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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7 13:32 | 수정 : 2015.03.27 13:34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3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musical drama film (음악적 극영화) “Sound of Music"(음악의
소리)이 개봉되었다, 영화관이 있는 나라 치고 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은 나라는 아마도 북한뿐일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걸작이다. 한국에서도 이 영화 보지 못한 사람 그리 많지 않을 것인데, 극장에서 본 사람보다 TV나 컴퓨터로 본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TV에서 매년 한 번쯤은 볼 수 있다.
이 영화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해군 함장 출신 중년 신사 게오르크 폰
트랍(Georg von Trapp)은 부인과 사별하고 7남매와 함께 대저택에서 산다. 그 집에 20대 예비 수녀 마리아가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녀는 아이들과 곧 친해지고 음악을 가르쳐 가족합창단을 조직한다. 폰 트랍은 한 귀부인과 약혼한 상태였으나 가정교사 마리아의 매력에 빠지자
귀부인은 스스로 물러나고 마리아가 그 집 안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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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의 남편 게오르크 폰 트랍(Georg von Trapp)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독일에 합병되고 퇴역
함장인 폰 트랍을 현역으로 불러낼 움직임을 보이자 폰 트랍 일가는 오스트리아를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합창단으로
참가하여 1등에 뽑히지만 시상대에 나타나지 않고 도주, 마리아가 있던 수녀원에 숨어들어 간다. 그러나 나치 경찰이 거기까지 따라오자 수녀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폰 트랍 일가는 이웃나라 스위스로 탈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그런데 영화 속 마리아가
아니라 진짜 마리아가 1949년에 독일어로 출판한 회고록의 영어판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 (트랍
가족합창단 이야기)를 보면 실제와 영화 사이에 차이가 크다. 우선 폰 트랍 가족 합창단이 음악제에서 1등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에서처럼
시상대에 나타나지 않고 도주한 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려고 꾸민 이야기였다.폰 트랍 함장이 나치 깃발을 자기 집에
거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히틀러를 싫어한 건 맞지만, 그들 가족은 산을 타고 스위스로 도주한 게 아니라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는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함장이
매우 무뚝뚝하고 엄격한 아버지로 영화에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는 음악을 좋아하고 매우 다정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함장이 집안에서도 해군
호루라기를 불어 자녀를 군대식으로 호출하고 해산시킨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폰 트랍 일가의 실제 가장 게오르크 폰 트랍은 영화
그대로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918년 패망 분할)의 해군 고급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초급장교 시절 중국 청나라의 외세배척 운동이었던
의화단 반란(1900년) 진압작전에 참가, 훈장을 받았다. 귀국하여 그는 잠수함 함장까지 진급한다. 그는 32세 때 잠수함용 어뢰를 발명하고
제조하는 영국 기업가의 손녀(19세)와 1912년에 결혼한다. 미인으로 소문난 부인은 10년간 7남매를 낳고 1922년 병사한다. 그녀는
친정에서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남겼다.
-
- 영화 "싸운드 옵 뮤직"에서 배우 줄리 앤드루즈는 이 여인 마리아 폰 트랍의 역을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폰 트랍은 거주지를 잘츠부르크로 옮기고 그곳의 대저택에서 4년간 여러 명의 가정교사와 가정부
등을 고용하여 자녀를 키운다. 7남매 중 병약한 셋째 딸 마리아(11세)의 간병인 겸 가정교사로 예비 수녀(우연히 이름이 같은 마리아)가
수녀원장의 명령을 받고 폰 트랍 대저택에 나타난다. 그때가 1926년, 마리아가 21세 때였다. 그녀는 10개월만 입주 가정교사로 일한 후
수녀원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폰 트랍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그 저택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그 집 안주인이
된다.
