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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나간 짝에게 보내는 편지

이강기 2015. 10. 28. 11:24
먼저 떠나간 짝에게 보내는 편지
 
진행 : 李相姬〈gwiwon27@chosun.com〉

 ●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사람들은 당신을 떠올려요 (李淳子 숙명女大 명예교수)
  ●「착하게 살라」가 유일한 잔소리였던 당신 (李斗植 홍익大 美大학장)
  ● 손주가 당신을 닮았어요(李貞順 한양大 겸임교수)
  ●『몸은 내것이지만, 목숨은 이미 나라의 것』 이라던 당신… (주부 李正任씨)
  ● 당신이 생각나면 천안공원묘지로 달려갑니다 (玄美 가수)
 
 
  ◈ 1983년 미얀마 아웅산에서 순직한 남편 金在益에게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사람들은 당신을 떠올려요
 
  李淳子 숙명女大 명예교수
  1938년 서울 출생. 서울大 불어불문학과 졸업. 美 하와이주립大 대학원 도서관학 석사, 연세大 대학원 도서관학 박사. 국제경제 연구원 자료실장, 숙명女大 도서관장, 숙명女大 문헌정보학과 교수 역임.
 
 
  함께 산 21년, 이별의 21년
 
  올해로 우리가 결혼의 연을 맺은 지 42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그 42년 중 꼭 절반인 21년을 내가 혼자서 살아온 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긴 세월이지요?
 
  1983년 10월9일, 화창하게 아름다웠던 가을날, 당신은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집을 떠난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만나 서로가 절실하게 원해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우리는 함께 성장했지요. 1960년대의 어려웠던 시대상황에서도, 송금 한푼 못 받고 장학금으로만 버텼던 유학생활에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웠고 자유로웠습니다. 젊은 마음으로 끝없이 열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우리의 미래, 그 시간을 가득 채웠던 희망 때문에 물질적 결핍은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나날이었습니다.
 
  귀국 후 당신은 숙명적으로 주어진 공직 생활이 길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 듯 처절하게 일에 매달렸습니다. 당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신념을 전파하는 데 온힘을 다 쏟았습니다.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회, 세계적 보편타당성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우리도 이룩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일했던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당신이 갑자기 우리를 떠난 후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처음 10년, 아이들이 한창 자라던 시절 혼자의 힘으로 부모 노릇을 잘 한다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물리적으로 같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은 생각 속에서, 마음속에서 더욱 나와 같이 있었습니다. 내가 혼자 살아오면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항상 당신이 나를 지켜 주고 깨우쳐 준다는 확신을 느꼈습니다.
 
 
  홀로서기 끝에 얻은 自由
 
  당신이 내 곁에 있을 때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너무도 당연하게 그냥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떠난 후에야 나는 아이들을 비롯한 내 주위의 가까운 모든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하나하나 특별한 의미를 깨닫고 정성을 들이는 법을 터득했어요.
 
  아이들을 일찌감치 둥지에서 떠나 보냈어요. 각자가 튼실한 기둥이 되어 우리 가족이라는 지붕을 같이 떠받드는 믿음직한 사회인으로, 家長으로 자랐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감사한 것이지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여생, 모든 공적 사회생활을 접고 홀가분하게 정신적·물리적 자유를 얻었어요. 그것을 더욱 값지게 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듯합니다.
 
  당신과 해로할 수 있었다면 나의 생활은 정말 다른 형태로, 다른 차원으로 보람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혼자서 수없는 좌절과 절망을 딛고 얻은 홀로서기와 거기에 따라온 크나큰 자유와 평화는 내가 代價를 지불한 것이기에 진정 귀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무엇이나 혼자 잘 할 수 있고, 어디나 혼자서 여유 있게 갈 수 있답니다. 내 작은 능력으로 도움을 줄 수 있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내 삶에 소박한 의미를 갖게 합니다.
 
  인생을 통해 결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독신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배운 셈입니다.
 
