력의 산물이 라고 한다면, 수필도 또한 관조적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모든 수필의 글감으로 시작되고 있는 ‘신변잡사’를 어떤 식으로 상상하여 창작 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수필의 모든
글감은 ‘신변잡사’에서 시작되는 것일 가는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문학의 성격이 상상을 떠나서는 거론의 가치조차 없어진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조선족의 수필문학은 ‘수필’이란 무엇인가는 국어사전의 풀이에 갇혀있었고, 좀 더 나아가 ‘자기 체험적’, ‘자기 고백’문학이라는 이론에
빠져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관조적인 자기 고백의 화려한 미문을 만들어냈다하더라도, 그것은 언제까지라도 ‘신변잡사’에서 고지식하게 ‘신변잡기’로만
흘러왔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신변잡기’라는 이 낱말자체가 이미 국어사전에서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적은 수필체 글’로 풀이되어 있다. 위에서 이미 짚고 넘어갔던 수필이란 낱말해석을 여기에 가져다붙이면 한마디로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일을 형식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또는 되는 대로 적은 글’이 ‘신변잡기’인 것이다. 즉 신변잡기의 소재는 이미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꼭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자기의 일’로만 한정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이것은 자기의
주위에서 일어난 ‘자기의 일’ 뿐이 아닌, ‘남의 일도’도 모두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여주고 있다. 이는 또 ‘자기의 일’과 ‘남의
일’이 각각 떨어져서 제각기의 소재로 되는 것만이 아니고, ‘자기의 일’과 ‘남의 일’이 함께 하나의 소재로도 될 수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이렇게 하여 ‘나’와 ‘남’이 합쳐져 ‘우리’의 이야기가 될 때, 작은 소재 하나가 ‘나’와 ‘너’ 뿐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 나아가 인류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현대문학 이론에서 수필의 현대적 개념을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고 하는 뜻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수필의 자그마한 소재 하나가 ‘나’ 자신만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재로 ‘남’을
관조하게 되고, ‘남’의 이야기로 ‘나’를 관조하면서 ‘너’와 ‘나’로 관조된 수필의 문학정신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고 인류 전체의
정신으로까지 이어져가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➋ '겨울 요정'에서의 '나'와 '남', 그리고 '우리'의 창조적
창작발상
이 작품의 소재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는 氣象상식에 대한 지식이다. 이 말은 일기예보 기술이 따로 없던 시대에 겨울
날씨를 예측하는 주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주로 시베리아의 한랭기후에 속하는 중국의 동북부나 한반도의 겨울 날씨는 ‘삼한사온’이라는 이 말
한마디만 알아두면 겨울의 날씨를 예측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상이 발달한 뒤에는 그것이 딱 맞는 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운 줄 알았는데, 춥고, 추운 줄 알았는데 더워서, 추운 날에 여름옷을 입고 나가고, 더운 날에 겨울옷을 입고 나가다가 망신을
당한다는, 낯익고도 보편적이다 못해, 말 그대로 우리 생활 속의 항사다반사와 같은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이 변덕을 부리는 날씨와 맞서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과, 맞서지 말고 그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우주적 주제를
형상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➌ '겨울 요정'의 형상적 창작발상
이 작품은 첫 시작부터 ‘변덕부리는
날씨’가 작가에 의해 ‘심술궂은’. ‘변덕쟁이’, ‘겨울 요정’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자체가 더 할 나위 없는 창작
발상이다.
➍ '겨울 요정'에서의 주제의 형상적 파악
'심술궂은 妖精을 달래서 데리고 놀고 싶은 생각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여전히 혼자서 즐거워하는 심미파가 되어 妖精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진다. 바보스럽게 점잖은 나는 그렇게라도 웃기는 신사풍이 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 작품의 주제는 위의 拔萃문에서 첫 머리에 있는 ‘심술궂은 요정’에서 이어지고 있는
종결어속의 ‘웃기는 신사풍’이다. 주제의 형상적 파악은 여기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대답은 분명하게 하나로 귀납되고 있다. 변덕 많은 ‘겨울
요정’을 달래서 데리고 놀지 않고 ‘요정의 놀림을 즐겁게 받아가면서 요정을 즐겁게 해주는 심미파’로 살아가겠다는 것이 이 주제의 문학적
대답이다.
❺ 소재의 창작형상화
'길이는 짧지만 소설이 담겨있어야’(김시헌) 하는 수필에서의 상상은
시나 소설의 상상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아야 함은 두말할 것 없는 일이다. 한 작품의 창작적 형상화는 주어진 소재에 대한 작가적 상상을 떠나
결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라고 해서 규칙 없는 제멋대로의 날갯짓은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수필이라는 장르의 문학자체가 안고 있는
편폭의 제한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겨울 요정’에서 보면 주로 세 가지 면에서 소재에 대한 창작양식을 구성하고 있다.
