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 [월간조선] 이종찬 전 국정원장 "노태우 후계는 1980년 이미 결정" | |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23/2012042301861.html | |
입력 :
2012.04.23 16:17 | 수정 : 2012.04.23 17:49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李鍾贊 前 국가정보원장(上)
![]() 1980년 4월 15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됐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강도 높은 개혁을 다짐했다. 다음 날 부서장급 이상 40명 가운데 33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후 나는 총무국장으로 중정의 조직 및 인사개편을 추진했다. 국내정보 기구는 대폭 줄이고, 해외 및 대북(對北)정보 부서를 강화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정국(政局)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학생들은 광화문까지 진출해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외치기 시작했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탈취한 버스에 전투경찰 한 명이 깔려 죽었다.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중동(中東)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5월 16일 급거 귀국했다. 그리고 5·17 계엄확대 조치가 단행됐다. 김대중씨는 국기문란 혐의로 중정으로, 김종필(金鍾泌)씨는 부정부패 혐의로 보안사로 연행됐다. 김영삼씨는 자택연금 됐다. 5월 18일 아침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김근수(金瑾洙) 보안수사국장을 만났다. 그가 한 말이 나를 긴장시켰다. “김영삼은 놔두고, 김대중(金大中)만 저렇게 잡아들이면 전라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그의 말은 적중했다. 부산·마산은 평온했지만, 광주(光州)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5월 29일 나는 전두환 부장서리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중정 조직개편안을 설명하고 재가를 받았다. 이어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몇 차례의 인사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약 100명을 추려서 결재서류를 만들어 보안사령관실로 갔다. 결재서류와 인사카드를 살펴보던 전두환 부장서리가 인사카드 한 장을 꺼내 들더니 물었다. “이 사람은 왜 안된다는 거야?” 나는 그의 비위사실들을 설명했다. “이 사람이 누가 추천해서 부원이 된 줄 아나?” 그는 전두환 장군과 고교 동기로서 전 장군이 중정 인사과장 시절에 추천해 입사시킨 사람이었다. 인사서류의 추천인란에도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께서 추천한 사람이어서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인사위원들이 이런 사람을 두면서 다른 사람을 자르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여 고민 끝에 포함시켰습니다.” 전 부장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재서류에 서명했다. “뻔히 내가 추천한 줄 알면서도 정리대상에 포함시킨 것을 보니 이 심사는 공정하다고 믿고 결재하는 거야. 다만 퇴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퇴직 후 생계문제에 신경을 써 주기 바라네.” 김옥숙, “서울 출마, 우린 못해요” 1984년 8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지구당원들과 함께 경기도 천마산에서 당원 하계(夏季)연수회를 갖고 있었다. 갑자기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급히 만나자는 것이었다. 자리를 뜨기 어렵다고 하자, 자기가 오겠다고 했다. 1시간 후 정말 노태우 위원장이 나타났다. 그는 차도 마시지 않고 용건부터 꺼냈다. “각하께서 내년 선거에 서울 서대문에서 출마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고향 대구라면 몰라도, 서울은 기반도 없고 생소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각하는 ‘이종찬이도 종로에서 됐는데, 당신이 왜 안 되느냐. 서울에서 당선돼야 전국적인 인물로 클 수 있다’고 하시더군. 내가 서대문에서 나오면 될 수 있을까?” 12·12사태 직후부터 ‘2인자’ 소리를 듣던 그가 서대문에서 출마하면 야당의 집중공격 대상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솔직하게 “야당의 집중공격 대상이 될 것이고, 잘해야 2등으로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위원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내가 어렵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니, 이 의원이 잘 좀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 그러던 어느날 김포공항에서 열린 외국 국빈(國賓) 환송행사에 나갔다가 노태우 위원장 내외와 조우했다. 노 위원장은 “행사가 끝나면 연희동 우리 집에 좀 들러 달라”고 했다. 무거운 걸음으로 연희동으로 갔다. 노태우 위원장은 “어떻게, 말씀은 드려 보았나? 잘 안되는 것 아닌가?”라며 걱정했다.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더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우리는 이 의원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해요. 서울 출마, 우리는 못해요.” “애써 줘서 고맙다”더니… 나는 얼마 후 권익현 대표가 12대 총선 공천 후보자 명단을 가지고 청와대로 올라갈 때 따라나섰다. 권 대표는 “이미 각하의 결심이 굳으니, 노태우 위원장 얘기는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대통령 집무실 밖 대기실에서 만난 정순덕 수석도 “며칠 전 각하께 다시 확인해 봤는데 확고하시더라”고 했다. 권익현 대표가 보고를 마치고 나온 후 나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각하! 한 가지 제가 개인적으로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 전두환 대통령은 조금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민정당을 창당하면서 과거에 야당을 했던 조종호(趙鍾昊·4·5·11·12대 국회의원 역임)·김정례·윤길중씨 등을 영입했습니다. 