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연재]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答 학문은 '答에 대한 성찰'… 종교는 '問에 대한 성찰'
스승 정진홍 한림대 교수, 제자 장석만 종교문화硏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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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계산만 하고 재는 삶은 이미 젊음이 아니지
정진홍(鄭鎭弘·67) 한림대 특임 교수는 한국 종교학 연구의 1세대 학자로 평가된다. 서울대 종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정 교수는 1960년대 말 미국 연합신학대 유학 중 종교학자 엘리아데를 직접 대면하고 그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본격적인 종교학자의 길을 걸었다.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 종교학과에 재직하며 종교를 신앙의 대상에서 문화적 차원의 담론 대상으로 이끌어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으며 시집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 등도 펴냈다. 장석만(張錫萬·49)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개항기 한국사회 ‘종교’개념의 형성’ 등의 논문과 ‘종교다시 읽기’(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문 상상력과 종교는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나요
답 경직된 문화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어 주지
문 종교사의 변화를 읽지못해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답 정치도 종교화… 맹목적인 광기로 善惡 판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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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만=선생님께서 최근에 쓰신 글에서 ‘인간의 삶은 홑겹이 아니라, 겹겹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정진홍=사실과 의미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사실에 매몰되어 의미를 잃든가 일상성 속에 함몰된 채 비일상적인 어떤 것을 잊곤
하죠. 예를 들어 종교는 비일상적인 주장으로 구체화된 문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투과하는 깊은 차원에서 의미를 담고 있죠. 보통 우리는
일상을 평면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덜커덩 일상이 흔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태까지 묻지 않고 살아온 삶에서 벗어난
낯선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익숙하지 않은 물음이 초래하는 답변이 곧 신비에의 어떤 낌새, 다시 말하면 결코 홑겹이 아니었구나 하는
터득이죠.
▲장=선생님께서는 상상력에 대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그러하고 공부의 영역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흔히 허구적인 것을 떠올려서인지 상상력과 종교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우리는 신앙, 이성, 감성 등으로 삶을 재단하고 각기 절대적인 실재인 양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맹신으로, 학문으로
독선으로, 감성은 도취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러한 서술범주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하고, 그러한 분류개념을 재성찰해야 합니다. 나는
상상력이 기계적으로 경화(硬化)된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지평과 서술범주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럴 때 삶은 훨씬 열려진 호흡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말씀하신 경화된 문화라는 것에 대해 특히 종교인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라면,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경화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정=진리는 사물이 아닙니다. 하나다 둘이다 하고 셀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진리는 초시공적인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삶의 자리에서 창조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마치 진리를 사물처럼 전제된
것, 도달해야 할 것, 소유해야 할 것 등으로 말합니다. 때로 학문의 태도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진리는 이미 죽은 진리입니다.
▲장=선생님의 종교학에서는 제발 전통별로 종교 연구하지 말자고 하십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전통에 따라 종교를
연구할 경우, 많은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종교전통에 따른 연구에서 벗어나자”라는 것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요?
▲정=물론 전통별 종교연구는 필수적이고 중요합니다. 가장 구체적인 역사현상이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연구가 지닌 그늘도 유념해야 합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종교별 연구는 특정 종교의 자기주장의 논리를 진술하는 것으로 일관하면서 갈등을 내장할 수밖에 없었고 주로
사상사나 교리사 위주로 기술되어 종교문화를 총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제는 무엇이 기독교인가, 불교인가를 묻기보다 왜
인간은 종교적이게 되고 하필이면 불교인이고 기독교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도 역사현상이고 문화현상이라는 인식을 기초로
하지 않고는 현대의 종교문화가 보여주는 고전적인 종교개념의 몰락과 새로운 ‘구원에의 희구’라는 문화현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장=종교학을 연구한다면 ‘믿는 신앙이 무엇이냐’ ‘신앙과 학문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신앙과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요?