ⓐ
'겨울 요정'으로 비유(은유, 상징)된 겨울 날씨 ⓑ 겨울과 요정에 주입된 시적 정서의 산문적 형상화. ⓒ 시적
리듬의 산문적 서사.
이 세 가지의 양식을 통하여 ‘겨울 요정’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을 진행한 것이다.
이것이 ‘겨울 요정’에서 사용된 기본 창작 개념이다. 결과적으로 노린 것은 ‘무엇이 심미파’이며, ‘무엇 때문에 심미파’이며, ‘심미파가 안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나’로 접목하여 ‘겨울 요정’에 대한 관조로 형상화한 것이다. 철학적 주제라는 것은 관념의 세계로써 그 자체로는
형상성을 갖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을 통한 형상 창작은 우리에게 관념을 어떤 형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2. 유순호 ‘문학수필’의 문학화
➊ '겨울 요정'에서의 창조적 구성작업
작품은 요정으로 은유된 날씨라는 변덕쟁이를 상대로 펼쳐가고 있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총 3단계를 거쳐 구체화시키고 있다. ‘1단계’는
사흘 춥고, 나흘 더워지는 겨울 날씨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설사 추운 날씨 (삼한) 일 때에도 창턱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해볕에 또 깜빡
속아버리는가하면, 정작 창턱을 넘어 길게 비쳐 들어와서는 봉창 같은 데까지 구석구석 비추고 있을 때에도, 계속 추운 줄 알고, 꽁꽁 쓰고나갔다가
이번에는 진짜로 더운 날씨로 바뀌는 바람에 땀을 뻘뻘 흘리고 돌아들어온다.
그리고 ‘제 2의 단계’에서 그는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화도 나고 끝까지 뻗혀보기도 하지만, 결국 굴복하고야 만다. 종당에 가서는 그렇게 굴복하고 즐겁게 순응까지 하게 되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즐거워하고 있을 변덕쟁이 겨울 햇볕을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요정으로 불러주면서, 요정이 자기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요정을 행복하고 즐겁게 하여주는 지극히 審美派的인 사나이로, 스스로 변신하여 버리는 것이다.
일찍 한국 문학평론가 협회장을 맡은바 있었던 김우종 교수(전 경희대, 덕성대 교수)의 수필이론에 의하면, 바로 이와 같은 ‘제 2단계’의 객관적
묘사의 소재 및 사색을 복합적으로 접목시키는 과정을 거쳐 유순호의 수필은 본격적으로 창작 화된다.
“겨울 요정”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유순호수필의 창작화 역시 ‘제 3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제 1단계’에서는 유순호가 “겨울 요정”에서 이미 ‘있는’,
또는 직접 ‘겪었던’ 사실의 체험이라는 재료를, ‘자기체험→자기고백’, 또는 ‘신변잡사→신변잡기’ 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음식’, 또는 ‘직접 만 질수도 있고, 직접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물’이란 결과물로 창작하여 낸 것이다.
➋ 창작적 문학공간과 형상적 틈새의 등식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요정은 상식적으로도 요염하도록 사랑스러운
전설적인 생물이다. 더구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은, 그것은 또 언제나 여신(女身)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요정의
영어인 페어리 ‘fairv'나, 프랑스어인 페이 ’fee)도 모두 라틴어인 파툼(fatum)에서 유래하였고, 파툼은 바로 ‘운명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바다, 강, 샘, 언덕 등에서 사는 님프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을 요정(妖精)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여정(女精)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은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요정, 여정들의 심술궂음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푸대접을 받게 되면 심한 보복을 하고 나아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유괴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에게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될 경우에, 그 대접이 단지 한 가닥의 미소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들은 아주 거창하게 인간에게 답례하기도
한다.
작품의 제 2단계에서는 그 같은 요정의 심술궂음을 지극이나 우리 민족적인 어린이들의 동화 비슷한 이야기로 인용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것도 다만 한 단락에 불과할 따름이다. 얼음동굴에 갇혀 살았던 겨울 妖精이 좀이 쑤시어 아직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는데 슬쩍 꼼지발을
빼들고 빠져나와 사람들을 못살게 굴다가 다시 숨어버린 것 같다고 한다.