조종호씨는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분이고, 윤길중씨는 대표적인 혁신계 인사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종호씨의 지역구인 동작에 허청일(許淸一·육사20기, 11·12대 국회의원 역임)씨를, 윤길중씨의 지역구인 서대문에 노태우 선배를 공천한다면 세상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과거 야당 사람들을 데려다가 일회용으로 써먹고 버리면서, 육사 나온 TK 출신으로 그 자리를 메운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종찬! 나는 거기까지 생각 못했다. 좋은 것을 지적해 주었어!” 이런 솔직함이 전두환 대통령의 장점이었다. 전 대통령은 “둘 중 한 사람만 공천한다면, 누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허청일은 오래 전부터 동작에서 준비를 했는데, 노 선배는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다. 전 대통령은 “그럼 노태우는 빼고, 대신 전국구 1번으로 하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사로 돌아와 권익현 대표에게 보고했더니 “노태우를 위해서나 당을 위해서나 잘된 일”이라며 좋아했다. 노태우 위원장도 내 얘기를 듣고 “잘됐다”고 기뻐하면서 “애써 줘서 고맙다”고 했다. 만일 2·12 총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대문에서 출마했다면, 그는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이후 대권가도(大權街道)에도 지장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 되자 이상한 얘기가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의 서대문 출마를 이종찬이 기를 쓰고 막은 것은 자기가 서울의 맹주(盟主) 노릇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당시 모든 각오를 하고 서대문 출마에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중간에 이종찬의 방해로 좌절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나는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의 일이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있던 안교덕(安敎德·육사11기)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왜 85년 총선거 때 노 대통령의 서울 출마를 막았소? 그게 당신이 오해를 받게 되는 원인이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나의 개인적 야심 때문에 그의 서대문 출마를 막았다는 얘기를 믿고서 나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두환, “이종찬, 노태우 잘 받들어” 1987년 6월 2일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전원을 청와대 상춘재로 부른 자리에서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노 대표는 “각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지명을 받고 보니 두려움이 앞선다”면서 전 대통령에게 사의(謝意)를 표했다. 이어 술이 돌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이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나가 옆에 있던 새 잔에 술을 따라 올렸다. 그러면 전 대통령은 술을 조금 마시는 시늉을 한 후, 다른 잔에 술을 따라서 돌려주었다. 내 차례가 왔다. 내가 전 대통령에게 술잔을 올리는 순간, 취기가 돌았는지 전두환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이종찬! 내가 누군지 알지? 자네가 잘해야 돼! 노태우 후보를 잘 받들어야 해! 알지?” 자리가 얼어붙었다. 노태우 대표도 나를 응시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순간 나는 전 대통령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짐작이 갔다. 얼마 전 친하게 지내는 기자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일(金榮馹) 청와대 사정(司正)비서관의 방에 갔다가 나에 대한 파일을 우연히 봤는데, 거기에는 “이종찬은 노태우 대표에 대하여 불만을 포지(抱持)하였다. 이종찬은 ‘노태우가 우유부단하고,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큼의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언동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 정권 내부에서는 “이종찬은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라는 식의 비방이 횡행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각하께서 하신 말씀의 뜻, 잘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파일에 있는 모략은 믿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래, 알았어. 자네가 앞장서야 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유학성의 독백 다음 날 노태우 대표를 정식으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한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됐다.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학성 의원이 독백(獨白)처럼 말했다. “오늘까지 오는 데 7년이 걸렸소.”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중정부장으로 가기로 결정된 1980년 6월 27일,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표와 나, 세 사람이 술자리를 가졌어요. 그 자리에서 ‘다음은 노태우’라는 약속이 있었어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여기에 이르니 감개무량합니다.” 12·12사태 직후부터 노태우 대표는 신군부의 2인자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꼽혀 왔다. 하지만 과거 김종필씨의 전례(前例)도 있어서 그가 과연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내가 노태우 대표가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1985년 그가 민정당 대표가 되었을 때부터였다. 하지만 유학성 의원의 말을 듣고 보니, 12·12 주도세력 내에서는 일찌감치 노태우 장군이 후계자로 확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6월 10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노태우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다. 실내는 축하 분위기 일색이었지만, 밖에서는 최루탄이 터지고 있었다. 상황은 나날이 악화됐다.