▲정=학문의 배후에는 학문을 학문이게 하는 비학문적 실존적 모티브가 있습니다. 신앙의 배후에는 신앙을 신앙이게 만드는 비신앙적인 인간적
고뇌가 있죠. 종교학과 기독교는 그러한 내 모티브와 고뇌가 선택한 내 삶입니다. 결과적으로 학문은 ‘해답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고, 종교는
‘물음에 대한 성찰’이어야 합니다. 둘 사이에 갈등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학문을, 학문은 신앙을 더 확장하고 심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종교학은 내게 ‘지적 정직성은 종교적 봉헌 속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장=현재 한국의 종교현실에 대해 학계의 자세나 사회의 일반적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우리 학계나 사회는 경험을 표출하고 기술하는 데 정직하지 못합니다. 전통 종교의 끈질긴 지속, 지배종교의 교체 등의 역사적 기억,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스스로 종교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현상, 그리고 현존하는 다종교 상황 등을 몸으로 겪으면서도 종교들은 여전히
배타적 자기 절대화 속에서 타자의 현존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종교나 학계의 이러한 자기기만적 태도는 종교문화 전체를 ‘병든 문화’이게 하고
있습니다. 종교학은 종교문화에 대한 문화비평적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종교를 해체하려는 것도 아니고 특정 종교를 고양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장=최근 선생님께서 종교사의 흐름을 ‘종교의 시대’ ‘종교들의 시대’ ‘종교적인 것의 시대’로 구분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이런 변화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좀더 설명을 해 주십시오.
▲정=단일한 ‘종교’만을 인식하던 의식으로 ‘종교들’이 공존하는 다종교현상을 기술하고 판단한다면 이미 그 자체가 오류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들의 배타적 독선이며 여기서 오늘날 종교가 원인을 제공하거나 정당화하는 살육까지 자행됩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들’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언어로 ‘종교’를 발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전적인 종교개념이 무색할 만큼 ‘종교적’인 현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치의 종교화’도 그
하나입니다. 요즘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을 판단하는 정치언어는 고전기의 종교언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호해야 할 진리와 척결해야 할
비진리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돈독한 신앙이란 맹목적인 광기와 실은 표리(表裏)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기 가득한 근본주의의 숲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서술범주의 새로운 구축, 물음틀의 새로운 구성이 이뤄져야 합니다. 종교, 종교들, 종교적인 것들의 구분은 이를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인문학을 지망하는 학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의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종교학에 관심 있는 학생 그리고 인문학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저는 인문학을 ‘기본적 학문’이라고 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기본’ ‘기초’라고 하면 왠지 초반 일정기간만 배우고는 ‘졸업’할
대상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근원적인 것을 천착하는 ‘일상적인 학문’으로 인문학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젊음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삶은 의외로 높고 깊고
넓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하게 살아도 모자랍니다. 약삭빠르게 계산하고 재는 삶은 이미 젊음이 아닙니다.
대담 전문
장: 선생님께서 최근에 쓰신 글에서 인간의 삶은 홑겹이 아니라, 겹겹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정: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과 의미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닌데 때로 우리는 사실에 매몰되어 의미를 상실하거나 일상성 속에 함몰된 채 어떤 비일상적인 것의 현존을 망각하곤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는 흔히 비일상적인 주장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사실을 투과하여 그 깊은 차원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담고 있죠. 모든 삶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이나 일상에만 집착하게 되면 삶이 얇아지죠. 자칫 잘못하면 찢어지거나 젖어버립니다. 따라서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사람노릇하며 살기 위해서는 이런 겹침의 모습을 잘 봐야 하지요. 신비에의 감성을 지녔으면 하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이해해도 좋겠지요. 장: 이렇게 겹쳐져 있는 것 자체가 다시 또 무한히 겹쳐지는 것이겠지요? 정: 그렇죠. 중첩은 존재론적인 구조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하는데 대한 의식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러저러한 사물과 만나면서 비로소 ‘겹침의 인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우리는 삶을 겹침이나 홑겹으로 다르게 판단하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이유 때문에 홑겹이 아닌 삶은 그것을 의식하는 매 순간들이 점철하면서 그 경험이나 의식이 무한히 펼쳐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죠. 보통 우리는 일상을 평면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덜커덩 일상이 흔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여태까지 묻지 않고 살아온 삶에서 벗어난 낯선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때 이 익숙하지 않은 물음이 초래하는 답변이 곧 신비에의 어떤 낌새, 다시 말하면 삶이 결코 홑겹이 아니었구나 하는 터득이죠. 정직하게 물음을 묻는다면 말입니다. 