  五慾七情(오욕칠정)의 인간조건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으나 속세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자유를 통해 절대적인 자유를 미리 맛보고 훈련하는 단계로 삼으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 지혜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을 당신이 지켜보고 칭찬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 얼마 전(2004년 11월3일자) 동아일보 「오피니언」 난에 고승철 부국장이 쓴 「김재익 수석이 그립습니다」라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 그 칼럼을 보게 되니 더욱 감회가 컸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아직도 사람들은 당신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1980년대 초의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과감히 미래지향적인 정책으로 경제기반을 공고히 했고, 그 후 경제도약을 이루어 낸 성과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 되어 버린 사실이 안타깝고 실감이 나지 않지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들이렵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로 가는 길이 멀지도, 험하지도 않기만을 늘 기도합니다.
 
  2004년 12월 당신의 아내가 ●
 
 

  ◈ 아내 孫惠京 서양화가에게
 
  「착하게 살라」가 유일한 잔소리였던 당신
 
  李斗植 홍익大 美大학장
  1947년 경북 영주 출생. 홍익大 미술대학 및 同 대학원 회화과 졸업. 일본 東京 미술전 동상 (1967), 문공부 신인예술상(1968), 國展 특선(1972) 등 수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現 한국미술협회 고문, 외교통상부 자문위원, 기업메세나 홍보대사.
 
 
  보석보다 꽃을 좋아했던 사람
 
  가끔 당신과 소리 없이 얘기는 하지만 편지를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당신이 뒤뜰에 심은 烏竹(오죽)말이야, 그 대나무 녀석들이 당신 없이도 씩씩하게 잘 자라더니 이제는 지붕만큼 키가 컸어. 그리고 우리 큰아들 하린이는 지금 미국 母校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 둘째 하윤이는 2005년 초에 졸업하잖아. 바로 軍에 입대해. 아참, 그리고 당신과 친한 박완서 선생님은 지난해 봄에 예술원 회원이 되셨어. 당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나도 기쁜 마음에 축하드리려고 화분 하나 사들고 댁으로 갔다가, 당신 생각나서 흐느끼다 결국은 못 드리고 집에 그냥 두고 보고만 있어. 당신, 내가 가끔 바보 같은 거 알지? 아직도 나 그렇다, 미안. TV 드라마 보면서 잘 운다고 아줌마라고 놀리던 당신이 보고 싶어.
 
  지난 11월4일이 당신 생일이었어. 꽃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결국엔 그냥 돌아왔어. 꽃나무를 좋아했던 당신은 화려한 장미보다 늘 야생화를 좋아했었지. 언젠가부터 당신 생일선물은 보석도 옷도 아닌 꽃다발이 공식적으로 지정되었지. 하지만 해마다 당신 생일날이면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나는 늘 행복한 고민에 빠져야 했어. 꽃 못 고른다며 어지간히 핀잔 줬잖아. 그런 당신이 하늘 정원으로 떠나기 7~8개월 전 마지막 생일에 한다발 가득 건넨 보랏빛 꽃다발에 최고의 점수를 주어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던 그날 정말 행복했었어.
 
  겨울을 당기는 늦은 가을비가 내린다. 지금 나는 당신과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거실에서 당신과 늘 함께 마시던 은은하고 향기 좋은 허브티 한잔 마시고 있어. 2년 반 전부터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당신 생각이 너무나 나서 싫기도 하지만, 때로는 조용히 당신 생각하기 좋아 이렇게 차 한잔을 두고 당신 생각 실컷 해.
 
  하린이랑 하윤이는 효자야. 내 표정이 조금만 슬퍼 보이면 자꾸 병원 가보라는군. 우울증이 무서운 병이라고…. 우리 아들들 때문에 기분이 좋아. 사람들이 가끔 내게 물어. 그렇게 사랑하는 당신 꼭 닮은 딸을 갖고 싶지는 않았냐고, 혹시 손자보다 손녀가 더 좋지 않겠냐면서. 하지만 난 정말 상관없어. 당신과 나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도 안 했을 정도로 아이들을 존중하고 믿었으니까! 당신도 그렇지?
 
