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불교계 분규는 아직 정확한 명칭이 없습니다. 불교계 분규라는 명칭은 우리가
만들어 붙인 편의상의 표현이예요. 이 사건은 1952년부터 불교계 내에서 갈등의 조짐을 나타내다가 1954년 제 1차 이승만 담화를 계기로
표면화되었습니다.
대립의 축은 대처승을 중심으로 한 총무원과 비구수행승을 중심으로 한 선학원계열이었대요. 총무원세력은 일제침략기에
대개 친일행적을 했었고 당시 다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선학원 계열은 소수파였죠. 대처승은 7000여명의 승려가 있었고, 비구수행승은
많아야 500여명이었답니다.
1954년 5월 21일 이승만은 1차 담화에서 왜색불교의 청산과 대처승의 추방을 주장하였습니다.
담화가 발표되자 대처승쪽은 6월 10일 불국사에서 법규위원회를 개최하고 자체 정화노력을 펼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 않았죠. 한편
비구수행승들도 9월 28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고, 종정에 만암, 부종정에 동산 등을 임명하고 교단 정화에 나섭니다. 이때 종조논쟁이라 해서
양측간에 정통성 논쟁도 함께 시작됩니다. 태고법통설과 지눌법통설 간의 논쟁이었죠. 하지만 양측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서로간 대화를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4일 이승만이 2차 담화를 발표하면서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승만의 담화로 힘을 얻은
비구측이 사무인계를 받겠다며 조계사로 진입했거든요. 비구측은 일단 조계사의 인수에 성공합니다만, 11월 17일 대처승측이 다시 조계사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심각한 폭력사태가 발생합니다.
이승만은 이후 세차례나 더 담화를 발표했어요. 문교부 등의 정부 부처들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이나 정부 부처나 노골적으로 비구측을 지원하였습니다. 수세에 몰린 대처승측은 계속 협상을 거부했구요. 결국 이
문제는 국회 본회의에까지 상정되었는데요. 국회는 정부가 종교문제에 간섭하지말고, 형사상 재산상의 손실에 대해서만 법적 조치를 취하라고 경고했죠.
하지만 이승만이나 정부당국은 끝까지 편파적이었어요. 불교계의 분규는 끝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법적인 분쟁으로 변질되어 1960년대로
넘어갑니다.
이승만은 왜 불교계 분규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했을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승만은 이러한
불교계 분규를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일차적으로 이해관계를 갖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담화가
발표되곤 했거든요. 또 그는 친일불교계의 청산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이 사건을 반일운동의 일부분으로 활용했던 것 같기도 하구요. 다들
아시겠지만 이승만은 1954년부터 대대적인 반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었죠. (우리 홈 '리뷰'를 참고하세요)
불교계 분규는 일단
비구측의 세력 확장으로 일단락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비구측이 정화운동을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죠. 비구측의
정화운동은 이승만저권이라는 외부 권력에 의존함으로써 불교계를 국가권력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식민지 시기때에는 일본제국주의에,
해방후에는 정부권력에 밀착하는 그런 보수적인 교풍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거죠. 더구나 비구측은 분규과정에서 세력확장을 위해 무자격 승려를
양산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도 봉건적 잔재와 식민지 유산의 청산은 제대로 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참고 :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사 (2004년 10월 "20세기 근현대사연구"에서
퍼 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