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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어요, 언더우드!

이강기 2015. 10. 28. 11:52
 원문링크 : http://blog.chosun.com/artemis/41822

수고하셨어요 언더우드

 

"냉정해, 인간미가 하나도 없다니깐..."

 

연대 영문과를 졸업한 한 친구에게 원한광 박사에 대해 물었습니다.

'F'학점도 아끼지 않으며

정치적인 학생들을 싫어하고

여학생들이 "교수니임~"이라며 치대오면 도망간다고 하더군요.

 

빡빡한 외부 스케줄때문에 

(TV와 신문에 오르내리는 일부 '유명교수님'들은 마치 연예인처럼 시간에 쫓기죠. 조교들은 메니저가 됩니다)

학생들이 무턱대고 기다리는 10~20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교수도 있고

강의명은 계속 바뀌는데 강의내용은 똑같은 사람도 있고

어떤 교수들은 자기가 쓴 책을 줄줄 읽어나가기도 합니다.

보장된 정년때문인지 졸업생으로부터 '아, 그 교수 공부를 하도 안해서 딱 대학원 1학기 수준이야'라는 모욕적인 평을 듣는 사람들도 있죠.

 

물론 학생들에게 지옥같이 많은 과제를 내주며

그들을 학문적으로 무장시켜 내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이제는 잊혀진 '자연'이니 '공동체성'같은 아날로그적 가치를 가르쳐준다며

노구를 이끌고 학생들과 함께 지리산을 오르는 분도 있으시죠.

혹은, 졸업생들의 취업때문에 학교에서 내주는 2~3만원의 수고비만 달랑 들고

중소기업 인사담당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분들은 물론이며

어떤 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의 가치관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어떤 요인이

교수들을 이 두가지 부류로 나누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전자는 두고두고 원망과 냉소의 대상이 되는가하면

후자는 학생 뿐 아니라 사회의 존경 속에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원한광 교수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요?

그가 학생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두우 박사로부터 시작해 원한광 박사까지 이어지는 언더우드家 4대는

종교와 이념과 국가를 초월해

우리의 넉넉한 존경을 받을만하다는 건 분명하겠지요.

 

 

 

 

국민훈장 받은 원한광 박사

 

“한국 사랑 120년 나는 떠나도 언더우드는 남아”

 

연세대 설립 언더우드 박사 손자 헐버트 ‘대한제국멸망사’ 등 자료 42박스 연세대에 기증

 

 

지난 8월 24일 오전, 종로 정부종합청사 교육부총리실. 안병영 부총리가 벽안(碧眼)의 한 신사 목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걸어주고 있었다. 그의 증조부인 원두우(1859~1916) 선생이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 땅을 밟은 지 120년 만이었다. 한국은 할아버지 원한경(1890~1951) 박사와 아버지인 원일한(1917~2004) 박사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영국인 조운 데이비슨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원한광(61) 자신도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에서 태어났을 뿐 세살 때 한국으로 건너와 이후 미국에서 수학한 기간을 제외한 35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수상소감을 묻자 그는 “120년간 언더우드 가족 모두가 해온 역할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주신 상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마무리’, 그는 오는 12월 한국을 떠난다.

 

 

녹음(綠陰)도 끝물인 8월 30일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에서 만난 원한광 박사. 그의 사무실에서는 학교 정중앙에 세워진 원두우 선생의 동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증조부께선 4가지 소망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셨어요. 이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 병이 많은 나라에 서양식 의료가 들어오는 것, 근대 교육이 들어오는 것,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것. 지금 한국에서는 4가지 희망이 다 현실이 됐잖아요. 이제 한국에서 선교사가 있어야할 시대, 꼭 언더우드가 있어야 할 시대는 갔어요. 또, 이젠 나도 환갑의 나이거든. 은퇴할 때고 나라보다는 가족이 소중해지는 때예요. 우리 아이들이 다 미국에 있고 12월에는 손주도 생깁니다. 12월 17일쯤에는 미국으로 돌아가야죠.”

 

인터뷰 도중 사진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니 “잠깐!”이라고 외치며 한 손에 빗을 들고 거울 앞으로 달려간다. “아이고, 남자라도~ 제대로 된 모습으로 찍혀야죠”라며 활짝 웃는 언더우드 4세는 면바지 차림에 검정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국=우리나라”라 불러

 

그는 대화 도중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했고 한국인을 ‘우리’ 안에 묶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이 한국이니 자신의 본적, 즉 고향도 이 곳 아니겠냐는 거다. “지난 30~4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란 물음에 그는 “당신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자기 집, 자기 나라에 대해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냐면서.

 

 

“한국의 발전상은 놀랍죠. 민주주의뿐 아니라 하이테크 기술도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돌아가서 불편을 느낄지 모르겠어요. 1945년만 해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75%가 넘었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요. 지금 한국인들 너무 똑똑해요. 물론 대학교에 가기는 어려운데 입학하고 나서 학생들이 공부 안하는 건 문제라고 봐요. 그건 학생 책임이 아니라 교수 책임이에요. 교수들이 공부를 너무 안 시키니까 그런 거거든.”