  계절이 무르익어 이제 곧 겨울이야.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또 다른 풍경을 맞을 준비로 분주해. 당신 기억나? 2~3년 전에 지나가던 건축가가 우리 집 칭찬했던 일. 단아한 한옥 대문에 겉에서 보기엔 오히려 허름해 보인다 생각했던 우리 집을 두고 그 사람이 했던 말. 『과장됨 없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오히려 주변풍경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는 칭찬에 무척이나 기뻐했었지. 산도 있고 숲이 보이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당신을 따라 이곳에 왔던 그때가 생각나.
 
 
  『선량하게 살아』
 
  가만히 보면 이 집은 꼭 당신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고 內實(내실)을 기했던… 맞아! 꼭 당신이다. 아무것도 없던 빈 터에 기둥이 세워지고 지붕이 얹혀졌어. 그렇게 마련된 이 집 곳곳에는 無에서 有를 낳듯이 당신의 손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제 빛과 기능을 갖추어가는 물건들이 하나하나 우리에게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고 이렇게 변함없이 추억을 담아내 당신의 숨결 하나하나를 느끼게 하고 있어.
 
  당신이 있는 그곳에는 고통도 슬픔도 없다고들 하니, 그 말 믿고 내 맘 많이 놓여. 힘든 몸으로 한번도 빠짐없이 학교에 가는 나를 위해 대문까지 배웅하던 당신이 생각나면 제일 힘들어.
 
  늘 그랬지만 난 미친 듯이 더욱 바쁘게 살아. 내가 미술협회 이사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을 때 당신은 별로 안 좋아했었지. 『출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美大학장이나 돼 보시지』 했었는데, 나 당신 떠나고 바로 美大학장 하고 있어. 이 말 쓰고 나니 당신 살포시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 나 당신 뜻과는 반대로 자꾸 출세(?)해서 어쩌나 싶어. 구도자의 삶과 같은 당신의 하루하루가 생각나. 당신 왜 그랬어? 다른 부인들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라고 한다는데. 그래도 당신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 매일 되새기며 살아.
 
  『선량하게 살아』라는 당신이 남긴 당부가 지금 나의 좌우명이고 인생관이야. 처음 만난 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내가 군대를 가고 결혼반대로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면서도 당신은 오히려 나보다 한결같은 마음이었어. 그리고 당신을 만난 그때 그 순간부터 당신이 바로 내 삶이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의 하루의 시작과 끝에 늘 당신이 함께 숨 쉬고 있어.
 
  지구 온난화로 겨울은 별로 춥지 않은데 난 가끔 춥고 그러네. 그래도 견딜 만 하니 걱정은 마!
 
  나 당신과는 반대로 말은 잘해도 글 잘 못 쓰는 거 알지? 나도 머지않아 당신 옆으로 갈 것이고 그때는 우리 편안하게 웃어 보자고. 잘 있어.
 
  초겨울 비 내리는 아천동 집에서
 
  당신 말 잘 듣는 남편 두식이가 ●
 
 

  ◈ 남편 金星均 사진작가에게
 
  손주가 당신을 닮았어요
 
  李貞順 한양大 겸임교수
  1945년 서울 출생. 이화女大 미술대학 회화과 및 同 대학원 미술교육학 졸업. 오스트리아 레오포드 프란체스코大 미술사 박사. 서양화가. 15회 이상 개인전 및 초대전. 「마적」, 「휘가로의 결혼」, 「심청」, 「카르멘」 등 다수의 오페라 무대미술. 김자경오페라단 이사장 역임. 現 베세토 오페라단 이사, 한국미술가협회 회원.
 
