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시작한 중국의 청나라 역사 서술 1100억원 들여 올해 마무리
⊙ 중국 주변 역사까지 중국 역사로 모두 포함시키려는 왜곡된 역사관
⊙ 192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 조선을 屬國에 포함시켜
⊙ 중국 주변 역사까지 중국 역사로 모두 포함시키려는 왜곡된 역사관
⊙ 192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 조선을 屬國에 포함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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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왼쪽부터). 중국은 청나라 역사를 정리하는 청사공정을 진행 중이다. |
‘청사공정(淸史工程)’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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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공정’의 최고책임자인 다이이(戴逸) 국가청사위원회 주임. |
그런데 중국의 마지막 봉건 왕조인 청조의 역사서 편찬이 순탄치 않았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한 뒤 국민당 정부가 《청사고(淸史考)》를 편찬했지만,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 정부는 이를 정통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이 청사 편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65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시절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앙선전부 회의를 소집해 청사편찬위원회의 설립을 결정하고 인민(人民)대학 내에 청사연구소도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된 문화혁명(1966~1976년)으로 사업은 중단됐다.(정혜중 김형종 유장근, 《중국의 청사공정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참조)
개혁개방 이후 경제에만 몰두하던 중국이 청사편찬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0년 인민대학 청사연구소의 다이이(戴逸) 교수가 청사 재편찬에 관한 의견을 내면서부터였다. 이듬해 3월 양회(兩會·全人大와 政協) 기간에 인민대학 리원하이(李文海), 북경대학 왕샤오추(王曉秋) 교수가 같은 의견을 피력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2002년 3월 중국 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준비팀을 설치한 데 이어, 그해 8월 장쩌민(江澤民) 주룽지(朱鎔基) 후진타오(胡錦濤) 리란칭(李嵐淸) 등 4명의 정치국 상무위원회의에서 이 편찬사업을 비준했다. 이때 리란칭 부총리는 “중화민족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게 하며,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가 전승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중화민족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정신적 원천이 될 수 있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해 12월말 25명으로 구성된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위원회의 주임은 인민대학 다이이 교수, 부주임은 동북공정의 핵심인물인 중국사회과학원 마다정(馬大正) 학술위원, 북경대학 주청루(朱誠如) 교수 등이 맡았다. 중국은 2003년부터 올해까지 10년 동안 총 6억 위안(약1100억원) 이상의 국가예산을 쏟아부었다.
이 사업에는 중국 전역 160개 대학·연구기관의 1600여 교수와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2010년 12월까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청대의 사료를 재정리하여, 당안(?案) 문헌(文獻) 연구(硏究) 도록(圖錄) 편역(編譯) 등 5종으로 펴냈는데, 그 규모가 1800여 권, 10억 자에 달했다. 편찬팀은 또 2011년에도 지방과 군사분야 등의 자료집 66권을 저술했다고 청사영도소조판공실이 올 1월 밝혔다. 편찬위원회는 이러한 사료집을 기초로 최종적으로 총 92권, 각권 35만 자, 총3220만 자의 청사를 펴낼 계획이다. 92권은 ①시대순으로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통기(通紀) 8권 ②천문역법 지리 인구 법률 등에 관한 전지(典志) 39권 ③각 시대의 인물에 관한 전기(傳記) 22권 ④각종 사표(史表) 13권 ⑤도록(圖錄) 10권 등이다.
최근 중국측 발표에 따르면, 청사공정은 이미 초고작성이 끝났고 현재 내용수정과 검사 단계에 와 있다. ‘중화문사망(中華文史網·www.historychina.net)’은 올 1월 11~13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청사편찬위원회 2011년도 사업 결산회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다이이 주임은 개회사를 통해 “올해는 청사편찬 업무가 10년째 되는 해이다. 이미 제출한 초고(初稿)를 통해 볼 때, 업무는 비교적 질서가 있고 진행과정은 비교적 순조롭다”며 “현재 심사수정(審改)과 검사(收)의 결정적 단계에서 ‘3번 수정하고 3번 검사하는(三審三)’ 6번의 과정을 엄격히 해야 하고, 특히 글자대조 업무를 중시하여 절대로 방심하거나 나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서 발간이 멀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족도, 만주족도 아닌 중화민족 개념 만들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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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정(馬大正) 국가청사위원회 부주임. |
중국이 청조의 영토에 집착하는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영토중심적 역사관’을 완성하려는 목적이다. 이 역사관은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터무니없는 역사관이다. 과거에 중국 주변의 국가와 민족이 중국과 어떤 관계에 있었든 상관없이, 현재 그 국가와 민족의 강역(疆域)이 중국영토 안에 포함돼 있으면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송(宋)을 공격하여 남쪽으로 몰아낸 여진족이나 명을 멸망시킨 만주족(청)의 역사가 모두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간주한다. 심지어 엄연히 중국 국경 밖에 별도의 나라(몽골)로 존재하는 몽골인의 역사도 과거에 그 활동영역이 중국 내였다는 이유로 자기네 역사라고 강변한다. 칭기즈칸을 중국사의 위대한 인물로 그리는 드라마가 중국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보는 ‘동북공정’도 이 사관에서 나왔다.