장: 선생님께서는 상상력에 대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그렇고 학문의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흔히 종교와 상상력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흔쾌한 기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상상력하면 허구적인 것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정: 나는 상상력을 신앙이나 지성에 상반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환상이나 백일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또는 ‘정신’을 신앙이나 지성이나 감성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그 범주가 무엇을 잃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선택한 개념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종교는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그렇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절대적인 진리로 수용하죠. 그런데 바로 그러한 해답은 특정한 시대나 문화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반향(反響)입니다. 따라서 비록 그 해답이 ‘인간’에게 본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온갖 시대나 문화의 물음에 기계적으로 상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종교는 그러한 문화-역사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자신의 해답의 절대성을 보편성의 범주로 상정하고 모든 정황에 규범적인 것으로 강요하곤 하지요. 결과적으로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는 ‘경화(硬化)된 해답의 구조’로 기능합니다. 게다가 제도화된 종교의 경우, 이 해답은 ‘힘’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물음도 해답도 특정한 종교의 제도적 전통과 실천적 규범에 의하여 통제되고 강요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죠. 이러한 현실은 사람들에게 마치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비극적인 정황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신앙의 강화나 지성적 분석이나 감정적 대응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제나 논리나 관성적인 것을 벗어난 새로운 ‘마음’이 열려야죠. 나는 그것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봉헌에 대한 성찰, 논리적 필연으로부터의 탈출, 새로운 존재양태의 모색이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다른 것보다 우위에 있다든가 상상력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신앙, 이성, 감성을 아우르면서 ‘마음의 경화’를 넘어서기 위해 잃었던 매개를 다시 확인하고 강조하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삶은 논리보다 더 넓다고 하는 것, 그리고 삶은 개념에 모두 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논리적으로 진술하고 개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이 역설을 견디는 일은 상상력에 의한 새로운 실재에 대한 희구가 생동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학문의 엄밀성과 실증성만으로는 학문자체의 경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상상력은 바로 이런 한계를 인식하게 하고 또 넘어서도록 하는 ‘의식의 결’이라고 할 수 있죠. 장: 아까 말씀하신 경화된 해답의 구조라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라면,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경화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정: 진리는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이 삶다움을 찾아 마침내 도달했다고 여기는 종국적인 상황에 대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연히 하나 둘 하는 수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진리를 절대나 불변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진리이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를 굳이 ‘사물화’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시공적인 것이라서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공 안에서 상황적인 적합성을 가지고 인간의 간절한 희구에 답변해주는 것이라서 오히려 불변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경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고, 그 적응력을 통해 현실을 재창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산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적인 적합성을 잃은 진리는 이미 진리라고 할 수 없지요. 때로 우리는 너무 관행적으로 기존의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과오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장: 선생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강조점 가운데 하나가 종교를 연구할 때, 제발 종교 전통별로 하지 말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전통에 따라 종교를 연구할 경우, 많은 문제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종교전통에 따른 연구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주장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전통에 따른 연구에서 벗어나자”라는 것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요? 정: 물론 전통별 종교연구는 중요하고 필수적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종교현상이니까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개 종교에 대한 연구가 실은 일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연구가 특정 종교의 사상사, 혹은 교리사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몇몇 연구를 제외하고는 종교의 중요한 부분인 사상, 의례, 공동체, 그리고 경험에 대한 연구가 상호 연관된 유기적인 총체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파편화된 인식은 그 인식자체를 스스로 배신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비록 그 딜레마를 거역할 수는 없어도 그 딜레마의 의미는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 전통종교의 연구를 넘어서는 다른 접근이 불가피합니다. 