 
  혼자 맞는 일곱 번째 겨울
 
  당신이 황황히 우리 곁을 떠나가고 난 후, 자주 마음으로, 그리움으로, 회한으로, 슬픔으로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오랜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고, 지금은 당신 없이 혼자 맞이해야 하는 일곱 번째 겨울이 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흰 눈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어느새 마음은 벌써 우리의 추억이 서려 있는 진부령 그 들판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둑을 쌓으며 겨울을 준비하던 그 희망의 시간들이 아직도 아름다움으로 남겨진 것은 당신이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당신의 不在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많은 아픔과 고통을 주었지만,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비록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시금 우리들 곁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은 당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고 우리들 안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느낄 때, 나 자신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당신을 잊으려 했던 노력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생각하며 흠칫 놀라기도 했습니다.
 
  죽음이란 삶의 끝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그 삶을 귀하게 마무리해 준다는 것, 또 그런 삶의 실체를 파악함으로써만이 우리가 충실한 나날을 살아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 당신은 끝까지 심한 통증 속에서 의연함을 보여 주고 떠나가셨지요.
 
  그래도 때때로 밀려오는 서러움과 슬픔은 가눌 길이 없답니다.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오랫동안 열어 보지 않았던 당신의 손때가 묻어 있는 물건들이 담긴 나무상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아픈 상처가 건드려질까 봐 겁이 나서 몸을 도사리듯이 당신의 물건들을 멀리 놓아 두었는데 오늘은 당신 대신 그것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어졌습니다. 상자를 여니까, 잠자던 물건들이 깨어나서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어요.
 
  작은 수첩에서부터 스위스제 주머니칼이며, 접는 선글라스, 나침반 등 그 종류도 다양하게 들어간 상자 한쪽 구석에서 자동장치가 부착된 열쇠 한 개가 삐죽 나와 있었지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이 그렇게 찾고 싶어 했던 자동차 메인 키였어요.
 
  당신이 이 열쇠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아쉬워했었는지 그 당시의 상황이 새삼 떠올라서 가슴이 순간적으로 꽉 막혀 버렸지요. 당신이 살아계셨더라면 소리지르며 함께 기뻐했을 텐데….
 
  『당신은 왕눈이라 뭐든지 잘 찾아낸단 말야』
 
  분명 이렇게 들려 주었을 당신의 그 한마디 말이 너무도 그리워서 저는 그것을 손 안에 꼭 쥐었습니다.
 
  그동안 모두 메말라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았던 눈물이 어느새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지요.
 
  용케도 잊고 살아왔던 따스한 당신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같은 겨울철 늦은 밤, 글을 쓰고 있으면 작은 담요를 들고 와서 가만히 어깨에 둘러 주던 손길이며, 그림 그리는 등 뒤에 서서 『당신은 최고야!』라고 어린애에게 해주듯이 칭찬을 퍼부어 주던 일…. 그 당시에는 때때로 성가시다 싶던 사소한 일들까지 당신이 떠나간 지금 커다란 그리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날대추를 좋아한 당신이 「다른 과일은 사다 놓지도 말라」고 해서, 가을이 되면 우리 식탁 위에는 늘 소쿠리 가득 날대추가 놓여 있어야 했지요. 언젠가 대추 반 쪽을 건네 주면서 제게 먹으라고 했을 때 영문도 모른 채 당신에게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당신은 조금 무안해하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지요.
 
  『너무 달아서 혼자 먹기가 아까웠거든…』
 
  지금 생각하니 당신이 좋아했던 날대추며, 고구마 말린 것들을 일부러 잊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철이 되면 식탁 위에 푸짐하게 날대추를 올려 놓고, 고구마를 듬뿍 쪄서 말리고, 그때의 행복을 마련해서 다른 손님을 초대하려 합니다.
 
  사랑스러운 외손자 희대가 벌써 다섯 살이 됐어요.
 