폰 트랍은 오스트리아 귀족출신 여성과 결혼하려다가 가정교사 마리아를 아내로 선택했다. 그때 그녀 나이 22세, 남편보다
25년이나 어린 신부였다. 마리아는 곧 딸 둘을 낳아 자녀는 9명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경제공황 여파로 은행예금을
대부분 잃게 되고. 또 오스트리아가 1938년 나치 독일에 강제로 합병되자 폰 트랍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한다. 마리아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막내아들을 낳아 총 10명의 자녀를 거느리게 된다. (영화에는 첫 부인이 낳은 7남매만 나오고 자녀의 성별과 이름, 나이 순서가 실제와 다르게
나온다.)
폰 트랍 (미국에서는 '본 트랩'으로 발음함)일가는 미국 동북부의 작은 주 버만트에 정착, 농장을 사서 그곳에 음악
캠프를 만들었다. 1938년 미국 이주 전 오스트리아에서 가족합창단으로 활동했던 마리아와 자녀는 미국에서도 순회공연을 하며 살았다. 어릴 때
고아가 된 마리아는 사범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1949년 회고록을 독일어로 써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 책을 토대로 독일에서 영화 두
편이 1956년과 1958년에 만들어졌고, 이 영화를 본 미국 뮤지컬 기획자가 1959년 뮤지컬 "Sound of Music"을 만들어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 히트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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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Sound of Music)의 한 장면
그리고 1965년에는 같은 타이틀의 영화가 만들어져 대박을 치고
주연배우 줄리 앤드루즈와 크리스토퍼 플라머는 스타 반열에 오른다. 두 배우는 지금도 살아있다. 진짜 마리아는 이 영화에 행인으로 몇초간 깜짝
출연도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폰 트랍 가문의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Meine Lieder, Meine Träume" (나의 노래, 나의
꿈)이란 제목으로 독일어 자막을 붙여 상영되었는데, 폰 트랍 일가가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잘라버렸다고 한다.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영화 제작권을 산 영화사 ‘패러마운트’는 마리아 역으로 오드리 헵번을 찍었다. 그러나 헵번은 사양했다. 이미
1953년 ‘로마의 휴일’로 스타가 된 헵번이 왜 주연 제의를 거절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헵번에게 거절당한
패러마운트사는 영화 제작을 포기하고 제작권을 ‘20세기 폭스’사에 팔아넘겼다. 나중에 크게 후회한 것은 패러마운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러나 진짜 마리아는 영화사로부터 원작료로 약 4백만불(현재 시가로 환산)을 받아 풍족하게 살다가 1987년 82세로
별세한다. 그녀의 남편 게오르크 폰 트랍은 그녀보다 40년이나 먼저 67세 때 사망했다. 폰 트랍 자녀 가운데, 첫 부인 소생 자녀 7명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작년(2014년)에 99세로 사망한 자녀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셋째 딸 마리아(가정교사와 동명)였는데, 이 아이가
심장이 약해 그녀의 아버지가 교사자격증을 가진 예비 수녀 마리아를 가정교사로 데려왔던 것이다.현재는 가정교사 마리아가 낳은 세
자녀(1남2녀)만 생존해 있는데, 막내아들 요하네스(75세)와 그의 아들 쌤이 버만트(Vermont)주의 스토우(Stowe)에서 Trapp
Family Lodge를 경영하고 있다. 이것은 약 10제곱킬로미터 들판과 야산에 호텔과 스키장 등 위락시설을 만들어 놓은 일종의 싸운드 오브
뮤직 띠임 파아크(테마공원)이다. 폰 트랍 일가가 살았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대저택은 어찌나 크고 좋은지 히틀러의 비밀경찰 두목 하인리히
히믈러가 그 저택을 접수하여 비밀경찰 사무실로 썼고, 히틀러도 그곳에 몇 번 들렸다고 한다.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구글 검색을
하다가 어떤 미국인이 쓴 이런 글을 발견했다. 즉, 한국에서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극장은 하루 상영횟수를 늘리기 위해 영화에서 노래
부분을 많이 잘라먹었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일까? 미국에서는 지금 영화 "싸운드 오브 뮤직" 개봉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 500여개
극장에서 이 영화가 재상영되고 있다.워싱턴에서조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