또 하나는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보다 무엇을 인간들은 종교라고 일컫는가 하는 물음이 우선할 뿐만 아니라 종국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종교 그것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문화를 이루는 총체의 한 범주로서의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종교에 다가가지 않으면 우리의 종교이해는 특정 종교의 자기 정당화의 논리, 곧 신학이나 교학의 논의를 추종하면서 이를 반복하는 종교논의 이상을 전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특정한 신앙을 강화할 수는 있을지언정 종교에 대한 인식지평의 확장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는 여러 종교들의 공존, 그것이 낳는 새로운 복합적인 종교적 에토스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기독교이고 불교인가 하는 물음을 묻기보다 왜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인가를 묻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의 여운을 좇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도 역사현상이고 문화현상이라는 인식을 기초로 하지 않고는 현대의 종교문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사태, 곧 고전적인 종교개념의 몰락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새로운 ‘구원에의 희구’의 문화화 현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종교연구가 개별종교연구를 아우르면서도 문화비평적 인식의 틀 안에서 다시 서술되어야 비로소 종교문화의 현존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 그러면 이런 관점이 종교학을 신학과 구별할 수 있게 한다고 봐도 되는 것인지요? 종교학을 한다고 하면 믿고 있는 신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기 일 수이고, 신앙과 학문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느냐라는 계속된 질문을 받게 되는데요?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어려서부터 개신교를 믿으셨고, 지금도 독실한 신앙을 유지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신앙과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요?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이 선생님께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정: 학문의 배후에는 학문을 학문이게 하는 비학문적인 실존적 모티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배후에는 신앙을 신앙이게 하는 비신앙적인 인간적 고뇌가 있죠.. 학문과 기독교는 그러한 내 모티브와 고뇌가 선택한 내 삶입니다. 그러므로 내 신앙과 ‘종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문법’이라고 여겨지는 종교학은 전혀 갈등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학문을, 학문은 신앙을 더 확장하고 심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학과 종교학은 상당한 긴장을 유지합니다. 비단 기독교 신학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자기주장의 논리’와 종교학은 긴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들’은 물음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스스로 전유(專有)하고 있다는 닫힌 태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학문은 ‘해답의 향유’가 아니라 자기 물음에 대한 ‘무한한 정직성’을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언제나 물음이 피상적인데 머물지 않고 근원적인데 이르렀는가를 묻습니다 결과적으로 학문은 ‘해답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고, 종교는 ‘물음에 대한 성찰’이어야 합니다. 그 둘이 갈등적일 까닭이 없습니다. 신학과 달리 종교학은 나에게 닫힌 언어가 아니라 열린 언어를 발언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체성이 보편성 속에서 유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체성은 보편성 속에서 비로소 자기 실재성을 갖습니다. 종교학은 내게 지적 정직성은 종교적 봉헌 속에서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할 수 있죠. 장: 종교적 봉헌과 지적인 정직성이 서로 피드백 관계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데도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어떻게 볼 수 있는지요? 정: 그것은 학문이 자기의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타자에 의해서 동기화된 ‘학습한 문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의 문제에 정직하다면 불필요한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나 부처에서부터 시작하지 말고, 나의 삶, 우리의 삶부터 이야기하자”고 나는 주장합니다. 장: 종교학이 한국의 종교현실에 대해 발언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겠군요? 끊임없이 물음 주체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하는 학문이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정: 그렇죠. 학문이란 삶과 경험에서 출발해서, 그 경험을 의미 있게 담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인식범주와 개념, 그리고 논리에 담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틀을 마련하여 거기 담을 것인가 하는데 따라 학문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세계를 맥락으로 한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서 삶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상응하는 인식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기존의 문화담론 자체를 철저히 성찰해야 합니다. 때로는 ‘의도적인 오독(誤讀)’마저 감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문은 논리적 필연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성을 위해 창조성을 대가로 지불할 수는 없는 일이죠. 종교학은 종교와 학문의 틈새에서 나름의 새로운 문화담론을 창조적으로 진술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현재 종교에 대한 학적인 자세나 사회의 일반적 태도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시고 계신지요? 정: 우리 학계나 사회는 경험을 표출하고 기술하는데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종교문화에 대한 태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통종교의 끈질긴 지속, 지배종교의 교체 등의 역사적 기억을 지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스스로 종교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현상, 그리고 현존하는 다종교 상황 등을 몸으로 겪으면서도 종교들은 여전히 배타적인 자기 절대화 속에서 타자의 현존을 부정하고 있고, 종교는 사적(私的)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투의 비학문적 태도가 학문의 영역에서 충분히 성찰되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나 학계의 이러한 자기기만적 태도는 종교문화 전체를 ‘병든 문화’이게 하고 있습니다. ‘비판적 성찰’이 가해지지 않기 때문이죠. 