  당신이 떠나고 2년 후에 태어난 아기가 제게 커다란 위안을 주고 있답니다. 그 애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귀여운 손자를 안아 보지도 못하고 떠난 당신 생각에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이것은 저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느낌인데, 아이가 짓궂은 표정을 지을 때는 꼭 당신을 보는 것 같다니까요.
 
  아기가 당신처럼 용띠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의 기질을 닮을 수도 있겠구나, 괜히 이것저것 당신과 결부시키게 되네요.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이 영원히 우리 곁에 함께 존재한다는 인식을 자신에게 심어 주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꿋꿋이 살아가야 되는 이유가 분명해진 것 같네요. 이 다음에 희대가 커서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물어올 때 얼마나 멋진 사람이 외할아버지였나를 설명해 주어야 될 테니까요.
 
  명종이랑 나미도 아빠를 많이 그리워하면서 지낸답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그 애들 곁에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애들이 아빠의 넓은 품이 그리워질 때, 가족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몫까지 합쳐서 지금의 제자리에 서 있겠어요.
 
  당신이 살고 간 그 커다란 발자취처럼 우리 애들이 그런 힘찬 발걸음으로 내일을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진부령 산 속의 정기가 그들에게 늘 힘을 부여해 줄 테니까요.
 
  오늘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먼 하늘나라로 이 글을 띄웁니다. 안녕 ●
 
 

  ◈ 북한 잠수함 대응 훈련 중 순직한 남편 金光佑 원사에게
 
  『몸은 내것이지만, 목숨은 이미 나라의 것』
 
  李正任 주부
  1969년 경남 거창 출생. 부산 성신女高 졸업.
 
 
  남편을 마중하던 부대 後門
 
  『민아!』
 
  갑자기 들리는 당신 목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습니다. 후다닥 부대 후문 쪽으로 정신없이 뛰어나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가슴은 떨려오고, 앞서는 마음에 자꾸 발을 헛디뎌 온몸이 휘청거리기 일쑤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 뒤, 옆 샅샅이 훑어가며 당신 모습을 찾아보지만 돌아와 안기는 차가운 바람은 당신을 삼킨 파도처럼 허망할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이 돌아와야 할 길을 멍하니 바라보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한참을 울다 혼자 돌아왔습니다.
 
  워낙 바빴던 부대업무에 늦게 시작한 대학공부로 늘 당신은 분주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 』고 늘 말했었지요. 그런 당신이 사고 이틀 전 일요일에 이제 막 두 살 된 막내 效元(효원)이와 가까운 바닷가에 놀러가 저녁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바로 부대로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당신은 짧은 시간을 더 미안해하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부대를 향해 힘차게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게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그 뒷모습이 당신과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그곳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고 이튿날, 보이지 않는 바람을 가슴에 안 듯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 사고현장에 가 보았습니다. 희망은 사라졌고 제 앞에 펼쳐진 茫茫大海(망망대해)가 제 평생 그렇게 차갑고 끝없이 넓어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침몰 직전까지 함정을 지키기 위해 배 안에 들어온 바닷물을 퍼내며 최선을 다했을 당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평소 부사관으로서의 강한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임했던 당신은 분명 자신의 목숨보다 끝까지 맡은 바 책임을 소중히 지켜내고 싶었을 겁니다.
 
  불현듯 가슴을 싸하게 스치던 당신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고 나기 일주일 전쯤 언제나처럼 우리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부대 후문으로 당신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갔습니다. 오래지 않아 당신이 나를 부르는 익숙한 호칭과 함께 당신의 모습이 눈에 가까워졌습니다. 『민아!』- 언제나 당신은 열한 살이 된 우리 큰아들 效敏(효민)이의 이름 끝자로 나를 불렀습니다.
 
