演藝, 팻션

사라져 가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김희갑 ‘향수’

이강기 2015. 10. 21. 10:31

[노래가 있는 풍경]

사라져 가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김희갑 향수

 

 

신동아 201411월호

 

·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차마 꿈엔들 잊히지 않는고향의 노래. 월북 혹은 납북된 시인 정지용의 시에 대중가요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였다. 가수 이동원이 곡을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성악가 박인수는 이 노래를 불렀다고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했다. 김희갑이 노래로 만들기엔 적당치 않다고 했던 시. 그러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무엇이 이 노래를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당나라 시인 이백이 거두망산월(擧頭望山月) 저두사고향(低頭思故鄕), 고개를 들어 달을 보고 머리를 숙여 고향 생각에 잠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누군가는 말했다. 고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사람들은 고향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거친 세파와 싸우다 상처 입은 우리의 영혼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씻어주고 싸매준다는 것이다.

 

 

향수는 지용의 나이 18세이던 1922년 휘문고보 재학 시절 당시 교지요람에 처음 실렸고, 1927년 일반에 발표됐다. 원래는 일제강점기 보성 벌교 출신의 유명 작곡가 채동선이 이미 이 시에 곡을 붙였고 이어 작곡가 변훈, 강준일 등이 다투어 곡을 붙였으나 노래 부르기의 어려움 때문에 가곡 향수는 오늘날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 대중가요 향수가 그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내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온 나라가 올림픽 열기에 사로잡혔던 1988315, 지금은 없어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예음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바리톤 김관동의 중후한 목소리가 여운 속에 잦아지자 200여 명의 청중이 우레와 같은 감격의 박수를 보냈다. 더러는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6·25전쟁이 끝난 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이 노래는 꼭 38년 만인 이날 역사의 저편에서 다시 찾아와 우리에게 고향의 목소리를 전한 것이다.

 

 

이날 음악회의 공식 명칭은 다시 찾은 우리의 노래’, 부제는 정지용의 시에 부친 채동선의 가곡 되살리는 음악회였다. 38년 만에 정지용 문학의 해금과 더불어 작곡가 채동선이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이 이날 복권된 것이다. 들을수록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흠뻑 젖어들게 하는, 무척이나 서정적이고 강물이 굽이를 도는 듯한 유장한 곡조의 노래다.

 

 

그러나 이날 부른 고향40대 이후의 기성세대나 알 뿐 젊은 세대에겐 무척 낯선 노래다. 이 노랫말이 된 시 고향을 지은 정지용이 전쟁기간에 월북하거나 납북됐다는 이유로 노래마저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성세대에게는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 임은 아니 뵈네/ 들국화는 애처럽고/ 갈 꽃만 바람에 날리고로 시작되는 그리워라야 이해가 되거나 아니면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시작되는 망향이라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왜냐하면 정지용의 시로 인해 노래 자체가 금지된 후 이은상과 박화목이 곡조의 유려한 아름다움에 감동해 각각 그리워망향이라는 노랫말을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이 노래는 정지용의 시 고향으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1989년 저명 성악가인 서울대 교수 박인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휩싸인다. 정지용의 시에 유행가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인 노래 향수가 그 단서가 된다. 박인수는 가수 이동원과 향수를 녹음했다. 요즈음 말로 크로스오버 음악인 셈이다. 당시로서는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게 매우 이례적인 일. 노래 향수가 국민가요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자 국립오페라단은 그를 제명한다.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땐 그랬다.

 

 

박 교수는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떤 선입관이나 장르의 구분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며 순순히 제명을 받아들였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자리에서 그가 다른 대중가요면 몰라도 그것이 정지용의 향수라면 어떤 반대급부도 오히려 영광이라고 선언하자, 한동안 순수 음악계는 타도 박인수를 외치며 법석을 떨기도 했다.

 

 

 

실개천, 질화로, 얼룩배기 황소

 

 

그날 이후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부른 향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성악가의 첫 대중가요 녹음이란 점에서도 자연스레 세간의 화제를 더했다.

 

 

세월이 흘렀다. 요즘 사람들은 향수란 노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노래 향수의 후렴구에 등장하는 참하(원문) 꿈엔들 잊힐리야를 들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떠올리는 고향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에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도회인에게 고향은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기에 노래 향수를 통해 떠나온 고향을 추억하게 된다.

 

 

잘나가던 오페라 가수를 한 방에 날려버린 노래 향수의 시작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이다. 올림픽 열기가 한창이던 1988, 가수 이동원은 신촌의 한 서점에 들렀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사회과학 전문 서점 오늘의 책이다. 당시 이 서점은 이념서적 판매로 대학가에 널리 알려졌다.

 

 

노랫말을 찾기 위해 시집을 살피던 이동원은 서점 구석에 감춰진 정지용 시집을 찾아내 읽다가 그 길로 여의도에 사는 작곡가 김희갑의 집으로 달려갔다. 김희갑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잘나가는 인기 작곡가였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시 향수에 빠져 있던 이동원은 김희갑에게 곡을 붙여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김희갑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향수의 운율이 곡을 붙이기가 쉽지 않고 또 억지로 곡을 붙일 경우 오히려 이 시의 의미를 다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동원은 막무가내로 고집했고 결국 김희갑은 1년 동안 고심한 끝에 이듬해인 1989년 초 곡을 완성했다. 이어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함께 부르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향수의 탄생 설화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로 시작되는 정지용의 향수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또 애송하는 시 중 하나다.

