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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00년 역사의 전반기를 일제강점기, 1945년 광복 이후와 분단시대로 구분지어 본다면 이제 본격적인 21세기가 펼쳐지기 시작한 오늘 이 시대를 무엇이라 불러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시기를 통일문학시대 전야 또는 통일문학 준비기라고 불러보고자 한다.
미당과 통일문학시대 전야 내지는 통일문학 준비기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기에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것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미당이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를 연결한 한국 현대시사 100년의 한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당은 이 땅 현대시사의 전개 과정 중에서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의 시문학사를 포괄하고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 인물이다.
미당은 김소월로 상징되는 한국 현대서정시의 본류를 계승하면서, 서정과 생명, 고전과 현대적 감수성을 통합해 냄으로써 광복 후 현대시사의 정통성을 마련했다. 아울러 미당은 한국 현대시의 모든 전통성과 실험성, 보수성과 진보성을 함께 포괄하는 통합적인 시인, 또는 대가형 시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지닌다. 소월, 만해, 지용, 이상 등 일제강점기 시인들과 고은을 비롯한 광복 후 모든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미당을 제외하고는 한국 현대시사를 논하기 어렵다. 소월, 만해, 지용은 광복 전, 일제강점기의 시사를 대표할 뿐이고 고은, 이형기, 박제삼 등 광복 후 시인들의 경우도 광복 전의 시문학사와 연결되어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으로서 미당은 그야말로 ‘미당 위에 미당 없고, 미당 앞에도 뒤에도 미당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독보적이면서도 개성적인 대가 시인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우리가 미당 탄생 100주년을 논의하는 까닭이 있다.
미당은 1930년대 중반 등단하여 1990년대 후반까지 60년 이상 현대시를 개척하고 시단을 이끌어 왔다. 그는 천부적인 시적 재질과 능력을 바탕으로 시적 사유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그것을 그에 걸맞은 표현 미학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민족어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진전해 왔다. 시집 ‘화사집(花蛇集)’(1941)으로부터 ‘늙은 떠돌이의 시’(1993)에 이른 시적 역정이 그 생생한 업적이자 증거라고 하겠다. 미당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대체로 생명의 탐구이자 영원성의 추구이고 민족어의 완성을 향한 노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꾸준히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아 일관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대가적 품격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당의 초기 시는 시집 ‘화사집’의 서시라 할 수 있는 ‘자화상’과 표제시 ‘화사’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에서 시작되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를 거쳐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끝나는 시 ‘자화상’은 말 그대로 미당 젊은 날의 초상이 압축적으로 상징돼 있다.
이 시에는 가난과 시련, 한과 허무의 운명론으로 점철돼 온 이 땅의 민족적·민중적 삶이 잘 암시되면서 미당 자신의 젊은 날 자학하는 생명의 실존적 몸부림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시 ‘화사’는 꽃뱀을 통해 고독과 허무, 관능과 욕망에 ‘뒤채이면서’ 원죄의식으로 자학하는 젊은 날의 초상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꽃뱀’은 젊은 날 미당의 운명의 얼굴이자 실존의 거울에 해당하는 셈이다.
아울러 초기 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부활’이나 ‘귀촉도’ 등에서 보이는 한국적 영원주의 또는 동양적 연모의 세계이다. 사랑도, 생명도 그 모든 것은 현실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영원의 세계, 절대의 세계로 열려 있다는 세계 인식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그의 시는 수난과 빈곤의 역사를 고통스럽게 살아온 이 땅 민중들의 한의 표정, 운명의 얼굴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면서도 그것을 인간 원형의 정서와 영원성의 모습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시집 ‘서정주 시선’ ‘신라초’ ‘동천(冬天)’ 등의 시가 그 대표적 예에 해당한다. 젊은 날 관능의 몸부림이나 한의 운명론이 차츰 극복되고 고양되면서 정신의 가벼움 또는 생명의 투명화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국화 옆에서’의 식물적 상상력이나 성숙의 시학, ‘무등을 보며’에서 보이는 달관과 순응의 정신, ‘선덕여왕의 말씀’에서 신라의 하늘이 상징하는 영원주의, 그리고 ‘동천’에서의 정신주의가 그 내용이라고 하겠다. 초기 시의 대지적 질서, 지상의 척도가 차츰 천상적 질서와 하늘의 척도로 일어서고 상승되어 가게 됐다는 뜻이다. 특히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는 시 ‘동천’은 이러한 생명의 투명화를 통해 마침내 정신의 하늘, 영원의 하늘에 근접해 가는 미당 정신주의, 영원주의의 한 모습을 날카롭게 제시해 준다.