여기서 어떻게 못살게 굴었는지에 대한 교대는 없으나
결코 역사속의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요정 세이렌(Seiren)도가 아니고, 아름다운 페리(peri)로부터 슬라브의 흉악한 바바 자가(baba
jaga)나 스칸디나비아의 추악한 트롤(troll)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작품의 “겨울 요정”은 또 밤마다
부잣집으로 들어와 남몰래 하녀를 도와 그 집의 일을 해주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의 로빈 굿펠로(Robin Goodfellow)나 또는 스코트
랜드의 브라우니(brownie), 독일의 코볼트(Kobold)같은 그런 착한 요정도 아니다. 다만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만은 사실인데,
그렇게 오래, 그리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겨울 요정”은 작중에서의
‘나’가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에 순응하게 되는 요정이기도 하다. 여기서 “겨울 요정”은 ‘제 1단계’에서 소개된 ‘요정’의 변덕스러움을 거쳐
‘제 2단계’로 넘어와 단지 소개되는 것 이상의 사색을 불러일으키게 되면서 ‘제 3단계’와의 복합적인 접목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제 3단계’에서 작중의 화자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기도 한 ‘나’라는 ‘체험’의 고백자이기도 하고,
‘신변잡사’의 기술자이기도 한 작가는 ‘요정’의 변덕스러움에 반항하지 않고, 또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잘 달래서 데리고 놀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 자신이 기꺼이 요정의 놀림을 받아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요정을 즐겁게 하여주는 신사풍의 審美派로 살아가고자 하는 원인을 이야기 하게
된다.
그 원인가운데 하나로 “요정(겨울)이 태생적으로 변덕을 부릴 수 있도록 천부적인 데를 지니고”있다고 하면서, 이
요정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나를 입히기도 하고 벗기기도 하는가 하면, 이렇게까지 하기 위하여 나에게로 다가오면서 겪었을
旅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여준다.
“이 겨울의 妖精은 노란 입김을 호호 불어가면서 얼음 눈을 녹여 겨우내
참아내고, 작년 여름 내내 나를 괴롭혔던 혹서를 물리치고, 가을 내내 외로웠던 고독도 날려 보내고 냇내같이 뽀오얗게 피어오르는 겨울 안개 속을
헤치고 왔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유순호의 “겨울 요정”에서 요정의 상징적 의미가 어떤 기술과 기교를 통하여 극대화되어
갔는지를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가] 겨울=자연→ [나] 햇볕=생명→ [다] 요정=창작화→ [라] 변덕=사색→
[마] 나=접목→ [바] 심미파=문학화→
이런 식으로 극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아] 햇볕에 의해
자연은 생명을 부여받게 되었고, [야] 요정은 창작을 통하여 생명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는 ‘굴복’과 ‘순응’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조성되어 있는 삶의 환경에 대한 생명의 여유이며 여백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조성되어 있는 ‘부정한 세상’ 내지 자기를 ‘못살게 굴고 있는’ 비정한 세상과의 타협을 선택하며 그 것과의 융합(融合)을 약속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겠음을 다짐한다. 여기서 그가 선택한 타협은 결코 굴종(屈從)하는 것이 아닌, ‘세상과 나 사이에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공간과 틈새의 등식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도출되는 유순호식의 공간 또는 틈새의 미학은 오히려 부정한 세상에
대한 결벽, 비타협으로 삶을 마감했던 윤동주의 ‘자화상’과 판판 다른 생반대 효과를 낳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➌ 창작 키워드
이 작품의 창작 키워드를 한두 마디로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대답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요정이라는 생명체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상징화된 작가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대답해야 한다. 요정처럼 변덕을 부리는 세상을 부정하거나
또는 비정한 세상과의 융합과 타협, 굴복과 순응이 전하고 있는 의미는 구경 무엇인지를 대답해야 한다.
자신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윤동주의 ‘자화상’에서도 우물 속의 아름다운 배경에 추억처럼 서있는 사나이와 이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두 자아의 갈등은 부딪쳐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자화상’속의 추억(追憶)'에 대하여 사실 그리움이나
동경(憧憬)의 뜻 말고는 다른 의미로 해석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겨울 요정”에서 겨울이라는 자연의
절기에다가 햇볕이라는 생명을 ‘요정’이라는 이름으로 창작 화하여 냄으로써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면면을 여러 가지로 은유하여 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여기서 이 작품의 문학적 갈등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의 고백이 있다. 요정에게 놀림을 당하면 서까지라도 이제는
요정을 즐겁게 해주는 바보스러운 심미파로 살아가겠다고 말한 것과, 말보다 오히려 더 강한 신념을 엿보게 만드는 행위가 뒤에 따라선다. 요정에
의해 제멋대로 벗겨지기도 하고 입혀지기도 하는 드러나 있는 앞모습 말고도 그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름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드러나 있되 깊이 숨겨져 있는 드러내는 자의 기술이며 기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바보스러운 자’가 능청스럽게 드러내 보이는 지혜이며,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렇게 문학적 갈등을 통한 은유 관계가 성립되어 그 사이에서 ‘요정에
대한 순종’이라는 명제의 이미지가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➍ 이 작품에서 배울 작법상의 힌트는
무엇인가?