중국은 이 괴이한 역사관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화민족(中華民族)’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는 마치 세계 수많은 나라의 이민자들로 형성된 미국이 자국민을 ‘미국민족’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어색하다고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지적했다. 중국이 ‘중화민족’ 개념을 창조한 목적은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에게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 주어 민족단결을 도모하고, 그들의 과거사를 중국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관영TV는 55개 소수민족을 ‘중화민족 대가정(大家庭)의 일원’이라고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열심이다. 중국은 이런 개념의 연장선에서 자국을 ‘통일적 다민족국가’라고 정의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형종 교수는 “중국의 영토주의적 역사의식이나 정치적 관점의 과잉은 20세기의 정치적 고려에서 만들어진 ‘중화민족’ 개념을 무분별하게 과거의 역사에 투사하여 최대한의 영토를 확보하고 또 그것을 현재가 아닌 과거에까지 적용시켜 보겠다고 하는 ‘신중화주의’로 연결되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역사학의 발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중국의 영토주의적 역사관은 당장은 중국에 이로울지 모르지만, 훗날 중국이 다시 분열되거나 식민지가 될 때 자국의 역사를 침략자에게 고스란히 바치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인들은 또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청조가 이룩한 과실(특히 방대한 영토)은 따먹으면서도, 한족 위주의 입장에서 만주족의 통치기간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침체된 기간으로 간주하는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중국명사학회장을 지낸 난빙원(南炳文) 남개(南開)대학 교수는 2006년 <명청시기 고대 중국사회의 종결과 그 교훈>이란 글에서 “명조 시기 중국은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 생산력 수준이나 경제발달 정도, 과학기술의 성취, 종합적 국력 면에서 서구 각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청조시기 중국이 열세로 전향하는 속도는 가속화되었고 19세기 중엽에는 마침내 서구보다 낙후되어 열강에게 능욕을 당한 식민지 반식민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에서 나온 일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낙후한 민족인 만주족 때문에 중국이 서구에 뒤지게 되었다는 시각이다. 2001년 청사편찬을 정부에 건의해 청사공정의 출범에 한몫을 했던 리원하이(李文海) 인민대학 교수 역시 올 2월 10일 <한 왕조의 종결(終結)과 한 시대의 종결>이란 글에서 “청조의 멸망을 기점으로 중화민족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태(不斷沈淪的狀態)를 끝냈다”고 지적했다. 한족들은 이미 1644년 명(明)이 청(淸)으로 교체된 것에 대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天崩地裂)’ 거대하고도 참통(慘痛)한 사회변동으로 표현, 이민족의 통치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고 정병철(2008년 작고) 전남대 교수는 연구서에서 지적했다.
중국 정부, 아직 조선을 어떻게 서술한 것인지 밝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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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최대 판도. 중국이 청사공정에 착수한 것은 영토주의적 역사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
청사공정은 조선(朝鮮)과 관련된 부분에서 어떤 서술원칙을 가지고 어디에 편입시키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만약 편찬위가 조선을 ‘외교지(外交志)’나 ‘외국열전(外國列傳)’에 서술한다면 큰 마찰이 없겠지만, ‘번속지(藩屬志)’나 ‘속국열전(屬國列傳)’에 포함시킨다면 한중관계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 1920년대 국민당 정부가 편찬한 《청사고》는 조선 부분을 광해군 11년(1619)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양국간 전쟁 및 사신왕래를 중심으로 기록하면서, 이를 권531 <속국열전>에 넣었다. 이는 과거 중국의 사서(宋史, 遼史, 金史, 元史, 明史)에서 모두 <외국열전>의 일부(高麗傳, 朝鮮傳)로 기록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국민당 정부가 어려운 여건에서 서둘러 사서를 편찬하면서 조선을 <속국열전>에 넣은 것은, 조선을 자신들의 통제를 받는 속국으로 격하함으로써 열강들의 침략에 대응하려는 19세기 후반의 외교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청사고》는 사서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그후 중국인들의 인식 속에 조선은 속국이었다는 잘못된 한국관을 심어 주는데 큰 작용을 했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한국관은 한중수교 20주년인 지금까지도 양국관계에 나타나 마찰요인이 되고 있다.