 

 

후세의 시인들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감성은 새벽하늘의 샛별보다도 찬란해 우러러보기조차 눈부시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1930년대 이래 문학의 기쁨을 알고 지내는 한국의 지성 중에서 지용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다고들 한다. 일찍이 영문학자 이양하는 엘리어트 등 영어권의 어떤 시인보다도 지용의 시가 뛰어나다고 찬탄한 적이 있다. 이양하는 척박했던 1920년대 도쿄 유학 시절에도 대부분의 조선인 유학생은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그린 지용의 시 카페 프란스를 즐겨 읊었으며 그가 동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알려진 대로 지용은 모더니즘풍의 시를 써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다. 1930년대 초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 김영랑과 함께 순수 서정시 개척에 힘을 썼다.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구축,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 구사 등으로 한국 현대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고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없다

 

 

지용은 1930년대 말부터 문장지의 심사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청록파를 발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6·25를 전후해 행방불명돼 생사를 모른다. 한때 월북 시인으로 분류돼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나 1988년 올림픽 열기 속에 해금됐다.

 

 

이런 연유로 박인수, 이동원의 노래로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진 지용의 대표적인 시 향수또한 월북 시비에 말려 오랫동안 한국문학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의 순수 모국어로 된 향수가 던지는 의미가 지대해 많은 사람이 당국의 눈을 피해 향수를 읽고 배웠다. 금지된 1950년대 이후에도 한국인의 끔찍한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실개천, 질화로, 얼룩배기 황소, 짚베개, 어린 누이, 늙으신 아버지 등이 적절하게 배열된 향수는 농경사회를 모태로 한 한국인에게 유년의 한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특별난 시다.

 

 

그러나 노래로서 향수는 우선 어렵다. 그래서 베테랑 작곡가 김희갑조차 향수만큼은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바닷가의 추억’ ‘달맞이꽃’ ‘봄비등 주로 서정성이 짙은 노래를 작곡해왔지만 지용의 시가 가진 모더니티가 노래로서는 적당치 않았다는 것이 김희갑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예상을 깨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지용의 고향인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청석교 밑을 흐르는 조그만 하천이다. 지용 생가에 자리 잡은 정지용문학관의 문화해설사는 이 대목에서 “‘향수의 무대는 반드시 이 작은 하천을 의미하기보다는 곧 유년시대의 한 심상일 것 같다고 설명한다. 서울에서 두어 시간 반 만에 만난 실개천은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잡초와 오수로 범벅이 된 불결한 하천일 뿐이어서 더욱 그러한 느낌을 준다.

 

 

고속도로에 나오면 만나는 옥천 구읍 도로 입간판은 정지용 생가와 육영수 생가를 나란히 적어놓았다. 정지용 생가는 옥천에서도 남루한 구읍에 있다. 초가집 모양새를 갖춘 생가를 찾노라면 방 한 켠을 장식한 시 한 구절이 탐방객을 반긴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 짧은 시 호수.

 

 

 

지용에 의한, 지용을 위한

 

 

구읍으로 불리는 생가 동네는 온통 정지용 시 구절로 도배됐다. 대형 슈퍼마켓의 상호는 시가 있는 상회이고 정육점 간판에는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 곳이라고 써놓았다. 유명 올갱이국 식당의 간판에는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가 새겨졌다. 옥천은 한마디로 지용에 의한 지용을 위한 지용의 고장쯤 된다. 생가에는 평일인데도 적잖은 탐방객이 오간다. 문화해설사의 얘기에 귀를 쫑긋하며 듣기에 열심이다. 문사철(文史哲)이 무너져 가는 시대에도 문학의 힘은 여전히 센가보다.

 

 

옥천은 육영수 여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지용 생가에서 불과 700m 거리에 육영수 생가가 있다. 깃발부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박정희·육영수 초상화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거나 두 손을 모아 절을 한다. 거대한 저택 한 켠에는 가난했던 시대를 찍은 흑백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의 그들이 바로 지금 그 사진을 보는 그 사람들이다. 인간에게 배고픔만큼 잊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대물림 가난이 싫어 손발이 닳도록 일해온 저들이야말로 지금의 풍요를 가져온 원동력이 아닐까. 육영수 생가에 가득한 노인들을 보며 문득 느낀 단상이다.

 

 

이제 향수의 고향엔 지용도 향수도 없다. 그의 생가 터에 건립된 지용의 흉상과 시비가 그의 옛 고향을 무심하게 증언해줄 뿐. 옛이야기 속삭이던 실개천은 이제 잡초만 무성하고 그 황량한 시멘트 다리 밑에선 오리 몇 마리가 시궁창에 주둥이를 처박고 꽥꽥거린다.

 

 

이 땅에서 도회인들에게 고향은 이제 현재완료형이 돼간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은 이제 차마 꿈엔들 잊히지 않는 향수로만 존재할 뿐 그 누구도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의 기성세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고향을 가진 마지막 세대이지만 지금의 세대가 늙어 죽기 전에 고향은 벌써 아득히 사라져 간다. 그래서 이 땅의 중년들은 어디서든 노래 향수를 들으면 시간을 돌려 세워 그 옛날의 고향으로 가고 싶어 코끝이 찡해진다. 그런데 그때로 돌아가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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