‘날씨’는 자연이기도 하고 ‘세상’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나’로 표현되는 ‘남’과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억압하는 가정(苛政)일수도 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철학적 명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비약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그런 작고도 큰
내용의 소재가 바로 ‘변덕쟁이 겨울 요정과 나의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오로지 문학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➎
개관정리 및 힌트풀이
⑴ 성격: 낭만 ⑵ 표현: 은유 ⑶ 주제: 세상과의
공존철학
ⓐ 제1단계/제1, 2의 단락 →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잔혹한 정치에 대하여 그것을 무서워하거나 미워할 대신
‘심술궂은 장난꾸러기’로 비유하고 은유하고 그에 대하여 은근히 사랑까지 한다고 고백한다.
ⓑ 제2단계/제3, 4의 단락 →
사랑할 수밖에 없는 원인 → ‘창턱과 봉창같은데까지도 구석구석 누비고 길게 들어오는 햇볕’과 ‘아침 때 더욱 그러하다’는 말로 정치의 陽지면을
이야기 한 것이다.
ⓒ 제3단계/제5, 6의 단락 → ‘겨울이 태생적으로 변덕을 부릴 수 있도록 천부적인 데를 지니고 난
것은 혼자서 유일하게 두 개의 해와 짝지기를 하고 있다’는 비유로 정치에 또 다른 陰地도 있음을 권고한 것이다.
ⓓ
제3단계/제7, 8의 단락 → 정치의 양지면과 음지면 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절대 싸우지 말고’, 또 ‘잘 달래서 데리고 같이 놀려고도
하지 말고’ 스스로 놀림을 당하면서 살아갈 것을 권고함과 동시에, 그렇게 살아갈 것을 고백한 것이다.
➏
중요단어풀이
겨울/요정/ → 정부, 집권여당, 정치, 정책, 햇볕/봄날/ → 정부의 친화정책
심술궂은 장난꾸러기/ → 정치의 불온정성 두 개의 해(年)/정치의 양지와 음지/ → 순종하는 자와
반항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은혜와 징벌을 내릴 수 있는 정치의 양면성/ 근거 단풍창고/얼음동굴/ → 양면을 가진 정치의
얼굴 바보스럽게/점잖게/웃기는/심미파/ → 역사의 관찰자, 또는 견증자
3. 유순호 ‘문학수필’의
예술화
➊ 예술적 진지성(眞摯性)
예술의 본성은 구체적 감각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미술에서의 색깔이나
선, 음악에서의 선율의 고저장단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문학은 언어라는 미적 매개물에 의해 추상적인 개념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언어 자체의
형식과 더불어 내포하게 되는 의미에 의해 비예술성적 예술성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의미에 의해 표현되는 비예술성이 정통적인 예술성보다
더 구체적인 감각성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그의 예술적 眞摯性이 되기도 한다.
➋
‘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에서의 時點 혼용과 교차적 구성
앞에서 낱낱이 세부 해석한 ‘겨울 요정’외에도 또 다른
한편의 수필작품인 ‘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 (이하 ‘흩어진 꽃닢’으로 약함)에서 보편적 스토리들, 단순 신변잡기로 끝나버릴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어떻게 창작 화되고, 문학 화되었으며, 나아가 어떤 방법으로 그것들을 향수 자에게 전달하는가는 技術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이다.
'흩어진 꽃닢‘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예술화하기 위하여 시간의 시점을 혼용하였는가 하면, 인간과 동물의 생태환경에
대하여 혼용하였으며, 나아가 그 생태기능 자체에 대하여도 혼용하였고, 그것들을 서로 교차적 구성이라는 낯설게 하기를 통하여 작가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자연속의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왔다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빼어난 언어 예술로 펼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겨울이나 봄, 그리고 봄과 함께 피었다가 여름도 오기 전에 다시 봄과 함께 사라져가는 꽃이나, 그 꽃들이 새순으로 돋아나는 봄만을 기다려왔던
겨울의 생명들이 모두 개개의 자유 모티프에 의하여 모습은 비록 여러 가지의 양상으로 드러나지만 결과적으로 귀속(歸屬)은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문 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 용사도 지쳐 스러져가고 여름이 오고 있을 때,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나는 여기저기서 비를 맞고 눈꽃마냥 난분분 떨어져 내리는 슬픈 꽃잎들의 모양을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딱히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의 삶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 속에서 꽁꽁 얼었다가 이 봄볕아래서 저 봄바람과 함께 사그라져간다고 하자.
