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13일 유억겸 문교부장은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을 공식발표 했습니다. 이것은 경성대학과 서울 및 근교에 있는 9개 전문학교를 하나의 종합대학교로 통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미 군정청 문교부는 "새 이상과 새 구상 아래 국가의 전 학계를 대표할만한 거대한 국립서울대학을 신설"하겠다고 포부도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국대안이 발표되자마자 문교당국은 심각한 반대에 봉착합니다. 전문대학교수단 연합회는 '국대안을 운영할 이사회가 군정청
문교부 관료로만 구성되어 있고 대학교 총장에 미국인을 임명하는 것은 고등교육기관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관료 독재화할 우려가 있다'며 즉각
반발합니다. (사진은 경성제국대학 대학본부 건물. 현재 마로니에공원 오른쪽에 있음.)
관련 전문대생과 대학생들 역시 국대안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결행하죠. 학생들은 친일교수를 배척하고 경찰의 학원 간섭을 금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집회허가제를 폐지하고 국립대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과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1947년 2월 들어 좌우익 정치세력들의
관여로 국대안 반대운동은 본격적인 좌우익대결로 번졌습니다. 더욱이 1947년 1월부터 재현된 반탁, 삼상회의 결의안 지지를 둘러싼 좌우익 대결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대안 문제뿐 아니라 당시의 편파적이고 비양심적인 교육행정이나 학원의 자유,
신앙의 자유와 같은 이슈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미군정청에서는 이 문제를 입법의원에 상정하기로 결정하고 맹휴 참가 학생들을 모두
제적하겠다고 협박합니다.
한편 국대안 반대운동을 반대하는 단체들도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익 학생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이었습니다. 이들은 맹휴반대투쟁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국대안 반대운동이 좌익 정치세력의 선동에 의한 것인양 폄하하면서 이념적
잣대로 문제를 호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국대안 반대운동은 3월부터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국대안 반대운동에 대한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던 거죠. 서울대 이사회는 국대안 문제를 종결짓기 위해 6월 13일 제적학생에 대한 무조건 복교를
결정했습니다만, 실제로는 대학 교수회의 심사를 거치는 조건부 복교로 재학생의 10~20%를 걸러내게 됩니다. 또한 서울대 총장을 한국인으로
바꾸는 선에서 국대안 문제를 종결짓게 되지요.
국대안 반대운동은 오랫동안 좌익정치세력의 책동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단죄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이 해방이후 최초의 교육개혁운동이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미군정이 국대안을 이렇게 무리하게 내세웠던
이유에는 학원내의 좌익세력을 몰아내고 미국의 지지기반으로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새로운 엘리트층을 양성하겠다는 목표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10개의 캠퍼스를 가진 희한한 서울대학교는 이렇게 탄생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