![]() 6월 20일 서울지역 국회의원들이 여의도에 있는 중국음식점 ‘도원’에 모였다. 홍성우(洪性宇) 의원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이제 체육관선거는 그만해야 해! 더 이상 안 돼! 이게 국민의 소리야!” 드디어 당내에서도 이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6월 21일 아침 9시부터 서울 가락동 민정당 연수원에서 의원총회가 소집되었다. 의원총회에 앞서 각 지역별로 분임토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홍성우 의원은 다시 한 번 ‘체육관선거 불가론’을 역설했다. 의원총회가 시작되자 법제처장을 지낸 이용훈(李龍薰) 의원(전국구)이 등단해서 외쳤다. “이제 잔재주 그만 피우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대해야 합니다. 직선제로 가자고 대담하게 주장하고 정면 돌파해야지 무엇을 주저합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홍성우 의원도 단상으로 올라가 “직선제로 정말 돌파하세요!”라고 주장했다. 6월 22일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간담회가 있었다. 전날 의원총회 분위기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지, 노태우 대표의 표정은 대단히 어두웠다. 중집위원들도 노 대표의 눈치를 살피느라 특별히 공개적인 발언을 삼갔다. 간담회가 끝난 후 근처 한식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노태우 대표가 말했다. “의원들이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와서 말해야지, 의원총회라는 공개된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발언을 하면 당이 분열된 것처럼 비쳐질 것 아니오? 당내에서도 나에게 압력을 가하는 게 옳은 일이오?” 이렇게 말하는 동안, 노 대표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서울지역 의원들의 의견분출이 내가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가다가는 서로 오해가 쌓일 것 같아, 그날 오후 노태우 대표를 면담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육사 시절 ‘후퇴를 해야 할 때에는 과감하게 확 후퇴해서 전선(戰線)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한강을 방어선으로 해서 싸우다 안되면 수원까지 후퇴해서 싸워 보고, 그게 안되면 다시 오산까지 후퇴해서 싸워 보는 식으로 찔끔찔끔 후퇴하다가는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차라리 대전까지 확 후퇴해서 거기서 전선을 다시 구축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카드를 한 장씩 내놓는 식의 전술적인 접근을 할 게 아니라, 뭔가 알맹이가 있는 포괄적인 제안을 해야 합니다.” 노 대표는 내가 말하는 ‘포괄적 제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나는 4·13 조치 철회와 개헌을 위한 실세간 대화, 구속자 석방, 김대중 연금해제, 사면복권 등을 꼽았다. 노 대표는 내 말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마음먹고 한 건의가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힘없이 의원회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나도 정치와 하직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무거운 마음이었다. 6월 25일 노태우 대표는 중앙집행위원들과의 오찬간담회를 마친 후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내게 “이용희(李龍熙) 의원을 통해 동교동계와 물밑대화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상도동 쪽은 유학성 의원과 박준병 의원이 맡기로 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난번 자네가 한 말처럼 대도(大道)를 걸을 결심을 하고 있네. 필요하다면 국민이 바라는 것을 수용할 생각이네.” 나는 노태우 대표의 태도가 상당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전날 전두환 대통령은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수용해서 정면 돌파하자”고 제안했다. 노 대표도 직선제 수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박철언(朴哲彦) 안기부장 보좌관, 이병기(李丙琪·의전수석·안기부 2차장 역임) 민정당 대표 보좌역에게 은밀하게 시국선언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나흘 후 노태우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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