잎보다 먼저 피는 꽃이 되어서 봄바람과 함께 살았고, 다시 잎보다 먼저 떨어지는 꽃이 되어 봄바람과 함께 가게 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 봄이 가고 있다.”
이 예문은 “흩어진 꽃닢”의 마지막 단락이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귀속 처로 함께 가는 진달래나,
개나리, 철죽같은 꽃들과 이 꽃들의 새순이 얼었던 흙을 뚫고 세상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려왔던 인간들, 또는 인간과 같은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들의
특징적인 개개의 자유 모티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물한다. 당장 가는 봄바람과 함께 떨어져 사라지게 되는 이 꽃들의 생명은 아주 짧다. 잎보다
먼저 피고, 다시 잎보다 먼저 지는 꽃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많은 재미있는 일을 하고 간다.
예문 ➁
“봄이 올 때 나에게 또 하나 안위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은, 낙엽이 지는 가을이나 눈이 쌓이는 겨울과는 달리 숲이 우거져 어디를 가도
아랫도리를 모조리 드러내놓고 허허벌판에서 살을 에는 눈바람에 시달리는 일이 없어서 좋다. 나는 별로 몸집이 크지 않으므로 키 작은 나무가 약간만
우거져 있어도 그곳에 몸을 숨기고나면, 아무도 내가 뉘 집 아낙네와 바람피우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없다. 설사 발견되었더라도 눈이 쌓여 있지
않으므로 나는 허리춤을 꿰지른 채로 재빨리 산 너머로 줄달음 놓을 수가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언어예술은 갈고
닦아서 빚어낸 예술적 진지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생태환경, 생태기능을 혼용시킨 것도 바로 이 시점이 된다.
이렇게 날씨가 따뜻하고 먹을 것이 많은 봄과 여름에 부지런히 바람을 피어야 하는 원인은, 그렇게 잉태되고 태어난 나의 새 생명들을 부지런히
기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겨울이 올 때까지 그것들이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➌ 순서적 삽입서술과 전도적 삽입서술
창작화 된 수필 작품을 다시 예술적 형상화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반짝이는 창조의 물결을 보게 된다. 단어 하나, 하나를 뜯어내고, 갈라서 보면 어느 것이라도 우리가 모르는 단어가
없다. 그 단어를 한선, 또는 두선, 세선에 꿰어 지르는 작업과, 그 단어의 낯익은 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이 하나의 작품을 예술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문 ➂
“봄바람은 꼭 벌과 나비를 중매쟁이로 아니 부리면 안 되는 여름의 꽃들과 사뭇 다른
것이,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것들을 모조리 봄바람으로 체화하여버린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전도적 삽입서술법의 방법으로 이
작품속의 이야기들을 고상한 쾌락의 예술세계로 형상화하고 있다. 만약 순서적 삽입서술로 표현한다면,
[1] 봄에 피는 꽃들은
봄바람으로 체화한다 [2] 여름에 피는 꽃들은 벌과 나비가 중매를 선다.
이런 순으로 되어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표현 기법은 그것을:
[3] 봄바람은 꼭 벌과 나비를 중매쟁이로 아니 부리면 안 되는 여름의 꽃들과 사뭇 다른
것이,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것들을 모조리 봄바람으로 체화하여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꿔놓고 있다.
➍ 장인적(匠人的) 언어 주조(鑄造)와 민족의식 - ‘살구꽃이 필 때’
이 작품의 주제는 살구나무로 표현 된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린 것인데, 더 이상 다른 말로 바꿀 수가 없는 정확한 묘사들과 빼어나게 유장하고 사무치게 현란한 단어들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주제가 말하고 자는 내용의 깊이도 끝 간 데를 알수가 없다.
살구나무로 표현된 고향은 단순한 살구나무뿐이
아닌, 첫 사랑에 대한 한 소녀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첫 사랑의 소녀는 이성의 원초적 뿌리에 대한 향수와 열정 외에도, 무너져가고
있는 농촌사회와 이합집산을 겪고 있는 내 민족의 병약한 육체를 침습하고 있는 종교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하여
거부하려고 한다.