미당이 대체로 60대 회갑을 전후하여 전개하는 후기시는 또 한 번의 도약과 변신을 위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시집 ‘질마재 신화’ 나 ‘늙은 떠돌이의 시’ 세계가 그것이다. 시집 ‘질마재 신화’는 토속적이고, 삶의 공간 또는 신화적 시간 속에서의 삶의 모티프를 통해서 생명의 구경 또는 영원의 얼굴을 만져보려는 노력이 전개된다.
그런가 하면 ‘늙은 떠돌이의 시’는 시각을 전환하여 서양 세계와 접하여 새롭게 깨닫는 삶의 모습 또는 생명의 다양성을 노래한다. 서양적 풍물을 통해 삶의 본질 또는 생명의 구경적 모습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인류적 보편성으로 수렴된다는 점을 확인한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모색은 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이나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그리고 ‘안 잊히는 일들’로 구체화된다.
미당은 1980년대 한동안의 침잠을 거쳐 1990년대 들어서서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산시(山詩)’(1990)와 ‘늙은 떠돌이의 시’(1993)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는 ‘산시’에 이르러서는 중년시절 썼던 ‘무등을 보며’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산’이란 지상으로부터 솟아나서 하늘의 세계를 향해 일어서 있다는 점에서 지상의 척도를 천상의 척도와 맺어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만큼 정신화되고 투명화한 생명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대지적 질서에서 천상의 질서를 향해 상승하려는 수직상상력이 하나의 정점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미당 최근 시에서는 더욱 원숙하고 포괄성을 지닌 시작들이 보여 주목된다.
가을 논에서/ 노랗게 여문 볏모개들이/ “좀 무겁다”고 머리 숙이면/ “좋지 뭘 그렇냐!”고/ 메뚜기들은 톡톡/ 튀기며, 날고,// 그 메뚜기들이/ 튀어나는 힘의 등쌀에/ 논고랑의 새끼붕어들은/ 후다닥딱/ 헤엄쳐 다니고,// 그게 저게 좋아서/ 논바닥의 참게들이/ 고욤나무 밑 논둑까지/ 엉금엉금 기어나가면,//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자 좋다!”고/ 농군아저씨는 어느 사인지/ 열두 발 상무를 단 패랭이를 쓰고서/ 그 기인 열두 발의 상무를/ 하늘에다 대고 마구잡이로 내어젓는다. - ‘가을의 벼논’(1993)
이 시는 그저 평범한 가을 농촌의 풍경을 그린 단순 서정시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깊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날카로운 문명비판 또는 공해와 오염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벼·메뚜기·새끼붕어·참게’를 거쳐서 마침내 사람에 이르는 대자연의 생명질서이자 순환적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다. 생명 하나에 우주가 깃들여 있음과 동시에 그것이 모두 연쇄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생명공동체, 우주공동체 사상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미당이 이 땅을 떠나간 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 그의 빈자리가 새삼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 땅 최고의 시인이었으나 친일 문제 등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폄하되고 있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시인의 삶과 시가 일치하면 오죽 좋을까마는 어디까지나 그의 문학적 성과와 그의 과거 개인적 행적은 별도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는 살아생전 언제나 시 앞에서 신인과 같이 최선을 다하던 현재진행형의 시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많은 후배 시인들은 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치열성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또한 이 땅에 시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의 이름, ‘미당 서정주’도 오래도록 살아남아 시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킬 것이 분명하다.
민족어의 완성에 전 생애를 바쳤던 시인, 미당, 그의 시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많은 연구자가 나와 제대로 평가받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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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경희대학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