종교학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종교문화에 대한 문화비평적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종교문화의 현상을 기술해야 하고, 그 현존의 의미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종교를 해체하려는 것도 아니고 특정 종교를 고양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현존하는 종교문화에 대한 성찰, 그것을 통한 문화전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삶을 삶답게 하는 태도를 자극하려는 것뿐입니다. 장: 종교학자로서 선생님은 평생 엘리아데라는 학자에게 애정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선생님에게 엘리아데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정: 어려서부터 신학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신학자들을 만나면서 실망이 많았죠. 젊었을 때, 고등학교 성경교사를 했었는데 학생들에게 기독교 용어로 이야기하면 지루해 하다가도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로 풀어주면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학언어가 ‘사투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번민할 즈음 만난 것이 엘리아데였습니다. 아직도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을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통종교들의 역사적 전개를 서술하지 않고도 인류의 종교사를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개안(開眼)’이었습니다. 새로운 서술범주의 발견, 새로운 개념의 창출보다 더 의미 있는 학문적 업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를 통해 종교와 세계와 문화와 인간을 재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학을 하고 싶었던 자리에서 종교학을 하도록 해준 것이 엘리아데입니다. 삶을 감사하게 만들어준 이런 첫사랑과도 같은 고마움 때문에 지금 엘리아데에게 퍼부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 제기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는 여전히 잊혀질 수 없는 ‘스승’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 지금 엘리아데에게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내용인지요? 정: 주로 엘리아데가 역사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엘리아데는 헤겔로 대표되는 역사주의를 강대국의 역사를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강대국의 논리를 약소국 루마니아 출신의 엘리아데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죠. ‘역사의 법칙’? ‘역사창조’? ‘역사창조의 주체’? ‘역사의 심판’? ‘옳은 역사, 그른 역사’라는 개념들이 가지는 폭력적인 ‘그늘’을 충분히 성찰하지 않고는 엘리아데의 주장을 그렇게 가볍게 비난할 수 없을 듯합니다. 역사주의라는 기존의 틀에 사로잡힌 채, 역사주의를 비판하는 엘리아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공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회귀나 원형에 대한 평가도 대부분 잘못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흔히 ‘결승점 없는 트랙’을 영원히 도는 것으로 영원회귀를 이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영원회귀는 ‘끝은 시작’이라는 연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끝과 시작은 분명히 있고,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죠. 천지개벽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역사창조의 주체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을 하며 엘리아데를 비난하는 것은 역사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당연하게 여길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가 파시즘과 관련되었다는 비난도 루마니아의 지정학적 입장에서 절박한 당위로 전제되던 1930년대 당대의 루마니아 민족주의와 연계하지 않고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국수주의적인 저널에 몇 편의 글을 기고했고 리스본의 루마니아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으로 반유대주의자로 살아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가 종교사에서 유대교의 아브라함의 존재를 ‘종교사적 사건’으로 여기고 그 창조성을 기술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비난은 서구에서 ‘아우슈빗츠 이후’의 지성이 낳은 ‘과장이나 왜곡’이 없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장: 최근에 선생님께서 종교사의 흐름을 ‘종교’의 시대, ‘종교들’의 시대, 그리고 ‘종교적인 것’의 시대로 구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관해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정: 단일한 ‘종교’만을 인식하던 의식을 가지고 “종교들‘이 공존하는 다종교현상를 기술하고 판단하면 이미 그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그 오류가 낳는 것이 종교들의 배타적 독선입니다. 상황은 달라졌는데 의식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태도입니다. 종교는 자기만이 선과 진리를 배타적으로 전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부터 스스로 ‘반종교적’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가 원인을 제공해주거나 ‘정당화’하는 살육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들’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언어로 ‘종교’를 발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전적인 종교개념이 무색해질 만큼 ‘종교적’인 문화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치의 종교화 현상’도 그 하나의 예입니다. 요즘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을 판단하는 정치언어는 고전기의 종교언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호해야 할 진리와 척결해야 할 비진리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전쟁’은 불가피한 필연인 듯싶습니다. 돈독한 신앙이란 맹목적인 광기와 실은 표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기 가득한 근본주의의 숲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태는 심각합니다. 