그것은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줄 수는 있어도 그 자신의 기억 속에서 언제가도 푸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살구나무 꽃이 피던 그 시절과 비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살구나무가 피던 그 시절의 사랑과 젊음과 열정은 지금 눈에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계속 살아있음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문 ➃
“삼라만상이 고요한 밤에 인류가
모두 잠 잘 때에도 제법 쌀쌀한 밤사이에 피고 또 피면서도 언제 한번 춥다고 엄살도 부려볼새가 없이 꿈을 꾸는 모습으로 부지런히 꽃을 피워내고
있는 살구나무에서 핀 꽃들이 지고 보란 듯이 탐스런 살구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면 봄날의 싱그러움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이
살구나무 아래로 돌아와주었으면 좋겠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에 마음이 평화로 와지는 오늘보다는 어제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풍경이 내일로 다시 다가왔으면 이런 5월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언제가도 푸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의 결미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예문 ➄
“아, 사랑하고 싶다. 紫雲英이 피는
고향의 논둑길에서, 그리고 청보리밭 위로 펼쳐진 하늘 아래서, 해란강의 푸른 물속에 비껴 있는 이 세계의 큰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도 나의
마음속에서 하나도 변함없이 그대로 피어있는 살구나무아래서 여자와 함께 장난쳐보고 싶다. 이런 거 이렇게 하냐고.”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갔고 병약한 모습으로 비쳐져 있지만, 그래서 종교가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하지만, 이 살구나무를 떠나갔던 내 고향의 젊은이들이 몸은 비록 타지에 있을지도 언제라도 자기 고향을 위하여 “쌀쌀한 밤사이에 피고
또 피면서도 언제 한번 춥다고 엄살도 부려볼새가 없이 꿈을 꾸는 모습으로” 분투하고 정진하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살구나무에서 핀 꽃들이 지고 보란 듯이 탐스런 살구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면 봄날의 싱그러움에 실려 어디론가 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이 살구나무
아래로 돌아 와줄 것”을 굳게 믿고 있다.
➎ 언어의 조탁에 의한 예술화
‘살구꽃이 필 때’에서 언어의
조탁에 의하여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은 그 본질에 충실한 일이기도 하지만, 보다는 예술적 완성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주고 있다. 아래의 예문에서 이 작품이 어떤 언어의 기술로써 자기만의 미학적 가치를 창출하여 냈고 예술적 결정(結晶)을 이루어갔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ㅊ] “그래서 처음 꽃이 필 무렵엔 분홍빛이었다가 꽃이 활짝 피어날수록 점점 더 하얀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성장하면서 조금씩 소녀티를 벗어가는 수줍은 여자애의 모습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든다. 그럴 때에 정작 새큼한 개살구라도 이렇게 혀끝에 침이
고이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모든 꽃들은 열매를 위해 존재하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 피어간다. 마치도 이 5월의 꽃들이 모두 타는 여름의
아픈 모질음과 지는 가을의 슬픈 낙화가 싫어 끝나가는 이 봄에다가 인생 모두를 던져 만끽하듯이 저마다 뽐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다
뽐내가면서 아주 잠깐 세상에 다녀가는 것은 아니겠는가.”
[ㅋ] “여름을 가까이 둔 봄의 절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여자애들이 모두 사라진 고향에는 올해도 살구나 무꽃이 피고 있다고 한다. 그림속의 동화 같은 선경에서 동네 오빠들이 나무의 물이 한껏 오른
봄날, 가지를 잘라서 손가락 크기로 자른 다음, 껍질을 분리한 후, 수피의 한쪽 끝을 면도칼로 다듬어 피리를 만들어 부는데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살구나무 밑에서 몸까지 다 주어버렸다는 추억이 그리운 5월이 지금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송보송한 젖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오빠, 말떼기는 언제 와줄 건데? 하고 묻는 여자애의 우산살 모양의 꽃받침 비슷한 것에 진 붉은 한송이 꽃으로 피어있는 가슴을 허둥지둥
어루만져보며 응,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낼 갈게…….하던 떠꺼머리 오빠도, 계집애도 지금은 다 어디가고 이 5월의 맑은 하늘에 동동 떠 있는
뭉게구름만 쳐다보며 살구꽃은 혼자 피고 있는 것일까.”
[ㅌ] “얼굴에 연지 한번 칠해본적이 없는 개살구 같은 씁쓰레하면서도
싱싱했던 여자애의 몸에서 맡았던 냄새는 처음 이성을 경험하는 여자의 몸 자체가 꾸고 있는 달콤한 꿈의 현시 같은 것은 아닐까 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와 어깨에 떨어져 내렸던 몇 송이 흐트러진 살구나 무꽃은 나비가 잠시 그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은은하고도 몽롱한 이미지를 자아내기도 한다.”
[ㅍ] “인간에게 주는 계절의 풍성한 혜택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게 풍성하고,
가장 향기롭게 아름다운 5월을 좋아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새싹이 돋아 온 산천이 푸르름으로 우거지는 이 생명과 환희의 시간을 함께 하는
살구나무 한그루가 나의 마음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피고 있기 때문이다. 연둣빛 새 잎 사이에 꿈을 꾸는 듯이 소박한 빛깔의 꽃을
피우는 살구나무와 함께 슬그머니 나에게로 다가와 서는 어린 여자애가 있기 때문이다.”
