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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은 내전의 상처, 보스니아의 민족 갈등과 정치적 혼란은 여전해

이강기 2015. 11. 1. 11:41

 

아물지 않은 내전의 상처 

‘스레브레니차 학살’ 20주년… 내전 끝났지만 보스니아의 민족 갈등과 정치적 혼란은 여전해 

FREDRIK ELISSON NEWSWEEK 기자
중앙일보
2015. 7. 27

 


▎알렉산다르 부시치 세르비아 총리가 ‘스레브레니차 학살’ 2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했다가 성난 군중으로부터 돌을 맞는 봉변을 당했다.
지난 7월 11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20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저질러진 최악의 범죄”라고 규정한 그 사건으로 약 8000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희생자 확인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데이턴 평화협정으로 내전은 끝났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전쟁을 촉발한 민족 갈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20년 전 ‘보스니아의 도살자’로 불리는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대’ 스레브레니차로 진격했다. 그가 이끄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은 그곳을 점령한 뒤 방어하던 보스니아 무슬림 전사들과 유엔군을 내쫓았다. 다음 며칠 동안 믈라디치 부대는 무슬림 남자 성인과 소년 약 8000명을 집합시켜 벌판으로 끌고가 학살하고 그 가족들을 추방했다.

옛 유고국제형사재판소(ICTY)와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 학살을 ‘대량학살(genocide)’로 판결했다. 또 지난 7월 8일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 사건을 ‘대량학살 범죄’로 규탄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안건으로 채택되지도 못했다. 비탈리 추르킨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그 결의안을 두고 “대립을 부추기며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고 비난했다. 그런 유엔을 보며 스레브레니차 희생자 유가족은 지금도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추모 행사에 참석한 작가 캐티 마턴은 “스레브레니차는 전후 세계에서 최악의 집단적 실패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전후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설립된 모든 기관과 제도가 실패했다.”

마턴은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내전 당시 보스니아에 있었다. 미국의 비정부기구인 국제언론인보호위원회(CPJ) 회장으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과 협상해 억류된 데이비드 로드 기자를 석방시키도록 했다. 데이턴 평화협정을 이끈 고 리처드 홀브룩 특사의 아내인 마턴은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어난 일은 누가 봐도 악랄하고 사악한 만행이었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발생한 학살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그녀는 ICTY의 전범 처벌 노력이 미흡했다고 비난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믈라디치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대량학살 범죄로 기소돼야 마땅하다”고 마턴은 말했다. “그래야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에 강요된 집단 죄의식이 사라질 수 있다. 그 전범들의 처벌에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카라지치가 체포된 지 7년, 믈라디치는 4년이 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뉘른베르크 법정은 1년 만에 나치 전범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스레브레니차에선 지금도 학살 당시의 살해자와 강간자 다수가 고향에 버젓이 살고 있으며 피해자와 희생자 유가족은 그들을 매일 대해야 한다.

1995년 ICTY의 푸아드 리아드 판사는 믈라디치와 카라지치의 체포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검사 측이 제시한 증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의 현장을 보여 준다. 수천 명이 처형돼 집단 매장됐다. 수백 명은 산 채로 매장됐다. 남자와 여자들이 난도질당했다. 어린이는 어머니 앞에서 사살됐다. 할아버지에게 손자의 간을 강제로 먹였다. 인류 역사의 가장 어두운 페이지에 적힌 지옥의 장면이다.”

발칸 지역의 관용과 긍정적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사라예보에 설립된 전후연구센터의 벨마 사리크 대표는 “이곳 사람들은 배신당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든 정당은 희생자들과 대량학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알렉산다르 부시치 세르비아 총리는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동시에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가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압박하는 등 이중 행태를 보인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희생자의 유골을 담은 관 옆에서 기도하는 가족.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각각 2008년과 2011년 세르비아에서 체포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됐다. 그들은 대량학살과 기타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들의 체포로 세르비아와 유럽연합(EU)의 관계는 어느정도 개선됐지만 아직도 이 지역에서 해결돼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보스니아는 데이턴 평화협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정부 시스템’으로 몸살을 앓는다. 그 협정으로 내전은 끝났지만 나라는 허약하고 분열된 상태로 남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대통령이 3명이다.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가 각각 대통령을 갖고 있다. 행정 단위로는 스릅스카공화국(세르비아계)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무슬림·크로아티아계)으로 나뉜다. 독립적인 브르치코 행정구도 있다. 양쪽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자치구다.

사리크 대표는 “정치인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더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스니아는 워싱턴 DC 크기만 하지만 정부 부처가 156개다. 행정 시스템을 단순화하고 EU·나토와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스니아의 미래는 없다.”

이런 혼란스런 시스템은 2005년 개편될 예정이었지만 무산됐다. 의지도 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마턴은 지적했다. “2004년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지금 그들은 부인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역사 수정주의와 학교 분리 정책으로 민족 정체성과 차별이 심화됐다. 최근 스릅스카공화국의 교육부는 “보스니아어는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지역에서 지배 계층에 불만이 크다. 경제를 엉망으로 운영하고 자기 잇속만 챙긴다는 비난이다. 지난해 2월 도시와 마을 20곳에서 폭동이 발생해 200명이 부상하고 지방정부 청사 하나가 불탔다. 북동부 도시 투즐라의 해고 사태로 촉발된 시위가 나라 전체의 정치적·경제적 침체에 대한 분노로 비화했다.

이런 갈등에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군은 예외다. 민족 구성에서 완전히 통합됐다. 내전 당시 서로 총을 겨눴던 노병들이 지금은 서로 잘 협력한다. 과거엔 유엔 평화유지군을 받았지만 지금은 다른 분쟁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한다. 보스니아 외무장관을 지낸 무하메드 사치르베이는 최근 허핑턴포스트 기고문에서 “데이턴 평화협정 체결 이래 많은 것이 정지된 상황에서 군의 그런 변화는 아주 놀랍다”고 했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아직 멀었다. 지난 11일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스레브레니차 부근의 포토카리 마을에서 발굴돼 신원이 확인된 시신 136구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국제실종자위원회(ICMP)는 지금까지 스레브레니차 학살 희생자 6930명의 신원을 확인했지만 1000여 명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ICMP의 시신안치소에는 녹색 캔버스로 만든 관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층층으로 세워진 선반에 놓여 있다. 신원 확인을 기다리는 희생자의 유골이다. 스레브레니차의 정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하다.

- FREDRIK ELISSON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