청과 조선의 관계를 일컫는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란 당시 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중국과 주변국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일종의 외교질서였지, 종주국과 속국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앞서 언급한 《청사고》조차도 “조선은 비록 번속이기는 하지만, 내정과 외교는 그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아조(我朝·청정부)에서는 간여한 일이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중국은 올해 출판될 청사에서 조선을 어떻게 분류·서술할 것인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2008년 허혜윤의 인터뷰에 따르면, 편찬위 부주임을 맡고 있는 청충더(成崇德) 인민대 교수는 내부적으로 토론을 거쳐 ‘속국전’을 폐지하고 모두 ‘방교지(邦交志)’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발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공식방침을 발표한 적이 없다.
동북공정 이어 청사공정도 한중 격돌의 불씨 될 가능성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가령 차오즈중(喬治忠) 남개대학 교수는 2002년 <청사토론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청사 외교지에는 서방 열강과 일본과의 외교교섭만을 기술해야 한다. 조선, 월남 등 부속국 명의 국가와의 왕래는 여기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가장 온당한 처리방법이다”고 주장했다. 저우웨이저우(周偉洲) 전 섬서사범대학 교수 역시 같은 논문집에 발표한 글을 통해 ‘교방전’에서 번속지와 일본지를 구분할 것을 제안했다.
반면 중국 제1역사당안관의 취류성(屈六生) 박사는 “속국 칭호는 오늘날 역사 편찬에서는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류큐(琉球·일본 오키나와현에 있던 옛 왕국)나 조선(朝鮮) 등 소수의 인국은 청정부와의 관계가 밀접하여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독립국가였으며, 근대 식민주의 종주국과 신민지의 관계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장전쿤(張振?)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도 “외교전은 응당 구미 일본 등 각국과의 관계를 포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선, 베트남, 류큐 등도 포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청조를 폄하하는 한족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도 일어나고 있다. 리즈헝(李治亨) 같은 학자는 “청조가 낙후된 생산력을 대표하여 중국의 발전을 백년이나 지체시켰다고 보는 것은 민족적 편견이나 진부한 사학관념으로 청사에 부적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역시 청의 최대 공로가 통일 다민족 국가를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어, 영토중심주의 역사관이나 통일 다민족국가론과 맥이 닿아 있다.
중국이 청사를 편찬하면서 조선을 어디에 편제시킬지 고민하는 것은 중국의 한반도 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중국은 그동안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 역사로 사실상 편입시켰다. 이는 남북한 통일 후 있을지도 모를 만주지역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연고권 주장을 사전에 차단하고, 북한 유사시에 개입의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 두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에 청사(淸史)의 서술이 더해지면, 중국의 한반도관과 한반도 정책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중국은 대미·대일전략 차원에서 한반도를 자국 역사 쪽으로 가깝게 끌어당기고 싶겠지만, 그렇게 했을 경우 한국과 북한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보여 고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년 내에 공개될 청사가 약간이라도 사실을 왜곡하거나 조선을 폄하할 경우, 한국민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양국관계의 악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중국의 국익에도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
바람직한 청사편찬의 방향에 대해서는 유명한 청사 전문가인 정톈팅(鄭天挺) 전 남개대학 부총장이 제시한 내용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서울대 김형종 교수는 지적한다. 정 교수는 2002년 애국주의와 국제주의의 선양(宣揚), 국내 다수민족과 소수민족, 통치민족과 피통치민족에 대한 일률적인 평등한 대우, 인근국가의 자존심 존중 등을 강조한 바 있다. 중국이 정 교수와 같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봉건적 역사관에 얽매여 또 하나의 역사갈등을 유발할 것인지가 주목된다. 우리 정부 역시 청사가 나온 뒤에 뒤늦게 역사왜곡을 바로잡겠다고 허둥댈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중국정부와 교섭해 갈등의 요소를 제거해 나가는 적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