 

그는 1987년 연세대 초대 국제학대학원 교학과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제교육부장과 국제학대학원장을 거쳤다. 그에게 한국대학의 국제화에 대해 물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교육이 국제화되고 있다고 봐요. 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이 많고 연세대만 해도 90% 이상의 교수들이 외국 박사 출신이거든. 우리나라는 이렇게 ‘나가는’ 국제화에는 강할지 몰라도 ‘들어오는’ 국제화는 약해요. 교환학생이나 섬머스쿨 다니는 학생들은 있죠. 그렇지만 한국대학에 학위받으러 오는 미국인 학생이 많은가요? 없어요. 또 국내에서 가장 국제화됐다는 연세대 모든 캠퍼스를 통틀어 1500명 전임교수 중 외국인은 단 4명입니다. 전 국제화 대신 ‘국제감각’이라는 말을 씁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으려면 국제감각을 갖춰야 해요. 우리나라의 정말 좋은 점은 ‘단일민족’이라는 거, 문제점 역시 ‘단일민족’이라는 겁니다. 한국 대학들도 외국인 전임교수를 적극 채용해서 한국 학생·교수들과 일하게 해야 합니다. 한국에는 쇄국(鎖國)정신이 아직 남아있는 거 같아요. 개화기 때 쇄국정신은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21세기에도 그럴까요? 아닐 겁니다.”

 

최근의 반미감정이 그가 말하는 ‘쇄국정신’의 맥락에서 나온 건지 물었다. “반미감정은 어떤 부분에서는 당연한 겁니다. 미국인이라도 만약 50년간 워싱턴시에 3만7000명의 한국군이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죠. 남의 군인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기분은 상할 겁니다. 반미감정이 미국인 개인에 향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는 강의를 끝내고 학교 정문을 나서다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반미시위를 하고 있는 학생들과 마주쳤다고 한다. 순간 움찔해하는 그에게 시위대 중 한 명이 달려왔다.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다. “‘교수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수업 빠지지 않고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씩씩하게 소리치고 가더군. 그러더니 다시 돌아가서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 이러는 거야.(하~하~하) 반미감정은 미국인 개개인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특정정책에 반대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 정부 간의 관계는 모르더라도 국민간의 관계만은 좋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희망입니다.”

 

 

“반미감정은 미국인 개인에 대한 것 아닌 듯”

 

 

그는 오는 12월 한국을 떠나 자녀들이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에 정착할 계획이라 요즘은 30년을 살았던 연희동 사택을 정리하는 데 정신이 없다.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남긴 42박스 분량의 편지·설교문과 1881년 프랑스 신부들이 프랑스어로 출간한 ‘한국어문법(Grammaire Conreenne)’, 헐버트 선교사가 1906년 저술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영문본 등 1500여권의 한국 현대사 관련 도서를 지난 7월 연세대에 모두 기증했다. 그는 “아버지가 연세대와 이 나라를 위해 수집한 자료이기 때문에 아들인 나는 그걸 ‘전달’하는 것 뿐이지 ‘기증’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한국을 아주 떠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5년까지 연세대 이사 임기가 남아있는데다 1년에 2~3번 정도는 올 겁니다. 예전처럼 미국과 한국 오가는 게 힘든 일은 아니잖아요.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좋게 생각하는 외국인이 한국에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이 미국에 있는 게 더욱더 필요해요. 이 참에 미국에 연세대 재단을 세워볼까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서 입양한 큰딸 12월 출산

 

 

그의 마지막 강의는 9월 21일 공학대학원에서 있을 예정이다. 원 박사는 1971년 미 해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잠시 미 미주리주 타키오대에서 영문학 조교수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올해 3월까지 줄곧 연세대(영문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대학 때 만난 부인 원은혜(60·미국명 낸시 언더우드)씨도 함께 들어와 역시 1986년부터 연세대 영문과 교수를 맡고 있다. 부인도 지난 6월 사임했다.

 

 

미국에는 친자인 2남과 한국에서 입양해 이제는 30대의 직장여성이 된 두 딸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 모두 한국에서 외국인학교를 다녔으며 이 중 결혼한 첫 딸이 올 12월 출산할 예정이다. 4남매 중 한국에서 언더우드 가(家) 4대의 업을 이어받을 자녀는 아직 없어보인다. 원한광 박사마저 떠난다. “언더우드 가는 한국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직 내 동생(원한석·외국계 컨설턴트로 활동)이 여기 남아있는데다, 저기 저 언더우드 1세의 동상이 언제까지나 서있잖아요.”

 

/올해 1월 별세한 원일한 박사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역사다큐 운명의 20년] 美, 1884년말 선교사 파견
[조선일보 2004-04-08 17:39]

[조선일보 이선민 기자]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1884년 말부터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매클레이는 1884년 초 한국에 건너와 고종을 알현하고 ‘학교와 병원’ 활동을 허락받았다. 이에 따라 미국 개신교의 북장로회와 감리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북장로회는 중국에 있던 알렌을 의료선교사로 임명해 1884년 9월 한국에 보낸 데 이어 언더우드를 교육선교사로 선발했다. 감리회는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튼,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부인을 각각 선발했다.

이들은 미국을 떠나 1885년 2월 일본에 도착, 유학 또는 망명 중이던 한국인들에게서 한국 말과 문화를 배웠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먼저 3월 31일 나가사키를 떠나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어 스크랜튼과 북장로회의 새로운 의료선교사 헤론이 차례로 내한했다.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초기에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의료와 교육 활동이었다. 조선 정부와 국민에게 가장 환영받는 부분이었을 뿐 아니라 서양의 기독교 근대 문명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성경 번역과 찬송가·전도 문서 제작 등 기독교를 알리기 위한 활동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런 어문 활동은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한글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아시아·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제국주의 침략의 주체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근대 문명의 전달자’로서 받아들여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 종주국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인의 지원 세력으로도 기능한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