  집안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당신이 『민아, 몸은 내 것이지만 목숨은 이미 나라의 것이다』라는 뜬금없는 말로 나를 긴장시키더니 가만히 제 손을 힘껏 잡고 다독여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서로 아무 말이 없었고 내 손을 잡은 당신의 손이 그날따라 더 크고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론 믿음직한 생각에 당신을 몇 번이나 올려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屍身 없는 장례식을 치르고
 
  당신의 죽음보다 우리를 더 허망하게 만든 것은 인사 한 마디, 살 한 점 없이 우리 곁을 떠난 당신에 대한 혹시나 돌아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였습니다. 시신도 없이 장례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을 씻어내며 당신이 쓰던 모자와 베개에서 머리카락 몇 올을 겨우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면도기에서 남아 있던 수염을 모아 유품이라고 마련했습니다.
 
  퇴근하는 당신을 기다리며 마중하던 설렘. 그 작고 평범한 일상이 주었던 소중한 행복이 더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나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고 첫날부터 영결식이 끝난 지금도 당신과 함께했던 53사단 분들이 어머니와 우리 아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소식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茫然自失(망연자실)해 있는 저희를 대신해 모두들 자기 일처럼 애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주임 원사님과 부대장병들이 당신 떠난 빈자리를 든든히 채워 주셨고 지금도 物心兩面(물심양면)으로 지켜 주고 계십니다.
 
  당신을 잃은 슬픔에서 마음을 추스려 사고가 일어난 지 20일 정도 지나 국방부 홈페이지에 편지를 올렸습니다. 식구들보다 더 가슴 아파하고 당신을 찾아 헤매이고 노력하던 全육군장병들과 존경하는 참모총장님, 사단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운을 냈습니다.
 
  그것만이 한평생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한 어머니를 슬픔과 충격에서 지켜드리는 길이었고,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이제는 나만을 바라보는 우리 아이들 效敏(효민), 慧眞(혜진), 效俊(효준), 效元(효원)이의 새카만 눈동자를 더 이상 슬픔에 젖게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께 약속드리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군인으로서 책임감을 다하려 했고 국가를 위해 청춘을 바친 당신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이 당신을 존경하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번 일을 치르며 당신을 대신하는 많은 부사관 가족이 생겼습니다. 당신도 힘든 일 없이 좋은 곳에서 편안히 쉬면서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겨울이 온다는 사실에 손끝이 다시 저려 옵니다.
 
  당신 계신 그곳이 부디 춥지 않기를….
 
  올겨울에 당신 계신 바다 위로 따뜻한 겨울 햇살이 가득하기를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을 만나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2004년 11월12일
  당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내가 ●
 
 

  ◈ 대중음악 작곡가였던 남편 李鳳祚에게
 
  당신이 생각나면 천안공원묘지로 달려갑니다
 
  玄美 가수
  1937년 평남 평양 출생. 덕성女大 무용과 졸업. 「밤안개」로 가수 데뷔(1962), 그리스 가요제 출전(1971). 문체부 장관 표창장(1995),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1999) 수상. 대표곡 「밤안개」, 「보고싶은 얼굴」, 「별」 등 다수. 現 노래교실운영. 문화센터 강사로 활동.
 
 
  『돼지 아빠!』
 
  유수와 같은 세월이라더니 참 세월이 빠르네요.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나간 지 벌써 18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성장해서 「돼지」 영곤이가 45세가 되었고, 동생 영준이는 41세가 되었어요. 그뿐인가요? 어느새 당신과 내겐 아이들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 늘었잖아요. 영곤이에게서 손녀가 둘, 영준이에게선 손녀 둘에 당신이 그렇게도 기다리시던 손자까지 한 명 더 있으니까, 벌써 손녀가 넷에 손자가 한 명…. 우리 부자죠. 혹시 당신 아직도 서운하세요? 아들 너무 좋아하셨잖아요. 제게 『아들 여덟은 낳아야 한다』고 늘 협박 아닌 협박을 하셨잖아요.
 
  아이들이 잘 자라서 우리에게 손자, 손녀를 안겨 주고 멀리 미국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뤄 열심히 살고 있으니 저는 무척 행복하답니다.
 
