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호화주택이 등장했다. 이
주택을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했다. 35채의 금입택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금입택이란 화려하게 금박을 입힌 주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권력자인 ´진골(眞骨) 김씨(金氏)´들의 호화주택을 일컫는 것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번쩍번쩍했을 것이다.
경주 시내에는 기와집이
빼곡했다. 장작을 때면 그을음이 생긴다며 숯으로 밥을 지었다. 중국의 역사마저 "신라 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고 노동이
3,000명이요, 갑병(甲兵), 우(牛), 마(馬), 저(猪)가 고루고루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서민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경덕왕 때 향덕이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어 부친이 굶주리자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부친에게 바쳤다. 흥덕왕 때 손순이라는 사람은
아이들이 늙은 어머니의 밥을 빼앗는다며 땅에 파묻어 버리려고 했다. 아이들을 묻으려고 땅을 파고 있는데 종(鐘)이 나왔다.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먹을 것을 내리기도 했다. 자식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숫자를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권력자들 사이의 싸움과 반란도 수없이
일어났다. 혜공왕 때에는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라가 무척 어지러웠다. 싸움뿐 아니었다. 사치까지 극성을 부렸다. 이런 상황에서
서민생활은 뻔할 수밖에 없었다.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떠났다. 당나라에서
과거를 치르고 관리가 되었다. ´호구지책´ 때문에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헌덕왕 때에는 당나라 절동(浙東)에서 먹을 것을 찾는 신라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 굶주린 신라유민 300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신라 해적´도 생겼다. 신라의 해적선 20여 척이
일본을 염탐했다. 100여 명의 신라 해적이 일본의 소영도(小迎島)라는 곳에 상륙해서 왜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은 깜짝 놀라서 신라가
쳐들어왔다며 야단법석이었다. 일본 조정이 온통 떠들썩했다.
오늘날 정부는 공시가격으로 수십억 원이나 되는 집이 있다고 발표했다.
공시가격이 이 정도니까 실제가격은 훨씬 웃돈다고 했다. 이런 집이 적지 않았다. 신라 말의 ´금입택´ 뺨치는 주택들이었다.
반면
어떤 30대 초반의 가장은 불과 2,000만원의 빚 때문에 강원도의 한 콘도에서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어떤 사람은 양육비가 없어
갓난아기를 암매장했다. 보험금을 타내려고 남편과 가족의 눈을 찔러 실명하도록 만든 사건도 발생했다.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 소득의
18배나 된다는 자료도 나왔다.
신라 말 권력자들의 싸움은 오늘날 여야의 싸움으로 변했다. 여와 여, 야와 야 사이의 싸움도
벌어지고 있다. 싸움질이 심해지니 국론이 엇갈리게 되었다.
저명인사들이 솔선수범(?)해서 자녀들의 국적을 포기시키고 있다. 어떤
전직 장관은 ´외국에서 태어난 손자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한국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최치원이 귀국했다.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조기유학´을 떠나 당나라에서 공부했다.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해 관리생활까지 했다. 그렇지만 조국으로 돌아왔다. 기대감을 가지고 돌아왔다. 조국에서는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29세의 한창나이였다.
그러나 조국의 현실은 기대와 딴판이었다. 최치원은 실망했다. 최치원의 눈에 보이는 권력자들은 여우나 살쾡이 수준이었다. 권력을
잡고 행세나 하려는 ´짐승´이었다. 세상을 속이는 거짓말쟁이였다. ´아마추어´ 정권이었다. 신라의 정치는 엉망이었다. 결국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여우가 미인으로 둔갑하고(狐能化美女), 살쾡이가 선비노릇을 한다(狸亦作書生). 누가 알았으랴, 짐승의
무리들이(誰知異類物), 사람의 탈을 쓰고 세상을 속일 줄이야(幻惑同人形)."
최치원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계림은
누런 낙엽이고(鷄林黃葉), 곡령은 푸른 소나무다(鵠嶺靑松)." 계림은 신라, 곡령은 고려였다. 신라는 낙엽으로 전락하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우와 살쾡이 같은 권력자들은 할퀴고 뜯는 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더구나 권력자들은 ´서남해안´에 있는 섬을
통째로 목장으로 꾸미기도 했다. 섬에서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등 유흥을 즐겼다. 섬 전체가 유흥장이었다. 오늘날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섬 개발사업까지도 ´닮은꼴´이었다.
[김영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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