종교, 종교들, 종교적인 것들이라는 범주의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와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전반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개개 ‘종교간의 대화’ 운운하는 자리로는 부족합니다. ‘문명권의 충돌’이라는 편리한 진단으로도 부족합니다. 종교문화 또는 문화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서술범주의 새로운 구축, 물음 틀의 새로운 구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종교? 종교들? 종교적인 것들은 이를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장: 선생님께서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시기도 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선생님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문학에 동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정: 절대로 시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학문하면서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인식과 상상’의 긴장입니다. 경험은 개념과 논리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존재는 새 언어를 빚습니다. 새 언어를 낳지 못하는 학문은 동어반복에 불과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기보다 신념의 강화에 머뭅니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지적 주장과 시적 상상력이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적 지성’이나 ‘지성적 감성’은 불가능한 개념일는지요. 문학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제 고뇌의 일단일 뿐입니다. 장: 선생님께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의 문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노인의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지니는 심각성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가있는 노인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요? 정: 고등학교에 다닐 때, 무척 죽고 싶었습니다. 오래 살면 추해질 것 같아서요. 지금은 죽을 때가 되니까 자연히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곱게 착하게 깨끗하게 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검이 치워야 할 쓰레기로 여겨지고, 주검의 처리가 경제원리로 그 방법이 선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화는 죽음을 아예 간과하려고 합니다. 죽음 때문에 생겼다고 하기도 하는 고전적인 종교들조차 이제는 생명의 윤리는 이야기해도 죽음의 윤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관의 부재, 그것은 죽음문화의 타락이죠, 그런데 그것은 곧 생명문화의 타락이기도 합니다. 그 둘은 단절된 것이 아니니까요. 실제적인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각기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 낳은 죽음문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모두 삶을 준비하듯 죽음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 인문학을 지망하는 학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의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학들(종교학에 관심 있는 학생 그리고 인문학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 먼저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논의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저는 그런 논의방식에 식상해 있습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인 학문이다. 그래서 지원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마치 자신들이 순교자인 것처럼 과시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문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식으로 인문학이 바뀌어야 합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하라고 하기가 겁이 납니다. 특히 종교학은 더합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인문학적 사유’나 ‘인문학적 상상’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합니다. 방금 말했듯이 그것이 ‘기본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결여가 얼마나 심각한 현실적인 문화실조(失調)를 낳는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만약 제도권 안에서 규범화된 ‘학문’이라는 개념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인문학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을 훨씬 자유롭게 모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을 배워 묻지 말고 자신의 물음을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문학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아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삶은 남을 위한 봉사인데 이 길이 그리 ‘가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청춘의 삶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삶은 생각보다 훨씬 높고 넓고 깊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해도 그 전부를 살기에는 부족합니다. 약삭빠르게 계산하고 재는 삶은 이미 청춘이 아닙니다. 장: 선생님께서 지금 하시는 작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앞으로 하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정: 도서출판 ‘산처럼’에서 기획한 ‘사유의 열쇠, 종교’편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써지질 않습니다. 매우 초조한데 되질 않습니다. 한림대 과학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신뢰연구’ 중에서 ‘종교와 신뢰’ 문제도 연구를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한국 종교학의 심장인 한국종교문화연구소가 더 활발하게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는가 하는 일입니다. 재정적인 문제에서 인력의 활용에 이르기까지 난제가 쌓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유능한 젊은 학자들이 충분히 의미 있는 결실을 이룰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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