  나의 사랑하는 당신, 제가 『돼지 아빠』라 부르는 걸 좋아하셨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당신이 그리워지네요. 사실 편지 서두에 그리운 당신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목이 메어 한참을 울고서야 다시 펜을 들 수 있었답니다.
 
  당신이 생각날 때마다 천안공원묘지로 달려갑니다. 『나 있잖아…』로 시작해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꽃을 바꿔 놓고 올 때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 아세요?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오빠랑 동생 명옥이 그리고 남동생 「뽀빠이」와 함께 갈 때면 더욱 마음이 가볍고 날아갈 듯 신이 납니다. 그래도 한편으론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을 때는 서운한 마음이 들곤 해요.
 
 
  운명적인 부부
 
  돼지 아빠, 『우리는 운명적인 부부다』 하셨던 말씀 기억하시죠?
 
  당신과 함께하던 그때 저는 왜 그 말뜻을 다 헤아리지 못했을까요. 당신이 가신 이후 나이 육십을 넘어 살다 보니 「운명적인 부부」라는 당신 말씀을 마음 깊이 헤아립니다.
 
  모든 것들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도 이렇게 가요계에서 43년이라는 세월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당신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합니다. 지금은 무대만큼이나 제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 주부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문화센터 생활입니다. 그 곳에는 항상 당신이 계십니다. 당신이 옆에서 연주하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래합니다. 무대에서나 평상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봉조라는 이름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당신과 나, 이봉조와 현미는 영원히 같이 있을 것입니다.
 
  주일날이면 교회에 나가 찬양 봉사하러 다니기 바쁜 제 모습 보기 좋으시죠. 당신 아세요? 제가 정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는 거. 저 혼자 힘으로 이봉조 추모음악회를 다섯 번까지는 열심히 해보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중단되었답니다.
 
  그래도 「BJ음악재단」이 만들어지고 4년 전 추모음반이 무사히 나와 마음의 위로가 돼요. 아이들은 성장하며 아버지를 굉장히 가엾다며 그리워했습니다. 너무 일찍 가셨기 때문이죠. 그래요 당신… 뭐가 그리 바빠서 57세 나이에 그렇게 빨리 가셨는지요.
 
 
  첫 크리스마스의 추억
 
  저도 올해 나이 68세입니다. 당신이 살아계셨다면 73세가 되시죠. 기억나세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해 1957년의 겨울을요. 스물여섯 살의 당신과 스물한 살 철없던 제가 세상의 축복처럼 맞았던 최고로 아름다운 화이트 크리스마스 말이에요. 그날의 추억은 아직도 제 마음속에서 하얗게 춤추고 있어요. 통행금지가 없어 유난히 즐겁고 자유롭게 느껴지던 축제의 밤, 한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우리는 밤새도록 남산을 걷고 또 걸으며 행복했었습니다.
 
  해마다 나는 그 누구보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길 어린아이처럼 손꼽아 기다립니다. 유난히 여름이 뜨거웠던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올까요? 그러면 나는 당신과 더불어 다시 한 번 그 남산 길을 걸어 내려가 우연히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에 발을 멈춰 서고 이어지는 당신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당신과의 추억이 유난한 겨울이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당신은 「오늘도 福, 내일도 福 …」 그렇게 해마다 福자를 가득 써 넣은 연하장을 주셨어요.
 
  당신의 보살핌이 새삼 가슴을 적십니다.
 
  영곤이 아빠, 편히 계실 줄 믿고 있어요. 언제나 새해가 되면 연하장을 전해 주시는 그 마음으로 하늘나라에서 다 내려보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참, 하늘나라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도 만나셨죠? 당신 외롭지 않으시죠. 매일 저와 함께하는 당신을 느끼며 저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게요.
 
  사랑하는 영곤이 아빠 편히 계세요.
 
  2004년 당신의 영원한 사랑 현미 ●

월간조선 2005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