(ㅊ) 에서→ ❶ 정작 새큼한
개살구라도 이렇게 혀끝에 침이 고이게 만들지는 못할 것,
(ㅋ) 에서→ ❷ 보송보송한 젖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오빠, 말떼기는 언제 와줄 건데? 하고 묻는 여자애의 우산살 모양의 꽃받침 비슷한 것에 진 붉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있는 가슴,
(ㅌ) 에서→ ❸ 처음 이성을 경험하는 여자의 몸 자체가 꾸고 있는 달콤한 꿈의 현시 같은 것,
(ㅌ)
에서→ ❹ 여자의 머리와 어깨에 떨어져 내렸던 몇 송이 흐트러진 살구나 무꽃은 나비가 잠시 그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는 것처럼,
(ㅍ) 에서→ ❺ 연둣빛 새 잎 사이에 꿈을 꾸는 듯이 소박한 빛깔의 꽃을 피우는 살구나무와 함께 슬그머니 나에게로 다가와
서는 어린 여자애가 있기 때문과 같은,
이런 구절들은 문학에서의 예술화가 美的 창조면 에서 회화나 음악 등 여타 예술에 비해
숙명적인 비예술 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 지경이다.
(ㅊ) 에서→ ❶ 에서 이 장면을 읽는 독자들의
혀끝에서 갑작스럽게 개살구를 씹은 것처럼 침이 고이게 만는는 감각적 유발, 정작 새큼한 개살구라도 이렇게 혀끝에 침이 고이게 만들지는 못할
것,
(ㅌ) 에서 → ❸ 과, ❹에서 여자의 어개에 떨어져 내려있는 살구나무 꽃이 마치도 나비가 그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현시를 일으키는 것 등이 모두 의미 예술로서의 문학의 예술화가 순수 예술이 갖는 구체적인 감각성을 자극하는 실례가 될 수
있다.
➏ 수필이 ‘문학이라는 이름의 수필’이 되어야 하는 이유
이상에서 보다시피 언어 예술인 문학의 한
장르로서 우리의 수필문학이 오히려 소설이나 시, 희곡보다도 더 고도로 되는 기교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참으로 기교와 기술의 문학으로써
우리의 수필작품이 창작 화와 문학화의 과정을 거쳐 보다 더 예술적으로 승화하지 못하였을 경우, 다시 한순간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남이 없이 자유롭게 손쉽게, 편하게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이라고 판단해버리는 학자, 평론가들이 정작 손쉽게
편하게 만들어져나오고 있는 허다하게 많은 소설이나 시에 대하여서는 설사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될 잡글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절대로 다른 말을
하지 않지만, 유독 수필이라고 이름을 단 잡글에 대하여서는 주저 없이 딴죽을 걸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필이 오히려 소설보다도
시보다도, 그리고 희곡보다도 더 성수불루(盛水不漏)의 치밀함을 가져야 하고, 감동적인 에크리튀르(ecriture)로 짤막하게 맺지 않으면 안
되는 한줌만한 주머니 안에 한수레 이상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잡아내어 가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➐ 유순호
‘문학수필’에서의 ‘동격 대화’를 두고
‘현대한국수필론’의 저자인 박장원은 “수필은 삶의 투영이며, 그것의 문학적 통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필이야말로 “달관의 철학이 상상의 문학에 은근히 접맥되는 까다롭고 정교한 장르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어떤 작품이나를
막론하고 문학이라는 이름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장르들은 상상이라는 기교를 피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사 자전적 회고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상에서 3편의 수필작품만을 살펴보았지만 유순호의 문학수필에서 가장 배워야 할 몇 가지만 짚어낸다면, 치열한
관조와 그것을 창작 화시키는 상상의 깊이 내지 높이다. 모든 수필작품속의 이야기들이 상상을 통하여 생명력이 부여되고, 생명력이 부여된 것들과의
동격 대화가 유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 대화속의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대화의 상대자보다 좀 바보스럽지 않으면 멍청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나’는 본문에서 예문으로 든 3편의 수필작품 외에도 또 다른 여럿 수필작품들에서 등장하고 있다.
(ㅏ) ’첫 눈‘ →
탱크톱에 핫팬츠 차림의 드러내놓고 가는 여자를 돌아보다가 경찰의 가슴에 머리를 들이박기까지 하는
‘나’
(ㅑ) ‘사랑하라, 내일이 없을 것처럼’ →
‘혼이 빠진 사람처럼 매일 잘난 내 여자밖에 없다며,
잘난 여자 말고 다른 여자들은 모두 못났다고, 못난 여자를 잘난 듯이 차고 다니다가 어느 날 잘난 여자에게 보기 좋게 채이고 나 혼자만 진짜
못난 남자’가 되어버린 ‘나’
(ㅓ) ‘겨울 요정’ →
‘요정의 놀림을 받아내는 바보스러운
심미파’
(ㅕ) ‘살구꽃이 필 때’ →
‘응,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일은 갈게.’하는 ‘더꺼버리 총각이
되기도 하는 ’나‘
(ㅗ) ‘보름달 같은 여자가 좋다’ →
‘보름달처럼 얼굴이 둥그스름한 여자를 만나
죽자 살자 하고 지내다가 내가 지쳐서 어질어 질하는 꼬락서니’의 ‘나’
이런 것들은 유순호의 모든 문학수필작품들이 집요하게
고수하고 있는 하나의 원칙 같은 것이기도 하다. 찰스 램이 ‘워즈워스에게 보낸 편지’(1806)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실상 격조 높은 수필은
“말끔하면서도 , 그러나 너무 화려하지는 않게(Neat, Not Gaudy!)"라는 말과 은연중 어울리는 대목으로 특정지울 수 있다. 다시
‘사우 티에게 보낸 편지’(1815)에서 찰스 램은 “너무 외경스러운 것은 모두 나를 웃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장례식이 너무 장엄하여
버릇없는 짓을 하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수필 속에서의 ‘나’라는 동격대화의
인물이 ‘나’의 상대보다 더 잘 났고, 그래서 지식도 더 많고, 그래서 끝없이 자기 자랑으로 일관한다면, 사실상 그것은 이미 동격 대화가
아니다. 작중의 대화 상대와도 대화가 되지 않고 작품을 읽는 독자들과도 대화가 되지 않는다.
유순호의 문학수필에서 찰스
램이 말하였던 “말끔하게, 그러나 너무 화려하지 않게!”라는 모토를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나’로 표현되고 있는 작품속의 대화자보다 항상
더 낮게, 못하게, 좀 더 바보스럽게 자기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사 위장이더라도 謙虛의 미덕과 상대를 나보다 더 높이게 쳐다보는
배려는 필경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작품속의 다른 누가 아닌 ‘나’와 먼저 친해지게 된다. 나랑
비슷하거나 아니면 나보다도 더 못한 인물들의 삶도 있거늘, 하물며 나야! 하는 심정으로 이 수필 속으로 들어선다.
때문에
수필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뽐내는 것은 최고의 금기(禁忌)이기도 하다. 한국식 수필의 대부분 수상문(隨想文)들이 이 금기를 피해가지 못하였다는
지적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야기속의 동격 대화와,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과의 동격 대화를 이루어내는 일이 얼마나 주요한가를
유순호가 만들어낸 수필작품속의 수많은 ‘나’가 말하여주고 있다.
분명한바 유순호의 문학수필에서 여러 가지의 신분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는 ‘나’는 유순호 자신이 아닌 상상의 인물이고, 창작의 산물임이 틀림없다.
나가며 우리의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
사실상 작품의 형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은 아주 간단한바 설사 소학생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터득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서두란 무엇인가? 중간이란 무엇인가? 종결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두란, 앞에는
무엇이 없고 뒤에 무엇이 있음을 뜻하며, 중간은 앞에도 뒤에도 다 무엇이 있음을 뜻하나 종결의 앞에는 무엇이 있으나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설명하였다.
‘시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낭만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현대의 문학 논의 자들에
의하여 개념 자체를 거부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홍문표의 ‘현대시학’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먼저 낭만주의 문학가들에 의하여
상상과 창조, 자아의 표현이라는 유기적 창조론의 일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 현대로 넘어오면서, 구성의 법칙과 기술에 의한 제작의
‘시학’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의 문학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수필은 어떤 형태와 형식의 수필이 되어야
하고, 어떤 수준과 경지의 수필로 거듭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할 차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수필도 또한 소설이나 시, 희곡에 못하지 않게 ‘소설
같은 이야기를 숨겨야 하고, 시 같은 리듬을 감추어야 하고, 희곡 같은 스토리로 꾸며져야 하는 기교와 기술의 문학이어야 한다.
수필이 단순히 자기 체험적, 자기 고백문학만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변잡기에만 너무 안일하게
머물러 있는 주변성, 또는 그 변방 성을 극복할 수 있는 문학적 체감온도를 한도 이상으로 끓여내는 바탕을 마련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수필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쓰는 것이 수필이라는 과거의 문학형태나 인습, 낡은 생각의 울타리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쩌면
소설인지, 수필인지, 아니면 수필인지 시인지도 잘 분간이 안 되는 시행착오가 발생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변화해야 한다.
변화야말로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다.
2011. 05. 22. 서울대 캠퍼스에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